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호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녹야원’ 주인 여여심

“수행은 않고 성스러운 체만 하는 껍데기 중은 되지 않겠소!”

  •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5-02-24 11: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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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스님도 속인도 아니다. 슬픔이 가득 찬 눈망울을 깜박이며 맹렬 정진하는 수행자일 뿐이다. 지구 반대편 뉴질랜드에 선방(禪房) ‘녹야원’을 열어 명상과 구도를 전파하는 여여심. 전심전력하지 않는 승려를 비판하고 불교의 생활선을 엄격히 실천하는 그의 삶에서 문득 아라한(阿羅漢)의 모습을 본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녹야원’ 주인 여여심

    ‘녹야원’ 근처 숲을 산책하는 여여심.

    뉴질랜드는 남섬과 북섬으로 이뤄진 나라다. 그중 남섬은 면적이 남한과 비슷한데, 인구는 고작 100만명밖에 안 된다. 남섬의 가장 큰 도시는 크라이스트처치로 여기에 30만명이 모여 산다. 그중 한국인은 2000명 남짓 된다고 들었다.

    크라이스트처치에 한 달 가량 머물 일이 생겨 이 참에 여기 사는 한국인들을 만나 그들이 사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다. 예민하게 세운 내 안테나에 여여심이라는 독특하고 진지한 사람이 포착됐다. 스님은 아니지만 속인도 아닌, 눈 깊고 생각 크고 고민 많은 여성. 나는 ‘녹야원’이라는 이름의 그 집으로 달려가 남방불교 승려가 입는 붉은 가사를 고쳐 만든 듯한 옷을 걸치고 머리를 파랗게 민 여여심을 만났다. 지구 반대편까지 흘러와 머리채를 다 잘라버리고, 뺨에는 아직 고운 기운을 지우지 못한 채 승도 속도 아닌 상태로 자그만 명상센터를 열고 스스로 좌충우돌 살아가노라고 말하는 여여심. 우리는 처음 만났지만 자매애라고 해도 좋을 공감으로 숱한 이야기를 나눴다.

    국내 최초 아함경 10권 번역

    여여심은 한국 나이로 마흔넷에 여덟 살, 여섯 살 난 아이가 딸린 엄마였다. “오후 3시면 학교로 아이를 픽업하러 가야 한다”고 말하는 도중에도 자꾸만 시계를 올려다봤다. 그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주로 집 안에서만 생활한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명상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사람들이 남기고 간 말들이 머릿속에 난무해 정신집중에 방해를 받기 때문이란다. 요즘은 살림집에 딸린 명상센터에도 나가지 않고 혼자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앉았을 때가 많다고 한다. 그가 천착하는 것은 근본불교다. 20대 때부터 막연히 근본불교를 추구했다.

    “불교를 처음 접할 때부터 한국과 중국의 간화선사(看話禪師)들이 주고받았다는 선문답들이 왠지 가식처럼 느껴졌어요. 겉으로 흉내만 낼 소지가 있고 진위를 증명할 길이 없는 무책임한 언행으로 보여 우스꽝스럽다고 여겼지요.”



    그러다 29세가 되어 만난 것이 ‘아함경(阿含經)’이다. 여여심은 국내 최초로 아함경 10권을 번역하고 해설한 불경학자로, 오래 회의하던 불교의 참모습을 아함경에서 비로소 만난다. 거기에 나온 불교의 간결하고도 정곡을 찌르는 가르침과 너무나도 청렴하고 솔직하며 단순해 보이는 수행승들의 언행에 의심 없이 마음이 활짝 열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교다 싶었어요. 아함경이 내게 안겨준 가장 큰 선물은 불교수행의 궁극이 저 어떤 추상세계가 아니라 바로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을 뿌리째 뽑아낸 심신의 정화상태라는 것을 알게 해준 것이었죠.”

    그때 이후 수행에 관심을 가지고 제 마음 안의 탐진치(貪瞋痴·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음)를 끊어내기 위해 맹렬정진의 길로 들어섰다. 그 길은 스스로 평가하듯 좌충우돌 종횡무진이었지만 지그재그로 걸어가는 중에 조금씩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여심은 몸 안의 정열이 유난히 많은 사람으로 보였다. 뿜어내는 뜨거움이 여느 사람과는 달라, 본인은 바로 그 열기 때문에 괴롭겠지만 언젠가 괴로움이 여여심을 아라한으로 이끌어줄 날이 올 것이라 나는 믿고 싶었다.

    “여여심, 아라한이 뭐지요?”

