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호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외상 도고 시게노리

멸시받던 조선 도공 후예, 천황과 일본을 구하다

  • 글: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입력2005-06-28 17: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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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 살 때까지 박무덕(朴茂德)으로 불리던 조선 핏줄의 아이가 있었다. 그는 훗날 일본제국의 외무대신으로 두 번이나 기용된다. 일본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던 1941년, 그리고 전쟁에 지고 항복하던 1945년, 일본의 명운을 가르는 시점에 외교 총수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전후 극동군사재판에 넘겨져 전범으로 분류된다. 결국 금고 20년형을 받고 갇혀 있던 중 병으로 옥사한다. 그의 일본식 이름은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1882~1950).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왜군에 납치되어 일본 규슈로 끌려간 도공(陶工)의 후손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외상 도고 시게노리
    내가 사쓰마 도자기의 고장 나에시로가와(苗代川)에 들르기로 하고 심수관 14대와 인터뷰 약속을 한 날, 공교롭게도 비가 내렸다. 심씨 집에 도착하자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다. 전시장에서 안채로 건너가면서 비를 맞게 되자 심씨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뛰어봐야 비는 피할 수 없다고, ‘앞쪽에도 비는 뿌리는 걸요!’라고 말한 어린아이가 있었지요, 이 마을에….”

    “도고 시게노리 말이지요!”

    나는 얼른 맞장구를 쳤다. 심씨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냐는 얼굴로 쳐다본다.

    그건, 시게노리에 관한 오래된 일화였다.



    비가 갑자기 억수같이 퍼붓던 어느 날, 소학교 학생 시게노리가 뛰지도 않고 천천히 빗속을 걷고 있었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던 동네 어른들이 안타까워 빨리 뛰라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시게노리는 대답했다.

    “아니, 앞에도 오는 걸요.”

    그러고는 천연덕스럽게 걸어갔다는 얘기다. 크게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던가. 나에시로가와 마을에 관심을 갖고 문헌을 읽으면서 알게 된 에피소드였다.

    이 마을 뒤쪽에는 영웅이 된 그 소학교 학생을 기리는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서 있다. 기념관 입구에 서 있는 아담한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실물보다 조금 작아 보인다. 조선 핏줄에 대한 차별과 질시를 딛고 오직 실력과 겸손, 성실성으로 일본 관료사회에 뛰어들어 입신한 우리 도공 후예의 당찬 품격이 손에 잡힐 듯 거기 서 있다.

    ‘도자기의 마을(陶鄕)에서 태어나, 격동의 세계를 무대삼아 누비던 외교관의 발자취.’

    기념관 팸플릿의 문구다.

    송덕비에는 내각서기관장(오늘날의 관방장관. 한국의 총무처 장관 겸 정부 대변인에 해당)을 지낸 이가 1964년에 쓴 비문이 남아 있다. “종전(終戰) 공작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성하고 일본국과 국민을 구했다”는 문장으로 끝이 난다.

    기념관에는 시게노리의 사진과 필적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한글과 일어, 영어로 설명이 붙어 있다. 그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1855~1936)의 얼굴사진도 걸려 있다. 낡은 사진이지만 형형한 눈매와 꼭 다문 입술에서 성정이 녹록지 않은 인물임을 읽을 수 있다.

    멋쟁이에 수완가인 아버지

    박무덕은 1882년 가을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27세, 어머니(도메)는 24세였다.

    그보다 3년 전에 누나가 태어났다. 조선 핏줄과 전통을 이어가는 고루한 박씨 집안의 첫아이가 사내가 아닌 딸이라 해서 무덕의 증조모가 무척 서운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노인은 첫아들을 낳지 못한 어린 손자며느리 도메에게 노골적으로 서운한 내색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 사내아이 무덕이 태어나자 어찌나 뛸 듯이 기뻐했는지 동네 사람들이 흉을 볼 정도였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외상 도고 시게노리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

    마을 사람 대대로 그랬듯, 아버지 수승은 무덕의 할아버지 이구(伊駒)에게서 도예기술을 배워 익혔다. 수승의 기예와 사업감각은 일품이어서 무덕이 태어날 무렵 도자기 사업은 꽤나 잘 돌아가고 있었다. 수승은 가고시마에서 멀리 요코하마와 고베까지 나가 외국상인과 접촉하면서 도자기를 팔아 큰돈을 모았다. 이런 아버지의 해외 지향성이 아들 무덕에게 은연중 문명개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는지 모르겠다.

