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75세에 송판 깨는 美 태권도 황제 이준구

“내 주먹은 바람, 내가 인정한 유일한 고수는 ‘싸움꾼’ 이소룡”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6-08-14 11: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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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세에 송판 깨는 美 태권도 황제 이준구
    실외 무술시범으로 시작된 그와의 인터뷰는 생동감 넘치는 것이었다. 그는 기자의 질문에 앞서 자신의 태권도 철학을 장시간 강의하는가 하면 인터뷰 사이사이에 송판 격파, 주먹 지르기, 하체 단련 체조 등 다양한 시범을 했다. 이를테면 태권도의 위력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기자를 일으켜 세워 “한번 막아보라”며 주먹을 내지르는 식이었다.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그의 주먹은 바람이었다. 40대 초반인 기자는 70대 중반인 그의 주먹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미국 태권도 황제 이준구(李俊九·75)씨. 미국인들은 그를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라 부른다.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행사에서 ‘세기의 무술인’으로 선정되기도 한 그의 미국 이름은 준 리(Jhoon RHee). ‘준리 태권도협회’와 ‘세계무술협회’ 창시자다.

    이씨는 2003년 2월 심장판막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의사는 심장에 부담을 주는 푸시업(팔굽혀펴기)을 삼가고 비행기를 타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에 따라 이씨는 하루에 1000번씩 하던 팔굽혀펴기를 중단했다. 같은 이유로 발차기에도 작별을 고했다. 다만 격파와 주먹 지르기, 하체 근력 강화를 위한 체조는 계속하고 있다.

    비행기도 여전히 탄다. 하늘을 날지 않고서는 ‘태권 전도사’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수년 전부터 전 세계를 누비며 태권도 철학을 강연하고 있다. 그의 독특한 태권도 철학은 ‘국제 10021클럽’을 탄생시켰다. 10021은 ‘100년의 지혜가 깃들인 21세의 젊음’을 뜻한다.

    2002년 서울에서 창립된 이 단체는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정신적 교류 모임이다. 체(體) 덕(德) 지(智) 진(眞) 미(美) 애(愛)라는 6가지 이념을 실천해 행복공동체사회를 만드는 것이 사업목표다. 이 단체의 총재인 그는 이 사업을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의 시에 빗대 ‘동방의 등불’을 켜는 일로 자임하고 있다.



    무술시범을 요청하긴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태권도 고수라지만 칠순 노인이지 않은가. “연세가 많아 요즘은 웬만해선 밖에서 시범을 하시지 않는다”는 측근의 귀띔이 무색하게 그는 취재진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장소는 서울 여의도 KBS 본관 광장.

    먼저 수도 자세. 왼손은 주먹을 쥔 채 가슴에 붙이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모두 붙인 채 부채처럼 쫙 펴서 가슴 전면에 세웠다. 묵직하고 꽉 찬 느낌이다.

    다음으로 발차기 동작. 오른발 앞차기를 했는데 쭉 뻗은 발이 머리 위로 솟구쳤다. 그런 다음 왼손으로 발끝을 잡고 한동안 균형을 유지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 몇 차례 같은 동작을 되풀이했다.

    이어 다리 일자(一字) 벌리기 시범. 그는 옷 버리는 것을 개의치 않고 다리를 일자로 벌리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180。에 가까웠다. 그런 다음 양 손바닥을 바닥에 댄 채 상체를 숙여 가슴을 바닥까지 내려붙였다. 사진기자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기자의 ‘특별 요청’을 받아들여 옆차기를 선보였다.

    시범이 끝난 후 인터뷰 장소로 되돌아왔다. KBS 맞은편 건물의 한 사무실이다. 몇 년 전부터 그가 한국에 들어오면 자주 들르는 곳으로, 주인은 세라믹 의류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심장수술 후 늘 세라믹 옷을 입고 다니는데 원적외선이 발산돼 몸에 좋다고 한다. 이날도 그는 깃이 목 중간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세라믹 티셔츠에 방탄조끼를 연상케 하는 세라믹 조끼를 걸쳤다.

    “136세까지 살겠다”

    키를 물어보니 165cm라고 한다. 몸무게는 64㎏쯤. 큰 귀와 짧고 짙은 눈썹이 첫눈에 들어온다. 무술인 특유의 강단이 서려 있다. 하지만 눈매가 부드러워서인지 전체적으로 푸근한 인상이다. 대단한 명성에 걸맞은 권위를 내세울 만도 했지만, 적어도 겉보기에 그는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태도와 소박하면서도 시원스러운 말투, 그리고 유머 감각이 처음 만나 대화하는 사람 사이에 필연적으로 생기게 마련인 긴장을 녹이고 거리를 좁혀주었다.

    그가 이번에 한국에 온 것은 제8회 세계태권도문화축제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6월27일 낮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행사가 열리는 전북 전주로 달려갔다. 일본에서 오는 길이었다. 일본에 들른 것은 알리-이노키 경기 3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받았기 때문. 시합 당시 그는 알리의 특별코치로 활약했다.

    인터뷰에 앞서 그가 “내가 요즘 무슨 얘기를 하고 다니는지부터 설명하고 질문을 받는 게 좋겠다”며 미리 준비한 자료를 꺼내들고 ‘강의’를 시작했다. 주제는 크게 두 가지. 첫째, 어떻게 무술이 철학인가. 둘째, 인생의 보편적 목적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이 “전세계에 동방의 등불을 켜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이는 “미국의 물질문명과 한국의 정신문명이 합쳐져 가능한 일”이라고 역설했다. 그가 정립했다는 태권철학의 요지는 체, 덕, 지의 3대 인격을 갖추고 진, 미, 애가 넘치는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태권철학이 지향하는 공유(共有)사회는 그가 119세가 되는 2050년에 도래할 전망이다. “그때까지 살 수 있겠냐”고 묻자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자신 있게 말했다. 평소 주변사람들에게 136세까지 산다고 공언해왔다는 것. 왜 하필 136세일까. 그의 설명이 재미있다.

