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호

KBS·MBC 연기대상 한꺼번에 거머쥔 고두심

고운 여자 애틋한 엄마, 따뜻한 사람

  • 이나리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5-01-25 17: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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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 안 오는 새벽이면 버스 타고 시장에 가 아줌마 아저씨들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는 배우.
    • 작품 하나 끝날 때마다 동료들에게 고운 인사 담긴 책 한 권씩 선물하는 어른. 혹은 아무도 몰래 소녀가장 집을 찾아 칼국수 끓이고 뒷머리 쓰다듬어주는 정 많고 눈물 많은 누이. 그 여자, 고두심.
    KBS·MBC 연기대상 한꺼번에 거머쥔 고두심
    그녀는작다. 손도 어깨도 자그마하다. 걸을 때는 발소리가 나지 않는다. 목소리도 나지막하다.

    오늘 파티는 작고 음전한 그녀를 위한 것이다. 그녀 고두심(55)은 지난 연말 KBS와 MBC 두 방송사에서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우리 방송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로는 ‘KBS 연기대상’을, ‘한강수타령’으로는 ‘MBC 연기대상’을 탔다. 고두심은 이미 세 차례나 연기대상을 받은 적이 있다. 연기대상 5관왕. 혹자는 이를 두고 ‘전무(全無)로도 모자라 후무(後無)할 것으로 보이는 금자탑’이라 했다.

    ‘꽃보다…’에서 그녀는 남편의 새 여자에게 콩팥을 떼주고도 미련스레 참아내는 여인 ‘영자’였다. ‘한강수타령’에선 부모 잃은 조카 남매까지 억척으로 키워내는 생선장수다. 두 여자는 사람들을 많이도 울렸다. 삶이 고달파 돌아간 집, 다 큰 자식 벌거벗은 등에 비누칠 해주며 “괜찮다, 괜찮다” 되뇌이는 엄마처럼 그녀의 연기에는 참 그립고도 간절한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진정성이요, 오래 울고 난 후의 나른함처럼 먹먹하고 서글픈 평안이었다.

    파티가 열린 곳은 서울 남산, 타워호텔과 신라호텔 사이에 있는 ‘서울클럽’이다. 구한말 고종황제가 외국인을 위해 연 사교장. 긴 세월이 흘렀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사교클럽’이라는 명성만은 여전하다. 겉모양은 수수하나 안으로는 자부심이 꽉 들어찬 그 공간에서 제주향우회 사람들이 ‘고두심 여사 연기대상 수상 축하연’을 벌이고 있다. 50여 명의 참석자 중에는 유명 인사도 꽤 있다. 문정인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 원희룡 한나라당 국회의원, 최근 퇴임한 김보현 전 국가정보원 3차장, 박종원 영화감독….

    “다시 태어나도 울 엄마한테서…”



    그런데 정작 주인공은 눈에 뵈지 않는다. 훑다 보니 중간 테이블,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에 앉아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다.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일어나, 사람들을 뷔페 테이블로 이끌며 조용조용 안부를 묻는다. 검은 재킷, 같은 색 바지, 굽 없는 검정 단화. 중성적이고 소박한 차림새로 제 앉은 테이블의 음식 심부름까지 도맡아 하느라 혼자 바쁘다. ‘럭셔리’한 공간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미인이면서, 또 그렇게 잰 걸음으로 손님 접대에 바쁜 뒷모습은 이곳에 동네 잔칫집 같은 온기를 불어 넣는다. 꼭 다물면 한없이 고집 세고 야무져 보이는 그 입매가, 한 쪽만 벙긋 터져도 그렇게 따스하고 때로는 맹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처럼.

    밤 9시, 손님들을 다 보내고 나서야 그녀는 코트를 집어 든다. 집이 있는 서울 평창동으로 이동하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인사를 튼다. 고향 제주도 이야기부터 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는 그녀의 근원이며 존재 이유다. 제주도에 관한 일이라면 만사 제쳐놓고 비행기를 탄다. 2년 전에는 연기생활 30주년을 맞아 7박8일간 제주 도보 순례를 했다. 가슴이 막힐 때면 화북 앞바다를 마주하고 서 그 푸른 속을 깊이깊이 읽어 내려간다. “나는 내 고향을 사랑한다, 어머니만큼 사랑한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입버릇이야말로 그녀의 삶 전체를 오롯이 아우르는 말이다.

