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호

‘긍정적 영향’이 되고픈 최첨단 팝 아티스트 낸시 랭

“난 ‘화학반응’을 추구해요, 현대미술은 더 새로울 게 없으니까”

  • 이 설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now@donga.com

    입력2006-07-19 13: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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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부요기니.’ 건담의 몸에 여자아이의 얼굴을 한, 낸시 랭의 작품이다.
    • 그의 퇴색한 꿈과 욕망을 담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해피투게더’.
    • 피해를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싫다. 누구와도 함께할 준비가 돼있다. 원하는 건 단순하다.
    • 함께 행복하기. 한데 그가 가는 곳마다 시끄럽다.
    • ‘해피투게더’하자는데, 자꾸만 태클이 들어온다.
    ‘긍정적 영향’이 되고픈 최첨단 팝 아티스트 낸시 랭
    주목받는 것은 불편하다. 누군가 자신을 들여다보면 손해 볼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생각도 취향도 숨기는 편이 안전하다. 은인자중(隱忍自重), 가만히 묻혀있는 게 미덕이요 정신건강에도 좋다. 범인(凡人)의 경우에는 그렇다.

    그러나 범인들 속에 있으면 무료함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다른 이의 관심 속에서 단단해지고 담대해진다. 시선에 대한 부담도 없다. 화려한 게 좋다. 자신만의 아우라가 빛을 발해 주변이 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팝 아티스트 낸시 랭(27)은 화려하다. 작품으로 사진으로 몸짓으로 자신을 활짝 보여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말도 거침없다. 여과 없이 ‘날’로 드러난 생각들은 때론 공격의 타깃이 된다. 그래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나고, 내 세계에서 행복하면 그만이다. 타고난 화려함이다.

    ‘애교’ ‘도발’ ‘섹시·큐티’ ‘청담동 키드’ ‘음주가무의 여왕’…. 낸시 랭에게 따라붙는 어휘들이다. 누군가는 “그의 작품 터부요기니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했다. 세상물정 모르고 해맑기만 한, 그리고 약간은 제멋대로인, 심각한 것은 질색인, 나태한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는 부유한 아가씨를 떠올린다. 어디까지나 상상이다.

    낸시 랭은 자신을 ‘팝 아티스트’라고 소개한다. 공식 직함은 ‘쌈지 ‘낸시랭 라인’ 아트디렉터’. 소개를 듣고 나도 여전히 헛갈린다. 팝 아티스트란 단어도 그리 익숙지 않은데 방송, CF, 패션잡지, 전시회를 오가는 아티스트라니. 당최 주종목을 모르겠다. ‘만능 엔터테인먼트’라는 편한 말이 떠오르지만 아무래도 ‘아티스트’라는 단어가 걸린다.



    파격적인 몸짓으로 패션브랜드 ‘쌈지’ 광고, 초고속통신 망 메가패스 광고, 홍대앞 퍼포먼스 등에 등장하는 그는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미술계 명사가 됐다.

    PR공주?

    서울 홍익대 근처 허름한 분식집에서 낸시 랭을 만났다. 같이 밥을 먹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가 배가 고프다며 그렇게 하잔다. 다른 곳으로 갈 걸 싶다. 낸시 랭과 분식집은 왠지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다.

    분식집으로 그가 들어온다. 날렵한 체구에 걸친 미니 청 원피스와 핫핑크 조끼가 경쾌하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매직박스’도 손에 들었다. TV에서 막 튀어나온 하이틴 스타 같다. 당당함과 애교스러움이 적절히 섞인 몸짓과 말투. 낯은 전혀 가리지 않는다. 끊임 없이 ‘하하호호’가 이어진다. 우려와 달리 분식집 배경과도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배를 좀 채우고 작업실로 자리를 옮긴다.

    그의 작업실은 홍익대 근처의 복합문화공간 쌈지 스페이스 6층에 있다. 심사를 거쳐 올해부터 1년간 지원 작가로 선정돼 이곳 작업실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작업실 벽면에는 터부요기니 시리즈와 그의 퍼포먼스 사진이 빼곡하다. 벽 한구석에는 만화책장을 찢어 붙여놓기도 했다. 괜히 기분 좋아지는 작업실이다.

