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호

고전 통해 억압의 숨통 틔워준 스승

“해학과 운치로 금기 풍자한 선조들의 지혜를 배우라”

  • 이재만 변호사 ljmad52@hanmail.net

    입력2006-07-21 13: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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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부와 규율만이 강요되던 숨막히는 1960년대 고교시절, 고전을 가르치신 최상덕 선생님은 재미있는 강의와 자유로운 학습 분위기로 우리의 숨통을 틔워주셨다. 변호사 생활을 하는 지금도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고전의 지혜는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고전 통해 억압의 숨통 틔워준 스승

    최상덕 선생(오른쪽)과 모교를 찾은 이재만 변호사가 학창시절을 소회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생들에게 공부와 규율만이 강요되었다. 교사들의 체벌은 물론 선배들의 ‘군기잡기’도 여간한 게 아니었다. 교사들은 성적이 안 오르면 안 오른다는 이유로, 오르면 기대만큼 안 올랐다는 이유로 매를 들곤 했다. 주로 손바닥이나 엉덩이(속칭 ‘빠따’)를 때렸는데, 한 대 맞을 때마다 아프다기보다는 자존심이 상했다.

    선배들은 주로 ‘버릇없다’는 이유로 군기를 잡았다. 머리카락이 길다, 복장이 불량하다, 태도가 불량하다는 등의 이유였다. 일제 강점기 때 만세학교(배재학교=반자이학교)라 불릴 만큼 반일(反日)기운이 강했던 학교인지라 일본 학생들과 대항하기 위해 강한 학생으로 훈육(訓育)하던 전통이 남아 있어 선배들의 권위도 대단했다.

    당시는 질서, 규율, 근검, 절약 등의 가치관이 강조되던 시대였고, 더구나 내가 다닌 배재고등학교는 분위기가 매우 엄격한 전통 사학(私學)이었다. 학교에는 이야깃거리도 많았다. 교정에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의 북쪽으로 뻗친 큰 가지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서거한 날 번개에 맞아 부러졌다. 이 일은 내가 입학하기 2년 전인 1965년에 있었는데, 이 대통령이 배재학당 출신인 탓에 ‘이 박사가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한 한이 깊어서 모교 교정에 있는 거목의 북쪽 큰 가지가 번개에 부러진 것’이라고들 했다.

    교정 동관 옆에 있는 수령 500년이 넘은 향나무의 10여 m 높이에 커다란 못 같은 것이 박혀 있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말을 묶어놓던 것이라고도 했고, 교실 지하실은 독립신문을 인쇄하던 곳이라고도 했다.

    또한 그 무렵엔 매일 아침 국가적 캠페인이던 새마을운동을 독려하는 노랫소리가 흘러넘쳤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되는 이 노래를 당시 학생들뿐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 뇌리에 인이 박일 만큼 들었다. ‘조국 근대화’라는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국가적 시책이 방송 뉴스나 드라마에서 수시로 방영되곤 했다.



    학생들은 조국 근대화를 위한 미래의 역군으로서 오직 ‘규율 속의 공부’만이 중요한 일이었고, 다른 과외 활동을 할 자유는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다들 까까머리에 목을 꽉 감싸는 호크가 달린 검정 교복에 검정 모자를 쓰고 학교와 집을 오갔다. 빵집도 자유롭게 들락거리지 못했다. 극장 출입이 불허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교회 아니면 학원에나 가야 여학생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고교생 미팅 같은 문화도 우리 시대에는 없었다. 남녀간의 내외도 심했지만 ‘남녀칠세부동석’의 가치관이 사회 전체를 지배했던 탓이다.

    우리 세대에게 특히 말 한마디 못하고 바라보기만 한 외사랑의 기억이 절절한 예가 많은데, 이는 이성교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죄악시되기도 했는데 고등학생들에게는 더 심했다. 나는 항상 이 점이 불만이었던 것 같다.