    “난 다시 태어나도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한테서 날 거예요. 내가 어머니 얘기를 많이 하는데, 거기에는 항상 아버지까지 포함돼 있어. 우리 아버지는 진짜 아버지다운 아버지였어요. 굉장히 남자답고 진취적이면서 또 그렇게 자상할 수가 없었어요. 손수 3남4녀 갖고 놀 인형까지 만들어주시곤 했으니까.”

    가난이 싫고 바다가 지겨웠던 제주 사람들은 늘 뭍을 동경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14살 되던 해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서도 별다른 희망을 찾지 못한 아버지는 남태평양 사이판 서남쪽 부근 ‘얍’이라는 미개척 섬에 들어갔다. 일본을 오가며 보따리상 비슷한 무역업을 해, 얼마 후에는 병원과 만물상점을 경영하는 제법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 이국 여인과의 혼담이 오갈 만도 하건만 아버지는 오로지 ‘제주 여자’만을 고집했다. 멀고 위험천만한 길을 되짚어 와 그녀의 어머니를 신부로 맞아 함께 얍섬으로 돌아갔다.

    “제주 여자는 강해요. 끈질기고 넉넉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원하던 바로 그 제주 여자였어요.”

    얍섬에서 두 아이를 본 부부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귀국길에 올랐다. 연일 이어지는 폭격에 어머니가 “돌아가자”며 성화를 부린 탓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제주는 4·3항쟁의 격랑에 휩싸였다. 어지러운 세상 속, 희망을 잃은 아버지는 소리없이 허물어져갔다. 그래도 어머니는 늘 온화했고, 부부는 죽는 날까지 서로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놓지 않았다.

    “제가 3남4녀 중 다섯째예요. 어머니 모습을 제일 많이 닮았지. 그런데 성격은 아니야. 좋게 말해 명랑소녀랄까, 하여튼 고삐 풀린 몽생이(망아지) 같았으니까.”

    고두심은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

    “부모님은 우리들하고 떨어져 농사를 지으셨어요. 7남매가 1주일에 한번씩 순번제로 생필품을 짊어지고 거길 다녀왔거든. 걸어서 오가는 데만 1시간20분쯤 걸리는 곳이었어요. 올 때는 또 우리한테 필요한 물건을 지고 오는데 친구들을 만나면 괜히 창피해. 고개를 못 들겠는 거예요. 근데 동네 어른들 보시기에는 그 모습이 예뻤나 봐요. 저렇게 착한 애는 괜찮다고, 두심이하고 노는 건 무조건 좋다고들 하셨어요. 사실 난 심부름이 싫어 죽겠는데 말야(웃음).”

    여느 시골 소녀들처럼 그녀는 씩씩하고 순박했다.

    “우리 집에서 똥돼지를 키웠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동네를 돌아다니며 구정물을 얻어다 우리 안에 던져줘야 돼요. 여고 마칠 때까지 내가 그 일을 했어요. 지금도 기억 나는 게, 우리 어머니가 새끼돼지 다섯 마리를 주시면서 장에 갖다 팔아 공부하라는 거예요. 근데 그걸 데리고 가다 그만 놓쳐버린 거야. 아이고, 겁도 나고 속이 상해 얼마나 울었는지….”

    그녀는 여중, 여고 시절 내내 고전무용을 했다. 도 대표로 뽑힐 만큼 재능이 있었고, 덕분에 중앙대 무용과에 입학할 기회가 생겼지만 부모님은 말도 못 붙이게 했다. 다 커서도 춤추는 여자란 기생이나 다름 없다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어디 춤만 췄나. 학교 연극에도 나가고, 밴드부로 시가행진도 하고, 웅변대회에도 참가했지. 중학교 때는 집집이 돌며 동요에 맞춰 직접 안무한 춤을 공연하기도 했어요. 하여튼 어떤 무대건 박수 소리만 들으면 무슨 신기나 광기 같은 것이 지펴지는 거야. 평소 때의 나보다 훨씬 멋있어지고, 보통 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던 능력이 마구마구 뻗어나오는 것 같고.”

    다른 과목은 그런대로 따라갔는데 수학만은 그렇게도 싫었다.

    “시험 치면 당당히 백지를 냈어요. 선생님이 뭐라 그러시면 ‘모르고 싫은 것을 어떻게 하느냐’고 되받아 쳤지. 하여튼, 오빠 친구들이 ‘여자 깡패’라 그럴 만큼 굉장히 왈가닥이었어요.”

