2004년 11월호

파란의 한국현대사 ‘현장 회고록’ 펴낸 신영길 박사

“50년 롱런 선거 구호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내 작품”

  • 글: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입력2004-10-26 17: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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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의 한국현대사 ‘현장 회고록’ 펴낸 신영길 박사
    호당(湖當) 신영길(辛永吉·78) 박사의 기억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어떠한 상황을 이야기할 때도 “일천구백육십오년, 당시 재무부 장관이던 ○○○씨는∼” 하는 식으로 정확하게 했다. 혹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수십 년 전 일기장을 꺼내 확인했는데, 일기장에는 50년 전부터 적어온 하루하루의 일과가 빽빽했다. 그는 사소한 일도 빠짐없이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신영길 박사는 한국장서가협회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현재는 명예회장). 지난해 광운대에 거의 다 기증했지만 한때 그가 소장한 책은 무려 5만5000여권에 이른다. 2.5t 트럭 14대가 넘는 분량으로 한국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신 박사의 생애는 그가 수집한 장서보다 더 방대하고 역동적이며 다채롭다. 정치인, 경제관료, 금융인, 연구자로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과 인물들을 현장에서 만나온 그는 최근 자신의 삶을 꼼꼼하게 정리한 회고록 ‘신영길이 밝히는 역사현장’을 냈다. “한 개인의 삶이 아닌, 신영길이라는 사람이 살아온 한 세대의 역사”라는 그의 말처럼 회고록에는 여순반란사건, 3·15부정선거, 군사정권 치하 증권파동, ‘사형수 김대중’ 구명활동 등 한국 현대사를 대표할 만한 사건이 가득했다.

    신영길 박사는 1926년 전남 광양의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 입학 후 아버지를 따라 간 쌍계사에서 우연히 태극 문양을 보았다.

    “아버지는 ‘저 그림이 우리나라 태극기에 있는 태극’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 ‘태극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일본에 합방되기 전 우리의 국기라고 하시더군. 얼마 후 학교 미술시간에 태극을 그리고 그 옆에 ‘태극기’라고 한글로 적어 제출했지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주재소에 가자고 하더군. 11살밖에 안 된 나를 불도 없는 캄캄한 유치장에 그냥 가두었어요. 밤새 울면서 덜덜 떨었지.”



    그의 조부가 동학군에 가담한 전력이 있는 데다가 ‘태극기 사건’까지 겹쳐 그는 광복이 올 때까지 ‘불온분자’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혔다.

    보통학교 졸업 후 신 박사는 법관이나 변호사가 되길 원했다.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공부에 매진하지 못하고 여수의 철도국에서 일했지만 그는 보통문관고시를 목표로 법전을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시험을 치르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았다.

    파란의 한국현대사 ‘현장 회고록’ 펴낸 신영길 박사
    그는 곧바로 철도국에 사표를 내고 여수 건국준비위원회 서기로 봉직하면서 여운형, 송진우, 조병옥과 같은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거물정객들을 만난다. 그러던 중 광복 한 달 후인 9월15일 시내 곳곳에 나붙은 경찰관 모집광고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광복 후 첫 경찰관 공채였어요. 합격했고 한 달 후 여수 서정파출소에 순사로 근무하게 됐지요. 당시 경찰서 직원은 세 파로 나뉘어 있었어요. 일제시대 경찰관, 치안대에서 들어온 경찰관 그리고 나처럼 공채로 들어온 경찰관. 세 파벌 사이에서 갈등도 많았지.

    1946년 서울에 콜레라가 퍼져 전국 경찰청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난 김구 선생이 계신 서울 경교장으로 파견됐어요. 아다시피 그곳은 상해임시정부 요인들의 아지트였어. 당시는 이승만 박사가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연설을 해 이에 대한 임정요인들의 성토가 하늘을 찌를 때였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당시 유명한 임정요인인 김구, 김규식, 이시영 선생 등을 다 만나보았지. 이들은 훗날 내가 자유당 치하에서 야당 당원으로 정치활동을 하도록 이끌어줬지요.”