    수승의 작품은 평판이 좋았기 때문에 그의 도자기를 독점하는 무역상들 사이에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요코하마나 고베의 무역상 가운데 몇몇은 경쟁상대에게 물건이 넘어가지 않도록, 수승을 감시하기 위해 그를 태우고 다니는 전용 인력거와 차부(車夫)를 붙여 안내인 겸 감시자 역할을 맡길 정도였다.

    그의 작품은 런던을 비롯한 유럽 도처에 팔려나갔다. 1970년대 일본이 고도성장기에 접어들 무렵 도쿄 아오야마(靑山)의 한 골동품상이 유럽에서 수승의 작품을 발견해 역수입한 사례도 있다.

    술을 좋아하는 수승은 아침식사 때부터 검은 소주잔(집에서 구운 것)으로 한 잔씩 걸치는 습관이 있었다. 이치기(市來) 해변의 생선장수들이 나에시로가와에 장사하러 나갈 때면 “그 집(수승)에서 사줄 거야” 하고 되뇌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인심이 좋았다. 생선을 밀봉해서 찬 우물에 담가놓고 한 점씩 회를 떠 안주로 먹는 것이 수승의 취미였다.

    외국문물을 좋아해 학교에 행사라도 있으면 당시로서는 진기한 물건이던 구두를 신고 나타났다. 큰 키에 당당한 체구의 그는 멋쟁이로 통했다. 수승은 “언젠가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라는 기계를 타고야 말 것”이라고 호언했다는데, 그 소원은 죽을 때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자녀들을 앞에 앉혀놓고 젊은 시절 서남(西南)전쟁(가고시마의 사족(士族)이 메이지 정부에 대항해 벌인 반정부 반란)에 종군하던 무렵을 회고할 때면, 열변을 토하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는 열혈청년이었다. 또한 마을 앞의 높은 언덕, 단군을 모시는 옥산궁(玉山宮) 개축에 돈을 내는 데도 앞장서는 마을의 유지였다.

    무덕의 어머니 ‘도메’ 역시 또 다른 박씨 성의 후손이었다.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출중해서 언제 누가 와서 무슨 소리를 하고 갔는지 죄다 기억했다. 남편이 물으면 “그때는 이랬고 저랬다”고 확실하게 대답해주었다. 돈 거래에 관해서도 아주 작은 액수까지 완벽하게 기억하고 처리해 박수승 도자기방의 회계 겸 기록 담당이었다. 시집올 때까지만 해도 읽고 쓸 줄 몰랐지만 타고난 지력(知力)과 노력으로 글을 배우고 깨친 터였다.

    수승 부부는 자녀들에게 엄했다.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도자기를 쌓아두는 창고에 가뒀다. 손녀 야마구치 도시의 증언에 따르면, 어린 그도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일상 용어를 잘못 쓰거나 경어 사용이 틀리면 조부모에게서 심하게 꾸중을 들었다는 것이다.

    무덕의 인격 형성에는 이러한 양친의 기질과 조선 핏줄이 모여 사는 도공마을의 풍토가 배어 있다. 활달한 개화파인 아버지, 영리하고 섬세한 노력가인 어머니, 뚜렷한 자립의식과 경쟁에서는 이겨야 산다는 분위기가 살아 있는 마을의 전통. 이런 것들이 무덕의 운명을 만들어놓았다.

    도자기 팔아 번 돈으로 성(姓)을 사고

    무덕의 아버지 박수승이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 사연은 애처롭고, 그 시대적 배경은 살벌하다.

    메이지 유신의 폐번치현(廢藩置懸昭坪·번을 없애고 현을 설치하는 조치)과 더불어 도자기 제조업도 번의 지배에서 현의 지배, 즉 현영(懸營)으로 제도 자체가 바뀐다. 대변혁이었다. 그때까지 지켜주던 사쓰마번의 보호막이 걷히면서 이들은 차가운 세상의 한복판에 내던져지고 말았다. 일본 사회의 차별과 냉대가 엄습해왔다.

