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금순이’ ‘소서노’ 연타석 홈런 쏘아올린 한혜진

“물올랐다고요? 하도 많이 혼나서 시집가고 싶어요”

  •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입력2006-08-08 16:0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금순이’ ‘소서노’ 연타석 홈런 쏘아올린 한혜진
    다시 사극 열풍이 불고 있다. MBC ‘주몽’과 SBS ‘연개소문’이 한동안 텔레비전 앞을 떠나 있던 중년남성을 불러모으고 있다. 특히 ‘주몽’은 정통사극의 무게감과 퓨전사극의 재미에 멜로를 적절히 버무려 젊은층과 주부, 중년남성에게 모두 인기다. 벌써부터 시청률 40%를 넘어서며 ‘대장금’ 기록을 갈아치울 기세다.

    드라마 ‘주몽’은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역사를 다룬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인물이 주몽과 결혼해 고구려를, 아들 온조와 백제를 세운 국모(國母) 소서노다. 작가 최완규씨가 당초 제목을 ‘주몽’이 아닌 ‘소서노’로 붙이려 했을 만큼 드라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다.

    소서노로 열연하고 있는 탤런트 한혜진(25)의 연기를 보며 지난해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MBC 일일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의 주인공 금순이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맹한 듯하면서도 아득바득 살아가는 금순이와 두둑한 배짱으로 현란한 무예 실력을 자랑하는 여장부 소서노는 한참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한혜진은 금순이로 시청자들을 웃고 울린 것처럼, 소서노를 통해 역사를 개척한 당찬 여성상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신세대 탤런트 특유의 생기와 섹시함을 드러내면서도 깊이 있는 연기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용인의 산속에 있는 드라마 촬영장을 찾았다.

    소서노는 상단을 이끌고 원행(遠行)을 떠나기 앞서 짐을 꾸리고 있었다. 가져갈 물건을 살펴보는 그에게 책사(策士) 사용이 “할 말이 있다”고 하자 사용을 쳐다보는 신(scene)이었다. 단순한 장면 같아 보이는데도 몇 번이나 NG가 났다. 사용의 대사가 꼬이기도 하고, 뒤에 서 있던 엑스트라가 실수하기도 하고, 소서노가 사용을 쳐다보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며 같은 장면을 찍고 또 찍었다.



    드라마 촬영 현장은 분주하면서도 지루했다. 10여 초 정도 되는 신 하나를 찍기 위해 한 시간 넘게 세트를 만들고, ‘OK’ 사인이 날 때까지 수십명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같은 연기를 반복했다. 촬영이 늘어지자 자신의 신을 기다리다 구석에서 잠든 배우도 있었다.

    겨우 한 장면 촬영을 마친 한혜진이 옷을 갈아입으러 차 안으로 들어갔다. 거듭된 NG와 감독의 꾸지람 때문인지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았다. 촬영 틈틈이 이야기를 나눠볼 요량이었는데 그것도 쉽지 않을 듯했다.

    군기 바짝 든 톱스타

    “많이 예민해져 있어요. 욕심처럼 연기가 안 되니까 마음이 무거운 모양이에요. 하긴, 촬영을 시작한 지 석 달이 넘었으니 몸도 마음도 지쳤죠. 촬영장을 매일 옮겨다녀야 하는데다, 사극이라 한여름에도 긴 옷을 여러 벌 겹쳐 입고 땡볕 아래 있어야 하니 더 힘든 것 같네요.”

    매니저 박가을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주일 내내 촬영의 연속이라고 한다.

    “일요일과 월요일엔 여의도 스튜디오에서 세트 촬영을 하고, 화요일 새벽부터 토요일 밤까지 쭉 야외촬영이 이어져요. 하루는 전남 나주, 하루는 용인, 하루는 충북 제천, 하루는 경남 산청에서 찍는 식이죠. 강원도 영월에 갈 때도 있어요. 새벽까지 촬영한 후 곧장 다음 촬영지로 갈 때도 있고요.”