    “미국에 ‘식스티 미니츠(60minutes)’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어요. 35년 전에 이 프로그램의 모리 셰리프라는 기자가 소련 장수촌을 취재해 보도한 적이 있어요. 겨울인데 109세 남자가 냇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어요. 기자가 이유를 물어보자 ‘어머니 생신을 맞아 몸을 씻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어 135세인 그의 노모가 화면에 등장하더라고요. 방송을 보고 나서 나는 그 노모보다 한 살 더 많은 136세까지 살겠다고 결심했죠(웃음).”

    이 총재는 자신의 태권철학을 그대로 실천하면 장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번에 심장수술을 받았을 때 가족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이 모두 내가 죽는 줄 알았대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거든요. 수술 후유증으로 풍(風)이 온 거예요. 그런데 정작 나는 죽는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더라고요. 136세까지 산다고 35년간 떠들어왔기 때문인지, 어느 날 3조 가량의 몸 세포가 내 앞에 줄지어 서서 ‘네, 우리는 주인님의 뜻을 받들어 136세까지 살겠습니다’라고 보고하는 거야(웃음). 그러니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요만큼도 없지.”

    “신호 없이 바로 들어가야 해!”

    그는 자신의 건강철학이 빈말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강연 도중 종종 시범을 한다고 한다. 올초 한국체육대학에 가서 강연할 때는 태권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남녀 한 명씩을 앞으로 불러냈다. 10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들고 자신의 주먹을 막아내면 주겠다고 했다. 결과는 그의 완벽한 승리였다.

    호기심이 발동한 기자가 한 수 가르침을 청했다. 서로 앉은 자세에서 그가 기자의 안면에 주먹을 날렸다. 기자가 방어동작을 취했을 때는 그의 주먹이 이미 기자의 코앞에까지 왔다가 빠져나간 상태였다. 기자의 손이 올라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의 주먹은 제자리인 그의 가슴팍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몇 차례 되풀이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벌써 빠졌네요. 주먹을 봐야 합니까. 눈을 봐야 합니까.

    “이건 못 막아요. 다 원리가 있어요. 그런데 이런 걸 아는 사범이 없어요.”

    ▶먼저 공격하니 그런 것 아닌가요.

    “내 주먹의 움직임을 상대방이 보고 있죠. 그런데 눈이 두뇌에, 두뇌가 팔에 명령을 내리는 데 시간이 걸리거든요. 그걸 반응시간이라고 해요. 그 반응시간이 끝나기 전에 나는 벌써 때리고 빠지는 거야. 그러니 못 막지.”

    “그 양반이 국제태권도연맹을 만들 때만 해도 나와 가까운 사이였어요. 나보고 연맹을 맡아달라고도 했어요. 그런데 당시 그 양반이 단증(段證)을 남발하는 바람에 연맹 이미지가 안 좋았죠. 내가 왜 그 골치 아픈 걸 맡겠어요. 안 맡았지. 이북으로 넘어간 후엔 관계가 완전히 끊겼는데, 1990년 태권도 홍보를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가 우연히 마주쳤어요. 평양집이라는 한국식당에서.

    인사를 하니 대뜸 인상을 쓰면서 ‘음악에 맞춰 춤추는 게 무슨 태권도냐’며 시비를 걸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반말로 쏘아붙였다고. ‘이거 봐. 나도 이제 환갑인데, 말 조심해. 내가 당신한테 밥 얻어먹은 적 있나? 당신이 나한테 얻어먹은 적은 있지만.’ 그러고는 돌아서서 내 자리에 가 앉았어요. 이북 놈하고 같이 왔더라고.

    잠시 후 그 친구가 내 자리로 와서는 ‘총재님이 사과한다’고 전달하기에 받아줬지. 난 그때 무엇보다도 그 양반이 이북에 드나드는 게 미웠어요. 지금은 공산주의를 이해하기는 해요. 내가 꿈꾸는 사회도 공산주의와 비슷한 공유주의거든. 공산주의도 인간적인 면을 갖추면 괜찮다고 봐요. 이북의 체제에는 단호히 반대하지만.”

    최씨는 2002년 84세로 북한에서 사망했다. 1918년생이니 이씨보다 13년 연상이다. 최씨의 자서전에는 1960년 두 사람이 미국에서 만난 일화가 소개돼 있다. 당시 육군 소장이던 최씨는 텍사스주 샌앤토니오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있었고, 이씨는 텍사스주 샌마커스에 있는 사우스웨스트텍사스주립대에서 태권도 클럽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최씨가 샌마커스로 이씨를 찾아와 격려했다.

    ▶당시 최 장군이 찾아와 태권도 명칭을 쓰지 않는다고 나무랐다면서요?

    “나무란 게 아니라 태권도라는 이름을 좀 써달라고 부탁한 거지. 그래서 내가 받아들였어요. 그때는 ‘코리안 가라테’라는 용어를 쓰고 있었거든요. 태권도라고 하면 미국인들이 알아듣지를 못하니. 그 후로는 태권도와 가라테를 함께 사용했어요.”

    ▶혹시 최홍희씨의 진짜 망명 사유를 아십니까.

    “몰라요. 아마도 태권도에 미쳐서 넘어가지 않았나 싶어요. 북쪽에서 돈 받아 책(태권도 백과사전)도 쓰고 했으니. 육군 장군으로 있을 때는 빨갱이를 그토록 욕해놓고는….”

    최씨의 뒤를 이어 ITF 총재가 된 사람은 북한의 장웅씨다. WTF도 총재가 바뀌었다. 김운용씨가 뇌물비리로 구속된 후 사상 처음 선거를 통해 새 총재를 선출했는데, 경희대 총장을 역임한 조정원씨가 당선됐다.

    장 총재와 조 총재는 지난해 6월 IOC(국제올림픽위원회) 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에서 자크 로케 IOC위원장과 함께 만나 남북 태권도 통합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후 두 단체의 실무진이 몇 차례 만났으나, 기구통합을 먼저 하자는 ITF측과 기술통합을 먼저 하자는 WTF측 의견이 맞서 회담에 진전이 없는 상태다.

