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호

파라다이스 문화재단 이사장 된 ‘객주’ 작가 김주영

“소설의 위기? 同시대인 공유한 생각 천착해 쓰면 잘만 팔린다”

  • 글: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사진: 김성남 기자

    입력2005-06-30 09:5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파라다이스 문화재단 이사장 된 ‘객주’ 작가 김주영
    작가김주영(金周榮·66)은 우리 시대의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입담과 풍물 묘사는 판소리 사설처럼 투박하고 걸쭉하다. 이 인터뷰에서도 ‘화력이 센’ 이야기꾼의 면모가 드러났다(여기서 ‘화력’은 ‘話力’과 ‘火力’의 두 가지 뜻을 지닌다). 그의 화술은 듣는 사람을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3시간의 인터뷰와 이어진 2시간의 저녁 자리에서 그는 문학, 인간 그리고 시대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놓았다. 서울살이 30여 년에도 경상도 억양이 살짝 남아 있다. 가끔 더듬거리고, 때로는 먼저 흥에 겨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작가로 등단하기 전에는 안동역 근처 중앙선 철로변에 있는 전매청 엽연초생산조합 사무실에서 10년 동안 주사로 근무했다. 단조로운 경리업무에 따르는 지겨움과 권태를 술로 이겨내던 전매청 주사는 1971년 서른셋의 나이에 ‘휴면기’란 작품을 들고 홀연 문단에 나타났다.

    그는 등단 이후 ‘객주(客主)’ ‘활빈도’ ‘화척’ ‘야정’ ‘아라리 난장’ 같은 장편소설을 꾸준히 발표했다. 조선 말기 보부상의 떠돌이 삶과 풍속사를 그린 대하소설 ‘객주’는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황석영의 ‘장길산’과 더불어 한국 역사소설사에서 당당한 봉우리로 자리잡았다. 근래에는 ‘홍어’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등 자전적 성장소설로 토속적 감수성의 세계를 개척하고 있다.

    그는 문학을 매개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벌이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문학작가회의에 참여했다. 지난해 총선 때는 열린우리당 공천심사위원을 했다. 그렇다고 지금의 그가 ‘진보’나 ‘참여’ 쪽은 아니다. 일부 진보적 문인들이 심사대상에 오르는 것조차 기피하는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이다. 그는 진보, 보수 어느 쪽으로도 분류되는 것을 싫어한다.



    유명 작가 작품 90%는 고향 얘기

    그는 얼마 전 파라다이스 문화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1989년부터 고 전낙원(田樂園) 이사장 밑에서 상근이사 겸 사무국장을 하다가 전씨가 지난해 세상을 뜨고 나서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6월의 토요일 오후 서울 장충동 파라다이스 빌딩 문화재단 이사장실에서 작가를 만났다. 토요일이라 여직원이 나오지 않아 그가 손수 차를 내왔다.

    김주영 문학세계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 보면 경북 청송 깊은 산골 고향 마을에 닿는다. 그는 청송군 진보장터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진보는 서쪽으로 안동이 100리, 동쪽으로 영덕이 80리, 영양이 50여 리 떨어진 고장이다. 산골의 소읍이었지만 일찍부터 장시(場市)가 성해 각성바지들이 섞여 살았다.

    -청송 분들이 보시면 기분 나쁠지 모르겠는데, 경북의 대표적인 오지라지요.

    “고향에서 제일 가까운 기차역이 안동인데 40km 떨어져 있죠. 꼬박 하룻길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먹고 주왕산 자락의 큰 재 2개를 넘어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야 저녁 무렵에 안동에 도착합니다. 경상북도 공무원들이 좌천을 당해 유배를 가는 곳이 울릉도 다음으로 청송이었습니다. 울릉도는 섬이니까 내륙에서는 청송이 가장 오지였죠.

    서울, 대구 같은 대처에서 태어난 것보다 청송 같은 산골에서 태어난 것이 어찌 보면 인생에 보탬이 됐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바깥세상으로 탈출하려는 강력한 동기부여를 받았으니까요.”

    김주영은 청송군 진보면에서 중학교까지 다니고 대구농고 축산과에 진학하면서 처음 대처 땅을 밟아봤다.

    -태어나서 성장기를 보낸 고향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우리 시대 유명 작가의 작품 가운데 90%가량은 고향 얘기입니다. 유소년기를 보내면서 보고 느낀 모든 것이 작가의 문학적 자산이 되는 거죠. 한승원씨는 전남 장성이 고향입니다. 지금도 바닷가에서 삽니다. 한씨의 작품엔 으레 바다가 배경으로 깔립니다. 이문구씨의 고향 충남 보령 관촌마을이 무대인 ‘관촌수필’은 명작이죠. 경북 영양 출신인 이문열씨의 주목받는 작품들도 거의 고향 이야기입니다. 김원일씨의 ‘마당 깊은 집’도 고향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을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저도 ‘홍어’ ‘멸치’ 같은 소설에서 고향 이야기를 했습니다. 편모 슬하에서 자라며 가난을 절절이 경험했습니다. 형제가 셋이었는데 동생 하나가 일찍 죽었죠.

    소풍 가는 날 어머니가 도시락을 싸주셨습니다. 우리 집에는 네모난 알루미늄 도시락이 없었습니다. 주발에다 보리밥을 담고, 그 속에 고구마나 감자를 한두 개 박고, 뚜껑을 닫고 보자기로 싸줍니다. 그걸 들고 학교에서 4km쯤 떨어진 낙동강 지류 반변천(半邊川)으로 갔죠.

