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호

무언의 승부사 김인식 한화 이글스 감독

자신감의 리더십, “너는 이것만 고치면 무조건 된다!”

  •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 사진·김형우 기자

    입력2006-04-28 15: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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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부족하면 칭찬, 잘해도 거들먹거리면 핀잔
    • 한번 더 보고 한번 더 참는 ‘한번 더 철학’
    • 대학감독 시절 1대 1로 150잔 대작한 전설의 술꾼
    • WBC 야구 붐 이어가려면 미국 횡포 용서해야
    • 야구나 인생이나 숫자에 빨라야 성공한다
    • 이승엽, 평년작만 해도 미국에서 스카우트 제의 올 것
    • ‘김인식 리더십’의 절반은 과장과 거짓말
    무언의 승부사 김인식 한화 이글스 감독
    그는 햇볕과 비바람에 거칠어진 석상(石像) 같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다. 미국을 7대 3으로 꺾을 때나 일본에 0대 6으로 패배할 때나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 야구장 덕아웃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경기에 몰입해 ‘돌부처’가 된다.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김인식(金寅植·59) 감독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 진출 이후 ‘국민감독’으로 떠올랐다. 45년 야구인생의 절정을 맞았다. 미국에서도 유명인사가 됐다. 귀국 길에 샌디에이고 공항에서 그를 알아본 미국 팬들이 다가와 사인을 해달라고 매달렸을 정도.

    김 감독의 숙소는 호남선 서대전역 바로 앞 삼성아파트에 있다. 용산역에서 KTX를 타고 서대전역에 내려 저녁 8시경 초인종을 누르자 김 감독이 반바지 차림으로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상의는 나이키 스우쉬 마크가 그려진 WBC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약간 절룩거리며 걸었다. 2004년 말 그를 덮친 뇌경색의 후유증이다.

    한화의 홈구장인 한밭야구장은 감독 숙소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있다. 유지훤 수석코치와 32평 아파트를 함께 쓴다. 남자 둘만 사는 집이라 실내가 썰렁했다. 나무 받침대 위에 올려진 야구 공 두 개가 이 집을 꾸미는 유일한 장식품. 두 남자는 세 끼 모두 외식을 한다. 주방에 취사도구나 식품은 보이지 않고 식탁 옆에 생수통 하나가 달랑 놓여 있다.

    책장에는 야구에 관한 책 몇 권과 고(故) 최명희씨의 ‘혼불’ 10권이 꽃혀 있다. 유승안 전 감독 때부터 있던 책이라고 했다.



    김 감독은 말이 느린 편이다. 틀니를 하면서 더 느려졌다. 장황한 수식이나 군더더기 표현 없이 천천히 생각해가며 요점만 간추려 말하는 스타일이다. 건강에 관한 이야기로 말문을 텄다.

    “뇌졸중은 어느 정도 회복됐습니까”라고 묻자 “뇌졸중이 아니라 뇌경색”이라고 고쳐주었다. 뇌졸중에는 뇌출혈과 뇌경색이 있다. 뇌출혈과 구분해달라는 뜻 같다.

    술, 담배, 스트레스 그리고 뇌경색

    “뇌의 기능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고 신체의 오른쪽이 자유롭지 않아요. 재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3년쯤 걸리는 모양이에요. 완전히 회복된다는 보장도 없고. 미국에서 WBC 경기 치르며 고생했어요. 국내 경기장의 덕아웃은 벤치에 앉아서도 선수의 움직임을 다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미국은 덕아웃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습니다. 앉아 있으면 선수의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아요. 3시간 내내 서 있어야 합니다. 피로도가 높아요. 성한 사람도 그렇게 서 있으면 다리가 아픕니다. 덕아웃에서 다리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어요. 어제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습니다. 더 절룩거리고 더 아프다고 했더니 미국에서 피로가 누적됐다고 하더군요.”

    -뇌경색은 왜 왔습니까.

    “술 담배에 과로와 스트레스 때문이겠죠. 당뇨는 없었는데 뇌경색이 생겨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뒤부터 당 수치가 높아졌습니다.

    -술 담배를 어느 정도나….

    “저는 그렇게 많이 마시는 거 같지 않은데 옆에서 많이 마신다고 했어요. 어떤 날은 폭탄주를 열댓 잔 이상 마시고, 소주도 세 병 마시고…. 몇십년을 쉬지 않고 마셨습니다. 뇌경색이 온 뒤로 담배와 술을 아예 끊었죠. 의사가 술을 끊되, 정히 마셔야 할 때는 레드 와인을 한두 잔 마시라고 하더군요. 담배 생각은 없는데 술 생각은 가끔 납니다. 그전에는 하루 두 갑 반에서 세 갑 정도 피웠어요. 술 마실 때 특히 더 피게 되고.”

    대학 춘계리그에서 그가 감독을 맡고 있던 동국대가 건국대를 꺾고 창단 37년 만에 첫 우승을 했는데, 당시 그는 축하연에서 참석자들과 일대일로 대작하며 무려 150잔의 술을 받아 마시는 전설적인 기록을 세웠다.

    -뇌경색을 앓고 나서 인생이 어떻게 달라지던가요.

    “주위에서 뇌경색을 당한 사람을 많이 봐서 막상 제게 닥쳤을 때 그렇게 놀라지 않았어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죠. 열흘 지나니까 급속도로 좋아졌습니다. 한 달 만에 병원에서 나와 캠프로 갔죠. 그런데 몇 개월 지나니 좋아지는 속도가 아주 느려져요. 차도가 안 느껴질 정도로. 3년이 지나도 이전처럼 완치된다는 보장은 못한답니다. 금년에 하와이 캠프에 다녀온 이후 상태가 무지하게 좋아졌어요. 그런데 이번 WBC에서 나빠진 거죠.”

