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변화를 부정하지 않는 정통주의자’ 교황 베네딕토 16세

“믿음 없는 자들은 개혁도, 쇄신도 할 수 없다!”

  • 글: 정종휴 전남대 법대 학장 jeongjh@chonnam.ac.kr

    입력2005-05-25 15: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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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리를 엄격하게 해석하고, 진보 진영의 교회개혁 의견에 반대해온 대표적인 보수 인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베네딕토 16세와 14년간 교분을 이어오며 그의 저서 세 권을 번역한 바 있는 정종휴 전남대 법대 학장은 “새 교황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며 “그는 변화를 부정하지 않는 정통주의자”라고 밝혔다.
    ‘변화를 부정하지 않는 정통주의자’ 교황 베네딕토 16세
    ‘내성적인 일벌레’ ‘위엄 있는 풍모를 지닌 공격적인 독일인, 십자가를 칼처럼 차고 다니는 수도자’ ‘바티칸 근처의 조촐한 거처에서 검소하게 살고 있는 친근한 용모의 소박한 바바리안’ ‘거룩한 교회 거두가 입는 화려한 복장을 한 번도 벗어본 적 없고 황금 십자가상을 한 번도 가슴에서 떼어낸 적이 없는 철갑 추기경’….

    지난 4월20일 교황으로 선출된 베네딕토 16세에 대한 평가의 일부다. 모두 사실이다. ‘신앙교리성’은 가톨릭 신앙의 심화를 촉진하고 순수성을 수호하는 교황청 기관이다.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24년을 지냈다.

    베네딕토 16세, 즉 요셉 라칭거는 1927년 4월16일 독일 오버 바이에른 마르크틀 암 인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찰관이었다. 부모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지라 그는 태어난 지 네 시간 만에 세례를 받았다. 아주 빈곤하진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절약하면서 수수하게 살아야 했다. 그는 “부유함 속에서 찾을 수 없는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다. 가족들은 아주 작은 일에도 기뻐할 수 있었다. 서로를 위하여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고 회상했다.

    그의 집안에서 종교는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식사 때마다 기도했고 학교 수업에 지장이 없는 한 날마다 미사에 참례했다. 기나긴 묵주기도도 가족과 함께 바쳤다. 집안은 절대적인 반(反)나치 분위기였지만, 라칭거는 신학교 재학 중 히틀러 청년단에 거의 강제로 가입했다. 청년단에 출석하면 신학교의 학비가 감면됐기 때문이다.

    6년 동안 뮌헨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라칭거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에 매료된다. 신앙의 역사라는 거대한 세계에 돌입하는 것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잠시 일선 본당에서 사목 활동을 맡기도 했으나 이내 신학자의 길로 들어선다. 보나벤투라의 역사신학에 관심을 가진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기울었다.



    그는 뮌헨, 튀빙겐, 레겐스부르크의 여러 대학에서 신학교수로 이름을 날렸다. 1962년부터 3년에 걸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 중 그는 프링스 추기경의 추천으로 전문위원으로 활약했다. 1977년에는 대주교 서품을 받으면서 뮌헨 프라이징 대교구장을 맡았다. ‘진리의 협조자’가 사목 표어였다. 그후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를 추기경에,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신앙교리성 장관에 임명했다. 또한 그는 국제 성서위원회와 국제 신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추기경단 수석 추기경으로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 절차와 ‘콘클라베’를 주도했다.

    필자가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처음 만난 것은 1991년 6월로 라칭거 추기경 사제 서품 40주년 기념 미사에서였다. 독일 뮌헨 중심가에 자리잡은 성 미카엘 대성당에서 미사가 끝나자 추기경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한국에서 온 법학교수인데 추기경의 대담집 ‘신앙의 현재상황(Zur Lage des Glaubens)’을 번역해도 되겠느냐, 한국어판 서문을 써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추기경은 “편지를 써 로마로 보내라”고 했다.