    강변에서 한참 노는데 상급반 학생들이 모래밭에서 축구를 해요. 가까이 가보니 보자기에 싸인 도시락 주발로 축구를 하고 있었어요. 깜짝 놀라 달려가 도시락을 겨우 수습했습니다. 음식이 너무 누추해 어린 마음에 부끄러워 바위 뒤에 숨어서 먹었습니다. 밥주발이 축구공 노릇 하느라고 모래 반, 밥 반이 돼 있었습니다. 도시락을 먹으며 왠지 억울하고 서러운 생각에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상, 어머니가 종일 노동을 해도 먹을 것을 충분히 마련할 수 없는 세상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죠. 제가 만일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거나 그런 가난을 겪지 않았다면 다른 직업인으로 살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홍어’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같은 작품을 저 정도 연배의 독자가 읽으면 푸근한 고향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요즘 신세대가 그런 소설을 읽고 필링을 받을지 모르겠어요.

    “요즘 아이들은 옛 시절의 가난 얘기를 아주 싫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지금 젊은 사람들 흉내를 낼 수는 없습니다. 나훈아, 남진, 송대관 같은 가수들이 요새 젊은 가수들의 랩송을 흉내 내면 아마 미친놈이라고 하겠지요. 송대관이는 바로 그날로 없어지는 거예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홍어’ 같은 소설을 제 나름대로 깊이 있게 써야지요. 젊은 작가 중에서 은희경, 김영하, 성석제의 작품을 즐겨 읽으면서도 제가 그들의 작품을 흉내낼 수 없는 이유죠.”

    자전적 성장소설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의 도입부에는 고향 집 묘사가 나온다.

    마을에서 면사무소로 올라가는 오르막길 들머리에 궁핍을 겪었던 시절의 집이 있었다… 울바자 너머로는 언제나 먼지와 허섭스레기가 흩날리는 장터거리가 있고, 거기선 닷새마다 한 번씩 저자가 섰다. 무싯날에는 내왕하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휑뎅그렁하기만 해서 동네의 개들이 몰려나와 한가롭게 흘레를 붙곤 하였다. 그러나 저자가 서는 날엔 꼭두새벽부터 노점상들과 장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해서 아침나절이 되면 그 넓은 장터가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꽉 들어찼다.

    저울추 모으기가 취미

    김주영의 작품엔 대표작 ‘객주’를 비롯해 장터와 장꾼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그는 저울추를 모으는 이색적인 취미를 갖고 있다. 시골 5일장에서 흔히 쓰이던 재래식 저울추를 50개 가량 수집했다. 시골 장터는 그에게 도서관이자 박물관이었다.

    “보통 시골 동네 구멍가게 앞에 앉아 있으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빤합니다. 매일 보는 사람들만 왔다갔다하지요. 낯선 사람은 없죠. 그런데 장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장날 장터거리에 나가 보면 낯선 사람이 많죠. 말도 전부 다릅니다. 점포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트럭에 장짐을 싣고 다니면서 장터만 찾아다니는 난전꾼들이죠.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경상도를 넘나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와서 무슨 축제 벌이듯 왁자하게 싸움질하고 웃고 떠들고 하는 모습이 어린 소년에게 신선하게 보였죠. 바깥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조그마한 소년은 장날이 되면 핑계를 대어 학교에 빠지고 장거리를 배회했습니다. 그 낯선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보고 듣고 하는 습관이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었죠.

    객지로 나가 학교에 다니며 생활하는 동안 고향 풍경이 야금야금 안개처럼 퍼져버리고 알맹이만 남아 있었죠. 작가가 되고 나서 어린 시절에 봤던 장터 이야기를 써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습니다. 다른 지방의 장터를 찾아가 보고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장꾼의 원조에 보부상이란 큰 덩어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죠.”

    ‘객주’는 1979년 6월1일부터 1984년 2월29일까지 4년9개월 동안 서울신문에 연재됐다. 200자 원고지 1만매를 넘는다. 창작과비평사를 거쳐 문이당에서 9권으로 출간됐다. 20여 년 동안 10만질 가량 팔렸다.

    그는 ‘객주’를 쓰기 위해 몇 해 동안 녹음기와 사진기를 들고 전국의 장터를 샅샅이 훑고 다녔다. 이 작품의 도처에 널려 있는 고유어는 전통문화를 되살리면서 민중의 사고와 의사표현의 영역을 확대했다고 평론가 김종철은 평가했다.

    “한자어 대신 우리말로 된 단어가 반드시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두꺼운 국어사전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역(ㄱ)부터 찾아나가는 거죠. 단어 하나 찾는데 밤을 꼬박 새우며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죠. 그러다 베란다에 나가면 새벽 4∼5시경. 멀리 한강변 가로등 불빛이 안개에 잠겨 있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한강변 가로등 보며 흘린 눈물

    -무엇이 그렇게 서러웠습니까.

    “데뷔한 지 얼마 안 돼 대하소설을 시작해 너무 어렵고 고생스러웠습니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역사 지식도 부족했으니까요. 사학과 출신도 아니고. 학력이라고 해봐야 고작 2년제 초급대학인 서라벌예술대학 졸업한 것뿐이었습니다. 연속으로 다닌 것도 아니고 중간에 군대 갔다 오고, 두 번이나 휴학을 했으니까요.