    경우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이씨도 태권도를 통한 남북 평화공존을 추구한 적이 있다. 1996년 북한의 이종혁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이씨는 이 부부장에게 오찬을 대접했다. 태권도 유단자인 미 의원 7명과 국회의장도 이씨의 초청으로 동석했다. 그 자리에서 이씨는 한국의 비무장지대에 국제적인 태권도 도시를 만들자고 제안했는데, 다들 반응이 좋았다.

    비무장지대와 관련된 일은 미 정부(국방부)와 북한 정권의 합의가 있어야 했다. 이씨는 유단자 의원 7명과 함께 평양을 방문한 다음 도복을 입고 판문점으로 걸어 내려오는 이벤트를 계획해 국방부의 승인을 받았다. 일행은 미 국무부에서 북한 방문에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계획대로 됐으면 대히트였지. 그런데 떠나기 전날 동해안 잠수함 사건이 터지더라고. 그래서 무산됐어요.”

    이씨는 북한의 장웅 총재와 싱가포르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인생의 꿈은 생명과 같아”

    “길에서 버스를 타려는데, 그가 멀리서 알아보고 ‘아이고, 우리 태권도 황제님 오셨네’ 하면서 반갑게 인사하더라고요. 마침 그곳에 와 있던 안민석 의원(대한올림픽위원회 남북체육교류위원장·열린우리당)과 함께 셋이서 저녁식사를 했어요. 아주 신사더라고. 인격이 됐어요. 그런데 태권도에 대해선 잘 모르더라고. 정치인이지.”

    ▶태권도가 요즘 위기지요. 올림픽 종목에서 빠지네 마네 해서.

    “그 때문에 제가 미 국회의원 전원에게 편지를 썼잖아요. 태권도 인구가 5000만인데, (올림픽에서) 빼면 큰일난다고.”

    ▶경기가 재미없다는 지적이 많아요.

    “내가 김정길(대한태권도협회장)씨한테 룰을 바꿔야 한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어요. 손기술을 쓰게 해야 한다고. 말로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는데, 하긴 뭘 해.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바꾸는 걸 싫어해요. 바꾸려면 노력해야 하니.”

    그는 프로태권도 도시대항전을 구상하고 있다. 각국의 도시별로 팀을 만들어 축구의 월드컵과 같은 태권도대회를 여는 것이다. 경기 종목은 겨루기, 격파, 태권무로 각각 3분의 1씩의 배점을 부여한다.

    “리그를 벌여 성공하면 프랜차이즈 방식으로 전세계에 팔아먹을 거예요. FIFA(국제축구연맹)처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 사랑이지. 두 번째는 투쟁이에요. 사랑과 투쟁을 빼면 영화가 안 돼. 그 투쟁을 상품으로 만들자는 거지.”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에 대한 인생 조언을 부탁했다. 그의 삶처럼 명쾌한 얘기가 나왔다.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사는 게 최고예요. 부모 말이라고 무조건 듣지는 말고. 부모 말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잘 판단해야 해. 타락한 부모도 많으니(웃음).”

    ▶이 총재께서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하십니까.

    “그럼. 행복하지. 가는 곳마다 존경받고. 내가 해놓은 일이 있고. 할 얘기도 있고.”

    점심을 거르며 4시간여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가 종착역에 이르렀다. 아 참, 한 가지 빼놓은 얘기가 있다. 그는 과연 ‘금발 미녀’와 결혼했을까.

    “금발 미녀가 좋긴 하지만 마음이 예쁜 것도 중요하니…. 예쁘고 착한 금발 여자는 찾기 어렵더라고.(웃음) 결국 한국 여자와 결혼했지.”

    ▶미국에 건너간 중요한 목적을 이루지 못했네요.

    “태권도로는 성공했잖아요. 꿈도 생명과 같아요. 자꾸 커져요. 금발 미인과 결혼해 태권도로 먹여 살리겠다는 꿈에서 시작해 이제는 세계를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꿈까지 갖게 됐으니.”

    75세에 송판 깨는 美 태권도 황제 이준구

    콘크리트 바닥에 주저앉아 다리 일자 벌리기 시범을 하는 이준구씨.

    그에 따르면, 비결은 상대에게 신호를 주지 않는 것이다.

    “사전신호를 보내면 상대가 막을 수 있어요. 신호 없이 바로 들어가야 해.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때릴 때 눈동자나 얼굴 근육이 움직이거든. 그걸 안 보이는 방법을 가르쳐야 해. 한번 일어나 봐요.”

    사진기자가 “인터뷰, 무사히 마칠 수 있겠냐”고 ‘걱정 어린’ 농담을 건넸다. 둘이 마주섰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최대한 몸의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헛일이었다. 그의 주먹이 대여섯 차례 나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막을 수 없었다. 아니, 막는 시늉도 하지 못했다. 주먹의 진퇴가 기자의 눈이 깜박거리는 것보다 더 빠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주먹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사진기자의 필사적인 노력도 물론 무위로 돌아갔다.

    그는 “발은 손보다 빠르지 못하다”면서 “주먹이 발보다 실전에서 더 효과가 큰 것은 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표정에서 신호를 주지 않으면 돼. 그런데 다들 표정에서 읽힌다고. 송판 깨는 걸 보면 더욱 확실히 알게 돼요.”

    거실로 옮겨갔다. 그의 측근이 송판을 준비했다. 그의 송판 깨기는 독특했다. 일반적으로 송판을 깰 때는 보조자가 위아래 양쪽을 다 잡아준다. 그런데 그의 경우엔 위쪽만 잡았다.

    “위아래를 다 잡은 상태에서 깨는 건 쉬워요. 받쳐주는 힘이 작용해 깨기가 편하거든. 이렇게 위만 잡고 깨야 진짜지.”

    역학의 원리야 잘 모르겠지만, 상식적으로 그의 설명이 타당한 듯싶었다. 그의 측근이 송판 2장을 포개 위쪽을 잡고 섰다. 그의 주먹은 너무 빨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느 순간 ‘꽝’ 소리와 함께 송판이 네 조각으로 갈라졌을 뿐이다. 사진촬영을 위해 한 번 더 시범을 했다. 셔터를 누르던 사진기자가 “도저히 못 잡겠다”며 포기했다.