    배우를 꿈꾸게 된 데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작은오빠의 영향이었다. 한때 제법 잘나가던 작은오빠가 어느 날 어디선가 조그만 영사기를 구해온 것이다. 마루에 천을 걸어놓고 그것으로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 같은 것들을 틀어주곤 했다. 그렇게 막연히 배우의 꿈을 키워가던 그녀에게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어느 날 신성일, 엄앵란씨 같은 유명 배우 일곱 명이 제주도를 방문했어요. 우리 학교 건너편에 있는 파라다이스 호텔에 묵었는데, 애들이 우루루 몰려가 막 소리를 지르면 신성일 선생님이 이 쪽을 보며 손을 흔들어줘요. 그런데 그게 꼭 나만 보고 그러는 것 같은 거야. 오늘 집에 가 있으면 ‘서울 가서 나랑 배우 하자’ 꼭 그런 전화가 올 것만 같았다니까(웃음).”

    여고 졸업 후 한 달도 채 안 돼 뭍으로 가는 가야호 3등선실에 몸을 실었다. 서울서 공부하는 오빠 밥을 해주겠다며 며칠을 조른 덕분이었다. 막상 상경해서는 냉큼 취직부터 해버렸다. 직원이 일곱 명뿐인 작은 회사의 유일한 여직원이 됐다.

    “이력서를 쓰는데 뭐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특기란에 ‘고전무용’이라고 적었어요. 사장님께서 ‘뭐 이런 애가 있나’ 하셨대요.”

    그녀는 당시 받은 ‘합격증’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순간 처음으로 받은 평가이기 때문이었다. 합격증에는 무슨무슨 서류를 어떻게 준비하라는 말과 함께 ‘특기는 전무하나 한번 가르쳐보겠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준비 서류가 적힌 부분만 따로 떼내 고향으로 보냈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의 시작은 ‘전무’였다.

    “2, 3년 지나서부터는 급사부터 현금출납, 사장비서 역할까지 제가 다 도맡아 했어요. 나 없이는 회사가 안 돌아갈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가슴속 불이 꺼지지 않데요. 결국 1972년, 아무도 몰래 MBC 탤런트 공채시험을 보러 갔지요.”

    ‘정숙한 맏며느리’가 찍어 누르다

    스물세 살에 꿈에도 그리던 연기자가 됐다. 하지만 그럴듯한 배역은 주어지지 않았다. 난 아닌가 보다 싶어 다니던 회사로 돌아가버렸다. 2년을 그렇게 보냈는데 갑자기 MBC에서 연락이 왔다. “니가 1등이었다, 키워줄 테니 한번 열심히 해보라”는 것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매달렸어요. 얼마 후 정말 제법 큰 역을 맡게 됐는데 어휴, 대본 리딩 시간에 도무지 입이 안 떨어지는 거야. 몇 번이나 내 차례가 와도 한 마디도 못 하겠더라구요. 그러니 어떻게 해요. 일어나 연출 선생님께 대본 드리고 화장실로 달려가서 펑펑 울었지.”

    결국 그 역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는 탁자에 엽차 한 잔 놓으며 ‘예’ 하고 고개 숙이는 역할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갈대’라는 드라마에서 김혜자, 이정길과 삼각관계를 이루는 정숙한 교수 부인 역을 맡으면서 마침내 시청자들에게 ‘고두심’ 이름 석 자를 알리게 됐다.

    “맨처음 주연부터 아예 유부녀였으니까…. 서른이 되기 전부터 내처 아줌마였고, 마흔이 안 됐을 때도 노인 역이 들어왔어요. ‘정화’의 김만덕 할머니(보릿고개에서 제주도민을 구한 18세기 여성갑부)나 ‘설중매’의 인수대비 역이 그랬지요.”

    1990년에 가야금 명인 이금화의 삶을 그린 ‘춤추는 가얏고’를 찍었다. 고두심은 외할머니 사진을 책상 위에 붙여놓고 매일 뚫어져라 바라보며 어릴 적 할머니의 말투, 걸음걸이와 행동거지 따위를 되새기려 무섭게 집중했다.

    “할머니들 특유의 구부정한 자세 있잖아요. 그 미묘한 움직임을 작품 속에 녹여낼 수만 있다면 내일 바로 늙어 꼬부라진대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어요.”

