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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의 한국혼 ②

이율배반의 ‘영웅’ 역도산

“차별의 사각 링에 서려면 네 귀퉁이를 모두 쳐다봐야 해!”

  • 김충식 동아일보 도쿄지사장 seescheme@donga.com

이율배반의 ‘영웅’ 역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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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들이 그를 사랑할수록 그는 더욱 필사적으로 감춰야만 했다. 조선인인 그가 ‘일본의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허구와 실체의 삶을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성공하고 싶었고, 또 성공했지만 끝내 만족할 수 없던 사내. 맨몸뚱이로 일본열도를 뒤흔든 이 반도 출신의 사내는,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서류상의 가짜 고향’에 묻혀야만 했다.
이율배반의 ‘영웅’ 역도산

1955년 9월7일 도쿄 센다가야 도쿄체육관에서 멕시코의 오르테가 선수와 맞붙은 역도산.(아사히신문)

씨름선수최홍만(25)이 K-1 격투기로 돌아섰다는 소식에 떨떠름해 하는 이가 적지 않다. 민속씨름을 집어치우고 섬나라 격투기판에 돈을 벌러 간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일본 현대격투기(프로레슬링)의 효시 역도산(力道山), 역도산의 분신 같은 제자 안토니오 이노키, K-1의 뿌리인 극진가라테의 창시자 최영의(崔永宜·오야마 마스다쓰), 역도산에게 일발필살의 가라테촙을 가르친 강창수(姜昌秀·나카무라 히데오)…. 혹시 최홍만이 느닷없이 도일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떤 손들이 그를 부르는 것은 아닐까.

지금 일본열도를 들끓게 하는 격투기 붐은 바로 한국 핏줄 싸움꾼들이 발휘한 투혼의 연장선상에 있다. 나라가 망한 뒤 한반도의 청년들은 저마다의 꿈을 펴기 위해 뿔뿔이 도일했다. 그러나 가진 것은 몸뚱이 하나. 돈도 지식도 연줄도 없이 이민족의 차별과 냉대를 이기고 홀로 살아남는 방법에 주먹이 있었다.

주먹은 폭력이다. 도덕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정직하다. 주먹의 세계엔 민족적 우열도, 배타적 감정도, 배우고 못 배운 차이도, 기존의 인격자산과 배경 같은 어드밴티지도 통하지 않는다. 오직 일대일의 실력만 통할 뿐. 지느냐 이기느냐! 참으로 원시적이지만 승부가 간灼構? 누가 우위인지 알아보기도 쉽다.

정건영, 이노키, 최영의와 K-1

사무라이 시대가 700년이나 지속된 때문일까. 일본에는 폭력집단에 일정한 사회적 지분을 인정하는 풍토가 있다. 한마디로 칼 한 자루, 주먹 하나만 세도 먹고 살고 존경받을 수 있는 나라다. 이 나라에서는 향학의 상징이어야 할 ‘문구(文句)’라는 말이 불평불만의 뜻으로 통한다. 식자에 대한 사무라이들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야쿠자의 실력이 일제시대에나 지금에나 정·재계에 깊이 통하는 특이한 선진국이다.

이율배반의 ‘영웅’ 역도산

스모선수 시절의 역도산.

재일동포 중에 왜 격투기나 프로야구, 심지어 폭력단 같은 분야에서 걸출한(?) 실력자들이 배출되는가. 그 원인을 재일사학자인 강덕상 전 히토쓰바시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일본사회가 배척하는 반도출신이기에 일본인이 우대받는 분야에선 희망이 없다. ‘시마구니 곤조(島國根性)’라는 일본 특유의 지독한 편견과 차별이 통하지 않는 세계라야 성공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일대일의 적나라한 체력과 기술만 통하는 격투기 세계에서 반도출신의 실력자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전설적인 야쿠자 두목 정건영(鄭建永·일본명 마치이 히사스케(町井久之))은 도쿄의 긴자를 중심으로 활동한 최대의 폭력조직 동성회(東聲會·전성기 회원 1500여명) 회장으로 이른바 관동지역의 ‘밤의 제왕’이었다(관서지역은 유명한 야마구치구미 조직이 통치). 180㎝가 넘는 거구에 주먹이 세고 정치력도 대단해서 밤거리의 왕좌에까지 올랐던 그의 별명은 ‘긴자의 호랑이’. 역도산은 프로레슬링 흥행을 위해 정건영의 힘을 빌리곤 했고 나중에는 동성회 명예고문을 맡기도 한다. 이 또한 재일동포끼리의 뜨거운(?) 상부상조였다.

일본의 양대 격투기대회인 K-1과 PRIDE에 프로모터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안토니오 이노키는 자이언트 바바와 더불어 역도산 문하의 양대 제자다. 이노키의 주걱턱은 어려서부터 유별나서, 역도산은 그를 늘 ‘주걱턱(아고)!’이라고 불렀다. 역도산이 옆사람에게 ‘아고 요베!(주걱턱 불러)’ 하면 그건 어깨가 쑤시다는 말이었고, 그때마다 이노키가 달려와 스승을 위해 마사지를 해주었다.

또한 K-1 격투기의 원점에는 가라테의 명인 최영의가 개척한 극진회관(極眞會館·국제공수도극진회관)이 우뚝 서있다. 그의 일본명 오야마(大山)는 ‘높을 최(崔)’자에서, 마스다쓰(倍達)는 ‘배달겨레’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1956년 최영의가 맨손으로 소를 쳐서 잡는 시범을 보이며 보급한 극진가라테는 선풍적인 붐을 일으켰고 결국 세계 124개국 1200만명의 회원을 거느리기에 이른다. 원래 가라테는 직접 몸을 치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가 ‘실전 풀컨택트 가라테’라 하여 잔혹하게 가격하고 쓰러뜨리는 격투기로 발전시킨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최영의의 문하생 이시이 가즈요시(石井和義)가 정도회관(正道會館)을 만들어 독립한다. 1993년 이시이가 가라테, 권법(拳法), 격투기, 킥복싱을 혼합하고 녹아웃(knock-out)의 머리 글자를 따 좀더 알기 쉽고 잔인한 경기로 업그레이드시킨 격투기가 바로 K-1인 것이다.

1950년대는 역도산이 일본에 프로레슬링을 보급하고 가라테촙으로 미국 프로레슬러들을 제압해 열도를 달아오르게 한 시대다. 최영의의 극진가라테는 역도산의 가라테촙 흥행이 성공한 연장선상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다. 그렇다면 K-1에 관여하는 이노키는 역도산의 분신이요, K-1의 격투내용에는 역도산의 가라테촙이 만들어낸 흥행 아이디어가 배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홍만이나 재일동포 유도선수 출신 추성훈(30·秋成勳·일본명 아키야마 요시히로)이 거기에 뛰어드는 것이 우연만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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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식 동아일보 도쿄지사장 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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