    옛날에 조상들이 쓰던 언어를 추적해 소설에 써먹는 작업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죠. 이 어려운 작업에 무작정 뛰어든 어리석음을 한탄했죠.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한 작품이라 더 애착이 갑니다.”

    ‘장길산’과 ‘객주’는 역사소설의 물줄기를 돌려놓았다. 그때까지의 역사소설은 대개 왕권 승계를 둘러싼 음모와 배신을 그린 궁중소설류였다. 역사는 정권을 손에 쥔 사람들에 의해 전개된다는 의식의 소산이라 하겠다. ‘장길산’과 ‘객주’는 그런 고정관념을 깨고 도둑과 보부상 같은 천민의 삶을 다뤘다.

    “과거 월탄 박종화가 쓴 역사소설에 일종의 반기를 든 작품이라 할 수 있지요. ‘장길산’과 ‘객주’는 역사를 보는 시선의 방향을 역으로 틀어놓은 것이죠. 조정래의 ‘태백산맥’도 사람들이 갇혀 있던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 용기 있게 대들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객주’에서는 간간이 푸짐하고 질탕한 성행위가 묘사되는데요. 독자의 흥미를 끌어야 하는 신문소설의 한계일 수 있겠지요.

    “인정합니다. 그러나 얼토당토않은 정사(情事) 장면은 없어요. 보부상(褓負商)은 보따리 장사인 보상과 등짐 장사인 부상을 합친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객지 생활을 합니다. 몇 달씩 혹은 1년 넘게 객지로만 떠도는 사람들이에요. 식구를 데리고 다닌 것이 아니죠. 피가 뜨거운 젊은 사람들이라 이성교제에서 상당히 난잡한 행태를 보였어요.

    보부상의 채장(일종의 신분증)에는 보부상이 지켜야 할 도리가 명기돼 있었어요. 그 중 하나가 보상, 즉 여상의 신발은 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자 상인에게 근접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이성관계가 난잡했기 때문에 그런 주의사항을 둔 거죠.

    소설 쓰기에서 인간의 본능에 대한 욕구를 구태여 비켜갈 뜻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본능에 내재한 섹스 욕구를 생명의 활력 차원에서 바라볼 수도 있지요. ‘농무’의 시인 신경림씨가 객주에 나오는 정사 장면은 ‘천하지 않다’고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필자가 “문화일보 연재소설 ‘강안남자’는 읽습니까” 하고 묻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직장인들이 주로 읽는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읽지 않습니다” 하고 답했다.

    피 묻은 골무

    -가난과 아버지의 부재(不在)가 성장기에 영향을 미쳤다고 했는데요. ‘홍어’ 같은 소설에도 아버지의 부재와 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는 제가 스물다섯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공무원이시던 아버지는 다른 곳에서 사셨죠, 어머니와 떨어져서.”

    파라다이스 문화재단 이사장 된 ‘객주’ 작가 김주영

    김주영씨는 ‘객주’ 집필을 위해 수년간 전국의 장터를 샅샅이 훑었다고 한다.

    -그 시대의 남자들이 흔히 그랬듯이 두 가정을 꾸리신 건가요.

    “그렇죠. 편모 아닌 편모 슬하에서 자란 거죠. 저는 찌그러진 결손가정에서 자라는 처지를 불행하게 생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런 환경이 저를 조숙하게 만들었어요. 고향 분들이 ‘주영이 너는 깡패가 됐어야 맞는데, 어떻게 글을 쓰는지 몰라’ 하고 말하는 것을 가끔 들었습니다. 사람은 환경보다 천성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 같아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습니까.

    “원망했죠. 정돈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게 만든 근본원인을 아버지가 제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욕은 안 했지만 아버지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 않았죠. 아버지는 자식 교육에도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학비를 대주는 일도 등한히 했죠. 제 인간 됨됨이를 만들어주는 데도 기여한 바가 거의 없습니다. 아버지는 자주 볼 수도 없고 저 혼자 바람처럼 허전하게 살았던 거죠.

    그런데 마흔 살을 넘기면서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습니다. 김주영이란 이름도 아버지가 주셨죠. 궤변 같지만 40세 이후부터는 아버지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어요.”

    아버지와 어린 시절에 관해 말하는 동안 그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궁금증은 남아 있었지만 심각한 어조로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그에게 그 시절의 상처를 후벼 파는 질문을 계속 던지기가 어려웠다.

    올해 아흔한 살인 작가의 어머니는 고향 청송에서 정정하게 살아가고 있다.

    -작품에도 어머니 이야기가 많이 나오더군요. 작가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이 어른이 젊은 시절에 고생해 장수하시는 것 같아요. 어머니는 주로 품앗이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어요. 삯바느질과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해주고 연명했죠.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에 삯바느질 장면이 나옵니다. 밤에 자다가 불이 켜져 있어서 깨어 보면 새벽 3시, 4시경인데 어머니가 윗목에서 바느질을 하고 계셨습니다. 아침에 보면 바구니에 피 묻은 골무가 놓여 있었어요.

    어머니는 학교를 다니지 않아 일자무식이셨죠. 제가 학교 다닐 때 글자를 가르쳐드려 나중에 언문은 깨치셨습니다. 젊은 시절엔 어머니가 글자를 모르는 것이 창피해 숨겼지만 지금 생각하면 눈물겹고 대단한 어머니셨습니다.”