    “탐진치를 끊어내 윤회에서 자유로워진 존재지요.”

    “여여심은 아라한인가요?”

    “예에? 아라한이요?” 하며 펄쩍 뛰기에 “아라한을 실제 만나보기는 했나요?” 물었더니 “김해 다보선원의 붓다빠라 스님이 아라한이라고 말들 하지만 직접 만나지는 못했어요” 한다.

    머리는 깎고 싶어서 깎았다. 깎고 나니 그렇게나 편안해졌다. 원래 남들이 오해할까 두려워서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겁쟁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승단에 등록한 출가승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나는 여여심의 홈페이지(www. migadaya.com)를 통해 그가 출가승이 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됐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녹야원’ 주인 여여심

    여덟 살, 여섯 살 난 두 자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여여심.

    “사실이지 출가해서 수행은 제대로 안 하고 사판으로 전전해온 스님들은 속인 못지않게 정직성과 고결성이 결여돼 있다. 사고는 미성숙한 채 선방에 들어가 막연한 망상에 사로잡혀 수행만 하는 스님들은 재가자들에게 고압적이기 쉽다. 선방에서 어깨에 잔뜩 힘주고 죽어라 수행하는 납자(衲子)로서 속인들에게 지나치게 고압적으로 권위를 내세우는 스님은 자신이 택한 길에 대한 의지와 긍지를 뒷받침해줄 철학적, 인간적 성숙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면서 화두를 타파한다는 대망상에 사로잡혀 자기착각에 빠져 지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출가승단의 일원은 아니지만 그것의 생리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승속의 저변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현실 문제를 이제 알 것 같기에 훌러덩 옷을 갈아입고 중이 되는 일이 더욱 조심스럽다. 중이 돼서도 속인과 똑같은 행세를 할 바에야 무엇하러 중이 되나? 차라리 내 손으로 밥해먹고 내 의무에 충실한 게 낫다!

    내가 만약 금생 어느 때인가 흰머리가 돼서라도 출가 수행자가 된다면 최소한 재가자보다 정직하고 고결할 것이며 분주하지 않고 생활을 간소하게 할 것이다. 만족할 줄 알아서 남들이 공양하기 쉽게 할 것이며, 감관은 고요하고 사려 깊어질 것이다. 속인들에겐 뻔뻔해 보일지 모르지만 알랑거리지 않을 것이며, 현자의 질책을 살 어떤 행동도 삼갈 것이다. 만약 이것을 실천할 수 없다면 나는 출가수행자가 절대로 되지 않으리라.”

    이것은 남방권 스님들이 늘 독송하는 ‘필수 자비경’에 나오는 말씀을 근거로 추구하는 여여심의 원칙인데, 그는 출가승은 아니지만 이 원칙을 철저히 지켜내려 애쓰고 있다. 그것도 낯선 나라, 모국에서 11시간을 날아와야 하는 지구 반대편의 도시 한 모퉁이에 열여덟 평짜리 선방을 하나 만들어놓고 쿡 찌르면 눈물이 주르륵 흐를 듯한 선량하고 겁먹은 눈으로 뜨겁고도 아프게!

    가족 내 ‘종교전쟁’

    남들은 세상과 타협하며 서서히 포기하고 늙어갈 마흔 중반에 진리를 찾으려고 저토록 맹렬정진하는 여여심은 남들과는 썩 다른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여심이 태어날 무렵은 경성약전을 나온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직후였지만, 살림은 아직 넉넉했다. 집에 기도방이 있었고 거기서 기도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다.

    “어머니는 산 기도를 가면 100일 동안 집을 떠나 있곤 했어요. 아버지는 바깥일이 잘 안 되는 게 어머니 때문이라며 많이 구박했고 그러니 불화가 있었죠. 어머니에게 영계와 전생에 관한 얘기를 늘 들었어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갑자기 창문이 깨지면서 시커먼 장군 셋이 집 안으로 들어와 당시 습관적으로 주사(酒邪)를 부리는 아버지를 향해 단도를 겨누더래요. 물론 엄마 눈에만 보이는 일이었죠.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기도만 했는데 나중에 보니 글쎄 아버지가 바지에 똥을 싸셨더래요. 그 이후 아버지는 많이 순해지셨어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니 저절로 영성과 신비를 믿게 됐죠.”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여여심의 말투는 독특하다. 자신에게 뇌이듯 천천히 고요하게 말한다.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 그 충격으로 어머니가 믿던 천도교를 버리고 불교를 선택했어요. 물론 그 후 각종 종교를 섭렵하며 방황하는 과정을 거쳤죠. 그토록 헌신적으로 기도하며 고생한 어머니를 그렇게 죽게 내버려둔 그런 신은 나에겐 전혀 고맙거나 필요하지 않은 존재였어요. 내 일곱 형제는 한동안 종교 없이 각자 외로움 속에서 뿔뿔이 방황하다가 나중에 종교를 가졌어요. 미국 사는 언니들은 가톨릭을, 한국 사는 오빠들은 기독교를 선택했죠.”

