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김진경

‘이건 시련도 고초도 아니다!’…수갑 찬 채 마주친 선생님의 뜨거운 눈빛

  • 고진화 국회의원·한나라당 www.gocorea.or.kr

    입력2005-11-10 17: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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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동하는곧은 지성, 시골 아저씨 같은 풋풋한 향기.까까머리 고등학생이던 1980년, 내가 김진경 선생님을 처음 뵈며 떠올린 느낌이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감상은 그대로다. 지식을 전달하는 것, 인격을 가다듬는 것, 인생의 목표와 시대정신을 깨우치도록 도와주는 것. 김 선생님께선 스승으로서 가져야 할 세 가지 덕목 중 어느 하나도 간과하지 않았다. 내가 아직도 그분을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더구나 김 선생님은 내게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함께 겪고 헤쳐나간 민주화·시민운동의 동지였다.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 1990년대 시민운동의 태동기, 그리고 지금까지 김 선생님과 나는 현장의 제일선에 서 있었다. 그렇기에 김진경 선생님은 가장 순수한 인생의 스승이자, 가장 열정적으로 지성을 실천한 시민운동의 선배로 내 가슴속 깊이 아로새겨졌다.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라”

    김진경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서울 우신고 2학년 때다. 국어를 가르치시던 김진경 선생님의 첫인상은 신선함 그 자체였다. 선생님은 1970~80년대에 흔히 떠올리는 교사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달랐다. 다른 학생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선생님은 권위의식에 젖어 획일적인 학교문화를 강요하기 일쑤였다. 개인차는 있었지만 전체의 질서를 잡기 위해 학생에게 체벌을 하거나 인격적으로 상처를 줄 수 있는 꾸지람을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군사정권의 영향이었겠지만 이러한 비인격적인 행동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던 시기에, 선생님의 행동은 모든 것이 정반대였다. 자유방임이라 할까? 아니면 자율책임이라 할까? 적응하기 어려운 선생님의 지도 스타일 때문에 당시엔 다소 혼란스럽기도 했다. 시간이 꽤 흘러서야 선생님이 학생을 대하는 모든 언행이 자연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자기가 할 일은 스스로 알아서 실행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내심 환호성을 지르다가도, 동시에 그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는 중압감에 눌리곤 했다. 마음대로 행동하고 잘못되면 벌을 받으라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지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것인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나는 학급의 반장이었다. 자율과 책임의식을 강조하는 선생님의 스타일로 인해 처음에는 ‘수업시간에 학급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지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의 수업시간만 되면 반장으로서 더욱 긴장했다. 엄숙해야만 할 수업 분위기가 흐트러진다면 반장인 내게 큰 부담이 될 터.

    사실 선생님의 수업은 초기에는 그야말로 자유방임 기간이었다. 조는 학생, 자는 학생, 심지어 아예 수업을 듣지 않고 다른 책을 보는 학생까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자율이라는 개념이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히려 대부분의 학생이 선생님 시간만 되면 강의를 들으려 귀를 쫑긋 세웠고, 선생님이 해주시는 이야기에 압도당하곤 했다. 수업시간이 더 진지해진 것은 물론이다.

    체벌을 하고 큰소리를 쳐서 겨우 진정되던 교실 분위기가 부드러운 말 한 마디에 봄바람처럼 따뜻해졌고, 수업시간에 조는 학생도 눈에 띄게 줄었다. 당시로서는 생소한 형태의 카리스마에 매혹되면서 몇 달 뒤부터는 학생들 모두 김진경 선생님을 좋아하게 됐다. 점수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아마 다른 선생님들이 지도했을 때보다 학급 분위기가 훨씬 진지하고 열의에 차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광주의 비극을 듣다

    자율과 책임의식이 어느 정도 싹트자, 선생님께서는 잔잔한 내 마음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켰다. 파문은 김 선생님께서 1970~80년대 사회에 대한 분석을 들려주면서 시작됐다. 나는 법대에 진학해 판·검사가 되고 싶었고,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꿈꾸던 평범한 청소년이었다. 그러나 김진경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내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한 지 2주 정도 지난 5월말이었다. 신문과 TV뉴스는 ‘광주사태’라는 제목을 통해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나 군과 경찰이 진압에 나섰다는 소식만 전하던 무렵이었다. 점심을 먹고 난 오후 수업시간에 김 선생님이 침통한 표정으로 교단에 올라섰다. 그리고 한참 후 입을 열어 우리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을 알고 있느냐?”