    당시 필자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 초청으로 독일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법학을 공부하러 간 독일에서 제일 먼저 구입한 책이 바로 ‘신앙의 현재상황’이다. 이 책은 1984년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을 맡은 지 2년 후 비토리오 메소리라는 저명한 이탈리아 저널리스트와 가진 대담집으로 ‘라칭거 리포트(The Ratzinger Report)’라는 영역본으로 더 유명하다. 대담에서 추기경은 잃어버린 것의 회복을 주장했고 1960년대 후반의 가톨릭 문화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을 보였다. 이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이 가톨릭 내부에서 격렬하게 불거졌다.

    ‘변화를 부정하지 않는 정통주의자’ 교황 베네딕토 16세

    정종휴 교수가 1999년 8월 독일 레겐스부르크 근처 말렌도르프 수도원에서 현 교황과 세 번째로 만나 찍은 사진.

    필자는 로마로 편지를 보냈으나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 이듬해 다른 일로 로마에 갔다가 라칭거 추기경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했다. 미사가 끝난 후 추기경에게 “말씀하신 대로 편지를 보냈는데, 비서실에서 편지를 아직 전해 드리지 못한 것 같다”고 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편지는 잘 받았지만, 식중독으로 한 달 남짓 고생하는 바람에 답장이 많이 밀렸다”고 답했다. 그 자리에서 한국어판 번역 허가와 한국 독자들을 위한 인사말을 써주겠다는 약속도 얻어냈다.

    그후 번역이 거의 마무리됐다고 편지를 보내자 추기경은 약속대로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을 보내왔다. 추기경은 자신의 첫 번째 대담집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일부를 인용한다.

    “주된 걸림돌은 회복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이 현대의 지배적인 역사철학에서 부정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역사철학의 근본사상을 형성하는 것은 진보에 대한 신앙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것을 더 나은 것으로 여기고 과거의 것은 불충분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뿐 아니라 많은 이에게 혁명이 더 나은 세계에 대한 가장 거룩한 희망을 나타내는, 일종의 성사적인 용어가 됐습니다. 회복은 옛것을 다시 세우려는 것으로 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주 쓰는 ‘반동’이라는 개념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저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파괴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지라도 복원은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참된 쇄신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 이 책의 내용이 비관적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진보 신앙은 낙관주의가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역사의 발전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척도로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라는 범주는 적절치 않다고 밝혀왔습니다. 진보사관으로 역사를 진단한다 할지라도 모든 구체적 발전 형태를 낙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사회건 저마다의 가치 기준이 있습니다. 교회의 가치 기준은 믿음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발전은 믿음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20년 동안 교회 안에서 이뤄진 발전의 구체적인 과정을 사회학적, 비판적으로 평가했습니다. 흡인력과 생명력의 상실이 너무도 명백했고, 외적인 활력의 상실이 교회의 내적인 힘을 등한시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태만도 가져왔습니다.”

    미지의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정다운 인사말 수준이 아니라 대담집을 둘러싼 세계적 논란에 대한 정면 응수였다. 이 글은 훗날 독일의 한 신학잡지에 ‘신앙의 현재상황-그후 10년’이란 제목으로 실렸다.

    反가톨릭주의자와의 대담

    1996년 추기경의 또 다른 대담집 ‘이 땅의 소금(Salz der Erde)-삼천년기의 문턱에서 본 그리스도교와 가톨릭교회’가 출간됐다. ‘신앙의 현재상황’이 이탈리아어 원본을 추기경의 제자가 독어로 옮긴 것인 데 비해 ‘이 땅의 소금’은 페터 제발트라는 저널리스트와 직접 독어로 대화를 나눈 것이다. ‘신앙의 현재상황’은 추기경의 생각인지 대담자의 생각인지 분명하지 않은 곳이 있었고 주제가 그다지 포괄적이지 못했다. 게다가 대담자가 추기경을 잘 이해하는 ‘보수주의자’였다.