    종교에 얽힌 가족간 갈등이 여여심네 집에도 총천연색으로 연출됐던 모양이다.

    “나보다 먼저 불교서적을 접했고, 또 그 서적들을 자신의 책꽂이에 꽂아놓아 나를 자연스럽게 불교로 이끈 장본인인 큰오빠는 군의관으로 타지에서 몇 년 지내는 동안 외로움을 못 이겨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죠. 그 후 큰오빠는 웬만한 목사님은 놀라 자빠질 정도로 서재에 하나 가득 성경주석서를 꽂아놓고 성경을 연구했어요.”

    ‘~쟁이’와 ‘~교인’

    여여심은 어떤 종교의 이름으로 온갖 무례를 자행하고 자타를 미망으로 몰아넣으며 괴롭히는 사람을 일러 ‘~쟁이’라 부르고, 진정으로 그 종교 교주의 뜻을 이해하고 믿는 이를 ‘~교인’이라고 달리 부른다. 성경주석서도 주석서려니와 오빠의 상식을 믿었기에 여여심은 오빠마저 ‘~쟁이의 아류’가 될 줄은 짐작도 못했다.

    “기독교에 깊이 들어간 오빠는 불교에 심취해 불경 책까지 쓰는 막내동생이 걱정되어 당신이 다니는 교회 목사에게 ‘석가모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대요. 그랬더니 목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에~ 말하자면 사탄이지요’ 하더래요. 오빠가 그 말을 내게 전하며 약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때 정말 놀랐어요. 그러나 화가 나기보다는 웃음이 나오데요. 그 후 오빠는 더 이상 사탄 운운하지는 않았지만, ‘영적으로 파장이 다르니 절대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죠.”

    이런 가운데도 그는 오빠와의 토론에서 시종일관 굽히지 않고 예수님은 인류의 영적 스승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자세를 취했고, ‘종교의 본질은 같다’는 주장을 펴나갔다. 녹야원을 짓기 전 불상을 가지러 한국에 간 적이 있다. 그때 형제들 중 언니 하나 빼곤 만날 수가 없었다.

    “내가 우상을 가지러 온 ‘사탄’이라 두려워서 못 만난다고들 했어요. 기독교의 특성상 그들의 내면에 그런 종류의 공포심이 생겨날 수도 있음을 이해하고 있던 터라 뭐 큰 충격은 없었어요. 다행히 최근 큰오빠가 당시 당신이 나를 안 만난 것은 잘못이었다고 사과를 하셨어요.”

    이런 말을 할 때 여여심은 세상 끝에 혼자 선 듯 쓸쓸해 보인다. 종교 때문에 여여심은 가족 사이에서 외로운 것 같다. 피를 나눈 형제들말고 남편과도 그런 충돌을 반복해서 겪었다. 그러나 끝내 자신이 추구하는 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나는 원래 주관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사람이에요. 오로지 내 세계에 빠져 있느라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으니 누가 좋아하겠어요.”

    연애로 無常을 배우다

    사춘기 여여심은 노량진 근처 강남여중에 다녔다. 잔병치레가 잦은 아이였다. 중2 때부터 연애질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 어떤 남학생을 만나면 정신 못 차리고 좋아해서 막 쌍무지개가 뜨는 것 같았죠. 그런데 그게 두 번째 만나는 순간이면 다 부서져버려요. 어떤 남자를 만나도 두 달을 채 못 넘겨요. 그러면 또 딴사람을 만나고…. 하여튼 끊임없이 상대를 바꿔봐도 처음의 무지개가 부서지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요즘도 이렇게 말해요. 나는 연애를 통해 무상을 배웠노라고. 인간의 허망을 중학교 때 이미 봤노라고. 가슴속에 불덩어리가 하나 들어 있어 그 정열을 퍼부을 대상이 필요한데, 사춘기에는 그게 이성일 수밖에 없잖아요. 사람을 만나 내 속에 있는 넘치는 정열을 퍼부을라 쳐도 상대는 그것을 받아줄 준비가 안 되었거나 그만한 크기의 정열을 담을 그릇이 안 되는 거예요.