    ‘금순이’ ‘소서노’ 연타석 홈런 쏘아올린 한혜진
    의상을 바꿔 입은 한혜진이 다시 촬영을 위해 세트장으로 올라갔다. 이젠 톱스타급이니 시원한 차 안에서 기다리다 호출이 오면 올라갈 법도 한데, 미리 가서 대기하는 모습이 군기 바짝 든 신인 같았다.

    촬영장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대본을 보고 있는 한혜진이 안쓰러웠는지, 중견 탤런트 정한헌씨가 우스갯소리를 건넸다. 시무룩하던 얼굴이 조금씩 밝아졌다. 그때 한혜진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전, 일찍 결혼하고 싶어요. 아이도 빨리 가졌으면 좋겠어요.”

    “뭣하러 결혼을 일찍 해, 천천히 하는 게 좋지. 생각 고쳐 먹어.”

    “결혼하면 좋잖아요.”

    “좋긴 뭐가 좋아. 한 3년만 좋지, 그 다음은 별거 없어.”

    “어머, 그렇게나 빨리요?”

    “결혼하더라도 꼭 신랑 몰래 딴 주머니 차야 해. 인생 선배가 하는 말이니까 새겨들어.”

    잠시 웃음꽃이 피어났다. 여자가 결혼하고 싶을 땐 두 가지 경우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변화를 주고 싶거나, 아니면 정말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거나. 한혜진에겐 사귀는 사람이 있다. “곧 좋은 소식이 들리는 거냐”고 묻자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지금 당장 시집가겠다는 건 아니고요. 젊은 여자들은 누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결혼해서 남편이라는 울타리의 보호를 받고 싶은….”

    ▶ 남자친구와 구체적으로 얘기한 적은 있고요?

    “아직 그런 건 없어요. 하지만 여성 연기자라고 일찍 결혼하면 안 된다는 선입관은 없어져야 한다고 봐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기회가 되면 빨리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 결혼하고 아기 낳은 후에도 연기는 계속하겠죠?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할지 안 할지….”

    연기가 많이 힘든 모양이다. “사극 연기가 힘들죠?”라고 묻자 “힘들긴 힘든데…잘 모르겠어요” 하는 끝에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금순이’ ‘소서노’ 연타석 홈런 쏘아올린 한혜진
    그가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순간 다시 촬영 호출이 왔다. 상단을 이끌고 길을 떠나는 신인데, 말을 타는 품이 능숙하다. 촬영 틈틈이 말을 타고 달리기도 했다. 간간이 빗줄기가 떨어지는 중에도 촬영은 계속됐다. 두 시간쯤 지나 그가 다시 돌아왔다. 얼굴이 아까보다는 훨씬 밝다.

    “말을 타고 달렸더니 기분이 많이 풀렸어요. 사실은 아까 감독님에게 많이 혼나서 감정 조절하느라 애먹었어요. 연기하면서 이렇게 혼나보기는 처음이에요. 시작할 때만 해도 정말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 많이 혼나서 시집가고 싶다고 한 거예요?

    “그랬을 수도 있어요. 결혼하면 힘들 때 남편에게 위로받을 수 있잖아요.”

    ▶ 지금도 전화하면 위로해줄 사람이 있잖아요.

    “‘오빠’는 전화해도 위로가 안 돼요. 그냥 ‘잘하지 그랬어’ 하고는 끝이에요(웃음).”

    “말도 저를 무시했어요”

    소서노는 낯선 이름이다. 그에 대한 사료가 거의 없어 웬만한 역사책에는 이름도 나오지 않는, 잃어버린 영웅이다.

    ▶ 소서노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겠네요.

    “감독님이 공부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역사 속 소서노란 이름을 빌려왔을 뿐 순전히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인물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섣부르게 아는 게 오히려 소서노를 연기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보셨나봐요. 물론 어떤 인물일까 궁금해 소설 ‘소서노’는 읽어봤어요. 고구려와 백제 건국사 등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책도 많이 읽었어요. 그게 연기하는 데 도움이 돼요.”

    ▶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소서노의 이미지가 있을 텐데요.