    우리들 대부분은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났다는 정도의 얘기밖에 들은 바가 없었다. 그러자 김 선생님은 고개를 숙인 채 책을 덮었다. 그리고 군사 독재정권이 광주에서 시민에게 발포하고 폭행과 가학행위를 저질렀다며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도 광주의 비극에 대해 자세히 몰랐다가 한 지인이 광주에서 찍은 사진과 그의 생생한 수기를 접하고 나서 한참을 흐느꼈다고 했다.

    선생님은 칠판 가득히 광주의 비극에 대해 써가며 암담한 현실과 민주정치에 대해 한 시간 내내 울분에 찬 강의를 쉬지 않고 진행했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이것이 사실일까. 광주의 참상을 듣고 나서 나를 포함한 모든 학생은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선생님도 우리와 같이 흐느꼈다.

    1980년 5월은 정말 슬펐다. 내 마음속엔 뜨거운 피가 돌기 시작했다. 광주에서의 함성은 내 인생을, 내 가치관과 꿈을 바꿔놓은 결정적 계기가 됐다. 훗날 대학에 진학해 광주 민주화운동을 담은 사진자료와 영상물을 볼 때마다 나는 고등학교 때의 그 뜨거운 피가 심장과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고, 새로운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를 찾기 시작한 나는 김진경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잦아졌다. 여름이 시작되던 계절의 문턱에서 학교 벤치에 앉아 선생님과 장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선생님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지식인은 무엇이냐?”

    선생님이 내게 처음으로 던진, 교과과정 밖의 질문이었다. 지식인? 설마 지식인이 무엇인지 모르셔서 물어보신 것은 아닌 듯한데, 내 입에서는 단 한마디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만 지으시곤 그냥 내 앞을 지나가버렸다. 그날 밤 나는 숙제도 하지 않고 ‘지식인이 무엇이냐?’는 숙제 아닌 숙제에 매달렸지만 신통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그 다음날 수업시간이 끝나고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반겨주셨다. 그리고 곧바로 지식인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말씀을 들려주셨다.

    많은 얘기를 하셨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배운 만큼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 양심과 역사와 시대정신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지식인이라는 것이었다. 내게는 절반만 이해가 되는 강의였다. 역사와 시대정신. 도대체 그 정신은 교과서에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누가 내게 가르쳐준 적도 없는 생소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무엇이냐

    나중에 든 생각이지만,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내 인생에서 충격과 희망이 동시에 다가온 순간이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김 선생님이 내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를 정해주신 분은 아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분명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해준 ‘열쇠지기’였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튀어나온 다음 과제는 ‘역사 주체로서의 시민의 역할’이라는, 더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 무렵엔 교육방침의 하나로 학생들이 위인전을 많이 읽게 했다. 역사의 위인과 영웅에 대한 글을 많이 접하면서 영웅주의 역사관이 마음속 깊이 자리잡던 때였다. 그러나 김진경 선생님은 ‘역사의 주체는 시민’이라고 해서 충격을 던졌다.

    김진경

    지난 5월 청와대 사회정책수석실 교육문화비서관이 된 김진경 선생(왼쪽)과 고진화 의원.