    여러 번 실망하면서 나중에는 그 대상이 스님으로 옮겨갔죠. 한때는 승복만 보면 땅바닥에 엎드리고 싶었어요. 승복은 그냥 옷이 아니라 내게는 불교적 이상을 체현해낸 빛깔이었거든요. 스님만 보이면 가슴이 마구 쾅쾅 뛰던 시절도 있었어요. 그러나 그것도 허상임을 알게 됐죠. ‘되지도 않을 사람들 앞에 엎드리는 것은 내 잘못이다’는 결론을 얻었죠. 가슴속의 불덩이는 절대적인 것을 찾기 원하는 열정이니 그걸 퍼부을 대상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됐어요.”

    열여섯 살에 꾼 꿈 하나가 지금도 생생하다. 꿈에 화살로 달을 쐈다. 그래서 딱 맞혔다. 너무 멀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활시위를 핑 당겼는데 허공에서 ‘맞혔다!’는 환호가 들렸다.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기분이 어찌나 좋던지 3일 동안 꿈의 분위기에 취해 꿈속의 기분을 곱씹었다.

    “열여섯 살에 화살로 달을 쏘는 꿈을 꿨어요. 어머니가 꿈 이야기를 듣더니 ‘너는 앞으로 마음공부를 해서 중생구제를 할 사람이다’고 하셨어요. 내가 이 길을 걷는 것도 그 꿈이 늘 마음에 있기 때문일 겁니다.”

    신비체험도 했다. 어느 날 부석사 무량수전 법당에 엎드려 있자니 과거 어느 순간 자신이 바로 여기서 법복을 입고 엎드려 있는 영상이 보였다. 경전을 줄줄 외고 다닐 때였다.

    “아함경전을 해설해 출간할 때였어요. 어느 선승이 저보고 ‘전생에 중이 아니고서는 경전을 다룰 수가 없다’고 했어요. 그러나 출가승이 되는 길은 늘 중간에서 막혔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고3 때였다. 아주 힘든 해였다. 자살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다. 아침마다 ‘오늘은 집을 나가야지’ 하면서 학교로 갔다.

    “사람이 참 우스워요. 그때 내가 반장이었는데 자살하거나 가출하려고 해도 반장이란 감투가 언제나 마음에 걸리는 거예요.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튀어나가려는 욕망을 눌러주더라고요.”

    학력고사가 끝나도 ‘중생구제’라는 말이 언제나 마음속에 맴돌았다. 외교관이 될까 동시통역사가 될까 망설이던 시절, 친구들과 법주사에 놀러갔다. 속리산에 눈이 엄청 쌓인 겨울날이었다. 눈 위로 걸어가는 어떤 스님을 보았다.

    “뻥을 좀 치자면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어요. 하얀 눈과 대비되어 나타난 회색 법복의 영상이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어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녹야원’ 주인 여여심

    여여심은 “수행보다는 친목과 정보교환이 목적인 여느 절의 포교방식에 식상했다”고 말한다.

    반야심경과 초발심자경문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아울러 한국외국어대 중국어학과에 지원했다. 동시통역사가 되어 불교와 경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학하던 해 불교학생회 서클 룸에 앉아 있다 문득 가지산 석남사로 떠날 작정이었다. 서클 룸에 있던 한 경상도 남학생이 옥편과 영한사전을 넣은 짐을 대신 들고 석남사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따라 나섰다.

    “정작 짐 들고 따라오던 그 애가 나중에 중이 됐어요. 나는 그날 밤에 다시 산을 내려왔어요. 왜냐고요? 설명을 못 하겠어요. 그게 답이에요. 방에 가서 짐을 풀었더니 세상이 거꾸로 빙빙 돌아요. 도저히 있을 데가 아니다 싶어 다시 내려왔죠. 인상 좋으신 한 스님이 ‘가시게?’ 하셔서 ‘예’ 하고 얼른 나왔지요.”

    그 무렵 꿈은 흉했다. 잠만 들면 몸 위로 온통 송충이가 비 오듯 쏟아졌다.

    “차츰 송충이를 우산으로 받고 있는 꿈이 나오다가 나중에는 내가 집 안으로 들어오고 집 바깥에만 송충이가 떨어지다가 서서히 그게 안 보이기 시작하데요. 그러니 살 만해졌죠.”

    휴학계를 냈다. 오빠가 의사였으니 ‘우울신경증’이란 진단서를 첨부해 휴학할 수 있었고, 집에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그 무렵 술을 무척 마셨다. 가슴속의 불덩이는 여전히 치솟다 가라앉기를 반복했고 그 부침에 따라 불교 책도 읽고 중국어도 공부했다.