    그러나 누가 뭐래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두심은 ‘우리 시대의 맏며느리’였다. 1981년 시작해 2002년에야 막을 내린 ‘전원일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 그렇게 왈가닥이었던 거 생각하면 지금 나는 도무지 내가 아닌 것 같아요. 가끔 거울 보며 그래요. ‘너는 누구니, 어떤 사람이니, 니 인생 자체가 위선 아니니?’ 하고. 뭐랄까… 가끔은 내 진짜 삶은 그만 없어져버린 것 같은 게, ‘전원일기’의 정숙한 맏며느리가 찍어 누르는 힘 때문에 어느샌가 시청자들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만 움직이게 돼버렸거든.”

    그녀는 화가 나면 잠을 잔다.

    “사람들이 그래요. 화가 나는데 어떻게 잠이 오냐고. 그런데 난 어떠냐면, 내 직업의 특성상 자칫 잘못 행동했다간 도마 위 생선처럼 난도질 당하기 십상이거든요. 그러니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그저 자기만 하는 거예요. 뒤집힌 속 안 보이려고, 약하고 흐트러진 모습 감추고 싶어서.”

    귀한 아들을 홀로 제주도로

    가끔은 확 피어버리고 싶다, 망가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느냐고 했다. 그녀는 “생각으로야 별거 다 해 봤지만 사람이 그렇게 살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다.

    “어설퍼. 어울리지 않을 거예요. 그게 편하고 자유스럽고 좋다면 그렇게 해 보겠는데 아마 불편할 거예요. 아마 죄의식까지 느낄걸. 그래서 연기가 좋은 거예요. 배역 속에서 마음껏 분출할 수 있거든. 실제로는 할 수 없는 일도 연기 속에서는 다 기회가 오잖아요.”

    연기로 인해 숨막힌 삶을 살았지만, 숨통을 틔워주는 것 또한 결국 연기뿐인 인생인 셈이다.

    전원일기의 종영, 그리고 이어진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와 영화 ‘인어공주’, 또 다른 드라마 ‘한강수타령’이며 ‘그대는 별’에서 그녀는 한결같이 ‘어머니’가 되었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먼 길’에서도 어지럼증 때문에 차를 타지 못해 막내딸 결혼식장까지 3박4일을 걸어가는 칠순 어머니를 연기한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난생 처음 올곧이 혼자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어머니’란 말이랑 ‘엄마’랑 말은 굉장히 다르게 다가와요. ‘어머니’가 말 그대로 전통적 어머니, 나는 없고 오직 헌신 봉사만 하는 사람이라면 ‘엄마’는 왠지 ‘그래, 나도 있고 너도 있는 거지’ 하고 말하는 이 같아요. 아마 요즘 여자라면 스스로도 그저 ‘엄마’ 정도로만 불리고 싶을 걸.”

    그녀 또한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엄마’였다. 아이가 아파 열이 40도씩 되어도 촬영장 가느라 대문을 나서면 거짓말처럼 싹 잊어버리곤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일을 했겠어요. 하지만 난 늘 내 어머니를 닮으려 노력했어요. 그거, 노력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차이가 무척 크거든요. 아이들은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보기보다 냉정한 엄마이긴 했지만, 아이 곁을 늘 지키지 못했다 해서 죄의식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결국에 가 보면 세상 어느 것도 정답은 없거든요.”

    고두심은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뒀다. 25살 난 딸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해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19살 난 아들 또한 꽤 오래 전 같은 곳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녀는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들을 제주도 제 이모 집에 보내 1년 반 동안 지내게 한 일이 있다.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거든요. 지금도 예뻐 죽겠어. 그러니 내가 참 독한 에미지요. 그걸 자연을 알아야 한다고, 사촌 세 명과 부대끼는 생활 속에서 뭔가 다른 걸 좀 배워오길 바라며 보내버렸지요. 처음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장에 ‘엄마 보고 싶다’ 넋두리를 해대더니 나중에는 굉장히 잘 적응하더라구요. 지금도 아침 일찍 일어나 자전거 타고 학교 가던 그 시절이 많이 그립대요.”

    KBS·MBC 연기대상 한꺼번에 거머쥔 고두심

    2004년 KBS와 MBC의 연기대상을 동시 수상한 연기자 고두심.

    고두심이 ‘어머니’라고 말할 때 그 원형은 2001년 타계한 모친 황정의 여사다.