    아무런 힘도 없는 시민이 어떻게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일까. 어려운 개념도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해주는 것이 선생님의 특기이자 장점이었다. 방과 후 선생님은 자장면을 사주시면서, 해방전후사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광복 이후 과거 청산을 하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게 한 우리의 과오가 있었으며, 평범한 시민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바꾸고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고 민주화를 이뤄가는 과정이 평범한 시민의 위대한 힘이라고 하셨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내 가치관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였다면, 민족정신과 평화에 대해 나눈 선생님과의 대화는 훗날 나의 정치적 비전에 큰 영향을 줬다.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을 하면서 틈틈이 한국 현대사와 민족사에 대해 공부하게 됐고, 그러던 와중에 장준하 선생과 김구 선생의 삶을 접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 이후 1990년대, 민족정신과 평화애호 정신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졌다.

    ‘문화대국론’을 주창하며 남과 북을 하나의 조국으로 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김구 선생. ‘자유와 민권’을 향한 비타협적 저항정신의 상징이자 ‘사상계’로 커다란 족적을 남긴 행동하는 지식인 장준하 선생에 대한 이미지가 방황하는 젊은 청년의 가슴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민족정신에 대해 눈뜨고, 대학교 때 민족사를 공부했으며, 이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김구 선생과 장준하 선생을 주저 없이 꼽게 됐다.

    김진경 선생님은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도 ‘남북한 평화체제의 정착과 화해와 교류를 통한 통일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 선구자였다. 국시(國是)는 반공이고, 이승만 정권 때 제기된 북진통일론을 외치는 사람이 여전히 많던 시절이라 선생님의 생각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구치소에서 이뤄진 사제 상봉

    1985년, 나는 미문화원 점거사건으로 경찰을 피해 다니다 결국 신민당 총재 사무실에서 민주헌법쟁취 연대투쟁을 제안한 후 경찰에 연행됐다. 서울시경 대공분실에서 십수일간의 조사를 마치고 검찰의 수사를 받기 위해 서대문구치소로 이송됐다. 감방에 있으면서 혈기가 끓어오르던 20대 젊은이의 가슴을 짓누른 것은 시경 대공분실의 천장이 아니라, 시민과 학생이 중심이 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할 수 없게 된 현실이었다.

    그때 김진경 선생님은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민주적 학교 개혁에 대한 글을 많이 쓰셨다. 군사정권에선 용인되기 어려운 주장이다 보니 그로 인해 선생님도 수감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나온 선생님은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1년2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셨다. 나도 당시 미문화원 점거로 3년 가까이 감옥에 있었다. 김진경 선생님이 서대문구치소로 이송된 시기는 공교롭게도 내가 서대문구치소로 이송되던 때와 일치했다.

    검찰로 송치되던 그날 나는 교도관과 경찰의 요구에 따라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누군가가 내 머리에 손을 스치고 지나갔다. 고개를 들고 뒤돌아보는 순간 내 뒤를 지나 멀어져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김진경 선생님이었다. 수갑이 채워지고 포승에 묶인 채 교도관에게 둘러싸여 있던 선생님, 단 1초라도 시선을 마주치려고 고개를 돌린 채 눈빛을 건네준 선생님…. 갑자기 주루룩 한 줄기 눈물이 솟구쳤다. ‘선생님이 왜 여기 계시냐’고 묻고 싶었다. 제자로서 송구스럽다고 말하고 싶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토론하고 선생님의 가슴에 기대어 마냥 울고 싶기도 했다. 말을 걸 수도, 쪽지를 전할 수도 없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나 김진경 선생님의 눈빛은 초여름 바람처럼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시련도 아니고 고초도 아니다. 시대정신을 안고 살아가는 지식인의 참모습이다.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동지로 여기에 선 것이다. 끝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이다. 선생님은 그런 뜻이 담긴 나지막하고도 뜨거운 눈빛을 내게 건넸다.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은 대화, 그러나 말보다 더 강한 마음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사제의 만남이 이뤄졌다. 조사를 받고 돌아온 후 방에 앉아 선생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앞으로 나아갈 ‘항해일지’를 미리 쓰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진경 선생님은 그날 밤 한 편의 시를 쓰셨다. 필기도구를 지참할 수 없었기에 선생님은 뾰족하게 간 나무젓가락을 책이나 은박지에다 눌러 희미하게 자국을 내서 시를 쓰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고진화’라는 시다.