    마침 배재고 주변에는 이화여고, 경기여고 등 명문 여학교들이 있었다. 곱고 아리따운 여학생들을 등하굣길에서 마주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행운이었다. 그만큼 이성 교제에 호기심이 많고 어리숙한 시절이었다.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멀리서 나타나면 수줍어서 전봇대 뒤로 몸을 숨기곤 하던 때였다. 우리들은 대부분 혈기는 방자했으나 어디 제대로 발산할 곳이 없어 헤맸고, 애써 의연한 척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파격적인 ‘성인등급’ 수업

    어찌 보면 가장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이어야 할 인생의 황금기인 고교 시절이 오히려 더 암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청춘이 장밋빛이기는커녕 우울한 잿빛이었다고나 할까. 생각해보면 참으로 억울하고 아쉬운 시절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고전 통해 억압의 숨통 틔워준 스승

    최상덕 선생의 수업 광경. 재미있는 강의 때문에 선생의 수업시간은 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돌이켜보면 나와 동년배들의 고교시절은 근대화라는 자유로운 기운과 구질서를 유지하려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가 충돌하던 때였다. 따라서 근대화 교육으로 습득된 자유를 향한 열망은 어느 세대보다 강한데 사회는 그런 분위기를 용인하지 않으니 그 틈바구니에서 우리들은 안타까운 몸짓을 했던 것 같다.

    이때 우리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수업이 있었다. 그 시간만 되면 우리는 수업에 몰입하곤 했는데, 다름 아닌 고전(古典)문학 시간이었다. 고전은 학문이 높은 선비들이 세상과 인생을 논한 한문학이어서 지극히 점잖고 도도하며 청아한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들의 고정관념이란 참으로 한심한 것이었다. 인생에서 ‘이성(異性)’에 대한 부분이 절반이 넘는 비중을 차지한다는 걸 우리는 간과했던 것 같다. 옛날이라고 해서 ‘이성’에 대한 묘사나 문학적 언급이 없으란 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일깨워주신 분이 최상덕 선생님이시다.

    아무도 이성이나 성(性)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고 궁금해하는 것조차 금기시한 시절에 ‘옐로 페이퍼’도 아니고 고등학교 고전문학 수업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니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에 철철 다 넘는다~.’

    도라지타령은 흔히 작자 미상의 타령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작사가는 선비였을 것이다. 이 선비가 이런 시문을 지은 본 뜻이 무엇이며 작문법상 어떤 방법론이 담겨 있을까. 선생님은 가끔 고전 중에서도 이런 시문을 택하셔서 우리의 잠든 머리를 깨우쳐주시곤 했다. 지금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이 백도라지 타령에 담겨 있었다.

    선생님은 뜬금없이 “대바구니에 가득 찰 만큼 큰 백도라지가 있을 것 같냐?”고 질문을 던지셨다. 우리는 모두 어리둥절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뜬금없는 질문에 그저 머릿속으로 백도라지 크기를 가늠해볼 뿐이었다. 선생님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짐짓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것은 도라지가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이다. 대바구니도 마찬가지로 은유적인 표현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학생들의 표정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잠시 후 한 녀석이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고, 한참 후에야 우리는 그 의미를 알고 반 전체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급기야 선생님도 흐흐 웃으시며 책상을 탁탁 치고는 “선비도 남자다. 조선시대는 이성에 대한 관심을 금기시한 유교적 전통이 기승하던 시대였다. 아마도 억눌린 이성에 대한 관심을 은근슬쩍 표현한 은유적인 시문일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해학과 운치가 넘치는 작품이다”라고 하셨다.

    당시로서는 자칫하면 ‘선생이 애들에게 음담패설이나 한다’고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오해를 감수하면서 우리들의 잠든 마음을 깨워주셨다. 요즘의 눈으로 보면 아무 얘기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수업이었고 내용도 ‘성인등급’이라 할 수 있었다.

    이보다 더한 성인등급의 수업 내용도 있었는데, 바로 그 유명한 ‘만전춘’이다. 만전춘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얼음 위에 댓닢 자리 보아 임과 내가 얼어 죽을망정 정든 오늘 밤 더디 세오시라!’

    “마음으로 느껴보라”

    세상에, 고전문학에 이렇게 파격적이고 노골적인 문장이 숨어 있다니. 지금 들어도 매우 적나라한 표현이 아닐 수 없는데, 당시 한창 예민한 나이에야 오죽했겠는가.

    귀가 번쩍 뜨인 학생들은 한동안 고전문학 공부에 빠져들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사실 그때 열심히 했던 고전문학 공부가 나중에 고시공부를 할 때나 변호사로 일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옛날 선비들이 인생과 세상에 대해 논한 한 구절 한 구절이 새록새록 생각나면서 인생사를 정리해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변호사 업무라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온갖 인생 잡사를 카운슬링하고, 법적인 어려움을 대신 처리해주는 일이다. 특히 형사사건 중 이성간에 얽히고설켜 발생한 사건에는 법률 이론만으로는 풀릴 수 없는 복잡미묘한 진실이 가로놓여 있게 마련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심장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정서적인 반응이 열쇠가 될 때가 많다. 이런 지혜를 구하는 법은 법전 속에는 없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아름다운 고전문학 속에 길이 있는 경우가 있음을 보게 된다.