    일본이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국시로 내걸며 서구열강을 따라붙자고 외치던 때였다. 한국, 중국 같은 아시아는 식민지 대상일 뿐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일본 우월주의 바람이 불어 대륙이나 반도 출신은 일단 열등하게 보는 것이 상식이 되고 말았다. 조선 풍속과 복식을 고스란히 유지해온 무덕의 고향 나에시로가와 사람들은 제국주의적 광기와 차별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도자기로 번의 재정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주어신 사족 대우는 박탈됐다. 사족과 평민의 차이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1872년 호적을 재편성할 때 마을사람 대부분이 평민으로 전락했다. 치명타였다. 마을 사람들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졌다.

    사쓰마의 일본 사람들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가진, 도예라는 독자적인 기예와 오랜 세월 쌓아올린 면학의 풍토를 자랑스럽게 여겨온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오히려 서남전쟁이 발발하면서 촌민 남자들이 대부분 전쟁에 끌려가는 바람에 현영 도자기 공장도 도산하고 만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군인, 공무원, 교사 같은 관직을 노렸다. 사족 신분을 획득하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다. 1880년 촌민 남자 364명이 연명해 가고시마 현청에 사적(士籍)에 편입시키라는 탄원서를 내기도 했다. 이 탄원에 서명한 이들의 명단에 수승의 아버지 박이구의 이름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이 탄원은 끝내 무시되었다.

    6년 뒤인 1886년 사적 편입 탄원서를 다시 제출했지만 각하당한다. 그리고 그 직후 박이구와 아들 박수승은 성을 갈아버린다. 도자기 팔아 번 돈으로 사족의 성을 산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가고시마성 하급 사족 도고(東鄕) 모씨의 사족 주(株)를 사들여 그 집에 입적하는 형태였다. 러일전쟁의 명장으로 추앙되는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도 가고시마 출신이지만 박씨 일가가 편입해 들어간 도고 성씨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외로운 소년

    시게노리는 일곱 살 때인 1889년 소학교에 들어간다. 학교 이름은 시모이슈인(下伊集院) 촌립심상(村立尋常) 소학교. 카메라를 들고 찾아가보니 소학교는 없어지고 사회복지법인 우애회(友愛會)가 운영하는 우애학원(아동양호시설)으로 바뀌어 있었다. 입구에 소학교 터라는 비석 하나가 옛날을 증언하고 서 있다.

    시게노리는 소학교에 다니며 별도로 ‘과외지도’도 받았다. 사숙(私塾)의 선생님에게서 독서지도를 받았다. 선생님이 책을 큰 소리로 읽게 하거나 책의 내용을 파악했는지 질문하는 식이었다. 시게노리는 이 시절 공자의 논어(論語)를 그런 식으로 배웠다.

    “대단한 공부벌레였다고, 옷자락이 닳도록 책상 앞에만 앉아 책을 넘기는 소년이었다고 어머니가 늘 말씀했어요.”

    질녀인 야마구치 도시의 전언이다.

    그렇다고 공부에만 매달리는 소년도 아니었다. 사쓰마의 여느 소년처럼 검술훈련에도 열심이고 활쏘기 놀이도 잘하는 활달한 소년이었다. 세 살 아래 동생의 기억에 따르면 “함께 시냇가에서 고기를 잡거나 산에서 잣밤을 줍곤 했는데, 겁나는 일이 생기면 언제나 형답게 단단히 감싸주었다”고 한다.

    1997년 시게노리는 가고시마 제1중학교에 입학한다. 고향마을을 떠나 가고시마 시내에서 하숙을 하고 방학 때 돌아오는 식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성적표가 지금도 남아 있다. 총 131명 가운데 1등. 영어를 비롯한 16개 과목의 평균점수는 88점(참고로 2등은 86.9점). 기하(수학)는 100점, 영역 영작 일어 강독 및 대수(代數)가 각각 97점. 가장 처지는 체육이 55점이다.

    중학교는 사족 자제들의 세상이었다. 폐쇄적인 시골 가고시마에서는, 평민인 농부가 제복을 입은 중학생을 보게 되면 상전의 자제라는 이유로 타고 가던 마차에서 내려 예를 갖추었다. 배를 타더라도 평민은 제복 입은 학생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시게노리는 비록 성을 바꾸고 사족에 편입됐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오히려 따돌림을 당하는 학생이었다. 천민부락의 이미지가 남아 있는 나에시로가와 출신의 가짜 사족, 조선 핏줄임을 아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외롭고 쓸쓸했다.

    비슷한 처지의 동급생으로 농부 아들 인 사키모토 요시오가 있었다. 그는 자라서 의사가 되었다. 요시오의 아들인 유키오는 아버지가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고 전한다.