    이어 그의 주먹이 깨진 송판을 다시 겨누었다. 역시 위쪽만 잡은 상태였다. 송판이 두 동강났다. 원 상태의 4분의 1 크기인 셈이다. 일흔다섯이라… 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싸움에선 주먹보다 정신력이 관건”

    인터뷰 장소인 서재로 되돌아왔다. 잠시 끊겼던 그의 강의가 재개됐는데, 타고르의 시 ‘동방의 등불’을 낭송하는 것으로 끝났다.

    “7년 전 처음 ‘동방의 등불’을 접한 뒤 내가 그 사명을 타고 태어났구나, 생각했어요. 그것은 우리 한국이 ‘동방의 등불’을 밝혀 세계의 모범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국을 모범으로 만들기 전에 먼저 제주도부터 모범으로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4년 전부터 매년 제주도에 찾아가 저의 철학을 강연했어요. 그런데 하늘이 계획하는 건지, 7월1일부터 제주도가 자유도시로 바뀌잖아요.”

    강의를 마치고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측근에게 같은 크기의 송판 한 장을 달라고 해서 줄자로 크기를 재보았다. 가로 세로 30cm×20cm, 두께 2cm였다. 주먹으로 힘껏 치자 강한 반발력이 밀려왔다. 아팠다.

    그에게 건강관리법을 물어봤다. “병은 99%가 음식에서 비롯된다”며 음식에 철저히 신경 쓴다고 했다. 오이 당근 참외 등 채소와 과일을 많이 먹는 대신 고기는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한다. “고기 안 먹으면 힘이 떨어지지 않느냐”고 묻자 한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웃통은 벗고 하체는 도복 차림인데 가슴과 팔 근육이 여간 단단해 보이지 않았다. 70세 생일에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음식조절과 더불어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은 역시 운동이다. 먼저 정권 지르기. 뒤꿈치를 들고 하나 둘 박자에 맞춰 허리를 틀면서 주먹을 내뻗는다.

    “한국에서는 (정권 지르기 할 때) 뒤꿈치 들면 사범한테 맴매 맞았어요. 주먹은 허리에 딱 붙였다 나가야 하고. 말이 안 되죠. 골프 칠 때 뒤꿈치 안 들면 공이 제대로 나갑니까. 역학 지식이 없으니 (뒤꿈치) 못 들게 한 거예요. 도장에서 맨발로 운동하는 이유를 물으면 아무도 대답을 못해요. 왜겠어요. 아, 옛날에 신발이 있어야 신고 하지…(웃음).”

    하체 근력강화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양손으로 두 발목을 잡고 무릎을 굽혔다 펴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다. 종아리를 보여주는데, 도저히 70대 노인의 근육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딴딴했다. 그는 또 몸의 유연성을 유지하기 위해 틈나는 대로 다리 일자 벌리기를 한다.

    “늙으면 가장 먼저 약해지는 게 다리예요. 내가 강연 다니면서 자주 다리 벌리기 시범을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소망을 갖게 하기 위해서예요. 누구나 연습하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통 사람이 앉아서 다리를 벌리고 상체를 숙이면 가슴과 바닥의 간격이 30cm쯤 돼요. 매일 TV 뉴스 볼 때마다 한 번씩 다리 벌리기를 하면서 하루에 1㎜씩만 가슴을 내려도 1년이면 바닥에 닿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와요. 이렇게 설명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죠.”

    흔히 무술과 싸움은 별개라고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묻자 그는 정신력을 강조했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정신력이요. 독한 사람이 이기게 마련이에요. 꼭 이겨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이기게 돼 있어. 주먹 잘 지른다고 이기는 게 아니라. 스포츠에서는 기술이 앞선 사람이 이기지만, 정말 죽고 사는 문제가 걸린 싸움에선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이겨.”

    “준리 태권도 주먹은 권투주먹”

    ▶운동 잘하는 애가 싸움 잘하는 애한테 못 당한다고들 하잖아요.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싸움 잘하는 아이는 결기가 보통이 아니야. 깡패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잖아. 정신력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거지.”

    ▶오랫동안 청와대 무술사범을 지낸 대한특공무술협회 장수옥 총재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모든 무술의 기본은 육상”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동의해요. 달리기 잘하는 사람은 스프링이 있거든. 빠르죠. 불행히 나는 어릴 때 뜀박질하면 늘 꼴찌였어요. 그토록 둔했어요. 그걸 노력으로 극복했죠. 타고난 체력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걸 내가 이룬 거요.”

    ▶흔히 무술을 외공과 내공으로 나누는데, 태권도는 외공 무술이죠. 진짜 무술 고수는 내공의 고수라는 얘기가 있는데요.

    “아까 보인 격파는 내공에서 나오는 거예요. 태권도에도 내공적 요소가 있다고 봐야죠.”

    ▶무술계에서는 태권도가 실전적이지 못한 무술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건 옛날얘기죠. 동작을 끊는 걸 배우던 시절엔 길에서 싸우면 안 되더라고. 도장에서는 상대가 다치지 않게 주먹을 끊거든. 그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은 싸우면 맞는 거요, 권투하는 사람한테. 권투는 실제로 때리잖아요. 지금은 태권도도 복싱처럼 때려요.”

    ▶접근전에 약한 게 치명적인 약점이죠.

    “레슬링이나 브라질 유술하는 사람한테 당하는 경우가 많죠.”

    ▶잡히면 끝나죠.

    “팔다리 꺾는 사람과 싸우려면 한번에 녹아웃(KO)시켜야 하거든. 그런데 아무리 잘 싸운다 해도 한 방으로 녹아웃시키는 게 힘들잖아. 그러니 맞을 걸 각오하고 덤벼드는 사람한테는 힘든 게 사실이에요. 섣불리 붙었다가는 봉변당하기 쉽죠.”

    ▶태권도가 유연성이 부족한 무술이라는 지적도 있죠. 직선적인 운동이라 근육에 무리가 간다는 얘긴데.

