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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거물 화상(畵商) 되어 돌아온 청년 광부, 김희일 갤러리 아트뱅크 관장

“미술에 투자하세요, 루벤스와 벨라스케스가 곳곳에 묻혀 있어요”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거물 화상(畵商) 되어 돌아온 청년 광부, 김희일 갤러리 아트뱅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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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험심으로 독일 광부行을 택한 청년이 30년 뒤 세계 유수의 화상이 되어 돌아왔다. 낯선 땅 독일에서 미술을 알았고, 미술을 통해 삶의 충만함을 맛보았다. 독일은 후진국 노동자이던 그에게 문화학교이자 희망의 땅이었다. 청년으로 떠나 초로의 사업가가 되어 돌아온 고국에서 그는 거센 ‘미술 한류(韓流)’의 주역을 꿈꾼다.
거물 화상(畵商) 되어 돌아온 청년 광부, 김희일 갤러리 아트뱅크 관장
36년 전 한 청년이 독일로 갔다. 호기심과 모험심 넘치는 청년이었다. 낯선 나라를 동경했지만 가난했던 그가 유럽으로 떠나는 길은 광부가 되는 게 가장 빨랐다. 1970년 동료 200명과 함께 에어프랑스를 타고 일본을 거쳐 독일에 도착했다. 독일의 첫인상은 울창한 나무였다. 당시 막 산림녹화사업이 시작되던 한국의 민둥산만 보던 눈에 수백년 된 나무들이 울창하게 선 독일은 풍요 그 자체로 다가왔다.

탄광지대인 루르 지방 게르센키흐센이란 도시의 광산에 도착했다. 동백림 사건이 일어난 직후라 북한 사람을 조심하란 소양교육을 하도 철저히 받아서 한국인 비슷한 사람만 보여도 겁이 덜컥 났다. 당시 독일엔 북한 사람이 꽤 많이 살고 있었다. 우리보다 제법 여유도 있었다.

지하 1000m 막장 안은 뜨거웠다. 지열 때문에 기온이 늘 40℃를 넘었다. 안전모와 무릎 보호대를 차는 게 원칙이지만 워낙 더우니 벗어던질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각자 5ℓ들이 차 주전자를 싸들고 막장 안에 들어가 마시다 보면 그게 오줌 대신 모조리 땀으로 쏟아질 만큼 더웠다. 같이 간 동료 200명중 11명이 사망했을 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석탄을 기계가 파내면 그 뒤를 따라가면서 암석층에 받침대를 괴는 게 우리 일이었어요. 3년이 지나도 가래를 뱉으면 시꺼먼 탄가루가 나오데요. 막장에서 일본 규슈 탄광으로 끌려갔다던 사람들을 생각하고는 했어요. 조상들은 나라를 뺏겨서 징용에 끌려갔고 나는 돈 때문에 여기 팔려왔구나 싶었지요….”

첫 월급으로 380마르크를 받았다. 우리 돈으로 20만원쯤 되는 돈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서울의 웬만한 집값이 300만, 400만원 할 때였으니 제법 큰돈이었다. 그러나 그가 독일로 간 목적은 돈벌이는 아니었다. 공부를 하고 싶었다. 계약은 3년! 광부 생활 3년이 끝나자 예정대로 그는 근처의 보쿰대로 진학한다. 독일 노동자들이 갖는 자부심, 수입이 많건 적건 직업에 귀천 없다는 당당한 태도가 노동자를 위한 법적, 제도적 토대 때문임을 알고 나니 독일의 노동법에 대해 공부하고 싶었다.

법대에 진학했다. 당시 보쿰대엔 한국 유학생 10여 명이 공부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게 됐다. 말이 아니었다. 생활은 쪼들리고, 공부한 지 6∼7년이 지났다는데도 제대로 학위 하나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광부로 온 게 28세 때였으니 진학할 당시는 서른이 넘은 상태였고 6∼7년 공부하면 마흔이 다 돼버릴 텐데 이를 어쩌나 싶었다. 공부하면서 돈 벌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사업가 기질 발동

김희일(金僖一·64). 그가 호기심과 아이디어로 넘치는 사람이라는 말은 앞서 했다. 게다가 그는 성실한 노력가였다. 그런 그가 독일의 막장에서 일하던 1972년 뮌헨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살던 곳에서 800km 거리였지만 한국팀이 거기 와서 뛴다는데 응원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루르 지역 탄광 근로자 중 독일어 실력이 기중 나은 사람이 그였다. 주말에 그는 희망자들을 모아 올림픽 구경에 앞장서곤 했다. 여행사를 중간에 끼고 버스 예약하고 호텔 예약하고 통역과 안내를 도맡았다. 원래는 뮌헨 구경 희망자가 50명이었는데 그가 깃발을 들자마자 150명으로 늘어났다. 여행사측에서 약간의 사례금을 건넸다. 동료들이 고마워하고, 자신도 즐겁고, 돈도 만질 수 있고…. 그는 광부 시절에 이미 1석3조로 쏠쏠한 재미를 맛보는 주말여행 가이드가 됐다.

주말이면 단조로운 탄광촌에 머물지 않고 동료들과 파리로 런던으로 바르셀로나로 떠날 여행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엔 여행하며 유적을 공부하는 ‘수학여행’ 코스가 다양하게 개발돼 있었다. 그 코스를 우리말로 번역하고 그 무렵 한국에서 한창 인기 있던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를 참고해서 독자적인 유럽여행 상품을 만들었다. 아마 최초의 한글판 유럽여행 패키지 상품이었을 거다.

광부일 땐 대상이 동료들뿐이었다. 그랬는데 유학생이 되자 고객층은 함부르크 거주 조선공들, 지멘스에 와 있던 기능공들, 독일 전역에 1만명 넘게 거주하던 한국인 간호사들까지 두터워지고 다양해졌다. 자잘한 주말여행말고도 1년에 20일짜리 여행 두 건, 8일짜리 여행 두 건을 다녀올 정도로 분주한, 그는 어느새 여행사 가이드 겸업 학생이 돼 있었다. 잠복해 있던 사업가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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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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