    WBC는 편파적이었다, 그러나…

    -언론에 ‘김인식 어록(語錄)’이 보도되더군요. 그중에는 ‘야구는 사람이 한다’는 것도 있어요. 야구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구기 종목이 다 사람이 하는 거 아닙니까.

    “매스컴에서 만든 말이지요. 야구는 선수가 하는 경기라는 의미겠죠. 감독이 모든 걸 일일이 간섭하면 선수가 지시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선수를 놓아주는 쪽으로 경기를 운영합니다.”

    그러니까 ‘야구는 (감독이 아니라) 선수가 한다’가 김 감독의 정확한 어록이다.

    -하여튼 일본에 두 번 이긴 것도 통쾌했지만 야구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을 7대 3으로 꺾은 것이 대단한 쾌거 아닙니까. 미국 현지 반응은 어땠습니까.

    “캐나다도 미국을 8대 6으로 이겼지요. 대신 캐나다는 우리보다 미국한테 점수를 많이 줬죠. 대회 시작 전에는 한국이 대만보다 못하다는 평이 나왔습니다. 아시아지역 예선 때 미국 스카우트들이 일본에 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구단장을 하다가도 다른 팀의 스카우트로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 스카우트들이 일본서 관전하고 미국에 돌아가 ‘한국 야구가 대만보다 떨어진다고 한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아주 짜임새 있는 팀’이라고 전했죠.

    미국에서 한국팀을 주목하게 된 계기도 우리가 피닉스에서 메이저리그의 캔자스시티 로열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연습경기를 하고 나서였죠. 미국 스카우트들이 ‘우리가 일본에 가서 본 게 정확하다’고 했습니다. 멕시코, 미국, 일본과 시합하기 전이었어요.”

    -대진표 작성, 경기시간 변경, 심판 판정에서 미국의 횡포가 심했습니다. WBC에서 미국의 독주를 견제할 방법이 없습니까.

    “사실 횡포는 횡포인데…. 대회 조직위원회 구성원 대부분이 미국 사람이니까요. 미국-한국 경기에서는 괜찮았지만 미국-멕시코 경기에서는 심판에 문제가 있었죠. 홈런을 2루타로 판정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서로 이해해야죠. 역사가 오랜 대회가 아니고 첫 대회니까요. 시행착오를 거치며 고쳐 나가야죠. WBC를 존속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WBC 조직위원회는 4년 주기로 대회를 열되 월드컵과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2차 대회를 2009년 열기로 했다. WBC 대회를 개최하자면 경비가 수천억원이 들어가기 때문에 미국, 일본 외에는 엄두를 낼 국가가 거의 없다.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 패인(敗因)은 뭐라고 봅니까”라고 묻자 그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왼손을 내저으며 “완패였죠”라고 대답했다.

    “우리 팀은 투수가 버텨줘야 했죠. 그때 구대성이 나갈 타임이었습니다. 구대성이 막아줬으면 승부가 한두 점으로 결정날 것 같은데 담이 결려서 못 던진다는 거야. 결국 나이 어린 전병두가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놓고 나쁜 코스로 가는 바람에 유인한다는 게 엉뚱하게 좋은 볼을 던져 2루타를 맞았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죠.”

    박찬호가 나왔더라면…

    -실전 경험이 많은 노장들은 큰 경기에서도 위축되지 않겠지요.

    “전투 경험이 많아야 되지만 결국은 실력이 있어야 자신이 생깁니다. 그게 제일 중요하죠. 실력 플러스 경험이죠.”

    무언의 승부사 김인식 한화 이글스 감독

    시합 전 한화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인식 감독.

    -박찬호가 나왔더라면 그렇게까지 완패하진 않았겠죠.

    “그런데 박찬호는 이미 그 시합에는 못 나가게 됐어요. 결과는 알 수 없지만 그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죠.”

    -일본과 한국의 야구 수준을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아직도 (한국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죠.”

    -그래도 두 번이나 이겼지 않습니까.

    “경기에서는 이길 수 있죠. 그런데 모든 면에서 떨어집니다. 뛰는 것부터 투수들까지, 아무래도 떨어져요. 이번에 나온 팀 중에 일본이 제일 짜임새가 있습니다.”

    -이번 대표팀의 결속력이 강했다지요.

    “몇몇 애는 자기만 아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듣던 거랑 달라요. 경기에 이기고 몇 번 파티를 했는데 절제를 아주 잘하더라고요. 파티 비용이 예산을 초과하면 서로들 내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아, 이 팀이 되겠구나’고 생각했죠.”

    -국내파 대표선수들은 연봉이 얼마나 됩니까.

    “평균 연봉이 2억8000만원에서 3억5000만원 될 겁니다. 해외파인 박찬호는 연봉이 130억원이고 이승엽은 20억원입니다. 미국에서 이승엽이 가끔 ‘감독님 용돈 좀 주세요’라고 했어요. 제가 어이가 없어서 ‘1년에 20억원씩 받는 놈이 나보고 용돈 달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했죠. 그러니까 박찬호가 한술 더 떠요. ‘아, 감독님 승엽이는 주면 안 됩니다. 제가 받아야죠.’ 130억원 받는 놈도 똑같더라고요. 많이 받는 선수들도 돈 떨어지면 별 도리 없다는 얘기거든요. 두 달을 바깥에서 생활하다 보니까 돈 떨어질 수 있죠.”

    김 감독은 한화 이글스와 계약금 1억8000만원, 연봉 2억원 등 모두 5억8000만원에 2년간 계약했다. 올해 계약이 끝난다.

    김 감독은 서울에 돌아와 WBC 4강 진출 보너스를 받았다.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한화그룹 상무급 이상 임원 140명이 참석한 ‘환영의 밤’에서 김승연 회장이 격려금을 직접 줬다. 인터뷰 뒤에 한화그룹 홍보실에서 액수를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종범 선수는 소속 구단인 기아로부터 2억원을 받았다. 아마도 ‘국민감독’의 포상금이 이 선수와 비교될까봐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포상금을 어디에 쓸 작정입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 중입니다. 우선 자식이 손 벌릴 거 같은데요.”