    “그건 하기 나름이에요. 제대로 훈련한 사람은 부드럽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뻣뻣하죠. 유도나 복싱도 마찬가지예요. 개인의 문제이지 도매금으로 깎아내릴 일이 아녜요.”

    ▶주먹 기술이 약한 것도 단점으로 지적되지요.

    “상대에게 신호를 보내지 않고 공격하는 방법을 모르니까. 도장에서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니 문제예요.”

    75세에 송판 깨는 美 태권도 황제 이준구

    바람의 주먹. 사진기자는 격파 순간의 그의 주먹을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

    ▶권투 주먹과 태권도 주먹에 차이가 있지 않나요.

    “없어요. 똑같아요. 우리(준리 태권도)는 권투식으로 해요.”

    ▶태권도 주먹은 권투 주먹과 다르잖습니까.

    “그게 얼마나 미련한 자세냐고. 상대에게 ‘나 때린다’ 보고하고 때리는 거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권 지르기 자세를 취하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내 어깨를 만져봐요. 힘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 주먹은 (어깨가) 부드러운 상태에서 나가야 해요. 허릿심으로. 격파도 마찬가지이고. 뒤꿈치 안 들면 안 깨져요. 기존 태권도 기술로는 안 되는 거지. 나 같은 사람의 얘기를 좀 듣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하는데….”

    “결심과 실천에 시간차 없어야”

    ▶비틀어 치는 것과 쭉 뻗어 치는 것은 어떻게 다릅니까.

    “비트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요. 꺾어 치든 뻗어 치든, 힘의 세기는 그 사람이 얼마나 그 기술로 단련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는 기본을 강조했다.

    “모든 건 기본에 달려 있어요. 저는 기본기 몇 가지를 잘하면 검은띠를 줘요. 여러 개의 기본기를 얼마나 빨리 정확하게 연결하느냐가 관건이죠. 수도와 주먹, 앞차기, 옆차기, 돌려차기. 이 다섯 가지 기본에 능숙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자유자재로 연결동작이 나오죠.”

    “젊을 때 발차기 실력은 어느 정도였냐”고 묻자, 그는 “나, 지금도 젊은데…” 하며 껄껄 웃었다. 글머리에 언급한 대로 그는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행사에서 ‘세기의 무술인’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각 분야에서 최고의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세기의 인물상’을 주는 행사였다. 정치 부문에는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 복싱에는 무하마드 알리, 미식축구에는 제임스 브라운, 농구에는 윌 챔버린, 야구에는 조 디마지오, 그리고 무술 분야에는 준 리가 선정됐다. 당시 시상식 사회를 맡은 평론가 잭 앤더슨은 그를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중에서 세 번 발차기를 하고 내려온 무술인”이라고 소개했다.

    ▶지금도 길 가다 젊은 애들이나 깡패와 붙으면 이길 수 있나요.

    “뭐, 주먹이 있으니. 한 방 치면 되니까. 75세 먹은 무술인 중에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 많지 않을 거요. 아까 봤잖아요. 아직 속도가 있으니. 속도는 정신에서 나오는 거야. 때리겠다고 결심한 순간 벌써 때렸어야 해. 결심과 실천에 시간차가 없어야 하는 거지. ‘심신의 펀치’라는 거요.”

    ▶다른 무술의 고수와 붙은 적은 없었나요.

    “없어요. 옛날엔 이종격투기 시합도 없었고.”

    ▶도전받은 적은.

    “유도 도장의 일본인 관장이 도전한 적이 있어요. 내가 워싱턴에서 태권도 도장을 차린 지 얼마 안 됐을 때예요. 내게 막 공격을 하려는 순간 발로 차버렸더니 그대로 쓰러졌어요. 그 후 학생을 많이 보내주더라고. 자신이 졌다고 하면서.”

    ▶한 방에 보냈나요? 어떤 발차기였죠?

    “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불쑥 들어와서는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할래’ 하면서 공격동작을 취하기에 손으로 막으면서 오른발 돌려차기로 날려버렸지. 이게 답이라고.”

    75세에 송판 깨는 美 태권도 황제 이준구
    그가 태권도를 처음 배운 건 1946년 서울 동성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가 입문한 청도관은 이른바 ‘태권도 9개 관(館)’ 중 하나다. 9개 관은 1961년 대한태수도협회(대한태권도협회의 전신)를 결성한 초창기 태권도의 대표적인 9개 파를 일컫는다.

    뜻밖에도 그는 검은띠 따는 데 5년이나 걸렸다고 했다. 그것도 도장에서 못 따고 군에서 땄다고 한다.

    “내가 좀 둔해서 (유단자가 되는 데) 오래 걸렸어요. 하지만 꼭 해내야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했기 때문에 나중엔 점프를 가장 잘했어요.”

    청도관에서 배울 때 가장 힘든 기술이 이단옆차기였다고 한다.

    “현 국기원장인 엄운규씨가 그걸 제일 잘했어요. 그분한테 많이 배웠죠. 나보다 2년 선배인데, 나중에 청도관 관장까지 지냈어요.”

    ▶초창기 태권도는 사실 일본의 가라테를 그대로 본뜬 것 아닙니까.

    “청도관 초대 관장인 이원국 선생이 일본에서 대학 다닐 때 배운 가라테를 귀국해서 보급했으니, 맞는 말이에요. 역사는 거짓말하면 안 되죠.”

    “다 가라테를 기본으로 한 것”

    ▶주먹을 허리춤에 댔다가 지르는 것도 가라테 동작이죠?

    “맞아요. 그래서 내가 독특한 동작을 만든 거예요. 준리 태권도에서는 주먹이 가슴에서 나가죠.”

    이 총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준리 태권도의 정권 지르기를 보여줬다. 국내 태권도 도장에서는 볼 수 없는 자세다.

    “우리가 하는 게 좀더 과학적이라 할 수 있죠. 심리학적 요소도 있고. 역학적으로 주먹이 허리에서 나가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못써요. 가슴에서 나가야 힘도 안 들고 속도도 빠르죠.”