    ‘씹버러지’에서 벗어나는 길

    여여심은 뭐든 맹렬히 뿌리까지 파고드는 사람이다. 당시 그의 공부는 그저 책 몇 권 읽는 정도가 아니라 종교의 근간을 파고드는 방식이었을 것이 뻔하다. 그러다 몰래 집을 빠져 나오는 날은 길가 맥주집이나 포장마차에 앉아 하염없이 술을 마셨다. 자기를 휘두르는 주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늘 괴로웠다. 짐을 벗고 마음을 편안히 내려놓고 싶었다. 방법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복학해서는 증산교와 신선도, 그리고 기독교 쪽도 기웃댔다.

    “남들은 발가락만 담그거나 한 발만 담글 일을 난 언제나 두 발을 풍덩 담가버리죠. 그러니 몸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시간이 걸리고 괴로운 대신 확실히 맛보고 확신에 차서 돌아나올 수가 있었다. 불안은 여전했다. 누가 머리를 잡고 흔드는 듯 두통이 심했고, 이 선사 저 선사를 찾아 이 절 저 절을 배회하면서 몇 년을 보냈다. 누군가 말해줬다.

    “너에게 네 어머니의 영가가 붙어 있어.”

    어느 날 가본 흑석동의 지장사가 이상하게도 아늑하게 느껴져서 매일 거기에 갔다. 어머니 영가를 제 몸에서 떼어내기 위해 49일 동안 1000배(拜)를 하기로 작정하고 혼자 매일 절을 올렸다. 스물셋 처녀가 매일 땀을 뻘뻘 흘리며 빈 법당에서 1000배를 하는 풍경은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럽다. 여여심은 무엇에 쫓기듯 필사적으로 고행에 매달렸고, 마침내 49일이 지나자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때 여여심은 웬만한 승려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인지도 모른다.

    “대학시절 자주 가던 절에는 보살님들이 상주하고 있었어요. 초파일이 가까워질 무렵 공양방에서는 보살님 몇 분이 연등을 만들고 있었죠. 그 보살님들 가운데 덩치가 크고 호방한 여장부가 계셨는데, 말을 너무 우습게 해서 보살님들이 하루 종일 배꼽을 쥐게 만들었죠. 사용하는 단어가 상말임에도 이상하게 상말 같지 않고 우습게만 들렸는데, 이를테면 자녀를 ‘씹버러지’라고 하는 거예요. 남편이 바람둥이인데다 자식들까지 무척 속을 썩인 모양인지 그 말에 나타나는 ‘몸서리침’ ‘진저리침’이 내 설익은 눈에도 환히 보였어요.”

    그 이후 여여심은 인간이 씹버러지에서 벗어나는 길을 늘 생각했다. 그 시작은 바로 ‘오온(五蘊·불교에서 정신과 물질을 五分한 것. 色·受·想·行·識을 이름)’에 대한 진정한 염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온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괴로워하며 살지만, 오온에 진정으로 염증을 느낄 때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는 각성이었다.

    “오온은 중생을 삼계에 묶어두는 족쇄죠. 오온은 꿀 묻은 칼과 같아서 칼을 핥다가 혀를 베면 잠시 멈췄다가 다시 꿀의 단맛에 이끌려 칼을 핥는 것이 다반사예요. 그러나 이 오온의 특성을 명석하게 인식하고 염증을 느끼기만 해도 그것이 실마리가 되어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청년기에 여여심은 이미 오온에 염증을 느낄 줄 알았다. 최소한 수다원(깨달음의 첫 단계)이 되겠다는 발원을 세웠다. 대학교 4학년 겨울방학 때는 매일 3000배를 하면서 자신을 닦았다.

    “기도 중에 독성각에 모셔놓은, 핀돌라라는 머리와 눈썹이 허연 아라한이 갑자기 클로즈업되며 내 앞으로 확 다가와요. 후불탱화에 등장하는 노인인데, 요즘도 난 수행이 잘 안 되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 핀돌라 존자를 염해요. 며칠을 부르면 문제가 해결되는 경험도 여러 번 했죠.”

    그렇게 절 근처를 뱅뱅 맴돌며 절하고 기도하고 경전을 암송하며 20대를 보냈지만 정작 출가하지는 못했다. 늘 출가를 목전에 두고 살았다. 졸업을 앞두고 다시 대학원에 갈까, 출가를 할까 어느 쪽에 패를 던질지 고민하며 1000배를 했다. 뇌리로 들려온 대답은 출가가 아니라 대학원이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진학했다. 종교철학을 공부할 작정이었으나 곡절 끝에 마르크시즘을 공부했다. 거기에서, 서울대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한 한 남자를 만나 모처럼 다시 연애를 시작했다.