    일제가 근대 교육기관을 들여온 뒤에도 식민지의 가난한 백성들은 남존여비(男尊女卑) 사고에 젖어 아들은 논밭 팔아 가르치면서도 딸은 학교에 보내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홍어’는 아버지의 이미지

    -자전적 성장소설 ‘홍어’에서 홍어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TV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에서 홍어를 흥미롭게 봤어요. 홍어는 양옆에 날개를 단 모습으로 바닷속을 부드럽게 유영합니다. 방랑의 이미지를 갖고 있어요. 헤엄치지 않을 때는 모래 벌에 숨어서 눈만 내놓고 있습니다.

    홍어 낚시엔 미끼를 쓰지 않습니다. 큰 갈고리를 가지고 모래를 긁습니다. 거기에 홍어가 끌려나오죠. 헤엄치는 모습이 율동적이고 아름답습니다. 홍어는 존재가 잘 확인되지 않는 방랑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어요. 그러니까 홍어는 제 아버지의 이미지입니다.”

    김주영은 대구농고 3학년 때 교지(校誌)에 ‘훈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소년이 저물녘 들에서 자반 한 손 짚끈에 묶어 들고 탁배기에 취한 걸음으로 돌아올 아버지를 기다리는 쓸쓸한 배경의 소설이다.

    파라다이스 문화재단 이사장 된 ‘객주’ 작가 김주영

    김주영씨는 신문 사설과 칼럼을 열심히 읽는다.

    -언제부터 문학을 평생의 업으로 삼을 생각을 했습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뭔지도 모르고 ‘현대문학’을 사보았습니다. 손창섭(孫昌涉) 작가가 기억에 남아요. 암울하고 배타적인 작품 분위기가 제게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죠. 오영수(吳永壽) 선생이 쓴 동화적인 분위기의 소설도 좋아했죠.”

    김주영은 대구농고 축산과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다녔다. 박목월, 서정주, 안수길, 김동리, 최정희 등 기라성 같은 교수들이 있었다.

    -시골에서 농고를 다닌 학생에게 대단한 문화충격이었겠네요.

    “아버지가 ‘농고 축산과를 나왔으니 경북대 농과대학 축산과를 가라’고 하셨죠. 졸업하고 시골에 있는 땅에서 목장을 하라는 것이 아버지의 명령이자 바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절 몰랐던 거죠. 아들놈이 소설가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셨죠. 교장과 담임선생님의 추천서를 몰래 받아 서울로 도망 와 서라벌예대 시험을 쳤습니다. 실기 산문시험 제목이 하필 ‘아버지’였어요.

    어쩌다 합격해서 학교에 다니는데, 강의시간에 대가들이 나타나는 거예요. 충격이었죠. 고생하는 어머니를 졸라 김동리 선생의 ‘사반의 십자가’라는 소설책을 한 권 사 책장에 모셔놓고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김동리 선생이 천상에 있는 분 같았어요.

    김 선생이 키가 좀 작습니다. 나중에 보니 구두 굽을 여자 구두 굽처럼 높여놨더군요. 그걸 보고 비로소 김 선생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인식했죠. 그분들한테서 글 쓰는 기교를 배웠다기보다 글 쓰는 정신을 배웠습니다. 젊음의 모든 열정을 문학에 쏟아도 괜찮다는 신념을 갖게 됐어요.”

    대가들의 고언

    1학년 때 다른 학생들처럼 시 열 편을 써들고 박목월 시인을 찾아가 ‘읽어봐 달라’고 요청했다.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도 반응이 없었다. 박 시인을 찾아가는 용기를 내는 데만도 3∼4일이 걸렸다. 교수실에 가니까 마침 박 시인이 손을 씻고 있었다.

    “‘선생님, 보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응, 봤지. 그런데 말이야, 자네는 운문에 소질이 없는 거 같아’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더 붙잡고 얘기할 용기가 없어 고심하다 그대로 나와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바로 자원입대했습니다.”

    -상심이 컸던 건가요.

    “너무 컸어요. 아버지 몰래 가출해 합격했고 양조장 서기로 근무하는 외삼촌이 입학금을 대줬어요. 미아리 꼭대기 허술한 집에서 자취생활하는 학생에게 하늘 같은 선생님이 ‘자네는 운문에 소질이 없는 거 같아’라고 말했으니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기분이었죠.”

    서라벌예대 동기생으로 소설가 천승세, 유현종, 송상옥과 동국대 홍기삼 총장 등이 있다.

    -안동 엽연초생산조합 주사로 근무할 때 계속 습작을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관사에서 살았죠. 경리 일을 봤거든요. 1년 내내 똑같은 일만 반복하는 겁니다. 그게 고문입니다. 가장 지독한 고문이 똑같은 일을 자꾸 반복시키는 거예요. 어떤 영화에서 죄수들을 아침에 넓은 들로 데리고 나가 땅을 파게 하더군요. 죄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종일 구덩이를 팝니다. 다 팠다고 보고하면 다시 메우라는 지시가 내려옵니다. 그걸 반복하게 하니 결국 총을 빼앗아 그 간수를 쏴버리는 내용의 영화를 본 적이 있거든요. 거기 생활이 그랬어요. 10년 동안 똑같은 일을 하는 거예요. 그동안 한번도 습작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술에 절어 지냈어요. 술 마시다 외도나 하고….