    “제가 설정한 건 하나도 없어요. ‘굳세어라 금순아’를 할 때는 제가 금순이 캐릭터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머리를 뽀글뽀글 볶기도 하고, 옷도 직접 고르고…. 그런데 이번엔 작가가 그리는 대로 물 흐르듯 연기하고 싶어요. 소서노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워낙 깊어서 잘 그려질 것이라고 믿거든요. 오히려 제가 그걸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아 속상해요.”

    그가 ‘주몽’ 출연 제의를 받은 건 지난해 11월이지만, 이미 금순이를 촬영하던 그해 7월부터 소서노 역에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시놉시스를 읽어보고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다.

    “당시 영화, 드라마 출연제의가 잇달았어요. 그런데 대부분 금순이와 비슷한 캐릭터였죠.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이 없었어요. 사극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고요. 그래서 무작정 기다렸어요.”

    ▶ 작품을 직접 고르나요.

    “매니저가 ‘이거 괜찮다’고 해도 제가 읽어보고 느낌이 안 오면 안 해요. 주몽은 정말 욕심이 났어요.”

    ▶ 금순이와 소서노는 캐릭터가 전혀 다른데, 배역을 고르는 기준이 뭔가요.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제가 소화할 능력이 없으면 못하죠. ‘이건 내가 잘할 수 있다’ 싶은 걸 선택해요. 금순이와 소서노는 극과 극의 인물처럼 보이지만 제 안엔 둘의 성격이 다 있어요. 금순이처럼 밝고 긍정적인 모습도 있고, 소서노처럼 냉정한 면도 있어요.”

    결국 그의 바람대로 소서노 역에 캐스팅됐다. 나중에 알았지만 주몽으로 낙점된 탤런트 송일국이 그를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금순이’ ‘소서노’ 연타석 홈런 쏘아올린 한혜진

    주몽을 맡은 송일국(오른쪽)이 소서노 역에 한혜진을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제가 무명일 때 단막극을 한 게 있어요. 나중에 미니시리즈 ‘낭랑 18세’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그 단막극을 보고는 ‘똘망똘망하니 잘한다’고 생각했대요. 그후 ‘굳세어라 금순아’를 보고 ‘이 친구면 괜찮을 것 같다’ 싶어 추천했다고 하더군요.”

    소서노는 미모도 뛰어나지만 무예도 출중하다. 말도 잘 탄다. 그래서 한혜진은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4개월 동안 1주일에 5일을 오전엔 1시간씩 승마연습, 오후엔 3시간씩 무술연습을 하며 보냈다. 몸을 유연하게 하기 위해 재즈댄스도 배웠다.

    “다친 적은 없지만 ‘힘든 드라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운동신경이 둔한 제가 그걸 하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오기로 버텼죠. 정말 열심히 연습했는데도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까 액션 연기가 정말 어렵더라고요. 특히 대소 왕자(김승수 분)랑 대결할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말을 제법 잘 타는데, 승마도 이번에 처음 배웠다고 한다.

    “낙마한 적은 없어도 배우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어요. 제가 잘 못 타니까 처음엔 말도 저를 무시하더군요. 자꾸 떨어뜨리려고 하고, 장난도 쳐요.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까 그때서야 말도 제가 하자는 대로 따라줬어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말을 탈 때의 쾌감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요. 너무 기분이 좋아요. 말은 귀엽고 애교도 많아요. 사람이랑 교감이 잘되는 동물이거든요.”

    “연기 내공 없었던 것 절감”

    그는 “사극이 이렇게 어려운 건지 몰랐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금순이 할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사극을 하면서 ‘내가 아직 신인이구나’ 하는 걸 뼈저리게 느껴요. 내 안에 아무런 연기 내공도 없었던 거예요. 뭘 해도 어색해요.”

    ▶ 어떤 게 특히 힘든가요.

    “현대물과는 말투부터 달라요. 현대물은 목으로 소리를 내도 별 문제가 없지만 사극은 반드시 복식호흡으로 대사를 해야 해요. 배에서 가슴을 타고 뒷목으로 올라오는 소리를 내야 해요.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처음엔 뱃심이 달려 안 되더라고요. 사극은 대사를 할 때 끊어줄 곳에서 제대로 끊고, 강조할 할 단어를 정확하게 강조해야 하는데, 그게 지금도 힘들어요. 아까도 감독님께 여러 번 핀잔을 들었어요. 처음엔 그 차이를 몰랐는데 NG 화면으로 보니까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어색했어요.