    “시게노리와 특히 친하게 지낸 것은 어떤 동류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족의 자제들에 대한 대항의식이랄까, 저항감이 있었고 그 반동으로 우리 둘은 공부에만 매달렸다. 사족 아이들은 우리가 공부하는 것조차 싫어하고 이지메를 했으므로 우리는 데루구니(照國) 신사 경내같이 조용한 데 가서 예습과 복습에 열을 올렸다.”

    사키모토 요시오가 아들 유키오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시게노리는 포켓용 영어사전을 늘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단어를 외웠다고 한다. 한 페이지를 전부 암기했다 싶으면 그 페이지를 찢어 삼키는 식이었다.

    시게노리의 친구라곤 사키모토뿐이었다. 항상 과묵했고 농담 한마디 한 적도 없었다. 필요한 것 외에는 말하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 시린 세상에서 차별받는 소년의 심리적 반응이었을 것이다.

    시게노리는 공·사석을 통틀어,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단 한 번도 조선 핏줄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가 남긴 기록에도 나에시로가와 이야기는 수없이 나오지만 핏줄에 대한 말은 전혀 없다.

    가고시마 제1중학교 출신의 역사연구가인 하라구치 도라오 가고시마대 명예교수는 말한다.

    “시게노리는 그 마을 출신이기 때문에 자기의 출신배경을 내세울 수도, 누군가에게 기댈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항상 눈을 크게 뜨고 세계를 쳐다보며, 주변의 속평에 연연해하거나 휘둘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교만을 떨지 않았다. 아첨도 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위화감이나 위협을 주는 일도 없었다. 점점 스스로의 지력과 기력(氣力), 신념만을 믿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보면 차별받고 서러움 당하는 가고시마의 나에시로가와 출신이라는 사실이 시게노리에게는 오히려 (대성으로 이어진) 행운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독문학도의 꿈을 접고

    1902년 스무 살이 된 시게노리는 명문인 가고시마고 제7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일본제국은 도쿄에 국립1고 센다이에 2고 하는 식으로 학교숫자를 붙였다. 가나자와, 교토, 구마모토, 와카야마까지 6고를 만들고 7고를 가고시마에 세웠다. 그러므로 가고시마고 학생들은 적어도 전국 7대 명문고 가운데 하나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넘쳤다.

    명문이기에 외지의 수재들도 몰려왔다. 시게노리의 동기 졸업생 87명 가운데 가고시마 출신이 2할, 규슈 출신이 2할로, 나머지 6할은 멀리 도쿄나 동북지방 같은 외지 출신이 차지했다.

    이 무렵부터 시게노리의 성격이 좀 달라졌다. 중학교 때와는 달리 고교 동급생은 ‘요소모노(외지 출신)’가 다수였으므로 나에시로가와 출신이라는 사실을 조금 덜 의식하게 된 것이리라. 현지출신이 소수였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더 자유롭고 활달해질 수 있었다.

    고교 3년간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어두운 기색 같은 것은 이미 없어졌다. 반을 이끄는 선두주자로 친구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한 반에서 시게노리는 인격이나 인품 면에서 단연 빛나는 존재였다.”

    동기생인 기시모토 하지메(岸本肇素稼·훗날 해군중장)의 회고다.

    교사진도 우수했다. 교장 이와사키 유키오는 도쿄영어학교를 나온 열혈 애국지사로 중앙 정계에도 발이 넓어 실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우수 교사를 확보했다. 그래서 신설고교인 제7고에 대학의 수석 졸업자나 기존 고교의 최우수 교사들이 많이 모였다. ‘도쿄 1고를 능가하는 7고 교사진’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시게노리는 7고에서 독일어를 익히고 독일문학을 접한다. 그것은 운명적이었다. 나중에 그가 독일대사가 되고, 독일인 아내를 얻는 계기가 된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외상 도고 시게노리

    소련대사 시절의 시게노리(아래 오른쪽에서 두번째).