    하지만 ‘이 땅의 소금’은 달랐다. 우선 대담자 페터 제발트가 유별난 사람이다. 1954년 보쿰에서 태어나 파사우에서 자란 제발트는 소년 시절 신앙을 잃고 늘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전쟁을 입에 올린 극렬 공산주의자였다. 고등학생 시절 이미 좌익 신문을 발행했던 그가 독일 지성을 대변하는 시사 주간지 ‘슈피겔’ 에 기자로 입사한 것은 반종교적 관점에 바탕을 둔 날카로운 분석 능력과 문장력 때문이었다. 그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때면 반드시 가톨릭교회를 공격하는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더욱 효과적으로 교회와 추기경에 대한 비판 기사를 쓰려 했고, 이를 위해 추기경의 저술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건 등 교회 문헌을 연구했다.

    ‘변화를 부정하지 않는 정통주의자’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어린 시절.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어릴 적부터 신부나 신학자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라칭거 추기경에게 장시간의 대담 신청을 했고 마침내 ‘좋다’는 전갈을 받았다. 대담을 진행하면서 추기경은 그의 과거나 신분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떤 질문도 미리 알려고 하지 않았고 무엇을 삭제하라든가 첨가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만남의 분위기는 진지했지만 라칭거 추기경은 마치 대학생과 대화하듯 가벼운 자세로 임했다. 반교회적 저널리스트와 대담하면서 추기경이 내세운 유일한 요구는 출판하기 전에 원고를 한 번 읽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땅의 소금’에서는 대담자의 질문과 추기경의 답변이 확연히 구분돼 있다. 주제는 교회 안의 대립, 세속에서 본 교회, 교회와 사회,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제정치에 대한 것이었다. 궁지에 몰린 로마, 교회 쇠퇴의 원인, 교회의 오류, 비판의 쟁점들, 무류성의 도그마, 사제 독신제도, 여성 사제 문제, 피임, 낙태, 이혼과 재혼, 교회 일치와 통일성, 이슬람과 유대교의 문제를 도마에 올려놓았다.

    필자는 이 책을 미국에서 보았다. 마침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연구하던 중이었다. 1999년 여름, 필자는 다시 두 달간 독일을 방문했다. 체류비를 지원해 준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에는 법학 관련 주제 외에 ‘이 땅의 소금’을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 독일을 찾았다고 신청서류에 명시했다. 7년 만에 다시 뮌헨에 온 것이다.

    모차르트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독일 체류 중 필자는 8월1∼5일에 추기경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신앙교리성 장관 비서실에 전했다. 하지만 그때는 추기경의 휴가 기간이었다. 비서실에서는 추기경의 형 게오르그 라칭거 몬시뇰에게 연락하라며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그에게 나의 숙소 전화번호를 알려줬는데, 8월4일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8월5일 저녁 숙소로 돌아오니 추기경이 세 번이나 전화를 해서 다음날 아침 미사 뒤에 만나자고 전해왔다.

    세 번째 만남이자 가장 개인적인 만남이었다. 화제는 주로 교회 일치, 공의회 정신을 빙자한 신앙, 전례의 붕괴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기차 시간에 쫓겨 요즘도 모차르트 음악을 자주 듣는지, 휴가 중에는 어떻게 소일하는지 같은 사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못했다.

    새 교황은 열성적인 모차르트 팬이다. 아마추어 수준을 넘는 피아니스트기도 하다. 모차르트 외에도 바흐, 팔레스트리나, 베토벤, 브람스를 좋아한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 이사를 했을 때도 피아노를 가져갔다고 한다.

    교황이 얼마나 명석한 신학자인지를 보여주는 유머가 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 신학자는 카를 라너, 한스 큉 그리고 요셉 라칭거다. 저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유명한 카를 라너는 예수회 출신으로 오늘날 현대 신학은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신교적인 사상으로 교황청에서 가톨릭 신학교수 자격을 박탈당한 한스 큉은 여전히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지지하고 있다. 셋 중 나이가 가장 아래인 라칭거는 제265대 교황이다.

    세 신학자가 한날 한시에 죽어 천당의 수문장 베드로 사도의 심문을 받게 됐다. 나이순으로 카를 라너가 먼저 베드로 사도 방에 들어갔다. 2시간 뒤에 라너가 나오면서 “아이고, 내가 여태까지 하느님에 대해 이렇게 모르고 있었다니…”하고 말했다. 다음은 한스 큉 차례였다. 베드로 사도 방에 들어간 지 4시간. 베드로의 심문에 녹초가 된 한스 큉이 나오면서 “아이고, 내가 여태까지 하느님에 대해 이렇게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하며 한탄했다.