    언뜻 권투 주먹과 비슷하다. 그도 인정했다. 그렇다고 권투를 베낀 건 아니고,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동작이기에 개발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신호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깨를 구부리고 주먹을 뻗는 권투보다 더 위력적이라고 주장했다.

    광복 직후 서울에는 태권도장이라는 게 없었다. 청도관을 비롯한 무술도장의 대부분은 가라테를 가르치는 곳이었다. 이들은 가라테의 한자어 표기인 당수(唐手), 혹은 공수(空手)도장으로 불렸다.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5년 육군 소장이던 최홍희씨가 제정한 것이다. 태권도는 일견 한국의 전통무술인 택견이나 수박도를 계승한 것 같지만, 모태는 어디까지나 가라테였다고 한다. 1959년 최홍희 장군은 대한태권도협회를 창설하고 초대회장에 취임했다. 중간에 파벌 싸움으로 대한태수도협회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던 대한태권도협회는 1965년 원래의 이름을 되찾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태권도 창립에는 최홍희 장군의 공이 크지요?

    “그 양반이 만든 거요. 이승만 대통령한테 태권도 명칭에 대해 사인까지 받았어요. 그래서 태권도가 탄생했지.”

    ▶그 공은 인정해야겠지요.

    “그럼. 그건 맞지. 태권도에 아주 미친 사람이었어요. 나하고도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 양반이 이북에 간 날부터 인연을 끊었지요. 나는 반공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최홍희씨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초기 태권도에 대해 궁금한 것을 더 물어봤다. 태권도가 현재 남과 북으로 양분돼 있는 만큼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이 총재의 증언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9개 관에서 가르치는 기술은 다 비슷했습니까.

    “그럼요. 다 가라테를 기본으로 한 것인데.”

    ▶관마다 특징이 있지 않았나요.

    “굳이 말하자면, 청도관이 옆차기로 유명했고, 무덕관은 앞차기를 잘했다는 정도죠.”

    ▶가라테 기술과 차이가 없다고 봐야 합니까.

    “가라테를 가르친 거니까. 당수니 공수니 다 같은 거예요.”

    ▶발차기에서 차이가 없었나요.

    “태권도의 발차기 기술이 가라테보다 더 발전했지. 일본은 전통을 따지기 때문에 지금도 옛날 것 거의 그대로 가르쳐요. 그런데 한국은 그런 의식이 없어 뒤돌려차기니 뭐니 해서 제멋대로 만들어냈어요. 그게 뒷날 다 복이 된 거요.”

    ▶당시엔 뒤돌려차기가 없었습니까.

    “그랬지. 나도 그때 뒤돌려차기는 못 배웠어요. 기본 동작만 배웠지. 지금은 뛰어앞차기 등 기술이 얼마나 화려해요. 가라테보다 훨씬 앞서 있지. 상대가 안 되죠. 쿵푸도 그렇고. 그러니 올림픽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야. 대중이 좋아하니까.”

    “남들 밥 다 뺏어먹었냐”

    ▶태권도에 대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시초는 가라테이지만, 이후 기술적으로 더 발전한 것’이라고.

    “다른 도장은 몰라도 청도관만큼은 분명해요. 품세도 가라테의 평안이니 철기니 하는 것을 그대로 배웠으니. 태극형도 마찬가지고요. 거짓말하면 안 되지.”

    그가 미국행을 꿈꾼 것은 영화 속 ‘금발 미녀’에 반해서였다. 중학생 때 ‘목숨 걸고’ 들어간 극장에서 금발 미녀를 보고 난 후 미국에 가 꼭 저런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한 것(뒷날 그는 그 금발 미녀가 아마도 마릴린 먼로였을 거라고 짐작했다).

    이후 미국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태권도를 열심히 한 것도 미국행과 관련 있다. 미국에서 태권도장을 차려 ‘금발 미녀’를 먹여 살리겠다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미국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56년 6월, 육군 항공학교에서 중위로 근무할 때였다. 어느 날 항공정비 교육장교를 뽑는다는 공고가 났는데, 자격시험을 통과하면 미국으로 6개월간 연수를 보내준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시험에 합격한 그는 3개월 후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가 군에 입대한 것은 1951년 12월. 전쟁 중 징집당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동국대 1학년에 재학중이었다. 병사로 입대했다가 장교가 된 사연이 흥미롭다.

    “참 나쁜 사람 많아요. 101포병대대 대대장이 대위였는데, 부대 양식의 3분의 1을 팔아먹는 거야. 그러니 다들 배가 고플 수밖에. 졸병으로 한창 포탄을 나를 때였는데, 그때도 운동을 계속해 근육이 좋았다고. 운동해서 생긴 근육은 잘 없어지지 않거든. 다른 병사들은 갈비뼈가 앙상한데 나만 근육이 붙은 거야. 어느 날 전방 사단 의무대에서 나와 신체검사를 하다가 내 근육을 보고 ‘남들 밥 다 뺏어먹었냐’고 묻더라고. 그 정도로 병사들이 굶주렸어요. 얼마 후 간부후보생을 모집한다기에 지원했지. 굶어죽느니 차라리 ‘소모 장교’로 싸우다 죽겠노라고. 당시 초급장교는 거의 다 전방에 투입돼 80%가량이 죽었어. 그래서 ‘소모 장교’라고 불렀다고. 포병장교 42기로 광주의 상무대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수료 2주 전에 휴전이 됐어요. 그래서 내가 살았지.”

    텍사스에서 6개월간의 정비교육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본격적인 미국 진출을 위해 유학시험을 준비했다. 당시엔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선 문교부가 주관하는 유학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군인이 합격하면 곧바로 제대 조치됐다. 그는 50대 1의 높은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비결은 뛰어난 영어실력이었다. 여비는 텍사스 연수를 끝내고 귀국할 때 잔뜩 사들여온 나일론 옷감을 팔아 마련했다. 전역한 지 두 달 만인 1957년 11월 그는 마침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75세에 송판 깨는 美 태권도 황제 이준구

    1968년 LA 해변에서 이소룡(왼쪽)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무르팍을 꼬집었어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고. 그렇게 좋더라고. 그때는 미국 가는 게 하늘에 별따기였어요. 더욱이 우리같이 빈곤한 가정환경에서는.”