    행동하는 것도 달라요. 현대물은 누가 부르면 휙 돌아봐도 되지만 사극은 안 그래요. 소서노는 권위 있는 인물이라 천천히 돌아봐야 하고, 고개 돌리는 각도도 정해져 있어요. 또한 늘 허리를 곧게 펴야 하고요. 그런 것 하나하나 신경 쓰면서 하려니까 대사는 꼬이고, 행동은 어색해지고…, 그러다 보니 극에 몰입이 안 돼 저 혼자 붕 떠 있는 느낌이었어요. 엄청 혼날 때는 정말 현대물이 그립더라고요(웃음).”

    ▶ 언론에선 연기 잘한다고 칭찬하던데요.

    “아니에요. 연기에 대한 회의도 들고, 내가 정말 연기자의 자질은 있는 건가 하는 의문도 들고, 마음이 약해져요. 그런데 제 역할이 마음이 약해지면 절대로 안 되거든요. 자신감이 넘쳐야 진짜 소서노 연기가 나올 수 있는데….”

    그렇다고 마냥 의기소침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생스럽지만 연기의 참맛을 느껴가는 게 즐거운 모양이다.

    “제가 연기를 제대로 배우려고 이걸 하게 된 것 같아요. 이 드라마 끝나고 나면 어떤 역할을 맡아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아요.”

    얼굴에 웃음이 묻어났다.

    ‘금순이’ ‘소서노’ 연타석 홈런 쏘아올린 한혜진

    같은 신을 열 번 스무 번씩 활영하다 보면 지칠 법도 한데 소서노 한혜진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무명의 설움

    한혜진은 방송사 공채출신도 아니고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것도 아니다. 신세대 스타들이 그렇듯 어느 날 갑자기 드라마에 얼굴을 내밀었다.

    “연기가 하고 싶었어요. 고3 때는 연극영화과 가려고 연기아카데미도 다녔죠.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웠어요.”

    연기력을 키워 볼 심산으로 무작정 지하철을 타고 껌이나 휴지를 팔거나 정신 나간 여자처럼 차려입고 길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때 열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소가 배어 나온다고 했다.

    데뷔작은 한일합작 드라마 ‘프렌즈’. 2002년, 서울예대 재학 때였다. 단역이지만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오디션에 합격해 얻어낸 배역이었다. 방송에 나가기만 하면 바로 뜨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무명 연기자 생활이 시작됐고, 조연의 설움도 톡톡히 겪었다.

    “방송 분량이 넘치면 무조건 조연들 신부터 들어내기 때문에 제가 나온 게 잘릴 때가 많았어요. 그리고 제가 입은 옷이 주인공하고 색깔이 같으면 다른 색 옷으로 바꿔 입어야 했어요. 배역 탈락 경험은 수도 없어요. 여주인공 최종 후보에서 탈락한 것도 여러 번이죠. 가장 가슴 아팠던 건 제가 주인공을 맡았던 단막극이 시청자들 호응이 좋아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질 때였어요. 여주인공 후보 명단에 제 이름조차 없는 거예요. 내 편이 아무도 없다는 설움을 진하게 느꼈죠. 그래서 한동안 활동을 접기도 했어요. 누군가 제게 ‘연예인은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맞아요. 활동할 때는 칼날 위에 선 것처럼 힘들고 위험하지만 거기서 내려오면 다시 그리워져요. 연기를 안 하니까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고 우울증 같은 것도 생기더군요.

    하지만 그런 무명시절이 저한테는 소중해요. 그런 시간이 없이 바로 떴다면 교만해졌을 거예요. 아픔과 쓴맛을 봤기에 좀더 성숙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다 일일드라마 제안을 받았는데, 처음엔 썩 내키지 않았어요. 하지만 고두심 선생님이 나온다고 해서 시작했어요. 참 잘한 일이죠. 선생님께 많이 배우면서 ‘연기가 이런 거구나’ 하는 걸 몸으로 느꼈으니까요.”