    인터뷰는 공교롭게 ‘오보(誤報)’라는 주제로 시작됐다. 그간 자신에 대한 오보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다고 한다.

    “제가 하지 않은 말에 따옴표 처리까지 한 것을 보면 정말 화가 나죠. 제 말에 대한 기자의 생각을 따옴표 안에 넣는다든지 하는 것 말이에요. 또 ‘안티’가 확 생겨날 수 있을 만큼 제 발언을 도발적으로 각색하는 경우도 있고요. 인터넷 기사는 정정요구를 한다 해도 지면으로 나간 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래서 항의도 안 해요. 책임은 결국 저한테 와요. 사람들은 오해하고 전 기사에서 말한 사람이 되는 거니까요. 정말 속상한 일이죠.”

    오보를 걱정할 만큼 대중적인 아티스트는 드물다. 한 평론가는 그를 빗대 ‘21세기형 작가’라고 표현했다. 자기 PR에 능한 예술가라는 의미가 담겼다. 인터뷰, 방송출연 등 가외활동 덕분에 아티스트로서 그의 자질이 뻥튀기됐다는 평도 있다.

    “그동안 작품 PR은 갤러리에서 해왔어요. 저는 그 역할을 직접 하는 거죠. 작가가 쌓아온 히스토리가 작품에 영향을 미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다른 활동으로 낸시 랭이 알려지면 당연히 작품값이 오르는 거죠. 가령 의미 없어 보이는 끄적거림이라도 그게 피카소의 것이라면 엄청난 가치가 있듯이.”

    그는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예술가는 왜 유명하면 안 되냐고, 왜 갤러리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느냐고.

    “작가가 작품을 하는 건 자신의 작품세계를 찾고 싶고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에요. 당연한 욕망이죠. 그게 없다면 전시할 필요가 없죠. 자기 방에서 자기만 봐야지. 작품을 팔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하죠. 땅 파면 물감 살 돈이 나오나요?”

    ‘가벼운 예술’

    유명세와 더불어 안티 팬도 얻었다. 낸시 랭의 안티팬은 진지하다. 낸시가 “고흐 같은 가난한 아티스트는 싫다” “예술은 깃털처럼 가벼워야 한다”고 하면 그들도 날카로운 촌평을 쏟아낸다. ‘안티무명인’은 낸시 랭 홈페이지에 이런 요지의 글을 남겼다.

    ‘고흐처럼 우울한 삶을 살고 싶은 예술가는 없다. 낸시는 무명 아티스트들까지 고흐같이 취급하며 상처를 준다’ ‘대중문화가 팝 아트보다 더 재미있고 다양한데 굳이 예술까지 상품화하려는 이유가 뭐냐. 낸시의 모방과 디씨인사이드의 패러디, 낸시의 섹시 퍼포먼스와 코스튬플레이의 차이가 뭔가. 새로움이 없으니 대중매체를 활용해 단기간에 이름을 알리려는 것 아닌가. 언론플레이는 그만하라’ ‘장난 같은 쇼로 대중문화를 흉내 내는 건 결과적으로 대중문화를 조롱하는 처사다’ ‘기존 미술계를 적으로 설정한 속보이는 공격적 홍보는 관둬라’….

    논쟁은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에 닿아 있다. 낸시 랭이 생각하는 예술은 이렇다.