    1958년 2월 사우스웨스트텍사스주립대의 티처스 칼리지(사범대학)에 입학했다. 전공은 토목공학. 2년 후엔 엔지니어링 상급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텍사스대로 옮겨갔다. 주립대에서와 마찬가지로 텍사스대에서도 캠퍼스 내에 태권도 클럽을 만들었다. 교내 나무들에 태권도 시범을 알리는 포스터를 붙였는데, 500여 명이 몰려왔다. 시범이 끝난 후 그중 170명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회비는 한 학기(4개월)에 10달러. 모두 합해 1700달러이니 한 달에 400여 달러를 번 셈이다. 당시 텍사스대 교수 월급이 600달러였다.

    태권도 덕분에 학비 걱정은 하지 않았다. 기숙사비도 면제받았다. 기숙사 질서를 유지하고 외부 불량배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해주는 대가였다. 시험 채점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기도 했다. 그런데 혹시 덩치 큰 백인들이 시비를 걸지는 않았을까.

    “모든 게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술인 브루스 리에게 발차기를 전수했고, 가장 위대한 복서인 알리에게 주먹기술을 가르쳤어요. 또 세계에서 가장 힘 센 미국 국회의원 300명을 가르쳤습니다.”

    “배곯지 않고 공부할 수 있으니…”

    “그때쯤 캠퍼스 내에서 워낙 유명해져 사람들이 나를 무서워했어요. 7척 높이로 뛰어올라 발차기를 하고 두꺼운 송판을 3장씩 깼으니 무서울 수밖에. 워싱턴 도장에서 유도 도장의 일본인 관장을 한 방에 꺾고 나서는 더욱 자신감이 붙었어요.”

    1962년 5월,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여름방학 기간에 수도 워싱턴에 있는 국방부 직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러 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것. 마지막 한 학기가 남았지만 그는 텍사스로 돌아가는 걸 포기했다. 대신 워싱턴에 태권도장을 열었다. 1962년 6월28일이었다. ‘워싱턴포스트’에 광고를 냈더니 120명이 몰려들었다.

    “첫 시범을 하는 날 정일권 주미대사가 와서 축사를 해줬어요. 그 분이 대장 출신이잖아요. 같이 근무한 적이 없는데, 나를 ‘아주 대단한 태권도 고수’라고 소개하면서 ‘이준구 중위는 예전에 내가 데리고 있었다’고 거짓말하더라고요(웃음). 첫날 10명이 입관했는데 한 달이 지나자 30명으로 늘었어요. 석 달 후엔 100명을 넘었고. 그 와중에 유도 도장의 일본인 관장이 도전하는 사건이 있었고요.”

    ▶초기에 생활비 마련하고 도장 꾸려나가느라 힘들지 않았나요.

    “힘들긴 했지만 닥치면 다 하게 돼 있어요. 처음엔 혼자서 관장, 사범, 청소부, 비서 노릇을 다했지.”

    ▶가장 힘들었던 일이라면.

    “난 미국에 가서 힘들었던 기억이 없어요. 태권도 덕분에 영광만 얻었어요. 한국에서가 힘들었지요. 특히 6·25 때 너무 배고파서.”

    ▶미국에 가서 기대했던 것과 달라 실망한 적은 없습니까.

    “노(No)! 늘 소망 속에서 뛰었어요. 난 미국이 좋았어요.”

    ▶자본주의의 나쁜 점이 눈에 띄지는 않았나요.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어요. 우선 배 곯지 않고 공부할 수 있다는 데에 만족했지. 한국에서 하도 고생했기 때문에 (미국생활에 대해) 불만이 전혀 없었어요.”

    오늘날 준리 태권도가 미국에서 유명해진 데는 국회의원들의 태권도 배우기 열풍을 빼놓을 수 없다. 그 발단은 강도사건에서 비롯됐다. 1965년 5월 ‘워싱턴포스트’에 뉴햄프셔 출신 국회의원 제임스 클리블랜드가 강도를 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를 본 이씨가 그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태권도를 배우면 그런 봉변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얼마 후 클리블랜드 의원이 자신의 사무실로 이씨를 초대했다. 가보니 상원의원 1명과 하원의원 2명이 함께 있었다. 세 의원 앞에서 시범을 했다. 그것이 주간지 ‘라이프’와 ‘워싱턴포스트’에 기사화됐다.

    이 일을 계기로 이씨는 미 국회의사당 안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게 됐다. 일주일에 3회, 아침 7시부터 한 시간씩이었다. 그렇게 해서 지난 40년간 국회에서 준리 태권도를 배운 국회의원이 300명에 이른다.

    LA 해변의 추억

    그가 전설적인 무술인 브루스 리, 즉 이소룡을 처음 만난 것은 1964년 LA 롱비치에서 열린 세계가라테선수권대회에서였다. 이 대회에서 절권도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소룡은 이후 영화에 출연하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각자 시범만 하고 겨루기 같은 건 없었어요. 나는 송판 격파를 했고, 그는 눈감고 하는 기술을 선보였어요. 대회 이후 친분을 쌓았습니다. 같은 동양인이라 그런지 서로 인상 깊었던 거죠. 그러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어요. 어느 날 그가 TV 쇼 프로그램에 주연으로 나오더라고요. 수소문 끝에 방송 홍보차 워싱턴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다시 만나게 됐어요. 그게 1966년이에요.”

    이듬해 그가 주관한 준리 가라테대회에 이소룡이 스페셜 게스트로 참가해 시범을 했다. 이소룡의 유명세 덕분에 관중이 9000명이나 몰렸다. 대회 이름에 태권도가 아닌 가라테를 붙인 것은 당시만 해도 태권도라는 명칭이 미국인들에게 생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코리안 가라테’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지만 태권도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렸다는 것.

    준 리와 브루스 리, 두 이(李)씨의 우정어린 교류는 당시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으로도 증명된다. 대표적인 게 1968년 LA 해변을 배경으로 한 흑백사진. 준 리가 브루스 리의 얼굴을 향해 옆차기를 하자 브루스 리가 몸을 비틀어 피하는 광경이다.