    -노후를 위해 숨겨둬야지 자식이 손 벌린다고 다 주면 어떻게 합니까. 부인은 손 안 벌릴 것 같습니까.

    “다 거기 통해서 자식들한테 가는 건데….”

    부상의 추억

    -미국 스카우트들이 이번 대회에서 펄펄 난 이승엽 선수에게 군침을 흘린다지요.

    “연봉이 어느 정도일지는 몰라도 올해 일본에서 아주 못하지 않는 이상 내년에 미국에서 콜이 오지 않을까요. 평년작만 해도 미국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올 것 같습니다.”

    -한국 선수들은 어떻습니까.

    “야구 선수가 몸이 풀려 자유계약선수(FA·Free agent) 자격을 취득하려면 9년이라는 세월이 걸려요. 일본은 8년이죠. 승엽이는 여기서 9년 됐기 때문에 일본으로 간 거죠. 일본에서 1년 단위로 계약하니까 미국에서 제의만 오면 갈 수 있어요. 우리 선수들은 연수(年數)가 얼마냐에 달렸죠.”

    -야구 선수는 대개 정년이 몇 살입니까.

    “지금은 꽤 연장됐다고 봐야죠. 우리 팀 투수 송진우만 해도 한국 나이로 41세예요. 웬만한 선수들도 30대 초중반입니다. 과거에는 서른 살만 되면 은퇴를 준비했어요. 지금은 의학이 발달하고 몸 관리를 잘하니까 정년이 연장됐습니다. 팀에서도 선수들을 아끼죠. 이번 WBC에서도 투구수 제한이 있었습니다. 옛날하고 달라진 거죠. 선수 생명이 길어졌습니다.”

    김 감독은 어깨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일찍 그만둬야 했다. 신인왕 출신인 그는 쉴 짬이 없었다. 팔을 다쳐 숟가락만 들어도 아픈 상태에서도 공을 던졌다. 1967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아 선수권대회 대표로 출전한 것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선수생활을 끝냈다. 지금 같으면 선수로서 전성기인 스물일곱에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변화가 무쌍하다. 그때 팔을 다치지 않았더라면 WBC의 명감독이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처음에 아플 때는 다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좀 아프다 나아지겠지, 통증이 가라앉겠지 생각하면서 몇 년 지나가요. 팔이 아픈 중에 시합을 해도 투구수 70개까지는 견딥니다. 상태가 점점 나빠져 50개 던질 때 통증이 오고 나중에는 30개만 던져도 아프죠. 그걸 고치지 않고 무리해가면서 1, 2년 더 던집니다.

    지금은 의학이 발달했어요. 다리 신경을 빼내 팔에다 넣기도 하죠. 수술해서 더 튼튼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프링 캠프에서 45일 훈련을 하면 30일 정도는 투수들한테 전력을 다하죠. 과거 쓰라린 기억 때문에 투수들한테 신경을 많이 씁니다.”

    집중하면 표정 없어져

    한화 이글스는 스타플레이어도 몇 명 안 되고 선수 평균연봉도 가장 낮은 편이었다. 다른 구단에서 방출된 선수, 혹은 재기불능으로 지목된 선수들이 한화 이글스에 들어가 결정적인 공훈을 세워 구단의 새 바람을 주도했다. 김 감독은 전력이 약해 하위권을 맴돌던 한화를 맡아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그에게 죽은 선수를 살려내는 ‘재활공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뒷전으로 밀려난 선수들을 재기시켜 훨훨 날게 만드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특별한 거 없어요. 제가 선수한테 주문을 하죠. 선수들한테 자신감을 넣어주는 게 제일 중요하죠. ‘너는 이거만 고치면 무조건 되는 거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역시 본인이 열심히 하고, 본인이 여기서 아니면 이젠 끝이라고 느껴야죠.”

    -WBC 대표선수들의 병역 면제에 대해 일부 반대하는 의견도 있어요. 병역 혜택 문제가 너무 일찍 거론돼 경기에 졌다는 이야기도 있죠. 결승 진출을 조건으로 달았어야 죽자 살자 경기해 일본을 이겼을 것 아니냐는 거지요.

    “병역 혜택 문제는 잘될 거 같아요. 한편으로는 저도 걱정했어요. 병역미필 선수들이 병역 혜택에 집착하다 보면 지나치게 긴장해 시합이 안 풀릴 수 있거든요. 진짜 국위를 선양하고 국민이 다 납득한다면 야구뿐 아니고 다른 종목에도 병역 혜택을 줘야 한다고 봅니다.”

    -해외 언론이 한국팀에 대해 철벽 수비라고 칭찬했더군요.

    “첫째는 선수들이 잘한 겁니다. 둘째는 전략 분석팀의 예측이 정확했습니다. 저 타자는 오른쪽으로 때릴 거라고 예측하고 오른쪽을 대비하면 딱 들어맞았죠. 셋째는 국내보다 그라운드 사정이 훨씬 좋아 엉뚱한 바운스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도쿄에서 시합하고 있을 때 전략분석팀은 미국에서 예선 경기를 지켜보았습니다. 경기 장면을 찍어 선수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는 거죠. 대만과의 경기를 앞두고서도 전략 분석을 위해 유승안, 김성한 전 감독이 지난해 12월부터 올 1월까지 대만팀이 합숙하던 호주를 다녀왔어요. 호주와 대만팀 경기를 찍은 비디오와 분석팀이 만든 자료를 선수와 코칭스태프들이 다 봤습니다.”

    -텔레비전에 비치는 김 감독 얼굴을 보면 긴장된 순간에도 표정 변화가 거의 없더군요.