    어쩌면 선생님은 학생들이 고전문학 공부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기 위한 방편으로 다양한 시문 중에서 예민한 학생들의 귀가 번쩍 뜨일 만한 시문을 택하셨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렇게 고전문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학생들은 차츰 정철, 소동파, 두보의 시문을 비롯해 유교 정전인 논어, 대학에까지 관심을 갖고 고문의 지혜를 공부하게 됐다.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지금도 변론서를 쓸 때 논어의 구절을 떠올리면 동시에 자연스럽게 선생님이 떠오르곤 한다.

    선생님은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우리를 깊이 있는 문학의 세계로 인도해주셨다. ‘선생님도 과연 모르시는 게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열강을 하실 때는 마치 큰 선비의 말씀을 듣는 듯 수업 내용이 힘있게 가슴을 치고 들어왔다. 지금 변호사 업무와 비교해서 생각해보면 선생님은 정말로 수업준비를 많이 하신 분이 아니었던가 싶다. 선생님의 충분한 수업준비가 쌍화점, 만전춘 등을 자유롭게 학생들에게 가르치시는 원천이었음을 훗날에야 깨닫게 됐다.

    또한 선생님은 고려속요 ‘가시리’를 가르치실 때에는 “마음으로 느껴보라”고 한마디 하시고는 물끄러미 창밖만 바라보셨다. 극도의 자기희생과 감정절제로 재회를 기약하는 ‘가시리’를 자세한 설명을 통해 좀더 잘 알 수도 있겠지만 말 없는 강의로 더 큰 깨침을 얻기도 한다. 공즉만(空卽滿), 즉 ‘텅빈 것은 꽉 찬 것과 같다’는 말처럼 말 없음과 말 있음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법정에서는 당연히 말과 글로 의뢰인의 고충과 번민과 이유와 사연을 피력하지만 어떤 사건의 경우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복잡미묘함 때문에 가슴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말과 글이 실체적 진실의 세계를 모두 반영하지는 못한다는 걸 점점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다시 듣고 싶은 강의

    변론을 하다 보면 자신의 처지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의뢰인이 있는가 하면 한마디도 안 하는 의뢰인도 있다. 언젠가 구치소에서 특수강도죄로 구속된 대학 휴학생을 접견한 적이 있는데, 그 학생은 몇 분 동안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말하지 못한 채 울기만 했다. 당시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의 억울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말없이 자신의 처지를 변호인에게 충분히 느끼게 해줬다.

    달변의 해박한 강의와 무언(無言)의 강의가 하나로 통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은 사춘기 시절 나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의 자유로운 강의 덕분이다.

    흔히들 지금은 스승이 없는 시대라고 한다. 시대정신을 표상하는 큰 스승이 없다는 뜻이다. 혹자는 선생다운 선생이 없다고도 한다. 상업주의에 물든 입시 위주 교육 때문이다.

    고전 통해 억압의 숨통 틔워준 스승
    李載滿

    1952년 서울 출생

    배재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행정대학원 졸업

    1992년 제17회 사법시험 합격

    1995년 변호사 개업

    연세대 법학연구소 자문위원·법무대학원 초빙강사, 세계스포츠선교회 법률고문, 대한변호사협회 이사


    그러나 예민한 사춘기 시절, 선생님의 한마디에 인생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는 예가 흔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반드시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뛰어난 실력을 갖춰야만 스승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사명감을 갖고 충실히 준비하며 가르침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시는 분이라면 훌륭한 스승이라는 명예를 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내가 기억하는 최상덕 선생님은 널리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가르침에 열심히 노력하셨고, 세상을 사는 지혜를 가르쳐주신 분이다.

    이성보다 감성이 혼재된 이 세상에서 가슴에 메아리치는 큰 울림이 점점 사그라지고 있다. 작은 일에도 마음이 설레던 예민한 사춘기 고교시절, 우리들을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행동하도록 가르쳐주신 선생님과 모교가 있던 정동골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리움과 재회를 노래한 고전을 소재로 한 선생님의 강의를 다시 듣고 싶다. 선생님의 청아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가시리 가시리 잇고 날러는 엇디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리 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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