    “저는 갤러리 안에서만 작업하지 않아요. 제가 생각하는 콘셉트로 저만의 작품세계를 펼치고자 해요. 패션 브랜드와 함께 작업하고, 작품과 결합해 자선파티를 하죠. 새로운 화학반응을 추구합니다. 왜냐고요? 현대미술은 더는 새로울 게 없어요. 개인적으로 볼 때 팝 아트도 앤디 워홀이 거의 모든 것을, 그것도 하이 퀄리티로 해서 제가 달리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비판자들은 낸시 랭의 작품이 가볍고 조악한 조합물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팝 아트는 자본주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이용하는 장르예요. 제 작품 ‘터부요기니’는 건담, 루이비통 가방, 어린아이 얼굴, 예일대 로고 등 누구나 아는 것들로 이뤄져 있죠. 익숙하니까 평가할 거리가 있는 거예요. 추상적인 작품이라면 할 말이 없죠. 철학적으로 들어가면 무식한 티가 날까 봐.”

    -노출 의상과 퍼포먼스로 주목받았다는 얘기도 많이 듣는데요. 거꾸로 관능미를 전시장으로 끌어들여 그 의미를 승격시켰다는 호평도 있고요.

    “여성성을 염두에 둔 적은 없어요. 그냥 제 세계를 펼쳐 나갈 뿐이죠. 옷차림은 취향이에요. 저는 보통 키에 그리 예쁜 얼굴도 아니지만 작품에선 섹시함과 순수함이 공존하는 느낌을 좋아해요.”

    ‘긍정적 영향’이 되고픈 최첨단 팝 아티스트 낸시 랭

    모든 종류의 퍼포먼스를 즐긴다는 낸시 랭. <br>사진 작업도 역시 좋아한다.

    -미술계 내부의 평가는 어떤가요.

    “처음과 지금이 다른데, 재밌는 건 여기도 파워게임이 작용하는 동네라는 거예요. 제가 지적이거나 시니컬한 스타일이 아니라서 처음엔 헬렐레 웃고만 다니는 아이로 보셨나 봐요. 작품도 미술적 차원이 아니라 그냥 ‘쟤는 저러고 노는구나’생각하고…. 그런데 갤러리에서 전시도 하고 대중에게 알려지니 이젠 백남준, 이동기 같은 분들과 함께 전시를 하게 되고, 유명 초대전에서 연락도 오고….”

    -언제부터 아티스트를 꿈꿨나요.

    “어릴 때부터 예체능 과목을 좋아했어요. 고등학교를 필리핀에서 나왔어요. 국제학교요. 한 반 학생이 20명 남짓이고 시설이 좋아 미술실에 가면 새 물감과 붓이 넘쳤어요. 또 어머니 같은 미술선생님이 계셨는데, 그분께 미술 배우면서 예일대 페인팅과에 가겠다고 꿈을 정했죠.”

    -예술의 대중화를 놓고서 말들이 참 많죠.

    “각자의 무기와 재능이 달라요. 그런데 사회는 한쪽만 강요해요. 미술을 한다고 하면 춥고 배고프고 비전 없는 걸 왜 하냐고 해요. 옛날에는 아티스트가 건축 과학 미술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전문가이자 권력자였죠. 존경도 받았고요. 그때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저는 홍대 출신이라서 그나마 나아요. 그냥 미술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콧방귀 뀌어요.

    자본주의 사회에 어울릴 만한 예술을 하고 싶어요. 내 생각대로 각 분야를 통합하면서 사람들이 좋아하고 즐기는 예술, 존경받는 예술을 하고 싶어요. 남의 눈이 두려워 하고 싶은 말 못하고 입고 싶은 옷 못 입는 부분을 대리만족시킬 거예요. 전 아티스트니까요. 작가의 고통에서 나온 작품이라야 승화된 뭔가가 서려 있다는 인식은 틀렸어요. 말도 안 되게 끄적거린 것 같은 작품으로 젊은 나이에 추앙받는 작가가 세계에는 많아요.”

    ‘낸시 랭’이라고 하면 그를 모르는 이는 국적부터 묻는다. 그를 본 적이 있는 이들은 교포라고 단정한다. 18세 이전 이중국적자였을 때 그의 한국 이름은 ‘박혜령’이었다. 현재는 ‘낸시 랭’ 만 유효하다. 뉴욕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아들 넷인 가부장적 집안 분위기와 한국에 대한 갑갑증 때문에 20대 초반이었던 20여 년 전 홀로 도미한 여걸이었다. 그녀는 한국에 잠깐 들어왔을 때 결혼하고 미국에서 낳은 낸시 랭을 한국에 보냈다. 낸시 랭의 어머니가 한국에 머무는 시간은 1년이면 고작 한두 달. 어머니의 빈 자리는 외할머니와 애완견이 채웠다. 낸시 랭에게 어머니는 아버지, 외할머니는 어머니와 같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아리송하다.