    고진화

    타이프 치는 소리가무표정하게 튀다 멎는검찰청의 복도를 너는 걸어오고 있다오랫동안의 잠행으로 야윈 얼굴 깊이에서충혈된 너의 눈이 반짝이고두 손에 채워진 수갑이 무겁게 중얼거리고 있다침묵하라 침묵하라고

    나는 모르겠다네가 나에게 무엇을 물었었는지내가 선생이고 네가 학생이었던 그 학교의복도에서였는지, 퇴근길의 교문에서였는지네가 죄수복처럼 걸치고 있던 제복의 의미에 대해서였는지아니면 그 해의 늦봄에 핀 피의 의미에 대해서였는지쏘아보던 너의 눈빛은 오래 남아 있지만

    모르겠다내가 너에게 무엇으로 기억되어 있는지몇 마디 네가 확인하고 싶었던 진실로 기억되어 있는지막히는 말 대신 흘리던 눈물로 기억되어 있는지몇년 만인가 수갑 찬 손으로 더듬는 우리들의 만남따스한 체온이 짧게 흐르고타이프 치는 소리가무표정하게 우리들의 만남을 갈라놓는다

    무엇을 치고 있을까네가 확인하고 싶어했던 몇 마디 진실들을너의 눈빛을너의 따스한 체온을그것은 범죄행위로 기록하고 있겠지무표정하게 튀어오르는 타이프라이터 너머로뿌옇게 김 서린 유리창 너머로 내리는 숨죽인 눈발

    내리는 눈발이 침묵으로 쌓여 얼어붙는다 해도그러나 쌓이는 눈 속 깊이 너의 눈빛은 살아 있다눈물이 얼어붙은 풀뿌리에도잠들 수 없는 우리의 말들은, 식지 않는 체온은 그러나…(‘우리시대의 예수’ 중에서)

    이 시를 읽은 것은 나중의 일이다. 선생님이 먼저 구치소에서 나가시고 나는 그보다 조금 늦게 나왔는데, 나중에 후배가 이 시집을 사서 내게 선물로 주었다. 시집을 받자마자 이 시를 읽었는데, 암울하던 시절의 그 장면이 마치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떠올라 잠시 말을 잊고 말았다.

    수갑을 차고 포승에 묶인 채 선생님과 마주친 그 상황은 오히려 어렵던 시절에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강한 동기를 부여했다. 고등학교 사제간에서 민주화운동의 동지로 새로이 조우한 일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또 하나의 가르침이었다.

    김진경 선생님은 “대한민국이 통일 이후 동북아 시대의 중심국가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교육정책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살아 있는 현장의 지식을 전달하고 책임 있는 자율 민주시민을 양성하자는 게 그 핵심이다.

    김 선생님은 민중교육지 사건 이후 전교조 창립을 주도했다. 특히 국어과 교과모임을 창설해 연구위원과 대표로 활동하는 데 주력하셨다. 김 선생님은 “교육을 기획하고 교과서 내용을 채택하는 데 현장의 교사들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신 분이다.

    민주적 리더십

    일선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실천 가능한 대안을 제시했는데, 최근에는 교육혁신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교과서의 자유발행을 정책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자율성과 인간성이 보장된 민주주의 교육은 일선 현장에서 시작돼야 한다는 생각은 선생님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와 합치된다. 최근 선생님이 펴낸 교육 에세이 ‘미래로부터의 반란’을 구해 읽어봤다. 특히 “학생들의 다양한 관심과 재능을 살리는 쪽으로 공교육의 근거를 찾아야 하며, 자율성과 책임의식을 기르는 쪽으로 교육 목표가 지향돼야 한다. 3명의 교사가 교과, 학급, 진로활동을 각각 담당하는 복수 담임제를 도입하자”는 혁신적인 정책 제시안을 보며 크게 공감했다. 김 선생님은 나의 학창시절에 교과나 학급 담임이 아닌, 진로활동 담임이었기 때문이다.