    “우리 어머니는 모난 게 하나도 없었어요. 누가 보든 그저 비죽 엷게 웃어주시던 그 미소가 너무나도 그리워요. 돌아가실 때쯤 되어선 거동도 잘 못 하시고 내게 실질적 도움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웃어주시는 것만으로도 힘이 됐어요. 어머니 돌아가신 후 양치하고 세수하다가도 문득 거울을 보면 못견디게 무서워 종종 눈물 흘리곤 했어요. 부모님 모두 안 계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공포스럽고 가슴 저미는 일이던지….”

    촬영장에서 ‘어머니가 저녁 드신 게 잘못돼 기도가 막히고 심근경색이 겹쳤다’는 동생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게 4년 전이다. 병원에 먼저 도착해 구급차를 기다리며 고두심은 자꾸만 ‘나쁜 생각’을 했다. 1996년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내고 하루가 다르게 기운을 잃어가던 어머니였다. 그녀는 ‘엄마, 지금 눈 감고 오시는 길이거들랑 그냥 아부지한테 가. 나는 해드릴 게 아グ孤?없는데…, 아무것도 없는데…’ 하고 되뇌었다.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그 못된 생각은 현실이 되어 어머니는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죄스러운 마음에 2년이 넘도록 어머니의 유품을 버리지 못했다.

    “내 30년 연기 힘이 다 어머니한테서 나온 거예요. ‘편지가 따로 있냐, 텔레비전이 편지지’ 하며 조용히 웃으시곤 했지요. 어머니 마지막 모습이 꼭 해탈한 사람 같았거든요. 정말 윤회란 것이 있다면 나하고 우리 어머니는 꼭 다시 만나야 해요. 그때 만약 어머니가 ‘나 니 엄마 하기 정말 싫어’ 그러면, 뭐 어때요, 내가 어머니의 엄마가 되면 그만이지.”

    그녀는 햇병아리 탤런트 시절 결혼을 했다. 그리고 6년 전 이혼했다. 부산 사람인 남편과는 ‘그가 고향집에 다녀올 때는 서울역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 밤열차를 타고 기차가 교행되는 역사까지 내려가 그의 품에 안길 만큼’ 불같이 연애를 했다. 꿈 같은 신혼은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지만 남편은 작은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혼생활은 “개화된 땅으로 떠나고 싶어하는 남편과 그를 막으려는 아내의 충돌”로 인해 오랜 세월 위태로웠다.

    이혼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두 번에 걸친 남편의 사업 실패였다. 고두심은 이혼 무렵 이루어진 한 인터뷰에서 “남편이 힘들어 할수록 용기를 주면서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그런 마음까지도 그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또 “남편을 놔줘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벌써 오래 전에 그랬어야 했다. 내 욕심 때문에 그를 힘들게 한 것 같아 미안할 뿐”이라고도 했다.

    “여자 목소리가 담을 넘을까…”

    “아내에게 무작정 기대는 남편보다야 그래도 낫지 않느냐”고 하자 그녀가 작은 한숨을 내쉰다. 그러고는 어찌 들으면 아주 딴소리를 한다.

    “내 인생에서 제일 용서가 안 되는 부분이 남편과 백년 해로 하지 못한 거예요. 그게 너무나 치명적이야. 최선을 다했다고까지 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결혼의) 룰을 벗어난 일은 하지 않았는데, 그게 참 억울하고…. 살면서 큰 싸움 한번 하지 못했어요. 내 목소리, 여자 목소리가 담 넘어 옆집까지 갈까봐. 얼굴이 알려져 있어 그렇기도 했지만, 제가 남들 짐작보다 참 고루하거든요. 부모에게나 남편에게나 항상 순종하고. 한마디로 노예근성이 있는 거지.”

    그녀는 이어 ‘학벌이고 능력이고 다 떠나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날 소중히 여겨주지 않을 때의 비참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이었던 ‘부산 남자’에 대한 회한이 담긴 것처럼도 들렸다.

    어쩌다 이야기가 한 젊은 개그맨과의 ‘열애설’로 옮아갔다. 한동안 연예계에서 꽤 화제가 됐던 얘기다. 그녀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으며 “요즘 말마따나 한마디로 생뚱맞죠” 했다.