    아침드라마 ‘그대는 별’로 KBS 신인상을 수상하며 시청자에게 이름을 알린 그는 다음 작품 ‘굳세어라 금순아’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금순이로 인기를 얻었지만 제 연기의 터닝 포인트는 지금이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금순이 때는 지금처럼 노력하지 않았어요. 지금 같은 열정도 없었고요. 그땐 연기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못한다는 말도 안 들었고요. 요즘 ‘왜 그때 지금의 열정으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밀려와요.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소중한 드라마니까요.

    지금은 대본을 몇 번이나 보는지 몰라요. 한 신 한 신 정성을 다해 찍고요. 첫 촬영에 들어가니 ‘금순이 정도로 해서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데요. 걱정이 돼 잠도 안 왔어요. 그렇게 열심히 애정을 갖고 하는데도 감독님으로부터 ‘노력은 하고 있는 거냐’는 말을 들으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죠. 왜 저의 열정이 연기로 표현되지 않는지 답답하기도 하고….”

    ▶ 지금은 출연료나 CF 모델료가 많이 올랐겠어요.

    “데뷔할 때 출연료가 얼마였는지 생각이 안 나요. 금순이를 할 때는 생각처럼 많이 받은 건 아니에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회당 출연료만 따지면 지금은 금순이 때보다 4배 정도 더 받아요. 정확한 액수는 말 못해요. 선배님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거든요. CF 모델료는 금순이 때보다 2배 이상 오른 것 같아요. 6개월에 2억5000만원 받은 것도 있어요.”

    나얼과 광화문에서 월드컵 응원

    그를 만나기 전, 매니저는 한혜진의 연인으로 알려진 가수 나얼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배우 한혜진’에만 초점을 맞춰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혜진이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내 화제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흘렀다. 나얼은 20대 여성에게 인기가 많은 브라운아이즈의 멤버다. 그의 노래 ‘벌써 일년’은 마흔을 앞둔 기자도 좋아한다. 두 사람은 2004년경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고 한다.

    ‘금순이’ ‘소서노’ 연타석 홈런 쏘아올린 한혜진

    한혜진은 지난해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맹하지만 삶에 적극적인 여성 역을 잘 소화해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다.

    ▶ 둘 다 연예인이라 사귀는 게 조심스럽지 않았어요?

    “제가 오빠 팬이었어요. 그래서 처음엔 호기심으로 만났는데, 몇 번 만나다 보니 음악에 대한 오빠의 진지한 열정과 성실함, 사람 됨됨이에 끌렸어요. 우리 관계를 처음 언론에 밝힐 때는 걱정도 했어요. 사실 그대로 알려지는 건 상관없는데 사실과 다르게 기사화되는 경우도 있잖아요. 다행히 저나 오빠나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하니까 팬들도 저희를 격려해주시는 것 같아요. 지금은 연애하는 게 서로에게 플러스라고 생각해요.”

    ▶ 연예인들은 보통 연인 사이여도 ‘친한 친구’ ‘오빠 동생’ 사이라며 부인하던데, 한혜진씨는 솔직한 편이군요.

    “만남을 부정할 정도로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안 만나는 게 낫죠.”

    ▶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텐데, 데이트는 어떻게 해요?

    “요즘은 시간이 없어 잘 못 봐요. 전화통화 자주 하고, 가끔 같이 영화 보는 정도예요. 시간이 있을 땐 남들 데이트하는 것처럼 우리도 카페에서 차 마시고 길거리 데이트도 자주 했어요. 자연스럽게 있으면 사람들이 잘 몰라봐요. 간혹 커플로 시사회 초대를 받는데 오히려 그런 곳은 불편해서 안 가요.

    월드컵 토고전 때는 같이 있었어요. 광화문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오빠랑 친구들이랑 봤어요. 경기가 끝난 뒤엔 거리로 나가 사람들과 어울렸어요. 다들 흥분해서인지 잘 몰라보더라고요. 간혹 알아보는 사람도 제가 방송 프로그램 촬영하는 줄 알더군요(웃음). 다음날 새벽부터 드라마 촬영이 있어 잠깐 있다 집으로 갔어요.”