    “경기에 집중해서 그래요. 여유가 없는 거지요. 최소한 뒤에 네 번째 타자까지 생각해야 해요. 상대 쪽 투수 교체시기를 점쳐야 하고. 그런 거에 몰입하니까 무표정으로 비치는 거예요.”

    칭찬은 체질적으로 쑥스러워

    -일본의 스즈키 이치로 선수가 한국팀을 겨냥해 ‘30년간 일본에 대들지 못하게 하겠다’고 큰소리쳤죠. 한국팀에 거푸 지고 나서는 분을 참지 못해 고함을 지르는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에 잡히더군요.

    “이치로 선수는 정말 노력파입니다. 프로팀에 들어와서도 진짜 노력했기 때문에 돌아가신 오오기 아키라 감독한테 발탁됐고, 거기서 뻗어나가 미국까지 가서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아시아에 이치로 팬이 많습니다. 그냥 일본의 이치로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돼요. 앞으로 국가 교류전이 점점 더 활발하게 열리리라고 봐요. 일본, 한국, 대만은 물론이고 중국과도 틀림없이 이뤄지겠죠. 아시아 전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치로가 경솔한 거죠.”

    무언의 승부사 김인식 한화 이글스 감독

    세계베이스볼클래식(WBC) 한국 야구 국가대표팀 선동열 코치, 김재박 코치, 김인식 감독(왼쪽부터)이 훈련을 지켜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치로는 연봉이 얼마나 됩니까.

    “아마 1100만달러쯤 될 겁니다.”

    -박찬호보다는 못하네요.

    “올해 연봉으로 따지면 박찬호보다 조금 떨어져요. 그런데 내년부터는 이치로가 훨씬 더 받는다고 봐야죠. 박찬호는 금년에 계약이 끝납니다. 그러면 박찬호는 그 정도 연봉을 받을 수 없을 거예요.”

    ‘스포츠서울’ 고진현 기자가 ‘김인식 리더십’이라는 책을 펴냈다. 3월의 WBC 대회를 겨냥해 2월말에 출간됐다. 저자는 세상을 감동시킨 김인식 리더십의 요체는 한마디로 ‘믿음의 야구’ ‘휴먼 야구’라고 말한다.

    -야구 감독 평전이 나온 것은 처음 아닙니까. 책은 읽어봤습니까.

    “일본 후쿠오카에서 합숙할 때 받아 읽어봤습니다. 반은 거짓말 같아요. 야구 취재를 오래 한 기자지요.”

    -반은 거짓말이라고 하면 저자가 서운하지 않겠습니까.

    “저를 너무 띄워놨어요. 한없이 올려놔서 안 내려오면 어떻게 하려고.”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든 거스 히딩크 감독에 비유하는 말이 있더군요.

    “하여튼 너무 과장된 거 아닌가요. 히딩크도 마찬가지지만 선수가 잘해주면 감독이나 코치는 저절로 올라가는 거지요.”

    칭찬을 쑥스러워하는 체질 같다.

    -길에 나가면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죠.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그렇죠. 많이 알아보죠. 그래서 불편해요.”

    ‘빠따’ 대신 마음으로

    필자는 야구경기를 30여 년 만에 처음 봤다. 미국-한국 경기도 보려고 본 게 아니라 사우나를 하다가 휴게실이 너무 소란스러워 가보니 한국 선수가 홈런을 때리는 장면이 리플레이되고 있었다. 그뒤로 WBC 대회를 빼놓지 않고 보게 됐다. 김 감독을 인터뷰하기 위해 벼락치기 공부를 했는데도 모르는 용어들이 가끔 튀어나왔다.

    -솔직히 야구를 잘 모릅니다. 무식이 드러나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선수들이 종종 감독한테 불만을 품고 집단 이탈하는 사건도 벌어지더군요. 옛날에 OB 베어스팀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 김 감독이 새로 영입돼 진압했다죠. 평소 선수 관리를 어떻게 합니까.

    “특별한 방법은 없습니다. 저희 세대는 어릴 때부터 운동할 때 꾸지람을 많이 들었죠. 선배들이나 감독한테 맞을 때도 많았죠. 선수 시절에 우리는 으레 맞는 거라고 생각했죠. 단체기합을 받으면 때로는 서운하죠. 자신은 잘못이 없는데 맞으니까요.

    세월이 흘러서 요즘 세대는 어릴 때 맞는 일이 없거든요. 대부분 자식을 한둘밖에 안 낳지 않습니까. 자식들한테 웬만한 건 다 해주려고 하지요. 그래서 야구부에서도 맞고 때리는 일이 점점 없어졌죠.

    OB 베어스 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감독이 문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선수들이 좀 참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 속에 들어가 선수가 돼 보지 않았으니까 모르죠.

    저는 선수를 좋아해야 진짜 꾸지람을 합니다.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고 관심이 없으면 말없이 2군으로 보내면 되거든요. 특별한 비방은 없고 그냥 선수와 함께 가는 거예요. (가슴을 손으로 가리키며) 여기 있는 마음을 그대로 선수들한테 주는 거죠. 내가 갖고 있는 걸 주면 선수들도 바보 아닌 다음에야 다 아니까요. 서로 충분히 마음을 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옛날에는 엎드려 뻗쳐 시켜놓고 야구 방망이로 때리는 일도 있었겠지요. 선수 시절에 몇 대까지 맞아봤습니까.

    “20대 이상 맞아본 적도 있죠. 불행한 시절이었죠. 야구 방망이에 잘못 맞는 바람에 좋은 선수가 일찍 관둔 경우도 있어요. 야구가 지겨워서 관둔 게 아니고, 쉽게 얘기해 병신 돼서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고요. 허리를 다쳐 운동을 할 수 없게 된 거죠.”

    -지금은 어때요.