    1904년 시게노리는 도쿄대 독문과에 들어간다. 아버지 수승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선택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현의회 의원을 꿈꾼 적도 있었기 때문에 수재인 아들이 법과대를 나와 내무성 관리를 하고 지사(知事)라도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아들과 후손을 출세시키고자 돈으로 성까지 사고 사족으로 끼어들어갔던 것이다. 아들 시게노리는 그런 아버지의 꿈을 알고 있었기에 한동안 독문과 진학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의 기대를 배반하고 택한 독문과였지만 길은 순탄치 않았다. 무엇보다 주임교수와 호흡이 맞지 않았다. 주임은 독일 문헌을 중심으로 가르치고 발표형식은 회화체를 강조했다. 시게노리는 독일어 답변에 능하지도 못했고, 원래의 꿈이 문학이었으므로 훈고학(訓퇑學)에 매달리는 주임의 방식이 재미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수업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그럭저럭 독문과를 졸업했으나 성적은 동급생 6명 가운데 꼴찌. 병으로 공부를 제대로 못하기도 했고 그나마 다른 이들보다 한해 늦게 졸업했는데 그로서는 처음 겪는 굴욕이었다. 게다가 하숙집에 불이 나 책이란 책은 모두 불에 타버리는 사건을 겪는다.

    그러는 사이 꿈도 희망도 바뀌뀐다. 원래는 도쿄대 독문과 교수, 문예평론, 그리고 독일어 소설 쓰기가 꿈이었으나 버리고 만다.

    ‘문학에는 재능이 필요하다. 영원히 남을 시인은 되지 못할 터이다. 실제 사회에 몸으로 부딪쳐 도전해보고 싶다. 이제는 딜레탕티즘의 문학을 떠나자.’ (만년의 자필 메모에서)

    굿바이, 나에시로가와

    외교관 시험을 치기로 결심한 것이 이 무렵이었다. 왜 같은 고시 가운데서도 외교관 시험이었을까. 우선 외국어에 자신이 있었고, 내무관료로서는 ‘핏줄의 장애’가 적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외무고시에 합격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길이었기에 스스로 벌어 수험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독문과 선배의 도움으로 메이지대 독일어 강사로 생활비를 벌어가며 수험준비를 했다.

    그러나 두 번 연거푸 실패. 문과대 졸업생이므로 법대 출신에 비해 어려움이 있으리라 각오는 했지만, 이처럼 연속해서 낙방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물고늘어졌다. 시간강사 수입으로는 돈이 궁해 문부성의 자료편찬실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다.

    더운 여름이면 시원한 고산지대인 가루이자와(輕井澤)까지 가서 책을 파고들었다. 이 가루이자와의 추억, 쓰루야(鶴屋)라는 여관에서의 고시공부에 매진하던 추억을 그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다. 만년에도 심신이 지치면 늘 그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세 번째 응시에서 마침내 합격. 1912년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아버지 수승은 아들의 고시 합격을 크게 기뻐했다. 비록 내무관료의 길은 아닐지라도 그야말로 신분과 팔자를 바꾸는 큰일을 해낸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을 불러 일주일간이나 연회를 베풀었다.

    잔치가 끝나고 관보에 합격자 발표가 나자 수승은 나에시로가와 마을과 인연을 끊는다

    본적지를 ‘가고시마시 니시센고쿠초(西千石町) 82번지의 2’로 옮긴다. 300년 가까이 지켜온 조선 핏줄과 완전하게 결별한 것이다.

    그런 철저한 출신지 은폐가 자식을 출세시키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일까.시게노리의 자필이력에도 나에시로가와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고시에 합격하면 관할경찰서 순사의 신상조사가 따라붙는다. 일본 외무성에 아직도 기록이 남아 있다.

    ‘성질은 침착 강의(剛毅)하고 과묵. 약간 고집스러운 경향이 있음. 부친의 동산은 5만~6만엔, 부동산 4만엔 정도로 중류 이상의 생활을 하는 인물.’

    합격자 6명 가운데 아버지의 동산 부동산 규모가 기입된 것은 시게노리뿐이다. 혹시 내세울게 없었던, 나에시로가와 배경이 마음에 걸리는 아버지 수승이 경찰관을 매수(?)라도 해서 집어넣은 문구가 아닐까. 무슨 짓을 해서든 아들을 성공시키려는 아버지의 정성이 아릿하게 짚이는 대목이다.

    승진가도, 그리고 결혼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외상 도고 시게노리

    예복을 입은 도고 시게노리.

    외무성에 들어간 시게노리는 신장염을 앓는 바람에 정무국과 통상국에서 7개월 가량 일을 배웠다.

    당시는 공문서를 모두 붓으로 쓰던 시절이었다. 시게노리는 한문 구사나 필력에서 뛰어나고 문제를 파악해 대응하는 능력이 예리하다는 평을 들었다. 고위직 상사들이 그를 편하게 생각해 늘 불러다 일을 시켰다.

