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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기행

둔황(敦煌) 동굴벽화 화가 서용

“이역 땅에서 모래바람 맞으며 그려낸 건 내 민족의 뿌리였어요”

  • 글: 조희숙 자유기고가 gina05@hanmail.net

둔황(敦煌) 동굴벽화 화가 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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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먹는 것과 그림 그리는 데만 열중할 수 있어 행복했다”는 둔황 동굴벽화 화가 서용씨. 7년간 둔황 사막 한가운데서 고대 벽화의 발자취를 추적해온 젊은 화백은 낡은 스쿠터 한 대와 붓 한 자루, 그리고 뜨거운 열정만으로 1500년 전 고대 화공의 뒤를 좇았다.
둔황(敦煌) 동굴벽화 화가 서용
둔황 벽화 화가 서용(徐勇·42)씨가 중국으로 간 것은 꼭 12년 전이다. 지도교수인 이종상 전 서울대학교 박물관장의 영향으로 벽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그는 떠날 때만 해도 중국 유학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고 한다.

“벽화를 보면 참 좋긴 한데, 뭐가 좋은지 구체적으로 모르겠더라고요. 그렇다면 제대로 공부해서 알아보자는 생각에 중국으로 간 거죠. 저는 뭘 해야겠다 싶으면 앞뒤 안 가리고 저지르는 성격이거든요. 작업실 보증금을 뺀 300만원만 달랑 들고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떠난 유학길이 10년 넘게 이어질 줄은 정말 몰랐죠.”

맨손으로 떠난 유학길이 수월하리란 기대는 애당초 없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믿음뿐이었다. 다행히 방학 때마다 한국의 지인들이 쥐어주는 용돈을 모으면 얼추 한 학기 학비가 충당됐다. 그렇게 해서 중국 최고 미술대학인 중앙미술학원 벽화과 석사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두 차례의 전시회도 무사히 치러냈다. 특히 1996년에 연 두 번째 전시회는 성공적이었다. 화랑에서 그의 그림을 소장하겠다며 각별한 예우를 해주는 등 그의 앞길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귀국을 앞둔 어느 날, 그는 꾸린 짐을 들고 한국이 아닌 중국의 서쪽 둔황으로 향했다.

“화랑에 걸린 제 그림을 보는데 갑자기 ‘이건 사기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뿌리가 없는 그림을 그렸다는 느낌이었죠. 제 그림 속에서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자극에 고무되어 그것만을 좇는 제 자신을 발견한 거예요. 실체는 없고 껍데기뿐인 그림이 걸린 전시장에 부끄러워서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둔황으로 달려가 석굴의 벽화를 보고 나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어요. 1500년 전 화공의 손에서는 새 그림이었을 벽화는 세월에 탈색되고 훼손됐지만, 인위적이 느낌이 빠져나가 이미 벽화가 아닌, 자연의 일부였어요. 완벽함 자체였죠. 들에 아무렇게나 자라난 풀을 보면서 어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동안 헛공부했다는 걸 알았으니 둔황에 짐을 풀 수밖에 없었죠.”

귀국 앞두고 무작정 둔황으로

둔황은 간쑤성 북서부에 위치한 사막의 오아시스로 인구 12만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다. 걸어서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작지만 한때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서역문화의 길목이었다. 고대 동서문화가 교류하면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던 문화의 거점지이기도 하다. 건축, 공예 등 다양한 둔황의 문화 중 백미는 막고굴의 벽화다.

막고굴은 석벽을 파서 만든 굴이다. 서기 366년 승려 낙준이 처음 팠다고 알려져 있다. 승려를 비롯 석공, 도공, 목공들이 파기 시작하면서 1000여개에 이르렀지만 현재 남은 것은 492개뿐이다. 석굴 내부에 그려진 벽화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보물 중의 보물이다.

서용씨는 둔황의 벽화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으로부터 그림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는 모래산으로 불리는 명사산 인근에 거처를 마련했다. 악명 높은 황사의 진원지답게 한번 바람이 일면 창문을 꼭 닫은 차안에서도 얼굴이 온통 하얀 모래로 덮일 정도로 모래바람의 위력이 대단했다. 그나마 이 정도는 약한 황사일 경우다. 폭풍우를 동반한 황사가 본격적으로 불어오면 속수무책이었다. 한낮에도 사방이 칠흑같이 캄캄해져 황사가 잦을 때까지 어둠 속에서 보내야 했다.

크고 넓은 작업실을 빌리는 데 1년에 우리돈 100만원 남짓이면 충분할 만큼 물가가 저렴했다. 3만∼4만원만 들고 나가면 친구들에게 생색내며 푸짐하게 대접할 수 있었다. 야시장에서 독주와 함께 먹는 양고기 꼬치구이 맛이 일품이었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다. 아삭아삭한 총각김치를 먹을 수 없다는 것.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그는 기어이 한국에서 배추와 무 종자를 공수해 손수 키워 먹는 극성을 부리기도 했다.

동선이래야 막고굴과 숙소를 오가는 것이 전부였으니 별다른 운송수단도 필요없었다. 그의 발이 되어준 낡은 스쿠터 한 대만 있으면 못 갈 곳이 없었다. 둔황에 있는 동안 그는 철저하게 둔황의 문화를 따랐다. 둔황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언어로 얘기하며 어울렸다. 이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점점 둔황 사람으로 변해갔다. 어쩌다 서울에 나오면 하루라도 빨리 둔황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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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희숙 자유기고가 gina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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