    “지금은 그런 게 없죠. 또 잘합니다. 어쩌다 선배들이 화나면 한번씩 하는 경우도 있어요. 젊은 선수들이 너무 귀하게 커서 옛날보다 참을성도 없어졌고 멋대로 하는 일이 있다 보니까 선배들이 못마땅한 거지요. 참고 참다가 한번씩 하는 거지요. 그때 재수 없으면 몸을 다치는 겁니다. 지금은 굉장히 자제하지요.”

    ‘한번 더’ 철학

    -옛날처럼 때려서 정신 차리게 하는 방법을 못 쓰면 지금은 어떤 방법을 주로 씁니까.

    “간단합니다. 벌금 제도가 있어요. 외출 나갔다가 제시간에 못 들어오는 경우, 시합장에서 사인 미스 또는 본헤드 플레이(bonehead-play)를 한 경우 등 한 스무 가지 돼요. 거기서 제일 적은 벌금이 5만원, 아주 많은 건 500만원 정도죠. 음주운전은 경찰서에서도 벌금 몇백만원 나오지만 소속 팀에서도 벌금 500만원을 매기죠.”

    본헤드 플레이는 ‘얼간이 같은 플레이’란 뜻으로 어이없는 실수를 범하거나 경기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미숙한 플레이를 의미한다. 우리말로 ‘돌대가리’를 영어에서는 ‘뼈대가리’라고 한다.

    -음주운전 벌금이 왜 그렇게 무겁습니까.

    “음주운전이 제일 무서운 겁니다. 교통사고 나서 다치면 선수 생활 끝나잖아요. 결국 팀도 손해고. 음주운전 다음으로 벌금이 많은 경우는 상급자에 대한 반항, 선수가 코칭스태프의 말을 안 들을 때죠. 한 100만~200만원 될 겁니다.”

    -선수를 관리하고 팀을 운영하는 철학이 있다면.

    “1년에 120게임을 하는데 3분의 1은 이기고 3분의 1은 지게 돼 있어요. 나머지 3분의 1에 따라 성적이 갈리는 거죠. 항상 이길 수는 없는 거지만 져서 기분 좋은 선수가 어디 있어요. 전부 이기려고 하는 건데요. 선수들이 본헤드 플레이를 하면 순간적으로 후려갈기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진짜 지나칠 정도의 핀잔을 줄 때도 있죠.

    그러나 ‘너 이 바보 같은 자식아’라고 하고 싶어도 ‘너 도대체 이런 실수가 어딨냐’ 하는 정도로 넘어갑니다. 한번 참고 생각하면 쟤도 최선을 다해서 하려고 했는데 하다 보니까 바보짓을 한 거지. 자신의 잘못을 누구보다 더 잘 알 거 아닌가. 그렇게 선수를 한번 더 쳐다보고, 한번 더 참는 거죠. 그러니까 철학이 있다면 ‘한번 더’ 철학이죠.”

    ‘신동아’ 지난해 11월호 이 인터뷰 코너의 주인공은 탤런트 최진실씨였다. 최씨는 인터뷰에서 육박전과 고소전까지 벌이며 헤어진 조성민 선수에 대해 “애들 아빠니까 잘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조 선수는 지금 한화 이글스에서 뛴다.

    -조성민 선수 데려오는 것은 구단 쪽에서는 반대했는데 김 감독의 의지가 강해 받아들였다고 하더군요.

    “조성민이 과거에 워낙 잘했죠. 일본에서도 잘했어요. 결국 어깨 부상으로 못하게 됐지만. 1994년 조성민이 고려대 3학년 때였어요. 제가 쌍방울 관두고 쉬고 있을 때 고려대에서 사이판으로 훈련을 가는데 인스트럭터를 해달라고 요청이 와 그때부터 인연이 닿았죠. 그때 보니까 대학생이 정말 잘 던지는 거예요. 볼이 빨랐어요. 조성민이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도 한참 뜨다가 일찍 부상당해 쉰 거죠. 최진실과 결혼하고 이혼하고 빵가게도 하고…, 저도 그런 이야기들을 신문에서 봤죠.

    작년에 조성민이 MBC ESPN에서 해설을 하고 있었어요. 한화 이글스가 SK와 인천에서 시합을 하는데 ESPN의 해설자로 인사를 온 거죠. 해설자들이 시합 전에 양측 감독을 만나 오늘은 어느 선수를 기용하느냐고 물어보지요. 조성민도 그 일로 왔는데 제가 ‘야구 다시 하고 싶지 않냐?’고 물어봤죠. 본인은 처음에 농담으로 들었죠. 제가 서울에서 정식으로 만나자고 하니까 깜짝 놀라는 거야. 만났더니 진짜 야구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데려온 거죠. 구단은 요란한 이혼으로 생긴 이미지 때문에 주저했겠죠.

    무언의 승부사 김인식 한화 이글스 감독

    ‘너 이 바보 같은 자식아’ 라고 하고 싶어도 ‘너 도대체 이런 실수가 어딨냐’ 라는 정도로 넘어갑니다. 쟤도 최선을 다해서 하려고 했는데 하다 보니까 바보짓을 한 거지. 그래서 선수를 한번 더 쳐다보고, 한번 더 참는 것이죠. 그러니까 철학이 있다면 ‘한번 더’ 철학이죠.”

    한화 이글스의 간판선수로 내세울 만한 선수가 송진우와 정민철이죠. 두 선수는 유니폼 벗고 사복 입고 다녀도 멋쟁이죠. 우리 팀의 이미지 개선도 저는 생각을 했어요. 조성민이 아무래도 잘생기고, 관중의 관심을 끌 수 있습니다. 걔가 다시 야구를 하면 팬도 늘고 그러면서 야구도 잘하면 더 좋은 거 아니냐는 기대감이 있었죠. 어떻게 보면 일종의 모험입니다. 3년 쉬다가 3개월가량 연습하고서 경기에 출전했죠. 작년보다는 조금 나아졌는데 또 어깨가 아파 쉬고 있습니다. 왔다갔다하고 있죠. 지금 어깨를 검사하고 있는데 최종 검사 결과가 안 나왔습니다.”