    “악수(惡手)는 늘 불교였다.”

    “내가 그때껏 만나본 남자 중에서 가장 똑똑했어요. 서로 자꾸 부딪치는 면이 있었지만 내가 그를 너무 좋아했으니까 자신을 억눌러 그에게 맞췄지요.”

    3년 연애 끝에 둘은 결혼했다. 석사를 마친 후 여여심은 대한불교신문의 연구직 기자가 되고 남편은 박사과정에 등록해 둘에게는 일상의 행복이 찾아오는 듯했다.

    “악수(惡手)는 늘 불교였어요. 절에만 가면 남편이 이방인처럼 보이는 겁니다. 13평짜리 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원고 쓴다는 핑계로 혼자 옆방에 가서 잠들곤 했어요.”

    허랑하고 담담하게 맨 밑바닥까지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내 보이지만 어쩔 수 없이 우울한 이야기였다. 여여심 부부는 둘 다 탐진치를 걷어내 니르바나를 얻는다는 마음공부를 하면서도 정작 부부의 불화를 자력으로 조정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을 무렵 이민을 궁리했다. 상처 많은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뉴질랜드라는 나라, 크라이스트처치에 관한 정보를 모았고 착착 준비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히는, 집집마다 정원에 꽃을 가꾸고 잔디 손질하는 것이 가장 큰 이슈라는 남방의 도시에 가서 살고 싶었다. 오랜 공부가 끝나고 남편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취직했지만 계획대로 떠났다. 훌쩍 미련 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내 땅에 큰 애정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민 첫해는 매일 향수병에 시달렸다. 바닷가에 나가 이 물이 한국에 닿겠지 하면서 가슴속으로 울었다. 새벽에 잠자리에서 깰 때면 인근 공항에서 나는 비행기 소리만 들어도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마다 돌아가야지 하면서 잠이 깼다. 그 무렵 임신을 했다. 입덧과 향수병이 겹쳤다.

    이 무렵 여여심을 구원한 것은 부처가 아니었다. 명상수행도 아니었다. 것은 바로 이곳 뉴질랜드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외경과 친절이었다. 병원에 가면 의사와 간호사들은 배부른 여여심을 부처 대하듯 소중하게 대접해줬다. 한국 병원에서는 어디서도 받을 수 없는 대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데요?”

    산부인과에서 겪은 모멸감과 수치심을 잊지 못하는 내가 하도 궁금해서 물어봤다.

    “얼마나 내 몸을 소중하게 다루는지 나와 아이가 왕비와 왕자라도 된 기분이었어요. 의사는 자기가 하는 일을 일일이 설명해줘요. 지금 네 몸 속에 뭐를 좀 넣을 건데 ‘당신이 넣을래요, 내가 넣을까요’를 다 물어봐요. 피가 묻으면 경건한 표정으로 꿇어앉아서 성스러운 것을 만진다는 듯 조심스럽게 닦아줘요. 병원만 가면 기분이 좋아졌어요. 이 나라가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죠.”

    여여심은 내게 나중에 전화로 말했다.

    “애들 아빠는 훌륭한 점이 많은 사람이에요. 일단 아이를 가지면 우리는 한번도 동침하지 않았어요. 남자에겐 그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도 아이를 위해서 꼭 지켜줬어요.”

    그렇게 두 아이를 낳으면서 뉴질랜드에 정착했다. 여전히 한국에서 보내오는 불교 관련 일을 했다. 전에 불교신문에 연재하던 ‘아함경 해설’은 10권으로 묶여 이미 출판됐고 ‘법화경’도 번역출간됐는데, ‘정선 아함경’은 뉴질랜드에 와서 번역했다. 오클랜드 불교인회에 연결해 남섬 최초의 한국인 불교단체를 만들어 묘심사라는 이곳 최초의 절이 생길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 이 불교단체에서 여여심이 맡은 직책은 포교부장이었다. 모임에 오는 사람들에게 불경을 강의했다. 그러나 출가승이 아니라서 서러움이 컸다.

    “중만 나타나면 난 찬밥신세가 되는 거예요. 또 ‘불교’ 혹은 ‘사찰’에 대한 인식과 접근 의도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일을 추진하다 보니 정말 갈수록 스타일만 구겨졌어요. 내 뜻을 펼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싶었어요.”