    “서구적인 사상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양적인 인격수양, 유교적인 단련도 되어 있는, 거기에 문학적인 소양까지 갖춘 친구였다”고 동기생인 기타다 마사모토(北田正元)는 전했다.

    1913년 부임한 첫 해외 근무지는 중국의 선양(瀋陽·봉천). 총영사관의 영사관보(補) 자리였다. 스위스 3등 서기관을 거쳐 베를린으로 옮기는 등 해외근무는 무려 8년이나 이어진다.

    그리고 그 베를린에서 독일 여성과 결혼한다. 에디 드 라론드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1920년경이었다. 시게노리가 37세, 에디가 33세 때였다. 재미있는 것은 에디의 사별한 남편 게오르그가 바로 김영삼 정부 때 헐어버린 조선총독부 건물(옛 중앙청)을 기본 설계한 기사라는 사실이다. 기이한 연(緣)이다.

    두 사람은 1922년 2월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린다.

    부부 사이에 외동딸 ‘이세’가 태어난다. 훗날 이 무남독녀와 결혼한 사위(원래는 ‘本城’이라는 성을 쓰던 외교관)는 장인의 성을 이어받아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가 된다. 후미히코는 나중에 북미국장을 지내는 동안 1969년 미국과 일본 사이의 오키나와 반환교섭 실무책임을 맡았다. 당시 미일 공동성명에 ‘한국의 안전은 일본의 안전을 위해서도 긴요하다’는 구절을 넣어 큰 정치적 반향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1973년 8월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납치사건을 저질러 일본을 경악케 하고 한일관계가 위태롭게 됐을 때 일본측 수습 사령탑을 맡은 인물이 바로 이 ‘조선 핏줄의 사위’ 후미히코 외무차관이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시게노리는 1923년 구미국(歐美局) 제1과장으로 승진한다. 다시 3년 뒤 미국 워싱턴으로 가서 1등서기관 생활, 1929년에는 독일주재대사관의 참사관으로 승진한다.

    외무성 생활 21년째인 1933년 구미국장에 오른다. 이 무렵 조선 청년 장철수(나중에 한국에서 외무부 국장을 지냄)가 외교관시험을 거쳐 올라오자 “여러 어려움이 있겠지만 인내하고 열심히 하라”고 등을 두드려준 일화가 있다. 잇달아 구아(歐亞)국장, 1937년 독일대사를 거쳐 이듬해 소련대사로 기용된다.

    그리고 1941년 10월 외무대신으로 발탁된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12월8일), 즉 대미 선전포고가 있기 두 달 전의 일이다.

    전쟁을 막아야 한다

    미국과 전쟁을 벌이면 무조건 진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미국 주재 경험과 외교관의 지식으로 미국의 생산력과 저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미국과 외교를 펼치는 한편, 장렬한 ‘내교(內交)’로 군출신인 도조 히데키 수상을 비롯한 전쟁광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내 인사 설득에 피 말리는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미국은 일본이 중국에 병력을 장기적으로 주둔하는 것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고 있었다. 또한 중국시장에서 일본기업만이 특수이익을 누린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 내에서는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 기업에도 이권을 완전히 열어버려야 하는지 결정하는 일이 하나의 과제였다.

    도고 시게노리는 내각과 군부에 강하게 주장했다.

    “첫째, 타국 영토(중국)에 무기한으로 병력을 주둔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기한을 정해 철수하는 것이 일본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뿐이라는 말은 틀린 얘기다. 둘째, 일본군대의 주둔은 궁극적으로 중국에 거류하는 일본인 보호를 곤란하게 할 뿐이다. 셋째, 일본이 이웃나라 중국에 병력을 장기 주둔해 압박하는 것은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유지하는 데 공헌하는 일이 아니다. 넷째, 일본군대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은 일본회사가 중국에 있다면, 이는 채산성 면에서 버려도 될 기업일 뿐이다.”

    특히 미국과 장기적인 해전이 벌어져도 승산이 있다는 해군에도 반론을 폈다.

    “전쟁이 벌어지면 군함의 증감에 따라 전세가 달라진다. 해군은 개전 1차년도에 소모(침몰)되는 양보다 2차년도에 소모되는 군함의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가 될 것이다. 미국은 잠수함을 더 많이 건조하고 활동범위가 점점 넓어질 것이므로, 우리의 2차년도 군함 소모량을 더 많이 계산해야 옳다.”