    -고교 시절에는 조성민 선수가 박찬호 선수보다 투수로서 한수 위였다죠. 그런데 한 사람은 130억원 연봉에 국민적 영웅이 됐고 한 사람은 국내팀 2군 투수인데, 그런 차이가 어디서 생겼다고 보는지요.

    “결국은 부상이 큰 원인이죠. 부상당해도 그거를 못 느낄 수 있죠. 무조건 던지고 싶으니까. 그때 옆에서 잘 챙겨주고 이건 좀 무리다 싶으면 말려야 하는데, 일본 풍토가 선수를 혹사시키는 편이에요. 그리고 선수 탓으로 돌려요. 일본의 야구 열기가 높지만 그런 면에서는 미국과 차이가 납니다. 조성민이 미국에 갔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러면 그렇게 심하게 어깨 부상을 당하지 않았을 거 아니냐….”

    김인식은 조성민을 통해 젊은 날 자신의 모습을 보는지도 모르겠다.

    칭찬과 핀잔의 방정식

    -자기 관리의 문제는 없었을까요.

    “조기 결혼이라고 해야 되나. 그것 때문에 지금도 아버지하고 사이가 안 좋은 거 아닌가 싶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말린 거 같은데. 최진실과 결혼하기보다는 운동에 매달리라고 했던 거 같아요.”

    -야구 선수들에겐 술 통제가 심하겠군요. 경기 전날은 술을 못 마시게 한다는가….

    “그것도 옛날얘기입니다. 지금은 술 마시라고 놔둬요. 술 마시든 말든, 내일 경기 있든 말든, 심하게 간섭 안 해요. 운동 못하면 2군으로 내려가는 거니까. 아까도 얘기했지만 선수 수명이 길어진 원인도 그런 데 있습니다. 지금은 술 마시러 가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진짜 프로다운 거죠.

    프로 초창기에는 술 많이 마셨지요. 그래도 경기 나갈 선수가 그 선수밖에 없으니까 그냥 나갈 수 있었죠. 지금은 아니죠. 1군은 물론 2군에도 선수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무리 스타 플레이어이고 꼭 필요한 선수라 해도 운동장에서 실력 발휘 못하고 빌빌거리면 가차 없이 빼는 거죠.

    저는 해외 원정을 가도 딱 시간만 정합니다. 밤 11시까지는 들어오라는 거죠. 그 안에는 술 마셔도 좋다고 해요. 선수들도 술잔 놓고 즐기지, 폭주를 하지 않아요. 시간을 안 지키면 벌금을 때리면 되니까.”

    -감독은 선수의 상태나 분위기를 파악하는 능력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IQ(지능지수) 보다 EQ(감성지수)가 높아야 할 것 같아요.

    “글쎄 어떻게 보면 제 실력의 80%만 내는 한 선수가 실력을 100% 발휘하도록 끌어올리자면 때로는 엉뚱하게 핀잔도 줘야 하죠. 갑자기 ‘너 진짜 괜찮단 말이야. 너 이런 것만 주의하면 최고 선수 된다’고 자신감을 넣어줘야 100% 이상 실력을 발휘할 수 있죠. 잘하는 선수가 거들먹거리면 다른 선수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때는 아주 엄청나게 핀잔을 주죠. 그러면 그 선수는 나한테 갑자기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런 게 때로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학교 다닐 때 학과 공부는 어느 정도 했습니까.

    “공부 못했어요. 야구를 열심히 하다 보니까. 선수들 중에서는 좀 하는 편이었죠.”

    -게임을 할 때 리스크 테이킹(risk taking)을 잘 하지 않는다는 평이 있던데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여기서 승부를 내야 한다 싶으면 막 하는 경우가 있죠. 안정적으로 가서 승리한다면 그거같이 좋은 일이 없죠. 야구에서는 결국 7, 8, 9회 마지막 3회에서 점수차가 어느 정도냐로 승패가 가려지거든요. 지고 있는데 승부 안 걸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제가 작전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작전을 하는 것보다 선수한테 맡기는 편이죠.

    숫자에 밝아야 성공한다

    가령 히트 앤드 런을 한다 치면 원 스트라이크 투 볼이나 투 볼, 원 볼 때 좋은 공이 오면 선수들은 능력을 발휘합니다. 제가 작전을 잘 안 하기 때문에 나쁜 공을 억지로 치는 경우가 없죠. 선수들이 나쁜 공을 치면 좋은 타구가 안 나고 타율 까먹고 팀도 잘못되죠. 그래서 선수들에게 맡길 때가 많죠.”

    김 감독의 어록에 ‘야구는 7회 이후에 승부가 난다’는 말을 보태야 하겠다.

    -이번 WBC 대회를 끝으로 대표팀 감독을 더는 맡지 않겠다고 했던데요.

    “WBC 대표팀 코칭스태프가 저와 현역 감독 세 사람, 그리고 코치 둘이에요. 김재박(52), 선동열(43) 감독이 너무 잘해요. 이런 친구들이 대표팀 감독을 하면 잘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죠. 저는 건강도 그렇고.”

    -선동열 감독과는 해태 시절부터 인연이 있죠.

    “선동열은 제가 해태에서 투수 코치할 때 선수였죠. 제가 OB베어스(현 두산베어스)에 9년 있었는데 당시 박용오 사장이 몇 년 전부터 ‘선동열을 데려다 키우면 어떻겠어?’라는 말씀을 가끔 했어요. 선동열을 코치로 데려다 감독 수업을 시켜서 다음 바통을 주라고 얘기가 됐죠. 저는 부사장으로 구단에 남는 걸로 돼 있었어요. 막상 시즌이 끝나고 선동열을 데려오려고 하는데 선동열은 선동열대로 다른 데서 오라는 데도 있고 하니까, 오니 안 오니 하면서 이상해졌죠. 그래서 제가 관둔 거죠.”