    드디어 요셉 라칭거가 베드로 사도를 만나러 들어갔다. 6시간이 지나도 라칭거는 나오지 않았다. 8시간이 지나자 문이 열렸고 라칭거가 아닌 베드로 사도가 나왔다. 베드로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아이고, 내가 여태까지 하느님에 대해 이렇게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했다.

    교황의 형은 교황의 장점으로 명석함을 들고 단점은 건망증이라고 했다. 독일의 한 추기경은 40여 권의 저서를 낸 라칭거를 ‘신학의 모차르트’라 일컬었다.

    그후 베네딕토 16세는 ‘이 땅의 소금’ 한국어판 독자들을 위한 서문을 보내줬다.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 적은 없으나 그 내용을 보면 한국사회와 한국 교회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대단히 깊음을 알 수 있다.

    ‘변화를 부정하지 않는 정통주의자’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황 즉위 미사에 참례한 김수환 추기경이 베네딕토 16세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의 선교가 아니라 자생적으로 형성된 교회입니다. 또 수많은 순교 성인을 배출한 자랑스러운 신앙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독재 치하에서는 인권과 자유의 보루이지 않았습니까. 현재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화의 과정에 있습니다. 또 한국사회는 현대적 세속주의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 세속주의, 남쪽에서는 기술지상주의, 시장원리라는 세속주의입니다.

    교회는 정치체제에 봉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게 고안된 정치적 이상향이라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정치가 절대적이라는 생각에 반대합니다. 정치는 인간 실존의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교회가 어떤 정치체제에도 봉사하지 않고 스스로를 정치 권력화하려고 애쓰지 않는 가운데 오로지 하느님의 진리를 증언하고 진리에 이르는 자유를 추구하며 때로는 순교의 길을 택하면서까지 헌신할 때에만 교회는 신뢰할 수 있게 되며 ‘이 땅의 소금’이 됩니다.”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

    필자가 새 교황에게서 받은 인상은 지혜와 겸손이다. 서양인치고는 단아한 체구지만 얼굴에서는 대신학자다운 지혜가 번뜩인다. ‘압도되지만 떨게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와 대담한 페터 제발트는 내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허영이나 교만은 전혀 없이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분이다. 스스로 교회를 위해 진정 어린 시중을 들려 했고, 자신의 입을 통해 성령의 말씀을 신자들과 함께 들일 수 있기를 충심으로 바라는 분이다.”

    교황은 추기경 시절 베네딕토 관상 수녀원을 즐겨 찾았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심장부 로사노에 있는 수도원이다. 그는 베네딕토 수도회 규칙이 잘 지켜지고 있는 것을 높게 평가했다. 이곳 수녀의 눈에 비친 교황을 보자.

    “오후에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긴 산책을 즐겨 하셨습니다. 여기를 방문하실 때는 언제나 모든 수도원 식구들과 자리를 함께하셨어요. 그분과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데, 워낙 성격이 소박하고 따뜻하면서도 명랑하고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슬쩍 꼬집는 듯 말씀하실 때는 재치와 유머가 드러나기도 했죠.”

    “교회의 어려운 일에 대해 말씀해달라고 청을 드릴 때마다 언제나 분명하게 설명하셨어요. 문제 하나하나의 핵심을 짚어내는 능력과 간결하면서도 모자람이 없게 설명하는 능력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무엇보다 부풀려 말씀하시는 일이 없었어요. 기도의 결실인 굳은 믿음과 희망이 가득했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과거엔 매우 진보적이었다가 1968년 전세계를 휩쓴 학생운동을 목격하면서 점차 보수적이 됐다고 알려져 있다. 초기의 그는 확실히 진보적인 신학자 무리에 속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콘실리움’이라는 신학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균형 잡힌 진보주의자로 평가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몇 년 후 그는 이 잡지에서 벗어난다. 어떤 일이 있어났던 것일까. 이에 대한 베네딕토 16세의 대답을 들어보자.