    여전히 가슴속에 불덩이는 활활 타고 있었다.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에게 집중할 수 없을 때도 많았다. 일상이 시들하고 무상했다. 남편은 때로 “당신은 절로 갈 사람이니 그만 여기서 떠나라”고 말했다. 아이를 두고 떠날 수 없는 어미에게 그 말은 잔인했다. 출가를 감행할 수도, 그렇다고 깨달음에 대한 끌림을 끊어버릴 수도 없는 곤혹이 여여심을 여전히 괴롭혔다.

    여여심이 스스로 스승으로 모신 분은 위빠사나 명상수행을 중흥시킨 미얀마의 마하시 스님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간단히 말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신체적 현상의 성격을 의식으로 명료하게 이해하고 알아차리려는 노력을 말한다.

    여여심을 알기 위해 위빠사나 명상에 관한 자료를 여러 편 읽어봤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위빠사나 명상은 구체적인 참선의 테크닉인 듯하다. 막연하게 화두를 들고 면벽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심신과 주변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하나씩 놓치지 않고 주시하는 동안 차츰 이 모든 현상이 ‘무상’이고 ‘무아’임을 걸 깨닫게 된다. 이전의 모든 부처 아라한 성자들도 바로 이 길을 통해 열반을 체득했다고 여여심은 말했다.

    김해 다보선원의 붓다빠라 스님도 윤회관은 좀 다르지만 여여심의 스승이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할 때마다 그것을 일일이 관찰하고 주시하는 일이 처음에는 어렵지만, 계속하다 보면 차츰 더 많은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수행자가 계속 주시해 나가면 일어난 모든 것은 잠시 후에 반드시 사라짐을 스스로 보게 된다. 모든 현상이 덧음을, 이 세상에 실체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진정한 깨달음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형상, 감각, 생각, 의도, 의식은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괴로운 것이고 괴로운 것은 실체적 자아가 아니며 실체적 자아가 아니라면 내 것 또한 아니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는 것이라 한다. 거룩한 제자들이여, 이와 같이 보면 형상, 감각, 생각, 의도, 의식을 혐오하게 되고, 혐오하는 까닭에 기쁘게 여기지 않게 되며, 기쁘게 여기지 않는 까닭에 해탈하게 된다. 해탈하면 진실한 지혜가 생겨 ‘다시 태어나는 일은 끝났고 청정한 수행은 완성되었으며 해야 할 것은 다 행했고 더 이상 윤회하는 상태에 이르지 않게 되었음’을 스스로 안다. [잡아함경 9경]

    여여심은 멈추지 않고 근본불교를 추구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순간에도 그걸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

    “삶이 고통스러우니까 어찌됐건 고통을 끊는 방법을 찾고 싶었어요. 수행보다는 친목 위주, 정보교환이 목적인 일반 절의 포교방식에 난 아주 식상해 있었죠. 아무리 작아도 내 뜻을 펼칠 공간을 내 돈으로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간절한 소망은 꼭 이루어진다. 여여심이 품은 소망은 이민 온 지 5년 만에 현실이 된다. 어느 스님이 구도 정진하는 여여심을 갸륵히 여겨 신도들이 푼푼이 모은 돈을 기꺼이 내놓았다. 자금이 넉넉하지 않으니 살림집의 마당 귀퉁이에 집을 지었다. ‘녹야원’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20대의 어느 날 커다랗게 다가왔던 핀돌라 존자의 사진을 걸었고, 뒤늦게 좋아하게 된 마하시 스님의 사진도 걸었다.

    자기만의 절, ‘녹야원’

    그는 기어이 혼자 힘으로 근본불교의 도량을 세운 것이다. 출가승이 아니라도 상관없었고, 누가 손가락질해도 개의치 않았다. 요즘은 모든 것을 ‘자율체제’로 돌려 명상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와 법당에 앉았다 돌아간다. 여여심은 그들에게 아무런 강제도 하지 않았다. 위빠사나 수행이란 철저히 혼자의 힘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일이고, 그 방법은 프린트된 자료를 읽어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정말로 마음공부를 원하는 사람은 배고픈 이가 밥을 찾듯 그렇게 스스로 찾을 겁니다. 요즘은 ‘저 자신의 공부’와 ‘자식들 잘 돌보기’ 그리고 ‘법우님들의 정진’에만 관심을 쏟아요.”

    그리고 여여심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대신 수행일기를 썼다. 수행하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녹야원 홈페이지에 올려 명상 수련하는 이들에게 지침을 준다.