    생활에 어떤 변혁을 시도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거예요. 그걸 ‘월간문학’에 투고했죠. 서른한 살 때였습니다.”

    김화영 고려대 교수는 김주영의 작품세계를 3기로 구분했다. 김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초기에는 속어, 비어, 상소리의 사나운 입담이 주축인 음산하고 거칠고 공격적인 일련의 작품들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사회풍자적인 작품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그의 거친 언어는 가난과 아버지의 부재에서 형성된 저항의식과도 뿌리가 닿아 있다.

    “초기엔 우리 사회가 산업화시대로 이전하면서 생겨나는 사회적 현상을 그렸죠. 사회의 진정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썼습니다.”

    -작품 경향이 바뀐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이병주 선생이 저를 한번 불렀습니다. 강가에 앉아 음식을 같이 먹었습니다. 이 양반이 ‘김군 말야, 문학작품이 우아해야 하네. 함부로 욕설 같은 걸 내뱉는 게 아니야’라고 충고하시더군요. 그런 말씀을 해주는 분이 주위에 없었어요. 그래서 아주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어요.

    ‘아, 이래서는 안 되는구나, 문학이 오래오래 남아야 하는 것인데, 오래 살아남는 문학이 되려면 품격을 유지해야 한다. 욕설하고 세상일을 빈정거리는 것으로 끝나버리고, 철학도 없는 소설을 써서는 안 된다.’

    이런 깨달음을 얻고 나서 문장을 가다듬기 시작했죠. 조용하게 가라앉은,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뭔가 스며들 수 있는 얘기를 해나가야겠다고 생각했죠. 단편소설 ‘달밤’, 장편 ‘홍어’ ‘멸치’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쪽으로 발전해온 거죠.”

    서당 훈장 어른이 장인으로

    작가 이문열씨는 김씨의 고향 진보에서 시오리(6km) 떨어진 영양군 석보면 출신이다. 석보면 사람들은 군계(郡界)를 넘어와 진보 장을 보았다. 이씨의 장형은 그와 진보중학교 동기동창이다.

    “이문열씨는 재령 이씨 집안입니다. 영양은 산골이었지만 상당히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죠. 영양의 재령 이씨들 중에는 6·25전쟁 때 좌익에 가담해 연좌제에 걸려 관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사업 쪽으로 풀린 사람이 많죠. 조지훈 선생도 거기가 고향입니다. 영양의 지식인들이 유행처럼 사회주의에 물들었다고 할까요.

    이문열씨 부친도 사회주의 성향의 지식인으로 월북했죠. 이씨가 대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떠돌이 생활을 한 것도 연좌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떠돌이 생활을 하며 한학(漢學)을 공부했죠.

    이문구씨도 선대가 좌파였죠. 당진이 고향인 시인 이근배씨의 부친도 좌파였습니다. 두 분 다 한학 공부를 깊이 했습니다. 신식 교육을 못 받으니까 한학에 열중한 것이죠. 그런 환경과 공부가 이문열, 이근배, 이문구를 낳은 것이죠.

    저도 방학 때 고향에 가면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죠. 나중에 서당 훈장 어른이 제 장인이 됐습니다. 고향이 지적 성장까지 감당해줬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애착이 남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고향에 지금은 청송보호감호소가 생겨 분위기가 살벌해졌지만, 감호소가 있는 고향도 어쩌면 나중에 저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요사이 고향에 들르면 새벽에 출소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곤 합니다.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되죠.”

    -지난해 총선에서 탄핵 바람에 열린우리당 ‘386 의원’들이 대거 국회에 진출했습니다. 열린우리당 공천심사위원을 지낸 작가로서 386 의원들이 제 몫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반체제 혹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에는 이상주의가 지나쳐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을 가진 분들이 더러 있어요. 이상주의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고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지 않다는 거죠. 현실에 발판이 없이 공중에 떠 있는 이상주의는 실패할 확률이 높아요.

    386 의원들이 교도소에서 책을 많이 읽었을 겁니다. 한쪽 방향의 책만 읽으면 이상주의로 흐르게 되죠.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책을 선택해야 합니다. 광복 후 문인 중에도 이상주의자가 많았습니다. 우익인 김동리 같은 분 빼놓고는 거개가 월북했죠.”

    그는 신문 사설과 칼럼을 열심히 읽는다. 언젠가는 ‘동아일보’에 실린 한 사설을 읽고 마음에 들었던지 지인(노한성 파라다이스 감사)을 통해 사설을 쓴 필자와 연락해 만난 적이 있다.

    “신문 사설 빼고 나면 뭘 읽겠습니까, 사설과 칼럼이 맨 뒤로 밀려났지만 난 그거 많이 읽습니다.”

    공천 심사 때 ‘양심’ 지켰다

    파라다이스 문화재단 이사장 된 ‘객주’ 작가 김주영

    김주영씨는 “문화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적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2004년 총선 때 이문열씨는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을 했고, 김주영씨는 열린우리당 공천심사위원장을 했다.