    파견근무가 끝난 후 그는 여수로 돌아왔고 2년여가 흘렀다. 그 사이에 미군정청 법무국에서 시행하는 조선변호사 예비시험에 응시해 합격했지만 본시험이 경찰교육을 받는 시기와 겹쳐 응시하지 못했다.

    여순반란사건의 참상

    1948년 10월19일 그 처참한 여순반란사건을 그는 현장에서 직접 겪었다. 그날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정복을 입고 출근하던 그는 여기저기서 들리는 ‘인민군 만세’라는 고함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한복으로 갈아입고 건너편 야산으로 도망쳤다.

    “돌무더기가 쌓인 길가에 돌무덤을 쌓아 은신할 만한 공간을 만들었어요. 거기서 6박7일간 물 한 방울 못 마시며 꼼짝도 하지 않고 숨어 있었지요. 대소변 한번 못 봤어요. 시내 쪽에서는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은신처 옆을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이들에게서 나는 담배냄새, 땀냄새, 음식냄새를 맡으니 왈칵 배가 고프더라고요. 그래서 돌담을 헐고 나가 근처 밭으로 들어가 생고구마를 캐 먹고 7일 만에 처음으로 소변을 보았지요. 시내로 나갔더니 반란은 진압되었고 군경이 눈에 불을 켜고 반란군과 협력자를 색출하고 있더라고.”

    다시 여수경찰서에 복귀한 그는 경찰서 뒤뜰에 널린 시체를 유족에게 인계하는 임무를 맡았다. 시신들이 심하게 부패해 마스크를 세 겹이나 해도 역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 이후 더욱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다. 1948년 11월1일 여순반란사건에 대한 군법회의가 열려 반란가담자들을 즉결처분했다. 그중 대다수는 가담 의혹만 있을 뿐인 양민들로, 일본도로 목을 쳐 죽이기도 하고 권총으로 쏴 죽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 회의를 느낀 신 박사는 경찰직을 그만둔다.

    법관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변호사시험 자료를 챙겨들고 한산사에 들어가 공부에 매진했고 1950년 제1회 고등전형고시에 합격한다. 청운의 꿈을 품고 고향에서 등용을 기다리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다. 피란지 부산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은 미국 유학파 거물 김우평(金佑枰·외자처장, 국회의원, 부흥부 장관 역임) 선생을 만났다.

    “김우평 선생은 아내의 중부(仲父)예요. 나중에 선생이 아내를 양녀로 들였으니 내겐 장인이기도 하지요. 부산에 머물면서 김우평 선생의 개인 심부름을 맡아했어요. 주로 김구, 이시영, 송진우, 조병옥 선생 등에게 서신을 전하는 일이었지요.”

    1952년 8월5일은 제2대 정부통령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당시 자유당에서는 이승만과 함태영, 야당에서는 이시영, 조병옥이 후보로 나섰고 김우평 선생은 야당 선거사무장을 맡았다. 결과는 자유당의 승리. 신 박사는 여수지구 범야선거대책위원회 선전부장을 맡아 뛰었다. 그러다 2번이나 경찰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몽둥이로 때리고 구둣발로 짓밟는 것은 보통이고, 전기고문, 물고문, 고춧가루물 고문, 손가락 사이에 막대기 끼우고 누르기 등 정말 모진 고문을 당했어요.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이승만 반대자는 죽여도 된다’며 위협하기도 했어요.”