    판·검사를 꿈꾸던 내가 시민운동과 민주화운동으로 진로를 전환한 결정적 계기는 바로 선생님과 많은 시간을 두고 토론하면서 리더십의 중요성에 대해 눈뜬 것이다. 선생님은 ‘리더십은 리더뿐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교육받아야 할 가치’라 강조하곤 했다.

    사람을 통솔하기 위한 리더십에서 시민사회의 조화를 위한 민주적 리더십으로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이 선생님의 리더십 이론이다. 이러한 리더십은 후일 학생운동을 하고 시민단체 활동을 해 나가면서 점차 신념이 됐고, 정치에 입문한 이후에도 난 선생님의 민주적 리더십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선생님은 당신을 시인이라 일컫곤 했다. 그는 문화의 힘을 일찌감치 체득하고 실천에 옮긴 선구자였다. 선생님은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한국 현대사와 민족정신을 힘찬 시로 표현했다. 학창시절 선생님은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의 작품을 소개했고, 교과 이외의 강의를 자주 열어 수험공부에 지친 우리에겐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최근엔 아동문학 작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당신이 결혼을 하고, 자식을 기르다 보니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만한 새로운 동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직접 동화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생님이 쓴 동화는 외국어로 번역돼 해외에서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김 선생님은 요즘도 올곧게 문화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그분에게 문화의 힘을 다룰 줄 아는 감각과 노력이 없었다면, 경험이 많은 칼럼니스트 정도의 ‘지적 능력’으로 오늘을 살고 계실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무도 저항할 수 없는, 그 어떤 힘보다 강한 문화의 힘을 알고 있었으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문화혁명가’다.

    나는 ‘대한민국을 평화와 민주정신을 바탕으로 한 문화대국으로 만들겠다’는 의정활동 목표를 세웠다. 이러한 문화대국의 비전은 선생님에게서 얻은 영감에서 비롯된다. 소프트 파워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이 주도적으로 문화의 힘을 펼쳐 나가야 한다는 ‘문화대국 비전’은 한류가 확산되고 국내의 문화적 토대가 견실해짐으로써 점차 현실화하고 있다.

    은사 이상의 은사

    감수성이 예민한 질풍노도의 시기에 만난 김진경 선생님. 그분은 스승으로서 내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도록 해준 은사였다. 학생에게 늘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이 개인적 영달보다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당신 스스로가 그 말을 지키며 평생을 살아왔기에 내겐 은사 이상의 은사였다.

    민주적 리더십을 키울 수 있도록 항상 옆에서 조언해주셨기에, 대학에 진학해서도 학생운동의 방향을 흔들림 없이 지켜갈 수 있었으며 소신과 원칙이라는 신념을 가슴속 깊이 간직할 수 있었다. 학교 공부 이외에도 겸손과 존중, 그리고 화합의 미덕을 강조하시던 모습은 내게 아버지 혹은 형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와 가족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선생님은 화려한 외모의 소유자가 아니다. 당신께서 늘 차분한 선비 같은 모습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멋을 부리거나 머리에 힘을 주려는 학생이 있으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면적인 충실함이 외면적인 것보다 중요하다”고 충고하는 세심한 면을 보여주시곤 했다.



    학창 시절 선생님은 자장면을 자주 사주셨다. 그때 자장면을 먹으며 듣던 선생님의 말씀들을 헛되이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늘 떠나지 않는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가 자장면 면발처럼 길게 이어지더라도 원칙과 소신을 잃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선생님께 드리고 싶다.

    지난 5월, 언론보도를 통해 김진경 선생님께서 청와대 사회정책수석실 교육문화비서관이 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율과 창의’의 시대, 민주적 리더십을 갖춘 훌륭한 학생들을 기르는 좋은 정책을 많이 만들어주실 것이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뵙고, 인생의 선배로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언해주시길 간곡히 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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