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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권 광주요 회장의 한국문화 업그레이드 대작전

최고를 만들었느냐? 세계와 通하였느냐?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 사진·박해윤,김형우 기자

조태권 광주요 회장의 한국문화 업그레이드 대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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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관(判官)은 세계 문화를 주도하는 서구인이 맡아야 할 것 같은데, 이들은 서민풍의 한식당보다는 깔끔한 일식당을 선호한다. 그들에게 한식당은 이국 체험을 해볼 수 있는 1회용 방문처에 불과한 것 같다.

서구인 사이에도 스시 집에서 식사 대접을 받으면 ‘제대로 대접받았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일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는 ‘일류(日流)’가 구축됐다. 사실 ‘일류’를 키운 것은 경단련(經團連)을 중심으로 한 일본 기업인이다.

서구 출장에 나선 이들은 서구 손님을 스시 집으로 초대했다. 그러고는 육고기만 먹어온 서구인들에게 날생선이 건강에 좋다고 강조했는데, 이것이 사실로 입증되면서 스시 집은 날개를 달았다. 일본 제품의 수출 실적은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 뒤로 아기자기한 일본식 정원도 수출되면서 선(善)순환 구조가 생겨나 일본은 세계 일류(一流)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조태권 회장은 우리 음식문화를 세계화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의 양친은 귀국한 재일교포다. 덕분에 그는 경기중을 나와 일본에서 ASIJ라는 미국인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왜색’이란 단어로 비하해버릴 낮은 수준의 일본문화가 아니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화식(和式)’ 문화를 꿰뚫어볼 수 있는 토대를 갖게 된 것이다.

대학은 미국(미주리 주립대 공업경영학 전공)에서 나왔고, 첫 직장은 대우실업의 국제영업 파트였다. 이어 펼친 사업도 무역 분야라 그는 선·후진국을 넘나들며 다양한 것을 먹고, 입고, 놀아볼 수 있었다. 덕분에 일류(日流)가 세계화한 것을 보고 한류(韓流)도 국제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세계를 돌아다닐 때 한국에 정착한 그의 양친은 경기도 광주에서 도자기를 굽고 있었다. 광주는 1883년까지 조선 관요(官窯)가 있던 도자기의 땅이다. 관요의 불이 꺼지자 도공과 그 후예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그야말로 ‘독 짓는 늙은이’가 돼버렸다.

기원전 중앙아시아에는 동아시아에서 생산된 비단을 유럽으로 실어나르는 ‘실크로드’가 있었다. 그리고 중세 때에는 동양에서 제작한 도자기를 배에 실어 중동과 동부 아프리카로 수출하는 ‘세라믹 로드’도 있었다. 조 회장의 양친은 ‘독 짓는 늙은이’의 선배들과 일본 다도(茶道) 사이에 세라믹 로드가 있었음을 간파했다.

일본 茶道와 임진왜란

일본 다도의 틀을 잡은 인물로는 ‘일본의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센노리큐(千利休·1521∼91)가 꼽힌다. 상인이었던 센노리큐는 당시 이미 고급 문화이던 다도를 배운 후 상인 생활을 접고 다도 발전에 전념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는 작은 문을 낸 다실(茶室)을 만들었는데 이 다실은 깨끗하고 청아했지만 매우 좁았다. 이 작은 방에선 최고권력자일지라도 반드시 꿇어앉아 차를 마셔야 했다.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는데, 심미적이고 종교적인 색채의 일본식 다도는 여기에서 시작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심(下心, 겸손)’을 강조하며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은 ‘존경’이라는 이름의 권력을 잡을 수 있다. 센노리큐가 다도로 일가를 이루자 당대 최고실력자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그를 ‘차두(茶頭)’에 임명해 함께 차를 마셨다. 센노리큐와 함께 차를 마심으로써 무력뿐 아니라 문화력에서도 최고임을 과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세를 쥐려 한 것.

오다가 죽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가 권력을 잡았는데, 도요토미 또한 센노리큐를 가까이하며 다도를 일본 전역에 퍼뜨렸다. 그는 다도에 집착했기에 다기(茶器)를 고급화하다 못해 신성화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도요토미와 센노리큐는 결별했다. 전국(戰國)시대를 대표하는 사무라이인 도요토미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센노리큐도 그런 대상 중 한 명이었기에 그는 센노리큐에게 할복을 명령했다. 도요토미로서는 완벽한 복종을 요구한 것인데, 센노리큐는 ‘예술이 정치에 앞선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결심에 기꺼이 배를 그었다(1591년 2월28일). 순교에 가까운 센노리큐의 죽음으로 다도는 더욱 신비화했다.

센노리큐가 죽은 다음해 도요토미는 조선 침공(임진왜란)을 명령했다. 그에 따라 여러 장수가 조선에 상륙했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백자에 청자 빛깔을 넣은 청화백자를 만들고 있었다. 지금도 청화백자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기술로 꼽히니, 이 그릇을 본 일본 장수들은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릇을 송출하다 나중에는 심수관(沈壽官)의 선조인 심당길(沈當吉)을 필두로 한 조선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갔다(1598년).

도요토미가 죽고 임진왜란이 끝나자 최고권력자만 누리던 다도가 각 가문으로 확산돼 엔슈류(遠州流) 등 여러 유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사무라이를 거쳐 서민도 차를 마시게 되면서 일본 다도는 매우 풍성해졌다. 도요토미에 의해 강제적으로 만들어진 해상 세라믹 로드 때문에 일본 다도가 융성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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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 사진·박해윤,김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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