    “정말 못살겠다” “다 갈아치우자”

    1955년 9월19일 민주당이 창당되었다. 신영길 박사는 창당 준비위원으로 참가했다. 창당 7개월 만에 민주당은 신익희, 장면을 후보로 내세워 제3대 정부통령 선거를 치른다. 그는 여수·여천지구 선전부장으로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에서는 내게 선거와 관련된 표어를 지어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우연히 음식점이 많이 모여 있던 번화가에 갔다가 식당 주인과 손님 사이에 싸움이 난 걸 봤거든. 그런데 ‘정말 못살겠다’ ‘싹 다 갈아치우자’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못살겠다, 갈아치우자’? 옳지! 이거다. 바로 메모를 했어요.”

    이렇게 탄생한 것이 선거기간 내내 민초들의 입에서 터져나온 그 유명한 구호 ‘못살겠다, 갈아보자!’다. 하지만 신익희 후보가 갑자기 타계하고 극심한 선거부정까지 이어져 이승만 대통령은 3선에 성공하고 만다.

    1960년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그는 또 한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다. 민주당은 조병옥, 장면을 정부통령 후보로 내세웠지만 선거일을 한 달 앞둔 2월15일 미국을 방문중이던 조병옥이 심장마비로 급서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이에 민주당은 장면 부통령 후보의 당선을 위하여 총력을 기울였고 자유당 역시 이기붕 후보를 부통령에 당선시키겠다는 목표로 엄청난 선거부정을 저지른다.

    선거운동을 벌이던 신 박사는 2월29일 밤 자신을 형사라고 소개한 사람의 급작스런 방문을 받는다.

    “갑자기 안방에 들어오더니 ‘사찰계에서 당신 사진을 수십 장 복사하는 것을 보았으니 빨리 피신하시오’라고 했어요. 심상치 않아 이틀 후 부산으로 피신했지. 그런데 3월10일자 신문에 ‘여수 민주당 선거사무소에서 재정부장 김용호씨가 폭한 11명에게 구타당해 피살되었다’는 기사가 실렸어요. 민주당 중앙당에서는 ‘단순한 살인이 아닌 불법선거를 강행키 위한 사건’이라고 단정하고 정부에 책임을 물었습니다.

    나는 김용호 부장 빈소에 찾아가 한없이 울었어요. 그가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나와 김 부장은 인상과 체격이 너무도 닮아 가까운 지인들도 헷갈리는 경우가 더러 있었거든.”

    극심한 선거부정에 민심은 흉흉해져갔다. 4월11일 마산 앞바다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군의 시체가 떠오르자 마침내 분노는 폭발했고 이는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켰다.

    “이승만 치하에서 내가 겪은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요. 고문으로 오른쪽 종아리뼈가 부러져서 지금도 장애인 신세죠. 4·19혁명 이후 경찰에서 다시 일해보겠냐고 제의했지만 고문받던 기억이 떠올라 거절했습니다. 얼마 후 외자청에서 주사(主事)를 공개 채용한다는 공고가 났고 곧바로 시험에 응시해 합격하면서 공무원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지요.”

    ‘강제저축 원흉’

    1960년 8월25일 신 박사는 외자청 경기사무소에 주사로 발령받았다. 다음해 5·16 군사쿠데타로 군사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국세조사 전담국인 통계국 편수과를 지원해 자리를 옮겼다.

    1961년 5월28일 ‘증권파동’이 터졌다. 당시 주가 폭등이 계속돼 ‘증권이 봉’이라는 말이 나오던 상황에서 갑자기 폭락세로 급전한 것이다. 신 박사는 고가의 정부 주식이 돌연 폭락한 원인을 밝히는 업무를 맡았다.

    파란의 한국현대사 ‘현장 회고록’ 펴낸 신영길 박사

    ① 반려자인 김정인 여사와 함께.<br>② 제3대 정부통령 선거 민주당 선거구호 ‘못살겠다. 갈아보자!’<br>③ 공직생활을 시작한 뒤 수십년 동안 기록해온 일기장.