    ‘박혜령’과 베니스 비엔날레

    초등학교 시절 그는 밝고 예쁘고 차려입은 눈에 띄는 아이였다. 테니스, 피아노는 물론 피겨스케이팅도 공중회전 직전단계까지 배웠다. 중학교 때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친구 열두 명과 몰려다녔다. 예체능과 어학계열만 좋아했고 방학 때 내준 미술 숙제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학창시절은 늘 즐거웠다. 낸시 랭의 표정은 활자처럼 명확해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표정은 ‘누리던 그때’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었다.

    낸시 랭은 눈치 보지 않는다. 자랑으로 들릴 만한 얘기도 자체 검열하는 법이 없다. 자꾸 듣다 보니 가장된 겸손으로 억지 예의 차리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필리핀 국제학교에선 할 말은 하고 솔직하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고 멋있다고 했어요. 그야말로 아메리카죠. 영어 못하고 버벅대고 소극적인 아시아 학생의 모습은 바보스럽게 여겨졌죠. 제 자신을 밖으로 많이 끌어내는 시간이었습니다.”

    ‘긍정적 영향’이 되고픈 최첨단 팝 아티스트 낸시 랭

    낸시 랭이 좋아하는 사진작업은 자신의 작풉과 함께 하는 것.

    필리핀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건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유학 명령 때문이었다. 대수술을 앞둔 어머니는 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사춘기의 딸이 행여 비뚤어질까 봐 두 삼촌이 있는 필리핀으로 보내기로 한다.

    “대부분의 아시아 유학생은 그들끼리 어울려요. 그 그룹에선 자기네들도 빠질 게 없으니까요. 전 그게 싫었어요. ‘레귤러’ 축에 끼고 싶었죠. 열심히 해서 두 번째로 빨리 ELS어학 프로그램 과정을 마치고 아이비(IB, 국제학위인증) 디플로마도 땄어요. 파티에도 꼬박꼬박 참석했고요.”

    악바리처럼 스스로를 몰아붙인 건 오로지 예일대 페인팅과를 가겠다는 꿈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로 귀국해 홍익대 서양학과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대학원을 마치고 유학을 계획하던 그는 난생 처음 좌절이라는 걸 겪는다. 어머니는 아팠고 사업도 기울었다. 세금이 뭔지, 관리비가 뭔지 세상물정 모르던 그에게 학비를 못 내는 상황은 충격이었다. 그 와중에, 그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된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로 눈을 돌린다.

    “친구와 토플학원에 다니고 있었어요. 베니스 비엔날레가 열린다는 걸 알게 됐는데, 제목이 ‘꿈과 갈등’이었거든요. 마침 저는 집안 사정과 경제적 어려움이 겹친 악재 속에서 꿈의 좌절을 겪는 중이었죠. 비상구가 필요한 상황이어서, 비록 초대받진 않았지만 무작정 날아가서 작품세계를 펼쳐보자고 결심했죠. 여러 아이디어를 구상했어요. 비행기 티켓 살 돈이 없었는데 마침 제 작품 100호짜리가 500만원에 팔렸어요. 하느님이 도와줬다 생각했죠. 부랴부랴 퍼포먼스에 사용할 도구를 준비했어요. 바이올린은 예술의전당 근처 악기사에 쳐들어가 막무가내로 빌렸죠.”