    이에 대해 해군은 “미국의 잠수함에 대해서는 충분한 대책을 세워놓았으니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군부 내각은 전쟁회피주의자인 도고를 외상에서 자르고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방안도 강구했다. 그러나 입으로는 그렇게 위협하면서도 차마 끝까지 경질하지는 못했다. 도고가 목을 내걸고 전쟁을 막기 위해 뛰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고로서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일본은 전쟁의 불바다에 빠져들고 만다.

    훗날 도고의 탄식이다.

    ‘과학의 진보에 대한 예상이 빗나간 것이 결정적이었다. 원자폭탄만 하더라도 히로시마에 떨어지기 수개월 전 일본의 권위자가 이번 전쟁에는 실용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 판이었다. 한마디로 전체적인 수준의 문제(미일 사이의 과학 격차)였다. 또한 정확한 통계와 분석이 없이 대든 것도 문제였다. 군함의 수량만 해도 전쟁이 길어지면 점점 소모가 많아질 텐데, 해군측은 전쟁 2차 연도에 소모가 줄어들 것이라는 고집을 끝내 꺾지 않았다.’ (도고 시게노리의 저작 ‘시대의 일면’ 중에서)

    8월9일 최고전쟁지도회의

    미국과 일본이 맞붙은 태평양전쟁은 시게노리의 예언대로 흘러갔다.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신형폭탄(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이 공격으로 26만명이 넘게 죽었다. 그리고 사흘 뒤인 8월8일, 소련이 약삭빠르게 연합국에 가담해 참전을 선언한다. 이미 전황은 기울었고 독일마저 항복해버린 터라 일본의 항복은 말 그대로 시간 문제였다.

    그보다 4개월 전인 1945년 4월9일, 도고 시게노리는 다시 외무대신으로 기용(스즈키 간타로 내각)됐다. 이때 이미 패전 선언은 예정되어 있었다. 수상 스즈키는 전쟁 종결처리야말로 도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소련이 참전을 선언했다는 정보를 접한 도고 외상은 8월9일 최고전쟁지도회의 석상에서 “신속히 전쟁 종결을 단행해야 한다. 포츠담선언을 즉시 수락하자”고 주장했다. 포츠담선언은 그해 7월말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국 정상이 모여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촉구한 것을 말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군부 장성들 앞에서 도고다운 용기와 배짱이 아니면 불가능한 소리였다.

    ‘철저 항전’을 외쳐온 강경파의 선두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가가 즉각 반론을 편다.

    “장래에 대한 확실한 낙관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종전(항복)한다면, 야마토(大和) 민족은 정신적으로 죽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오래 전부터 국체호지(國體護持·천황제 유지)와 일본 군사기구 유지라는 확실한 보증이 없으면 전쟁 종결은 안 된다고 주장해왔다. 장래의 낙관 운운은 바로 그 이야기였다.

    그래도 사태가 워낙 급박하다보니 일단 항복을 전제로 회의를 하기로 했다. 해군대신 요나 미쓰마사가 “그렇다면 무조건 항복인지 조건을 달아 항복할 것인지를 정하자”고 제안한다. 도고는 “국체호지 하나만 남기고 다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세등등한 연합국에 씨알이라도 먹히려면 천황제 유지 하나만 주장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에 납치되어간 조선 도공의 핏줄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고 조선 민족에게 더없는 고통을 안긴 일본 천황을 위해 그 제도를 유지해야만 한다고 외치며, ‘일편단심’으로 목숨과 명예를 건 투쟁을 벌였으니 말이다.

    육군대신 아나미와 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 군사령총장 도요다 소에무가 “철저 항전”을 주장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회의 분위기는 강경파가 주도했다. 천황제 유지는 물론 ‘전장에 있는 일본군의 자주적 철수’ ‘전쟁 책임자를 일본이 처리하는 것’까지 연합국에 요구하자는 다(多)조건 항복론이 대세를 이룬다. 도고의 일(一)조건 항복론은 소수로 몰렸다. 이 논의는 8월9일 오후 임시 각료회의에 넘겨졌으나 결론이 나지 않는다.

