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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의 한국혼 ⑦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외상 도고 시게노리

멸시받던 조선 도공 후예, 천황과 일본을 구하다

  • 글: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외상 도고 시게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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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 살 때까지 박무덕(朴茂德)으로 불리던 조선 핏줄의 아이가 있었다. 그는 훗날 일본제국의 외무대신으로 두 번이나 기용된다. 일본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던 1941년, 그리고 전쟁에 지고 항복하던 1945년, 일본의 명운을 가르는 시점에 외교 총수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전후 극동군사재판에 넘겨져 전범으로 분류된다. 결국 금고 20년형을 받고 갇혀 있던 중 병으로 옥사한다. 그의 일본식 이름은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1882~1950).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왜군에 납치되어 일본 규슈로 끌려간 도공(陶工)의 후손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외상 도고 시게노리
내가 사쓰마 도자기의 고장 나에시로가와(苗代川)에 들르기로 하고 심수관 14대와 인터뷰 약속을 한 날, 공교롭게도 비가 내렸다. 심씨 집에 도착하자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다. 전시장에서 안채로 건너가면서 비를 맞게 되자 심씨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뛰어봐야 비는 피할 수 없다고, ‘앞쪽에도 비는 뿌리는 걸요!’라고 말한 어린아이가 있었지요, 이 마을에….”

“도고 시게노리 말이지요!”

나는 얼른 맞장구를 쳤다. 심씨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냐는 얼굴로 쳐다본다.

그건, 시게노리에 관한 오래된 일화였다.

비가 갑자기 억수같이 퍼붓던 어느 날, 소학교 학생 시게노리가 뛰지도 않고 천천히 빗속을 걷고 있었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던 동네 어른들이 안타까워 빨리 뛰라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시게노리는 대답했다.

“아니, 앞에도 오는 걸요.”

그러고는 천연덕스럽게 걸어갔다는 얘기다. 크게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던가. 나에시로가와 마을에 관심을 갖고 문헌을 읽으면서 알게 된 에피소드였다.

이 마을 뒤쪽에는 영웅이 된 그 소학교 학생을 기리는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서 있다. 기념관 입구에 서 있는 아담한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실물보다 조금 작아 보인다. 조선 핏줄에 대한 차별과 질시를 딛고 오직 실력과 겸손, 성실성으로 일본 관료사회에 뛰어들어 입신한 우리 도공 후예의 당찬 품격이 손에 잡힐 듯 거기 서 있다.

‘도자기의 마을(陶鄕)에서 태어나, 격동의 세계를 무대삼아 누비던 외교관의 발자취.’

기념관 팸플릿의 문구다.

송덕비에는 내각서기관장(오늘날의 관방장관. 한국의 총무처 장관 겸 정부 대변인에 해당)을 지낸 이가 1964년에 쓴 비문이 남아 있다. “종전(終戰) 공작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성하고 일본국과 국민을 구했다”는 문장으로 끝이 난다.

기념관에는 시게노리의 사진과 필적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한글과 일어, 영어로 설명이 붙어 있다. 그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1855~1936)의 얼굴사진도 걸려 있다. 낡은 사진이지만 형형한 눈매와 꼭 다문 입술에서 성정이 녹록지 않은 인물임을 읽을 수 있다.

멋쟁이에 수완가인 아버지

박무덕은 1882년 가을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27세, 어머니(도메)는 24세였다.

그보다 3년 전에 누나가 태어났다. 조선 핏줄과 전통을 이어가는 고루한 박씨 집안의 첫아이가 사내가 아닌 딸이라 해서 무덕의 증조모가 무척 서운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노인은 첫아들을 낳지 못한 어린 손자며느리 도메에게 노골적으로 서운한 내색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 사내아이 무덕이 태어나자 어찌나 뛸 듯이 기뻐했는지 동네 사람들이 흉을 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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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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