    이소룡이 아홉 살 아래였지만, 두 사람은 무술 동료로서 서로 존중하고 아꼈다. 이씨는 이소룡에게 발차기를 전수했고, 이소룡은 그에게 손기술을 가르쳐줬다고 한다.

    ▶이소룡 영화를 보면 옆차기가 많이 나오는데요.

    “원래 쿵푸에는 옆차기가 없어요. 내가 이소룡에게 옆차기를 비롯해 돌려차기, 뒤돌려차기 기술을 가르쳐줬어요. 모든 게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술인 브루스 리에게 발차기를 전수했고, 가장 위대한 복서인 알리에게 주먹기술을 가르쳤어요. 또 세계에서 가장 힘 센 미국 국회의원 300명을 가르쳤습니다. 그게 다 장차 ‘동방의 등불’을 켜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던 거죠. ‘아버지 부시 대통령’ 자문위원을 지낸 것도, 소련에 준리 태권도가 진출한 것도.”

    ▶이소룡의 파워는 어느 정도였나요.

    “걔는 백인들과 팔씨름해 진 적이 없어요. 나도 상대가 안 돼요. 손가락 2개만으로 푸시업을 하는 애니. 타고난 강골이에요. 원래 깡패야. 홍콩 길거리에서 만날 싸움만 하다가 골든 글러브 복싱대회에 나가 우승했지. 몇 가지 기본만 배워 참가했다더라고. 그러니 여간 독한 게 아니죠. 독하니 이기는 거요.”

    이소룡이 실전무술의 대가로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타고난 싸움꾼이 무술의 체계를 갖췄으니 실전에서 강하지 않으면 이상할 터.

    ▶이소룡의 인간성은 어땠나요.

    “아주 까다로워요. 대신 한번 좋아한 사람은 끝까지 좋아하고 도와주죠. 나를 무척 좋아해 나중엔 영화 출연 섭외까지 해줬잖아요.”

    75세에 송판 깨는 美 태권도 황제 이준구

    기자에게 옆차기를 하는 이준구씨.

    “이소룡 죽음은 타살”

    그는 지금까지 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73년 제작된 홍콩영화 ‘흑권’과 1980년 한국에서 만든 ‘돌아온 용쟁호투’다. 이소룡이 주선해 출연한 ‘흑권’은 한국에서도 개봉됐다. 그런데 그해 이소룡이 죽었다. 33세였다.

    “홍콩에서 영화 촬영이 끝나고 미국에 돌아간 게 7월6일이에요. 이소룡이 공항까지 나와 배웅했지요. 그런데 7월21일엔가 죽었어요. 죽기 전날 그가 미국으로 전화를 걸어왔어요. 영화 편집작업이 끝났다면서 감독이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만들려는 걸 자기가 싸워서 나를 주연으로 만들었다고, 신이 나서 떠들더라고요. 다음날 여자(친구) 집에서 죽었지요.”

    ▶이소룡의 사망원인에 대해선 약물중독설 등 지금까지도 뒷말이 많아요. 혹시 죽기 전 무슨 이상한 조짐이 없었나요.

    “노! 그건 누가 죽인 거지. 난 그렇게 봐요.”

    그는 이소룡의 출현으로 사업상 막대한 피해를 봤다는 홍콩 배우의 이름을 꺼내며 추론의 근거를 댔다. 하지만 말끝에 “확실한 건 모른다”고 덧붙였다.

    ▶일본 극진가라테의 최영의씨와는 만난 적이 없나요.

    “1967년인가 한 번 봤어요, 일본에서. 그런데 별로 반가워하지 않더라고. 난 그래도 같은 한국인으로 가라테 하는 사람이라고 일부러 찾아갔는데. 악수만 하고 말았지.”

    ▶‘나보다 고수’라고 인정한 무술인이 있다면.

    “이소룡이에요. 몸이 빠르고 뚝심 있고 힘이 좋았으니. 호리호리하지만 강철 같은 몸이었어요. 참 타고난 무술인이었지요. 나 같은 사람은 노력해서 된 거고.”

    이씨는 2000년 이전까지는 한국에 거의 오지 않았다. 미국이 주 활동무대인데다 소련 등 세계 각국에 태권도를 보급하느라 바쁜 탓도 있었지만, 한국 태권도계와의 불편한 관계도 한 이유였다. 정통 태권도계에서 보면, 뒤꿈치를 든 채 주먹을 지르고 음악에 맞춰 발레하듯 발차기를 하는 준리 태권도는 이단이었다.

    “한국 태권도계는 지금도 나를 싫어하지. 내가 전통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태권도를 개발했으니.”

    1972년 초대 대한태권도협회장이자 ITF(국제태권도연맹) 총재인 최홍희씨가 유신(維新) 반대 명분을 내걸고 캐나다로 망명한 후 박정희 정권은 ITF에 맞설 국제기구 창설을 지원했다. 이듬해 탄생한 WTF(세계태권도연맹)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이야 올림픽에 참가하는 WTF의 세력이 훨씬 크지만 당시만 해도 ITF가 주류였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과 기네스북에 태권도 창시자로 이름이 올라 있는 최씨의 영향력 덕분이었다.

    최씨 망명 이후 한국 태권도계의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른 사람은 청와대 경호실장 보좌관 출신인 김운용씨였다. 박종규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김씨는 대한태권도협회장,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국기원장이라는 태권도의 빅3 단체장을 모두 거머쥐고 이후 30여 년간 태권도계의 황제로 군림했다. 반면 ‘친북인사’로 낙인찍힌 최씨는 한국 태권도사(史)에서 그 흔적이 거의 지워졌다.

    태권도와 ‘코리안 가라테’

    이씨는 김운용씨를 좋지 않게 평했다.

    “그는 태권도의 ‘태’자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나는 평생 태권도 이미지를 고양하기 위해 뛰었는데, 그 사람이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관련 비리에 연루되는 바람에 태권도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어요.”

    그는 최홍희씨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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