    ▶ 젊은 연예인이라 개방적일 듯한데, 말하는 걸 들어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네요.

    “크리스천이라 좀 보수적으로 보이는 걸까요? 어느 정도 보수적인 게 좋다고 봐요. 가령 전 결혼해서 부모님을 모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빠와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오빠도 좋다고 하는데, 오히려 오빠 어머니께서 우리랑 같이 살면 귀찮다며 결혼하면 저희끼리 나가서 살라고 하셔요.”

    ▶ 요즘 들어 연예인들이 홍보대사를 많이 하던데.

    “여성단체에서 제안이 많이 왔어요. 하면 좋죠. 그런데 그런 것 하려면 언행일치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름만 걸어놓고 제대로 일을 못 하는 것보다는 내실 있게 할 수 있을 때 하고 싶어요. 지금은 드라마 촬영 때문에 못 하지만 끝나면 해외 선교봉사활동을 나갈 생각이에요.”

    가족들 웃음 찾아준 연기자 생활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얼굴이 잠깐 어두워졌다. 그가 아침 드라마를 할 때 배역이 가난한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다. 그 무렵 부모님이 외환위기 때 사업에 실패해 인천에서 ‘함바집’을 하며 어렵게 산다는 게 언론에 알려지면서 마음고생을 했다.

    “전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존경해요. 하지만 딸 된 도리로 부모님이 고생하시는 걸 보는 게 가슴아프죠. 지금은 함바집을 그만두셨지만, 당시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족들이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가난한 게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실제 이상으로 과장되게 보도되는 바람에 가족들이 많이 힘들어했죠. 더는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요.”

    ▶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것 같군요.

    “저로 인해 가족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는 게 제일 좋아요. 제가 연기를 해서 세상에 알려지면서 가정이 더욱 밝아졌어요. 엄마도 딸 자랑하느라 어깨를 펴시고요. 그걸 보며 더 열심히 연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기를 할 수 있는 게 고마워요.”

    ▶ 아버지는 어떤 분입니까.

    “화를 낼 줄 모르는 분이세요. 엄마에게 꽉 잡혀 살면서도 늘 웃으세요. 화를 냈다가도 금방 풀어져요. 심성이 너무 착해서, 우리 집 살림도 어려운데 친구 분이 어려운 사정에 처하면 그나마 남은 몇 푼마저 꿔주시곤 하셨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마음 상한 적도 여러 번 있었어요. 어렸을 땐 그런 아버지가 싫었지만 자라면서 이해하게 됐어요. 그게 바로 참 신앙인의 자세라는 걸 알게 됐죠. 지금은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좋아해요. 그런 아낌없는 사랑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해요. 2000년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적이 있는데,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어릴 때부터 검소함이 몸에 배어서일까, 그는 지금도 자동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사적인 일을 볼 때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요. 비디오 빌리러 갈 때나 시장 갈 때처럼 한두 정거장 정도는 그냥 걸어다니고요. 요즘은 버스를 자주 타지는 않아요. 교회에 갈 때나 미용실 갈 때 타죠. 모자 쓰고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거의 몰라봐요.”

    ▶ 차를 안 사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차에 대한 욕심이 없어요. 옷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고요. 저 자신을 위해 돈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엄마가 딸이 힘들게 번 돈으로 당신이 뭘 사는 걸 미안해하시기에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버스 타면 음악을 들으며 가는데, 길거리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치 제가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찍고 있는 것 같아 즐거워요.”

    벌써 날이 어두워졌다. 아직도 못 찍은 신이 남아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다시 촬영하기로 했는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의 식사시간까지 빼앗고 말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이 남아 있었지만 이쯤에서 인터뷰를 접어야 했다. 밤 촬영을 마저 끝내고 내일은 새벽같이 충북 제천으로 향해야 한다기에 잠깐이라도 쉴 시간을 줘야 했다. 데이트는 아쉽게 끝났지만, 그의 참모습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인터뷰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