    “사건을 조사하던 중 40대 초반의 건장한 사람이 찾아와 자신을 중앙정보부 차장 김 대령이라고 소개한 후 다짜고짜 남산으로 끌고 갔어요. 승강기를 탔는데, 층계 표시가 없어 얼마를 내려갔는지도 모른 채 한참 내려가더니 방에 가두더라고.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갑자기 천장에서 ‘올라오라’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올라갔더니 김 대령이 조사내용은 무엇이고 조사결과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더군. 그러더니 ‘오늘 일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게 하곤 풀어줬어요.”

    다음날 출근했더니 조사를 그만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중앙정보부가 주가를 조작해 챙긴 이익으로 민주공화당 창당에 일조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1963년 재무부 이재국으로 자리를 옮긴 후 그는 경제개발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내자조달정책을 주도한다. 내자조달정책의 핵심이 저축에 있다고 생각한 그는 국민의 저축을 늘릴 수 있는 묘안을 찾느라 골몰했다. 그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 미군정 시절 변호사시험을 준비하면서 ‘육법전서’에서 읽은 일본의 ‘전시국민저축법’이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강제저축조합을 제정한 법률이었다. 상부에 보고하자 곧바로 일본 법전을 번역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번역을 마친 후 5시간쯤 지났을까. 전문과 수식어말고는 한 자도 수정되지 않은 채 그 번역물이 최고회의에서 법률로 통과되어 공포됐다. 이것이 바로 ‘국민저축조합 저축특별법’이다.

    이 법안의 골자는 공무원의 봉급을 금융기관 통장으로 지급하고 매월 지급액의 3%를 잔액으로 예탁해두는 것이다. 또 직장단위와 거주지단위로 저축조합을 결성하고 시군단위로 저축추진위원회를 조직해 저축을 장려하며 저축조합의 저축금 운용은 재무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특수목적(예를 들어 경제개발계획에 책정된 사업 등)에 한해 융자할 수 있게끔 규정했다. 이를 추진하면서 신 박사는 ‘강제저축의 원흉’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1965년 청와대상황실에 파견근무를 나가게 됐고 매주 금요일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을 했다. 그러면서 박정희 대통령과 개인적 교분을 갖기도 했다.

    “대통령과 종로 뒷골목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정치, 경제뿐 아니라 개인적인 얘기도 나누었어요. 대통령은 주막에 가서 ‘각하’ 대신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라고 했지만 그게 쉽게 되나요. 한번은 선글라스를 낀 박 대통령의 음성을 들은 주모가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라고 했어요. 나는 소리 없이 웃었고 박 대통령은 탄로날까 봐 입을 다물었지요.”

    어느 날 박 대통령이 그에게 명함을 달라고 했다. 명함에는 ‘재정주사’라는 직함이 찍혀 있었다. 맡은 업무에 비해 직위가 너무 낮은 것에 놀란 대통령은 그에게 승진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지만 1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당시 공무원 세계에서 전라도 출신은 찬밥 신세였어요. 게다가 과거 야당생활을 했던 경험이 발목을 잡은 거죠. 중앙정보부에 있는 신영길 관련 서류가 7장이나 됐대요. 일제시대에는 불령선인, 이승만 치하에서는 요시찰인, 군사정부하에서는 요주의인물로 지목된 것이죠. 대통령이 약속했는데도 승진이 안 된다면 평생 주사를 벗어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1967년 설립된 한국주택금고(한국주택은행 전신)에 과장으로 가게 됐지요.”

    1973년 입사 5년 만에 광주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이후 대전지점장, 서울 불광동지점장, 미아동지점장 등을 거쳤다. 그리고 정년을 1년 앞둔 1980년 1월30일 서대문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해 그는 생각지도 못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빨려들고 만다.

    말년운 꺾어버린 DJ 구명탄원서

    1980년 11월21일 그는 주택은행 동문인 김소환씨와 재야인사 김대중씨의 부인 이희호 여사를 만났다. 김씨는 그에게 당시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과 내란음모죄 등으로 사형이 확정되어 복역중이던 DJ의 석방탄원서를 작성해달라고 부탁했다.