    -그 퍼포먼스로 일약 이름이 알려지게 됐죠.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단지 제 상황을 해소하고 싶었죠. 계속 미술공부를 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 절망적이었어요. 하도 절실해서 거기까지 가게 된 것 같아요.”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는 가부키 배우처럼 분장하고 속옷차림을 한 채 ‘잡음’에 가까운 바이올린 연주를 한다. 기묘한 광경이었지만, 수천명의 청중이 환호했다. 그리고 몇 차례의 전시와 퍼포먼스로 언론을 타게 된다. 요즘은 방송과 인터뷰 요청이 밀려들어 잠깐 눈붙일 짬도 못낼 지경이 됐다.

    어쨌든 그는 ‘베니스 비엔날레 사건’ 이후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나서면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꽤 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너무 바빠요. 제가 패리스 힐튼 같은 여유 넘치는 삶을 영위한다면 몰라도 잠잘 시간조차 없는 상황에선 느낄 틈이 없어요. 작품활동, 방송, 제 자신의 브랜드 관리, 자선 파티도 예정돼 있어요. 거기에다 프랑스 초대전, 신세계 아트페어, 서울메트로 전시…. 가을까지는 전시회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아요.”

    Dream · “Go for it!”

    낸시 랭은 늘 뭔가를 구상하고 움직인다. 인터뷰를 마친 밤 12시에 그는 또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인기 연예인만큼이나 빽빽한 스케줄인데, 혼자 해나가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다. 실제로 이따금 연예기획사에서 연락이 오곤 하지만 거절한다. 자신의 이미지는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철칙 때문이다. 기업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와도 조건이 맞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에 한해서만 받아들인다.

    “아티스트는 철저하게 개인이에요. 공식적인 루트도 없고 대변해줄 사람도 없죠. 그러나 상대는 기업이죠. ‘갑을관계’가 생길 수밖에 없어요. 아티스트들은 자기 개성이 강해서 함께 일하기가 매우 힘들어요. 협력하다가도 싫으면 그냥 관두고 신경도 안 쓰죠. 하지만 저는 자본주의 사회의 쇼 비즈니스 맥락도 즐기는 편이라 책임감을 갖고 일하려 노력해요.”

    ‘Just be your self. Dream · Go for it!’ 낸시 랭이 건네는 메시지다. 그 자신과 작품, 꿈이 모두 이 메시지에 귀결된다.

    “제 꿈은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에요. 그로 인해 부와 명성도 얻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요. 서울을 뉴욕, 런던 같은 현대미술의 메카로 만들어 국가에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도 있어요. 그래서 하느님에게 영광을 드리고 싶어요. 그렇게 하려면 자양분이 좋아야 해요. 젊은 아티스트를 후원하는 것이 1순위죠. 젊은 작가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첫 개인전이에요. ‘현찰’이 필요하거든요. 누구에게나 문은 열려 있지만 시간과 돈이 없어 개인전을 못하는 이들이 많아요. 이번에 영 아티스트 13명을 뽑아 후원하는 행사를 기획했는데, 지원자의 학력에 제한을 두지 않았어요. 요즘은 재능 있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제가 비엔날레에 가려 했을 때 어머니가 “네가 아직도 부르주아인 줄 아냐”고 하셨어요. 예술을 하려면 현실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어요.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이 저를 ‘아트’에 올인하게 이끌었어요. 내일 어떤 집에 살지 몰라도 당장은 비엔날레에 가겠다고 결심했죠. 제겐 꿈이 다예요.”

    낸시 랭은 결코 헐렁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게 지나치게 명확했다. 자기 영역에 대한 고집도 대단했다. 인터뷰와 사진작업을 할 때도 애매한 부분은 반드시 짚고 넘어갔다. 그렇다고 자기본위의 완벽주의자로 볼 것만은 아니다. 겉으론 “상관없다”고 하면서도 주변의 오해에 누구보다 속상해하고, 뒤틀어진 관계를 쉽게 털어내지 못했다. 연신 ‘행복’ ‘너무’ ‘사랑’이란 말을 쏟아내며 얘기하다가도 울컥울컥 하는 모습은 순수했다. ‘낸시 랭은 터부요기니 자체다’라는 말의 속뜻을 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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