    “내 또래 연기자나 드라마에서 남편 역을 맡았던 사람이랑 그런 말이 났으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이건 대체…. 며칠 전에도 MBC 현관 앞에서 왕영은씨랑 잡담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지나가는 거예요. 다가와선 ‘선생님, 별고 없으시죠’ 하는데 그런 말까지도 반갑지 않더라고. 아이고 이 사람아, 내가 별고 없을 리 있나…. 그러니 어떡해요. 조카 말마따나 ‘젊은 연예인이랑 스캔들도 나고, 아직 청춘이네’ 하곤 웃을 수밖에.”

    그녀는 “다시 결혼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식 사고, 내려오는 교육 같은 것이 싫어요. 다시 결혼이란 제도 속으로 들어가면 얽혀야 할 일이 좀 많겠어요. 또 그렇게 속이 멋있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 난 그저 연기만으로도 충분해요. 언젠가 황혼의 멋진 로맨스를 그린 영화나 드라마에서 여주인공 역할 한번 해보고 싶을 뿐이에요.”

    여자다운 여자, 연기자다운 연기자인 그는 또한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이기도 하다. 잠 안 오는 새벽이면 버스 타고 새벽시장을 찾아, 거기 아줌마 아저씨들과 어울려 커피 한 잔 마시며 사는 얘기를 한다. 드라마 하나, 영화 한 편이 끝날 때마다 동료들에게 고운 인사 담긴 책 한 권씩 선물하는 따뜻한 어른이다. 혹은 아무도 몰래 소녀가장 집을 찾아 칼국수를 끓여주고 머리를 쓰다듬는 정 깊은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어디서건 제일 먼저 아랫사람들한테 눈이 가요. 가끔 부모님, 하늘을 쳐다보면서 ‘감사합니다, 이런 눈을 주셔서’ 할 때가 있어요. 남의 어려운 지점, 아픈 지점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거든요. 그런 걸 보면 뭔가가 머리를 확 잡아당겨서 뭐라 한마디 해주고 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의도적인 건 분명 아닌데, 그런 게 자연스럽게 배어 나와요.”

    세상은 흐물흐물하게 사는 것

    그녀는 나이 듦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흔 넘으면서부터 ‘나이 드는 것도 좋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세상을 향한 칼날이 흐물흐물해진달까. 어찌보면 개성이 없어지는 거지. 그런데 사실 세상은 그렇게 사는 거거든. 물론 여배우가 나이 드는 거, 그건 초라해지는 거예요.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해요. 사람들 앞에서 아주 서서히,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져가야지요.”

    고두심은 남들 다 하는, 이젠 성형수술 축에도 못 끼는 보톡스 주사 한 방을 안 맞아봤다. 누군가 입가 주름 좀 펴라 그러면 그녀는 답한단다. ‘이 사람아, 그 한 방 쏘면 난 더 이상 고두심이 아니야.’ 때로 진짜 예쁘고 매력 있는 후배가 얼굴 고친 걸 보면 화가 나 전화를 걸기도 한다. ‘앞으로는 제발 더 손대지 마라, 그런 배우는 팬들한테 사랑 못 받아도 싸다….’

    그가 사는 동네의 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문 닫을 시간 다 됐다”는 말에 밖으로 나왔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밤이란다. 정말 귓볼이 떨어져나갈 것 같다.

    평창동은 서울 귀퉁이라도 밤이면 참 별이 많다. 우리집도 이 근처라 하니 “나 보통 때는 새벽 6시만 되면 북한산 오르거든. 내려오는 데까지 두 시간 정도 걸리는데 언제 같이 가요” 한다. 그런 그녀가 꼭 이모나 엄마만 같다.

    “추운데 어디까지 걸어갈 거냐”며 걱정이 늘어지는 그녀를 뒤로 하고 비탈길을 내려온다. 기분은 참 좋은데 자꾸 눈물이 난다. 딱 그녀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간 엄마가 자꾸 생각나는 거다.

    누군가 말했다. 앞만 보고 그저 뚜벅뚜벅 걸어갈 뿐인 이는 아무도 당해낼 수 없다고. 고두심은 바로 그렇게 먼 길을 걸어왔다. 한결같이, 고집스럽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이룰 것인가 따위 고민하지 않은 채. 그녀는 앞으로도 한참을 꼭 그 보폭으로 걸어갈 것이다. 그녀에게 ‘한국의 어머니’니 ‘만점짜리 맏며느리’니 하는 거추장스런 수식어는 이제 그만 좀 붙여줬으면 한다. 그녀는 그저 고두심이요, 아직도 할 일 너무 많은 이 땅의 재인(才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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