    -고향은 같지만 이씨와는 정치적 성향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솔직히 진보니 보수니 하는 분류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양심적인 인간상을 추구하려고 애쓸 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이상주의자는 될 수 없겠죠. 저는 현실주의자이고 실용적인 사람입니다. 현실적으로 산다고 해서 정신은 하나도 없고 고깃덩어리만 왔다갔다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열린우리당 공천 심사할 때 군대생활하다 휴가 나와서 양심선언을 하고 군대 복귀 안 한 것이 양심적인 행위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죠. 저는 궤변이기 때문에 공천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죠. 군대 체벌이 두려웠다 하더라도 생명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거든요.

    저는 여당의 공천 심사 활동을 한 후 진보를 표방하는 당이나 정부에서 녹을 먹은 일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면 취했지, 거기에 적당히 넘어간 일은 없기 때문에 양심을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이문열씨의 경우 보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우리 사회의 뜨거운 논쟁의 한복판에 서서 정치사회적 발언을 자주 하는데요. 고향 선배이자 문단 선배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들도 정치적 발언을 강하게 합니다. 이씨는 연좌제의 피해자죠. 그러나 그런 것에 의한 영향보다 자기 판단에 의해 보수적 발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정치적 발언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세상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행동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황석영씨는 동인문학상 심사대상에 오르기조차 거부하던데요.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으로서 황씨의 생각에 동의할 수 있습니까.

    “‘창작과 비평(창비)’의 참여문학에 근거를 둔 문인과 ‘문학과 지성(문지)’의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문인들이 문단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습니다. 심사위원을 선정할 때 양쪽에 치우치지 않은 사람을 골라내느라고 ‘조선일보’가 애를 많이 썼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1998년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초청으로 시인 고은, 미술평론가 유홍준과 함께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 백두산과 평양 일대의 문화유적을 답사했다. 유홍준은 이 답사를 바탕으로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 3권을 썼다.

    “보통 사람들은 고은 선생의 북한 인식이 상당히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내가 보름 동안 동행한 경험으로 봐서는 고은 선생은 평균 수준으로 북한을 바라보려 애썼습니다.

    그분이 진보적이지 않냐, 친북적이지 않냐 하는 생각을 갖기 쉬운데 그렇지 않아요. 아주 냉정하고 평균적인 시선으로 북한을 바라보려 애쓰는 것을 봤습니다.”

    금연 후 한동안 집필 어려워

    -요즘 소설이 안 팔린다고 합니다. 인기작가의 작품도 안 팔릴까봐 초판을 1000부만 찍는다고 해요. 인터넷 때문이라고도 하고, 작가들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작품을 써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오는데요.

    “인터넷 때문이라곤 보지 않아요. 그 시대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각을 천착해 잘 쓴 소설이나 시는 팔립니다. 우리 독자층이 꽤 두텁습니다. 시집이 100만권이나 팔리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입니다. 일본에서는 시가 소멸되다시피 했어요.

    우리 사회의 고민을 제대로 다룬 소설이 나온다면 작가의 지명도와 상관없이 잘 팔릴 겁니다. 신인작가 김별아의 ‘미실’은 판매부수가 20만권에 육박했어요.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도 40만부 팔렸고 ‘홍어’는 30만부가 나갔습니다. 왜 독자가 없습니까.”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의 인세 1억4000만원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액 기탁해 김주영은 2004년 개인 최고 기부액을 기록했다.

    그는 지난해 40년 동안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6월15일로 금연 1년이 된다. 문이당 임성규 사장은 그가 담배를 끊은 후 새 작품을 내놓지 않아서 걱정이다. 작가는 청송군 진보면 진성중학교에서 1년 동안 임시 국어교사를 한 적이 있다. 임 사장은 그때의 제자다. 소설가의 꿈을 접은 임 사장은 스승의 소설집을 펴내는 출판사 사장이 됐다. 이문열씨도 가끔 문이당에서 책을 펴낸다.

    “기침이 너무 많이 나와 폐 검사를 해보니 담배를 끊지 않으면 오래 살기 힘들다는 진단이 나왔어요. 종합검진을 했더니 폐에 총알 맞은 것처럼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담배 끊고 난 뒤로 긴 글을 못 쓰고 있죠. 보통 하루에 두 갑을 피우다 글 쓸 때는 세 갑을 피웠어요. 담배를 먼저 끊은 작가들이 6개월 정도는 글을 못 썼다고 하더군요. 저는 한 1년 가는 거죠. 이제는 글을 써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장편 ‘붉은 단추’ 구상 중

    -구상 중인 작품은 어떤 것인가요.

    “‘붉은 단추’라는 제목입니다. 장편이죠. 아버지와 딸이 여행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써볼까 합니다.

    7월1일부터 연세대 배지성 교수와 함께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답사기를 쓸 계획입니다. 그걸 쓰고 나서 올가을부터 소설에 착수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일보’에 ‘화척’이란 소설을 연재하다 절필을 선언한 적이 있지요.

    “화척은 압록강변에서 고기 잡고 살던 천민이죠. 인간 대접을 못 받아 호적에도 못 올랐습니다. 부역도 면제받고 세금도 안 냈어요. 그들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죠. 만주에서 넘어온 여진족 계통이란 설과 백제가 망한 뒤 숨어 산 왕족의 후손이란 설이죠.

    저는 여진족이 넘어와 사는 걸로 보고 소설을 썼죠. 이걸 쓰다 보니 개성에 가봐야 할 일이 생겼어요. 당시 중앙정보부 허가를 받아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사람들과 접촉했죠. 그런데 북한대사관 직원들이 유경식당에서 만나기로 해놓고는 안 나오는 거예요. 오래 공들인 개성 방문 계획이 무산되면서 소설을 그만둬야겠다는 자포자기 심정이 생겼어요.