    “변한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분들이었다. 첫 모임부터 나는 동료들에게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하나는 우리 모임이 오만한 종파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새롭고 참된 교회인 것처럼, 그리고 진리를 독점하고 있는 대안적 교도권을 갖고 있는 듯 행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모든 논의가 개인주의적이거나 급진적인 비약을 일절 배제하고 이뤄져야 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실을 대함에 있어 가상적인 제3차 바티칸 공의회를 상정하지 말고 공의회 정신을 그대로 가진 상태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조건들이 점차 무너지더니 1973년 전환점을 맞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이 더는 가톨릭 신학의 준거점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제기되었다. 그러자 그는 곧장 임원진과 편집진에서 탈퇴했다. 이후 베네딕토 16세에게는 보수주의자라는 딱지가 붙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가톨릭 보수의 선봉장’이니 ‘정통신앙의 수호자’니 하는 칭호가 붙었다.

    베네딕토 16세는 교회의 견해를 진보와 보수로 나누는 것에 반대한다. 진보의 반대는 퇴보라고 주장한다. 진보란 좋은 것인데 왜 바꾸는 것만이 진보일까. 개혁에는 좋은 것(개선)도 있고 나쁜 것(개악)도 있지 않은가. 좋은 것을 바꿔버리는 개혁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 개혁은 아무리 다수가 원했다 해도 퇴보가 아닌가. 한편 바뀌어야 할 것을 굳게 지키는 것(보수)이라면 아무리 기득권층이 편한 옷처럼으로 느낀다 해도 퇴보이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굳게 지키는 것 자체가 옳다면 그 보수는 진보가 된다고 주장했다.

    즉 진보와 보수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진보와 퇴보, 보수와 개혁으로 나눠야 한다는 것. 문제는 진보냐 퇴보냐를 정하는 근거, 이를 뒷받침하는 더 높은 근거, 그리고 더욱 더 높은 근거, 즉 최종 근거가 중요하다. 교황에게 그 최종 근거는 가톨릭교회가 지난 2000년간 수호해온 신앙의 유산, 즉 믿음이다.

    교황은 공의회 정신이라는 미명 아래 도처에서 신앙의 실질적 파괴행위가 벌어지자 ‘개혁이건 쇄신이건 신앙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견해를 분명히 한 것이지, 결코 ‘수구 꼴통’의 자세를 보인 것이 아니다. 필자는 교황 선출 후 각종 인터뷰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변화를 부정하지 않는 정통주의자’라고 표현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40년 동안 교회는 공의회 이전 400년 동안 이뤄진 변화보다 더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쇄신, 토착화, 개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왔다. 새 교황도 교회의 개혁과 쇄신에 관심이 많다. 교황에게는 믿음이 교회 내 모든 일을 평가하는 최종 근거가 된다. 즉 믿음 없는 자들은 개혁할 자격이 없다.

    ‘베네딕토’를 택한 이유

    카롤 보이티야가 요한 바오로 2세가 되었듯 누구나 교황이 되면 새로운 이름을 택한다. 요셉 라칭거 추기경은 베네딕토 16세가 됐다. ‘축복’이라는 뜻의 베네딕토를 택한 것은 베네딕토 15세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평화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즉 세계 평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새 교황은 곳곳에서 베네딕토를 언급한다. 그는 베네딕토 성인을 서양 수도원 문화에 구심점과 불변의 형식을 부여한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그가 인용한 성 그레고리오 교황의 예화를 들어보자.

    “어느 날 밤 베네딕토 성인께서 수도원 야간 경비를 서게 되어 가파른 계단을 타고 망루 꼭대기까지 올라가셨습니다. 창가에 선 채 어둠 속에서 전능하신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밖을 내다보니 대낮보다 더 환한 불빛이 보였습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분 눈앞에서 온 세상이 마치 한 줄기 햇살 속에 모두 모아진 듯 펼쳐졌다고 합니다. 교황님과 친교가 있던 베드로 부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놀라서 ‘도대체 사람으로서 어떻게 창조세계 전체를 볼 수 있는지, 그러기에는 사람의 영혼이 너무 비좁은 게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베네딕토가 온 세상을 한눈에 봤다면 그것은 하늘과 땅이 좁아서가 아니라 그걸 보는 이의 영혼이 넓어서겠지…’.”