    “원자폭탄은 천우신조”

    그 무렵 천황을 움직이던 측근 기도 고이치 내(內)대신은 수상을 지낸 고노에 후미마로 등이 다조건 항복론에 회의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미국이 들어주겠냐는 것이었다. 더욱이 국제 정세에 밝고 수상과 외무대신을 경험한 시게미쓰 마모루가 중요한 조언을 해줬다. 이미 그날(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져 15만명이 넘는 사상자가 났다는 보고가 들어온 상태였다.

    “이제 (미쳐 날뛰는) 군부를 누를 수 있는 힘은 정부 내각에 없다. 천황 폐하가 직접 결단을 내리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성단(聖斷)에 의한 항복을 주장했다.

    이날 밤이 늦은 11시50분부터 천황 앞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스즈키 수상이 도고 외상의 ‘일조건 항복’을 제안하고 천황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매듭지어졌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외상 도고 시게노리

    도고 시게노리는 미국에 선전포고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전쟁을 일으킨 도조 내각의 일원이었기에 전범 처벌을 면치 못했다. 앞줄 군복차림이 도조 히데키, 가운데 원내가 시게노리.

    그러나 사흘 뒤 사태는 일변하고 만다. 일본측은 연합국에 ‘천황의 대권을 변경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포츠담선언을 받는다’고 제안했지만, 연합국의 회신은 ‘(천황제를) 어디까지나 연합국 사령부 아래에 두고, 궁극적으로 일본 정치형태는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하는 의사에 따라 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군부가 다시 거세게 들고 일어났다. ‘국체의 근본인 천황의 존엄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이런 식이라면 천황제는 유지되기 어렵고, 최악의 경우 폐지될지도 모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회의가 길어지고 다음날 새벽 3시가 되도록 군부 강경파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연합국)은 이미 천황제를 유지시킬 심산을 굳히고 있었다. 주일대사를 지낸 그루 등이 천황제를 두어야 점령통치가 쉽고 공산당의 발호를 막을 수 있다고 조언한 그대로였다. 포츠담 선언에서 굳이 ‘천황제 폐지’를 명기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쇼와 천황은 연합국의 메시지를 간파했다. 거기에는 요나 해군대신의 역할도 컸다.

    “외람되고 이상한 말씀이지만, 원자폭탄과 소련 참전은 천우신조(天佑神助)의 천우라고 생각한다. 국내의 분열 없이, 전쟁 계속파와 종결파가 대립하는 것을 노출하지 않고, 외압에 의해 전쟁을 종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천황제 존속으로 천황의 전쟁범죄를 덮어버리려는 이 아이디어는 미국의 의도, 즉 점령통치를 쉽게 하고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는 계산과 깨끗하게 맞아떨어졌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21세기에 들어서도 일본의 전쟁책임과 반성을 둘러싸고 한국과 중국이 일본과 계속해서 부딪치는 지점이 되었다.

    천황은 도고 외상에게 무조건 항복(포츠담선언)을 수락하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전쟁은 막을 내린다. 이후 넉 달여, 군부의 암살기도와 협박을 이기고 패전협상을 마무리한 도고의 근성과 현실감각은 무서운 것이었다. 때문에 일본인들이 기념관과 비석을 세워 그를 기리는 것이다.

    고향의 과자조각

    시게노리는 일본이 패전하자 전범이 되어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에 갇혔다. 극동군사재판에서 금고 20년형을 선고 받았다. 복역 중이던 1950년 7월23일 68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감옥에서 외교관 생활을 기록한 ‘시대의 일면’이라는 수기를 남겼다.

    그의 손자 도고 시게히코는 ‘아사히신문’ 기자를 거쳐 ‘워싱턴포스트’ 도쿄지국장을 지냈다. 시게히코의 쌍둥이 형제인 가즈히코는 외교관이 되어 할아버지처럼 구주국장과 네덜란드 대사를 지냈다.

    도고 시게노리의 고향인 나에시로가와의 도공 심수관 14대(당시 와세다대 재학 중)는 아버지 13대의 명을 받들어 아홉 차례나 시게노리를 면회하러 다녔다. 고향의 과자조각을 싸들고 가면 시게노리가 반갑게 맞아줬다고 한다.

    심수관 14대는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을 그리워하는 모임’의 회장이다. 이래저래 박수승· 박무덕 부자와 인연이 깊다.

    “그래서일까요. 시게노리가 미국 사람들의 재판으로 갇혀 옥사해서일까요. 나는 아직도 심정적으로 반미(反美)예요.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 미국 땅 한 번 밟은 일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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