    -선동열씨는 투수의 전설인데 박찬호처럼 미국에 갔더라면 더 성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게 제일 아까워요, 마지막에 일본으로 갔죠. 늦게 간 거죠. 이미 20대 초반에 미국에서 오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병역 문제도 있고, 해태에서 놔주지 않았죠.”

    -인생에서 야구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면.

    “야구는 숫자에 밝아야 돼요. 야구 용어에 숫자가 많지 않습니까. 스리아웃, 스리 볼, 타율 다 숫자니까요. 숫자 계산도 빨라야 합니다. 1번 선수를 내보냈으면 최소한 6번까지 계산이 나와야 해요. 6번 에는 누구를 대타로 내보낼까 이런 것까지요. 만일 이런 찬스가 생기면 얘를 내보낸다는 계산이 나와야죠. 우스운 얘기지만 야구장 바깥 세상에서도 숫자에 밝은 사람들이 성공하잖아요.”

    -숫자에 밝으시니까 재산도 많이 모았겠네요.

    “모은 게 별로 없습니다. 자식들 공부시키고 먹고 살면서 썼죠. 돈은 2000년 초부터 모을 수 있었죠.”

    부인 안명협(58)씨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뒀다.

    -어디에 사십니까.

    “수지 살아요. 제일 싼 데. 잠실에 오래 살았는데 아들이 캐나다에서 들어왔어요. 같이 살려고 수지의 넓은 아파트로 나갔는데 얘들이 와서 3개월 살더니만 못 살겠다고 나가더라고요. 그놈들도 고생이지. 맞벌이 부부인데 애를 어떻게 할 거야. 놀이방에 데려다놓고 오후 6시에 데리러 가야 하잖아요. 일주일이면 닷새를 집사람이 가서 봐주고 있죠. 1년 만에 다시 들어오겠다고 하는데….”

    “오빠, 어디야?”

    그는 과년한 딸(35) 시집보낼 걱정을 했다. 딸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딸이 화낼까봐 겁난다며 쓰지 말라고 부탁했다. 선수들을 호령하는 감독도 자식에게는 지고 사는 평범한 부모인 모양이다.

    -집에는 자주 갑니까.

    “서울에서 경기 있을 때만 한번씩 들러요. 정규 리그 시즌이 끝나면 가을에는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같은 포스트 시즌이 시작됩니다. 길게 끌면 10월20일까지 계속되고 한국시리즈가 11월 초까지 갑니다. 한 닷새 쉬고 마무리 훈련을 하러 일본 가서 한 달 정도 있다가 들어오면 12월 초예요. 그러면 12월 초부터 한 달도 채 못 되는 기간 집에서 쉬죠.”

    -집에 들어가면 낯선 느낌이 들겠어요.

    “집 식구야 원체 이런 거에 이골이 났다고 봐야죠. 저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감독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기 후에는 야구 생각을 안 하려고 소설책을 많이 읽는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옛날이에요. 제가 해태 쌍방울 있을 때 1년에 50권 정도 읽었죠. 김주영의 ‘화척’, 조정래의 ‘태백산맥’, 임선영의 ‘억새풀’을 읽었죠. 그후에 눈이 나빠졌어요. 밤에 버스로 이동할 때도 불 켜놓고 책을 봤으니까. 이제는 돋보기를 써도 이상해지는 거야. 특히 아침에 신문 볼 때 그런 현상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책을 못 봐요.”

    옆에 놓아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김 감독이 폴더를 열자 볼륨이 커 “오빠, 어디야?”라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나 여기 대전인데 지금 통화하기 힘들다”며 전화를 껐다.

    필자가 “오빠라고 하는 거 보니까 술집 아가씨 같은데요. 술집 가면 지금도 인기가 좋으시죠? 유명해져서”라고 호기심을 표시하자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여기도 동국대 감독할 때부터 아니까 벌써 20년 넘었네요.”

    필자가 “부인이 아시면 혼나실라” 하고 공연한 걱정을 하자 “집사람도 다 알아요. 그런데 전화 오고 그러면 이상하더라고요”라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돔구장 하나쯤은 있어야

    김 감독은 서울 토박이다. 그가 배문중학교에 다닐 때 경동고 백인천, 오춘삼 선수가 이름을 날렸다. 그는 백인천 선수같이 되고 싶어 동네 개천에서 말랑말랑한 연식 공으로 연습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야구부에 들어가 1년 만에 대한체육회에서 주는 연식야구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세력인 이주일씨가 대한체육회장을 할 때였다. 조선호텔 앞에서 농구 박신자, 축구 김정남, 야구 백인천씨와 나란히 시상대에 섰다.

    “백인천 선수와 함께 상을 받게 돼 정말 기뻤어요. 백인천씨가 아마 그 상을 받고 일본 프로야구단 도에이로 갔을 거예요. 제 야구의 우상을 거기서 만난 거죠. 백인천씨야 연식야구 상 받으러 온 중학생 놈이 눈에 안 들어왔겠지만.”

    -요즘 야구 인기는 어떻습니까. 한일월드컵 이후에는 축구에 관객을 상당히 뺏긴 거 아닙니까.

    “그렇다고 봐야 되는데 골수 야구팬들은 변함이 없죠.”

    -WBC 경기 효과로 야구장 관객이 늘어나겠죠.