    그래서 1년 가량 놀고 있는데 ‘동아일보’ 고미석 기자가 적극적으로 따라붙어 소설 쓰라고 권유해 시작한 것이 ‘야정’이란 신문 연재소설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박정희 대통령 후반기부터 전두환 대통령 중반기까지 저도 반체제 인사들이 벌이는 데모에 꽤 열심히 참가했습니다. 창비 문인들과 연좌시위를 벌인 일도 있습니다. 시청 앞에 나갔다가 이마를 찍히기도 했죠.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를 했지만 독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상당 부분 있죠. 우리가 덮어놓고 그 사람을 매도해서는 안 되죠. 그 시대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역할이 컸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제가 경상도 사람이라고 해서 이렇게 말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저는 지역주의를 가장 싫어합니다. 지역적으로 덕 볼 생각은 조금도 해본 적 없고, 변명한 적도 없습니다. 박정희가 전라도 사람이든, 충청도 사람이든, 그가 한 역할을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박정희 시대는 갔어요. 지금 박정희 같은 대통령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박정희는 존재가치가 정말 뚜렷했던 거죠.”

    김주영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국민과의 대화’ 사회를 세 차례 맡았다. 김 전 대통령은 옥중에서 ‘객주’를 읽었다. KBS가 ‘국민과의 대화’에서 앵커가 사회를 보는 것은 너무 도식적이므로 다른 사람을 찾아보자고 건의하자 김 전 대통령이 그를 지목했다.

    KBS에서 연락이 왔는데 단번에 거절했다. 그는 정치에 대해 근본적으로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KBS 사람들이 대통령의 뜻이라며 매달렸다. 출연료도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했다.

    “글마, 출세했네”

    “그 양반이 ‘김주영과 얘기하기가 편하다’고 했대요. 제가 더듬거리거든요. 결코 달변이 아닙니다. 잘 웃고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그분한테는 편안한 상대였나 봅니다. 대담하는데 편안하면 말이 잘 나오거든요. 한번 맡고 나니 자꾸 연락이 와서 세 번이나 사회를 맡았습니다.”

    -DJ의 ‘국민과의 대화’ 사회자를 맡고 나중에는 열린우리당 공천심사위원까지 맡았으니 고향 분들한테서 가끔 싫은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까.

    “고향 사람들의 시각은 단순합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아주 단순해요. ‘글마(그놈) 출세했다’ 그겁니다. ‘시대가 이런데 저런 사람 만나고 열린우리당 공천심사하고, 자식 저거 자기 문학도 잊고 그러네’ 이렇게 복잡한 생각 안 합니다. 아주 단순해요, ‘글마 출세했어’ 이러고 맙니다.”

    김씨의 사무실엔 전경태 구례군수에게서 받은 명예군민증이 있다.

    “시간이 있으면 여행을 떠납니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각 지방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살려서 부각된 곳이 많습니다. 구례군은 자연 자산을 최대한 살린 동네입니다. 산수유 매화꽃 군락지와 섬진강에서 부는 바람으로 사람을 끌어모으죠. 섬진강 위에 있는 지리산을 팔아먹습니다. 자연친화적인 소재로 구례군을 업그레이드시킨 사람이 전경태 군수입니다. 글 쓸 때 몇 차례 구례의 사례를 언급했습니다. 천년을 가나 이천년을 가도 그 자산은 그대로 있는 것 아닙니까.

    섬진강에서 잡히는 참게, 조개, 은어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더욱 구례를 자주 찾게 돼요. 그랬더니 군민패를 주데요. 10돈짜리 거북이도 하나 줍디다. 그건 집에 갖다놨지요.”

    -영호남 지역감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고려 왕건이 어떻고 저떻고는 몇 백년 전 일로 필요없는 이야기죠. 정치적으로 잘못됐단 말이죠. 박정희 시대의 공과(功過) 중 과(過)에 해당하죠. 호남 을 괄시한 거죠. 경부고속도로를 내고, 구미에 공단을 짓고, 포항에 제철소를, 울산에 조선소를 만들었습니다. 전부 다 경상도 지방에 했습니다. 경상도 지방에만 특혜를 주는 과오를 박정희 시대에 저지른 건 틀림없죠. 상대적으로 전라도 지방이 낙후됐죠.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제 아들(김대일)이 울산대 첨단소재공학부 교수로 있습니다. 손자들이 오염된 공기에 노출돼 있어 항상 걱정돼요. 상대적으로 낙후돼 있던 전라도 지방에는 그런 걱정이 없습니다. 앞으로 낙후지역에 배려 함으로써 조화롭게 하나하나 해결해나가야 합니다.”

    ‘휴먼 원정대’에 2억원 협찬

    파라다이스그룹 창업주 고 전낙원씨는 카지노 산업을 투명한 코스닥 등록 기업으로 키운 전문 CEO다. 외국인 카지노 사업이라서 광고도 안 하고 소문나는 일도 피해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전낙원씨의 선친 전주부씨는 목사였다. ‘낙원’이라는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파라다이스’의 번역이다. 함경북도 무산에서 광산을 하던 전주부씨 집안은 광복 후 북한에서 남쪽으로 내려올 때 열차의 객차 한 량을 대절할 정도로 부자였다.