    “DJ의 관선변호인이 적어준 내용을 골자로 작성했는데, 요지는 DJ가 정계를 은퇴하고 전두환를 적극 돕겠다는 것이거든. 나는 작성만 했을 뿐 제출자로 나서진 않았어요. 그래서 문제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죠.”

    하지만 이 일은 그의 말년 명운을 꺾어버리고 만다. 며칠 후 중앙정보부에 몇 차례 연행돼 조사를 받았고 지점장직에서도 해임되고 만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일이 있기 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에서 ‘당신을 이사로 추천했다’는 전화를 받았거든요. 여기저기서 축하인사도 받았죠. 그런데 이 일이 있은 후 국보위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어요. ‘DJ의 탄원서를 써주다니 당신, 생각이 있는 사람이오? 이사추천은 고사하고 파면감이나 그동안 세운 공을 참작하여 지점장에서 해임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으니 그리 아시오’ 하더군요.”

    1981년 12월 정년퇴직한 신영길 박사는 이후 책을 모으고 글을 쓰는 데 노년을 바친다. 특히 희귀본 서적, 백두산정계비와 간도, 독도, 녹둔도, 대마도 영토 관련 서적 및 자료, 그리고 일제강점기 사료를 모으는 일에 몰두했다. 그 결과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많은 책을 모았고 희귀한 문화재 발굴과 해석을 통해 역사와 서지 연구에도 기여했다.

    하지만 그의 시련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83년 11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35시간 동안 의식을 잃었고, 1989년엔 ‘한국경제백년사료전시회’를 개최했다가 빚더미에 오르고 만다.

    “우리나라 경제를 주제로 한 서적 8076권을 모아 전시회를 가졌어요. 그런데 2000만원을 협찬하기로 했던 대한증권업협회에서 갑자기 협찬을 취소해 버렸지요. 나는 사채를 빌려서 전시회 비용을 지불했어요. 전시회를 마치고 나니 빚이 2600만원이나 되더이다. 부득이 귀중 서적들을 정리하면서 사채도 갚고 생활도 했지만, 고정 수입이 없다보니 빚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그의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채무변제 후 남은 잔액 4000만원을 가지고 전셋집으로 이사했다. 현재 그가 사는 집 역시 전세다.

    그는 지난해 9월 자신이 명예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광운대에 소장도서들을 단 한 푼도 받지 않고 기증했다. 하지만 1975년 집 한 채 값을 들여 구입한 ‘양휘산법’만은 서재에 고이 모셔뒀다. 세종대왕 시절 그의 16대 조부가 지은 책이라고 한다.

    박사는 일제침략과 관련해 평생 집필한 논문들을 모아 책으로 낼 계획이다. 중요 논문들만 해도 원고지 3000매가 넘는 분량이라 총 3권으로 펴내야 한다고 했다. “책을 읽을 때와 글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죽을 때까지 글을 쓰겠다”고 말한다.

    “월간지 3종 필독하라”

    “1951년 조병옥 선생과 함께 이시영 선생을 찾아뵈었어요. 이 선생은 제게 ‘내가 신군의 관상을 보니 공직에 출사해도 큰 벼슬에 오르지 못할 거야. 신군에게 이르노니 조·석간 2종과 월간지 3종을 필독하라. 내 말대로 따르면 신군은 억만장자보다, 고관대작 벼슬아치보다 훌륭하고 만인이 존경하는 귀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하셨어요. 조 선생도 ‘신군은 사적 전기(史的傳記) 학문을 전공 연구한다면 큰 사람이 될 것 같다’고 하셨죠. 그래서 50년 전부터 서적을 모으기 시작한 거예요. 특히 일제침략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졌죠.

    지금 생각해보니 두 분의 말씀이 다 맞았어요. 큰 벼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가장 애정을 가지고 했던 장서 수집 분야에서는 내가 최고가 됐잖아요. 인생이란 다 그런 게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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