    “괴로운 감각(목 갑갑증, 어지럼증, 어깨통, 두통)이 한번 강타해서 두려움과 우울증 속에서 시들버들하고 있으면 마치 강진(强震) 후의 여진(餘震)처럼 고통도 그렇게 약해진다. 첫 번째 강타 이후 서서히 약해지다가 아주 사라지더니 지난 토요일에 다시 한 번 강타. 그리고 다시 서서히 여진처럼 약해진다. 그런대로 이런 가운데 흐름을 잘 타야 하리라. 몸이 피곤하면 강진이 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또 다른 원인은 소리수행이 내게 안 맞는 것 같아 행선시 소리내어 명칭 붙이기를 중단하고 예전처럼 속으로 하기로 했다.”

    “행선을 하며 목 갑갑증이 심해지거나 어깨통이 심해지는 듯하면 그곳에 의식을 보내며 ‘불쾌감, 불쾌감’ 하고 명칭을 붙여주면 좀 완화된다. 그리고 평상시의 염불도 역시 속으로 하되 마음을 혀끝에 두고 있다. 이건 좀 섣부른 판단이 될 수도 있겠으나, 소리수행은 이지(理智)가 높은 사람에겐 금방 한계를 안겨주는 것 같다.”

    “수행자는 귀머거리처럼 행동해야 한다. 보통사람은 소리를 듣는 순간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려서 그쪽을 본다. 혹은 그에게 말을 한 사람을 향하여 대답하려고 고개를 돌린다. 그는 침착한 태도로 행동하지 않는다. 반면 귀먹은 사람은 어떠한 소리나 말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들리지 않으니까. 소리를 들으면 즉시 ‘들음, 들음’ 하면서 알아차리고 배로 돌아와야 한다.

    귀머거리가 되는 방법을 터득했다. 전화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사탄의 전갈을 귀에 찔러주는 사람이 있으면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거나 문을 열고 조용히 퇴장시키는 것이다. 카펫 바닥에 갖가지 영상이 보이는 것이 가끔은 섬뜩할 정도인데, 그것에 대해 사유하거나 분석하지 않는다.”

    여여심의 친절하고 솔직하고 통찰력 가득한 글들을 읽자면 위빠사나 명상수행으로 열반에 이르는 길이 그리 아득하게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구체적인 테크닉을 익혀 맹렬히 매달리기만 하면 우리는 모두 부처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여심은 지금 길 위에 있다. 아직은 혼돈과 고뇌의 길이다. 남편과는 얼마 전에 기어이 헤어졌다. 남편은 집을 나갔지만 근본원인은 자신에게 있었다고 여여심은 기꺼이 항복을 선언한다. 성냄도 미움도 털어버리리라 작심했고 요즘은 어느 정도 평온에 도달했다.

    “남편이 집을 나가면서 혼자 살 수 있겠냐고 물었어요. 난 당신에게 관심있는 게 아니라 당신 행복에 관심있으니 상관없다고 말했어요.”

    씩씩한 대답과는 달리 여여심은 말하면서 눈에 눈물을 비쳤다. 붉은 옷 위로 눈물이 번졌지만 결코 허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해탈에 이르기를, 모든 고통을 벗고 진정한 대자유에 이르기를 나는 여여심의 손을 꽉 잡으면서 빌었다.

    “수행 않는 자와 상종 않겠소”

    “인간은 살덩어리, 감각덩어리, 생각덩어리, 의지덩어리, 분별작용덩어리. 이 덩어리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다 호르몬 천하이기 때문에 제어하고 정화하지 않으면 안 되오. 앞으로 난 수행자연(修行者然) 하며 수행하는 체만 하고 전심전력하지 않는 껍데기 중들은 상대 안 할라요. 왜냐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가면서 각종 호르몬의 양상에 따라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 수행 않는 인간의 심신(心身)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요소들의 지배를 거스를 능력은 차치하고 거스르고자 하는 노력조차 없으면서 몸에 가사를 걸치고 성스러운 체하는 그 모습이야말로 기실은 상카(Sangha·승려들의 규범)를 기초부터 흔드는 숨은 악성 바이러스임을 잘 알기 때문이라오. 앞으로 난 전혀 수행 않는 사람들과는 상종 안 할라요.”

    이런 시니컬한 글 속에 여여심의 맹렬정진의 다짐이 들어 있다. 크라이스트처치의 녹야원에서 제가 낳은 아이 둘과 함께 근본불교의 좌선, 행선, 생활선을 실천하며 승속을 벗어나 살고 있는 한 여자, 여여심의 법명은 담마디나, 본명은 이연숙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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