    전주부 목사가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는 바람에 가족들은 전쟁통에 가난에 시달렸다. 전낙원씨는 먹고살기 위해 미군부대에 취직해 카지노 CEO로 일하면서 슬롯머신과 연을 맺었다. 고인은 1973년 관광공사에서 워커힐호텔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인수해 키웠고 호텔, 면세점, 건설 등 관광·레저산업 전반으로 사업영역을 넓혀 파라다이스그룹을 일궜다.

    전낙원씨의 누나인 수필가 전숙희(田淑禧·86)씨는 펜클럽 한국대표로 활동했다. 1989년 동생이 문화재단을 만들며 상임이사 겸 사무국장을 구하자 전 여사는 김주영씨를 천거했다. 창업주가 지난해 11월 별세하면서 김씨는 문화재단 이사장직을 승계했다.

    “전 회장은 문화예술계를 폭넓게 도와주었습니다. 장례식 때 내로라하는 음대 교수들이 서로 나서 조가를 부르고 피아노를 쳤어요.”

    그는 63세 때 전 회장의 권유로 골프를 시작했다. 해외출장에서 돌아온 전 회장이 그에게 골프채 한 세트를 선물로 주며 골프를 배우라고 권유했다. 6개월 동안 꿈쩍도 않다 채근을 받고 타워호텔 연습장에 나갔다.

    전 회장이 머리를 얹어주며 ‘골프는 욕심내면 안 된다’는 말을 했다. ‘욕심내지 말라’는 말을 골프를 넘어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핸디는 90대 초반. 문인들 중에는 최인호, 신봉승, 이어령, 유현종씨가 골프를 친다. 그는 “1년 동안 골프에 빠져 있었다”며 “골프가 글 쓰는 시간을 빼앗아간다”고 말했다.

    파라다이스 문화재단 이사장 된 ‘객주’ 작가 김주영

    필자와 환담을 나누는 김주영씨.

    파라다이스 문화재단은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이끄는 초모랑마 휴먼 원정대에 2억원을 내놓았다.

    “돈을 냈는데도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신문사와 방송국에서 협찬사로 넣어주지 않았죠. 언짢은 일이었습니다. 카지노 산업에 대한 인식이 뒤틀려 있습니다. 그런데도 좋고 의미 있는 일이라서 2억원을 쾌척했지요.”

    -문화재단을 어떻게 운영할 건가요.

    “대다수 문화재단이 천편일률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누가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면 이사회에서 심사해 돈 주는 거지요. 이제는 문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를테면 먼저 우리 문화가 어떤 분야에 중점을 두고 발전해나가야 하는지를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지원하는 거죠. 한국 산업이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전환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시기에는 사회적 상상력이 동원돼야 합니다. 서비스업에는 상상력의 은행, 상상력의 창고가 필요합니다. 문화재단이 발전방향을 제시하고 여기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신청을 받는 공모제를 시행하려 합니다.”

    후회가 있다면 ‘연애’ 못 해본 것

    김씨는 키가 180cm로 장대 같고 인물이 훤하다. 칠성사이다 광고 모델을 했다. 언변이 좋고 글도 잘 쓴다. 옛 표현을 빌리면 이른바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갖췄다.

    -젊은 시절에 여성들이 따라다니지 않았나요. 연애를 많이 해봤을 것 같아요.

    “요즘은 연애란 말을 쓰지 않더군요. 젊은이들은 애인이란 말에도 진저리를 쳐요. 남친(남자친구) 여친(여자친구)이라 하더군요. 저는 여친 복이 없었어요. 좋은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어요.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장가가서 애들도 생겨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곁눈질을 못할 형편이었죠. 제 삶에 후회가 있다면 연애를 못 해본 것 딱 한 가지예요. 염사(艶事)라고 해봐야 술집 여성들과 몇 번 있었던 일이죠.”

    아내 김진득(金震得)은 그에게 한문을 가르쳐준 서당 훈장의 딸이다. 초등학교 동기생이지만 김 여사가 한 살 위다.

    “어려서부터 서로 빤하게 알았죠. 장인어른이 한학을 아주 깊이 하셨어요. 마을 사람들에게서 존경받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서당을 짓고 돈을 받지 않고 가르쳤죠. 방학 때 가서 한문을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천자문을 주시더라고요. 다른 사람이 배우고 반납한 헌 책이라 너덜너덜했어요. 소학까지 읽었습니다. 제가 결손가정에서 자라고, 부잣집 아들도 아니고, 좋은 학교 다니는 놈도 아니고, 빌빌거리는데 아마 가능성을 보고 딸을 주신 것 같아요. 장인이 먼저 제안했어요. 그분이 한학을 하셔서 사주를 볼 줄 아셨든지 안 그러면….”

    인터뷰를 끝내고 저녁을 먹으며 둘이서 소주 두 병을 비웠다. 좌우명을 묻자 그는 거짓말 안 하고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평범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도덕률이다.

    술기가 조금 올랐을 때 그 유명한 육담(肉談)을 청했다. 허허 웃더니 금방 신이 나서 몇 토막을 들려줬다. 함께 저녁을 먹던 속기사가 얼굴을 숙이고 쿡쿡 웃었다. 우리는 한번 더 만나 술과 대화의 자리를 갖기로 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