    당시 라칭거 추기경은 “베네딕토 성인처럼 내면적으로 높이 오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내적인 상승과 영혼의 확장을 위해 나름의 노력은 기울였다”고 밝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62년부터 65년까지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 중 주교로 활동했다. 당시 신학교수이던 라칭거 신부는 공의회 전문위원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만나지는 않았다. 처음 만난 것은 1977년 세계 주교회의에서였다. 바로 다음 해 교황선거가 있었으니 오랜 친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잘 통했다. 신앙 교의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동성애, 혼전 성관계, 피임, 낙태, 안락사, 유전자 조작, 생명 복제 같은 생명과 윤리 문제에서 두 사람은 ‘코드’가 잘 맞았다.

    하지만 선대 교황은 교회의 현실을 다소 낙관적으로 보았고 새 교황은 다소 비관적으로 본다는 데 차이가 있지 않나 싶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젊은 나이에 서구 교회와 교황청 내부에 대한 이해가 적은 채 교황이 됐지만, 베네딕토 16세는 78세의 고령에 서구 교회와 교황청 내부를 완전히 파악한 상태에서 등극했다. 새 교황이 정통 신학자 출신이라는 점도 선대 교황과 다른 점이다.

    새 교황이 교리의 엄격한 수호자가 될 것인가, 통합을 주도하는 가톨릭 수장이 될 것인가. 여기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가톨릭 계통 언론에서는 교황을 ‘완고한 정통교리 수호자이지만 사랑을 아는 가슴 따뜻한 인물’이라고 표현한다. 왜 이런 이분법이 성립한 것일까. 교리의 엄격한 수호자는 통합을 주도하는 수장이 될 수 없단 말인가. 완고한 정통 교리 수호자는 사랑을 아는 가슴 따뜻한 인물이기 어렵단 말인가. 우등생은 사랑도 모르는 냉혈한이어야 정상인가. 가톨릭 교리가 진리라 한다면 교리를 엄격히 수호할 수 있기에 통합도 주도하고 따뜻한 가슴으로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고 할 수 없는 걸까.

    베네딕토 16세에게 교황은 어떤 의미인가. 그레고리오 교황 이후 교황들 스스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 표현했듯 그는 교황을 최고위 지배자라 여기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교황은 교회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도록 하는 순명을 보증하는 구실을 해야 합니다. 교황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바로 교회라거나 전통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교황은 교회의 전통에 매여 있으며 교회의 이러한 구속적인 성격을 몸소 보이는 것이 곧 교황의 할일입니다.”

    여기서 베네딕토 16세의 생각이 드러난다. 그는 통합을 중시하지만 통합을 가치 있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위한 통합인가를 항상 문제삼는다. 가톨릭 교회의 가치를 전하면 세상은 교회를 박해한다. 특히 쾌락주의와 물질주의에 기운 현대 사회가, 가톨릭 교회가 전하는 가치를 달갑게 여길 리 없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전문가임을 자부한다. 교회가 참사랑의 가치를 포기하면서까지 세상과 영합할 수는 없고 그럴 바에야 교회는 소수파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 교황이 강조하는 바다.



    요한 바오로 2세가 타고난 친화력과 포용력으로 온 세상 곳곳에 교회의 존재 가치를 아낌없이 드러냈다고 한다면 타고난 신중성, 내성적 성격, 정통 지향성이 강한 베네딕토 16세는 1960년대 후반 이후 어지럽게 전개된 교회가 본모습을 찾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을까. 시공을 초월한 가치를 추구하는 신앙인, 뛰어난 학자, 노련한 사목자, 관록 있는 행정가인 그에게 세상은 그 어떤 위대한 것을 기대해도 좋으리라고 감히 전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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