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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方外之士 (16)

‘스피커 소믈리에’ 일명 스님

“소리 속에 존재가 있고, 자신이 있고, 내면의 진심이 있나니…”

  • 글: 조용헌 江湖東洋學연구소 소장,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스피커 소믈리에’ 일명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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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음(音)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지금 이렇게 두 귀에 뚜렷하게 들리지 않는가. ‘이렇게 들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화두로 삼아 참구(參究)해볼 일이다.”

-그렇다면 불교사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소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소리는 각기 다른 것 같지만 결국 하나의 소리로 귀결된다. 결국에는 차별이 없는 것이다. 서양음악은 분석이 강하다. ‘도레미파솔라시도’와 같은 음계의 분류를 중시한다. 서양음악은 모든 소리가 음계로 분류되어 표시된다. 반면 불교를 비롯한 동양음악은 음계의 분류를 넘어선 소리를 추구한다. 가령 범종소리를 들어보라. ‘우웅~’ 소리 하나로 귀결된다. 종소리는 하나다. 종소리에는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없지 않은가.”

소리에 대한 일명 스님의 말을 듣고 보니 공감이 됐다. 서양음악이 분석을 통한 음의 다기화(多岐化)를 포착하려 했다면 동양음악은 직관을 통한 통합화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화엄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관계라고나 할까. 이렇게 놓고 보면 다(多)는 서양음악, 일(一)은 동양음악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와 일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상즉(相卽)의 관계로 맞물려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종소리가 하나라고 한다면 그 한소리 너머에는 어떤 소리가 있는가. 궁극의 소리는 무엇인가.

“아주 좋은 질문이다. 바로 이 대목부터 수행에 들어간다. 화두선(話頭禪) 식으로 표현하면 ‘종소리가 일어나는 곳이 어디냐?’ 하는 화두가 성립한다.”

-어째서 이 물음이 수행에 해당하는가.

“소리를 즐기는 것이 음악이다. 음악은 존재를 소리로 표현한 것이다. 존재 그 자체는 빛이고 기쁨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 그 자체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다. 존재는 불성(佛性)이고 신성(神性)인데, 어찌 슬플 수가 있겠는가. 근원적인 존재의 기쁨을 기쁨으로 표현하는 전달매체가 바로 소리다. 존재와 기쁨의 중간에 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누구나 기쁨을 느낀다. 음악이라는 소리를 통해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기쁨을 느끼다 보면 그 기쁨의 근원으로 소급해 올라가게 된다. 즉 소리라고 하는 줄을 따라 올라가면 자기 존재로 들어올 수 있다. 이게 바로 수행이다.”

-판소리에서는 ‘득음(得音)’을 이야기한다. 도대체 ‘소리를 얻었다’는 것은 어떤 경지를 말하나.

“명창이 되려면 득음의 경지에 들어서야 한다. 득음의 경지를 체득하기 위해서 폭포 근처에서 연습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자기 소리가 더 커서 폭포 소리를 제압하는 것을 득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잡소리를 제거하고 자기 소리만 듣는 경지가 바로 득음이다. 즉 폭포 소리가 안 들리고 자기 소리만 듣는 것이다. 자기 소리만 듣는다는 것은 자기 내면의 미세한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면 자기와 소리가 서로 혼연일체가 된다. 자기가 곧 소리다. 자기는 없어지고 소리만 남는다. 득음을 통해서 아상(我相·ego)을 털어내게 된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소프라노 조수미씨가 ‘많은 사람 속에서도 자기 소리만 들린다’고 말한 것을 인상 깊게 들었다. 조수미씨도 득음을 한 것 같다.”

-한번 득음의 경지에 이르면 영원히 그 경지가 유지되는가.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하듯 득음 이후에도 수행이 필요한 가.

“필요하다. 명창 임방울도 득음을 한 상태에서 세상에 나와 다양한 활동을 하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흐트러진 것 같다. 흐트러지면 다시 산에 들어가서 폐관(閉關)하고 정진해야 한다. 다시 추스려야 하는 것이다. 임방울도 다시 산에 들어가 공부한 것으로 안다.”

소리를 관(觀)한다는 것은?

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잠깐 필자의 전공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필자는 불교의 ‘능엄경(楞嚴經)’을 연구해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일반적으로 능엄경은 어려운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깜깜 기신(起信)이요, 차돌 능엄(楞嚴)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기신론(起信論)’은 논리 전개가 복잡해 한번 들어가면 깜깜한 미로에 빠진 것 같고, 능엄경은 차돌처럼 단단해 도대체 이빨로 깨물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능엄경의 핵심은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법이다. ‘이근(耳根)’이란 귀를 가리킨다. 귀로 소리에 집중하는 수행을 하면 크게 통한다(圓通)고 설파한다. ‘법화경’의 ‘법사공덕품’에 보면 여섯 감각기관 가운데 이근이 가장 수승(殊勝)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안근(眼根)은 앞에 있는 사물은 볼 수 있지만 뒤의 사물은 볼 수 없다. 하지만 이근은 뒤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전후좌우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눈보다 귀를 사용하는 것이 전천후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능엄경에서는 이근원통의 수행법이 여러 수행법 중 가장 우수하다고 한다. 소리에 집중하는 이 방법이 바로 관음보살의 수행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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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용헌 江湖東洋學연구소 소장,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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