    “어떻게 보면 이번 WBC는 세계적으로 야구 붐을 확산시키는 의미가 큽니다. 미국이 조금 독단적으로 했고 처음이라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용서해야죠. 야구팬들이 겨울에 굶주렸다가 이번에 너무 즐거웠다고 봐야죠. 이번 대회를 계기로 우리 프로야구 선수 전체가 잘해야 된다고 봅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물론이고. 이럴 때 잘해야 지속적으로 야구 붐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신상우 KBO 총재가 돔구장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던데 돔구장이 꼭 필요한 겁니까. 돈이 많이 든다면서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야구를 할 수가 있으니까 중요한 거죠. 그리고 국제대회를 유치하려면 돔구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4월에 시즌을 시작해 11월 초면 모든 게 끝나거든요. 11월15일만 넘어가면 추워서 못 해요. 돔구장이 있어야 국제경기도 할 수 있거든요. 아시아에서 돔구장이 있는 일본에서만 WBC 아시아 예선을 치를 수 있죠. 일본이 6개 돔구장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에도 하나쯤은 있어야지요. WBC 대회를 우리나라에 유치하려면 돔구장이 있어야 해요.”

    한때는 밤의 황제?

    -건설비가 얼마나 드나요.

    “몇 년 전에 5000억원 든다고 했는데 지금은 턱도 없을 거 같아요.”

    코미디언 배일집씨와는 40년 지기다. 배씨는 텔레비전에 나와 “김 감독이 큰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허슬을 16절까지 춘다”고 했다. 허슬은 절마다 춤사위가 달라져서 머리 나쁜 사람은 5절도 넘기기 어렵다.

    “술 한참 먹으러 다닐 때 흥이 나면 막 흔들고 그런 거 했는데…. 허슬이 16절까지 있지도 않아요. 그놈의 새끼, 뭐 그렇게 거짓말을 해.”

    -한시절에 ‘밤의 황제’라는 칭호를 가졌다더군요.

    “그때 술을 많이 마셨죠. 그때는 하일성씨도 자주 끼었어요. 지금은 완전히 유명인사가 됐지만.”

    -술 때문에 부인 속을 썩혀드릴 일도 많았겠습니다.

    “그렇죠.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어서 술 마시다가 외박도 자주 했죠. 어쩔 도리 없이 못 들어가는 경우가 있었어요. 그때는 술이 좋았어요. 20대 후반부터 그렇게 된 거죠.”

    -야구 선수들이 스윙 폼이 비슷한 골프를 좋아한다죠.

    “저도 골프 시작한 지가 23년 됐어요. 핸디캡은 형편없어요. 최고로 잘 친 스코어가 92 정도입니다. 이제 뇌경색 때문에 완전히 못하게 돼 골프채를 아들 줬어요. 박용오 사장한테서 받은 골프채인데. 아들놈한테 골프채 주니까 골프화까지 사달래요.

    쌍방울 때 코치들이 운동장에서도 매일 야구 방망이로 퍼팅 연습을 하는 거에요. 쌍방울이 익산에 컨트리클럽을 갖고 있었잖아요. 새벽에 라운드를 하고 연습장으로 갔죠. 그런데 코칭스태프가 운동장에서 퍼팅 연습을 하는 모습이 내 눈에 안 좋아 보이는 거라. 그래서 애들 앞에서 ‘그럴 양이면 골프고 뭐고 다 때려치우라’고 소리를 질렀죠. 그때부터 거의 안 쳤습니다.”

    -쌍방울 때 팀 성적이 안 좋아 마음고생을 했다면서요.

    “감독 맡을 때부터 각오하고 갔어요. 그래도 지니까 역시 신경을 많이 쓰게 되더라고요.”

    -경기 중에 받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풉니까.

    “몸이 괜찮을 때까지는 술을 많이 마셨죠. 몸이 이렇게 되고 나서는 술을 마시지 못하니까 매일 텔레비전만 트는 거죠.”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죽음도 생각해봤을 텐데요. 몇 살까지 살고 싶으십니까.

    “살고 싶은 욕망이야 뭐 한이 없죠. 솔직히 말씀드려서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는 오래 살고 싶어요.”

    그는 뇌경색이 오기 6개월 전부터 후배들의 권유로 교회에 다닌다. 교회에 다닌 지 얼마 안 돼 뇌경색을 당하자 친구들이 ‘가만 있던 놈이 예수 믿어서 그렇게 됐다’고 핀잔을 줬다.

    내 인생의 9회

    “예수 믿는 거하고 뇌경색하고는 별개 문제 아닙니까. 병들고 나서 신앙심이 더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기도를 많이 하고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집사람에게도 함께 교회를 나가자 해서 지금은 저희 집사람, 딸, 며느리, 아들, 손자 다 나가요. 원래 집사람이 시집오기 전에 교회를 다녔는데 어머님이 불교 신자여서 제가 못 다니게 했죠.”

    아들 승원(34)은 월트 디즈니 코리아에 다닌다. WBC 대회 치르고 귀국할 때 손자(6)가 마중을 나왔다.

    “경기 없는 날 저녁에 손자와 통화하다 보면 ‘할아버지 한화 이겼어요, 졌어요?’ 하고 물어요. 실제로 졌는데 무심코 ‘이겼어’라고 거짓말하면 그 애가 ‘아이~ 졌다’고 해요. 그 녀석도 알면서 물어보는 거지요. 아버지가 텔레비전으로 야구 중계를 볼 때 딴짓하고 장난치면서도 다 보는 거야.

    저녁 8시경 시작한 인터뷰가 밤 11시에 마무리됐다. 김 감독이 건강하던 시절 같았으면 인터뷰 뒤풀이로 술 한잔 걸치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재밌는 비화를 많이 들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룸메이트는 그때까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다음날 일정이 빠듯했다. 오전에는 서울에 올라가 ‘아름다운 가게’에서 WBC 대표팀 감독 유니폼 경매에 참여하고 곧바로 대전에 내려와 삼성과 시범경기를 치른다. 그리고 광주로 부산으로 원정을 간다.

    인생을 9회로 나누면 당신과 나의 인생은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한 게임은 이기고 한 게임은 내주면서 덕아웃의 야구 인생이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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