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호

‘수첩’ 대신 ‘비전’ 들고 나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민주당과 손잡을 수는 있으나 DJ와는 말 안 돼” “위기에 강한 ‘모성 리더십’이 부정부패 막고 실용정치”

  •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7-01-05 11: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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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관통 열차 페리, 동북아 경제공동체 계기 될 것
    • “영토, 정치통일 없어도 경제공동체 되면 남북통일”
    • 경선방식 변경? 당원 뜻 모이면 무조건 따른다
    • 포용정책 반대하지 않지만 무조건적 양보와 지원이 문제
    • 집값, 공급 확대·세금 조정·환경 개선으로 잡아야
    • 자립형 공·사립고, 특목고 다양하게 만들어 학생들이 선택케
    • ‘매력 포인트 26.5’ 비결은 적게 규칙적으로 먹는 습관
    • 어머니가 혼처 찾기도…이제 결혼은 선택일 뿐, 지금은 ‘계획 없음’
    ‘수첩’ 대신 ‘비전’ 들고 나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朴槿惠·54) 전 한나라당 대표는 검은색 바지 정장에 보라색 폴라를 입고 있었다. 여러 해 입은 옷 같았다. 옷깃엔 덩굴이 이삭을 감은 모양의 은색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일본에 갔을 때 동포들이 준 선물이라고 했다.

    필자가 울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의 ‘브로치 외교’를 예로 들며 “이삭은 결실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자 “예, 좋은 의미를 부여해주셨어요. 저도 그렇게까지는 생각을 못했는데…”라고 받았다.

    박 전 대표는 텔레비전 화면이나 신문 사진에 나오는 것보다 실물이 낫다. 필자가 “실제 모습이 더 예쁘다”고 말하자 박 전 대표는 고개를 숙이며 수줍게 웃었다. 그런 인사가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비위 맞추려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박 전 대표의 대선 캠프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맞은편 주유소 사이 골목 건물 5층에 있다. 2층에는 일식집이 들어 있다. 인터뷰 중간에 그 집에서 주문한 생선초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박 전 대표 캠프는 사무실 집기며, 차를 나르는 여직원 옷차림이 수수했다.

    대권 주자들의 일정표를 보면 벌써 대선 레이스에 접어든 듯한 분위기다. 인터뷰 시간 잡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박 전 대표는 이날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 조찬 모임에 참석하고 9시에 여의도 캠프에서 참모회의를 가졌다. 10시에는 일간지 신년 특집용 인터뷰, 11시 반부터는 오찬을 도시락으로 곁들인 ‘신동아’ 인터뷰가 있었다.



    인터뷰하느라 한나라당 의원총회는 건너뛰고 오후 2시에 본회의에 참석했다. 5시에는 주요 인사를 면담하고 7시엔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 씻고 자리에 눕는 시간은 밤 11시경.

    그는 “스케줄이 타이트할 때는 새벽 4시, 5시에 일어나요.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잠 좀 실컷 자봤으면 좋겠다’고 하셨거든요. 저도 그런 얘기를 하고 살게 될지 몰랐어요”라고 말했다. 인터뷰 시간이 넉넉하지 못해 한가하게 너스레를 떨지 못하고 바로 현안 질문으로 들어갔다.

    “새마을운동은 ‘정책 한류(韓流)’”

    ▼ 중국에 다녀온 이야기 좀 해주시죠.

    “중국에서 6자회담에 관여하는 핵심 인사들을 만났어요. 마침 베이징에 체류 하던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를 만나 조찬을 하며 북핵 얘기를 나눴습니다. 미국, 중국 모두 단호했습니다. 한목소리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인센티브를 주고, 핵 보유를 고집하면 확실하게 불이익을 줘야 한다’고 했어요.

    이번 중국 방문은 제가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열차 페리의 현장을 살펴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죠. 분단으로 인해 대륙으로 가는 철길이 끊어졌지 않습니까. 서해안에서 중국까지 뱃길로 열차 페리를 연결하면 한국의 철도 화물이 중국 횡단철도와 유라시아 철도를 타고 유럽까지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기업들의 물류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어들 수 있어요. 유럽연합(EU)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같이 동북아 경제공동체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최근 열차 페리 운항에 성공한 옌타이(煙臺)시에서 기차가 선박에 실리고 나오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가능성이 높은 물류 방식입니다.”

    열차 페리는 선박의 갑판에 선로를 갖춰 화물을 실은 열차 5~10량을 동시에 선적한 뒤, 도착지에서 곧바로 현지 철도와 연결하는 화물운반 수단. 중국은 열차 페리를 국책사업으로 선정해 산둥(山東)성 옌타이 항과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을 연결하는 노선에서 시험 운항 중이다.

    ▼ 박 전 대표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이공계 출신이라 말이 잘 통했다는 보도가 있더군요. 중국은 주석을 비롯해 전인대 상무위원장(국회의장) 총리 부총리 등 최고위직을 맡은 상무위원단 9명 전원이 이공계 출신인데요.

    “이공계 인사들이 지도층에 많이 진출해 중국의 경제발전을 이끌었습니다. 이공계 출신이 상층부에 많으면 경제발전에도 도움이 되고 부패도 줄어드는 것 같아요. 이공계 출신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과학기술 정책을 훨씬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는 어려운 이공계 공부를 한 사람이면 정치도 쉽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고 해요.

    우리나라에서 이공계 출신이 정계, 관계에 많이 진출하지 못한 것은 정치 풍토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치를 국민을 잘 먹고 잘살게 하는 수단이라기보다 권력투쟁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권력투쟁에 약한 이공계 출신의 진입이 어렵죠. 정치문화를 바꿔 이공계 출신들이 정관계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면 어린 학생들도 이공계를 많이 지원할 것 아닙니까.”

    박 전 대표는 서강대 전자공학과 70학번. 전자공학에 대한 인식이 지금처럼 높지 않을 때였다. 삼성전자가 1969년 11월1일 설립돼 막 한발짝 뗀 시기였다.

    ▼ 전자공학은 본인의 선택이었습니까. 아니면 아버님의 권유였습니까.

    “청와대에서는 식탁에서 나라 얘기를 할 때가 많았거든요. 그 무렵 우리나라가 수출 10억달러를 돌파했습니다. 100억달러를 돌파하려면 뭘 해야 하느냐를 놓고 전문가들이 청와대에서 토의를 했죠. 전자산업이야말로 무공해 산업이고 미래의 성장 동력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 사람의 손기술이 좋아서 이런 데 적합하다는 말도 있었어요. 고등학생이던 제가 전자산업의 가능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 계기였죠. 성심고등학교에서 문과 공부를 하다가 전자공학과에 가기 위해 이과로 바꿨습니다.”

    ▼ 이번에 중국 공산당 학교에서 새마을운동을 주제로 특강을 했다지요. 중국 공산당이 왜 그렇게 새마을운동에 관심이 많습니까.

    “공산당 학교는 중국의 지도자가 되려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바로 직전 교장이 후진타오 주석입니다. 중국이 경제성장을 하면서 도농(都農) 격차가 심해졌습니다. 우리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한 신(新)농촌운동을 시작했어요. 문화적인 한류뿐만 아니라 정책 한류도 가능하겠더군요. 제가 특강한 내용이 보도되고 나서 여기저기서 요구해 전국에서 교재로 삼을 정도로 열의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 정작 본고장에서는 새마을운동이 활발하지 않은데요.

    “새마을운동은 하면 된다는 정신, 누구한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우리 힘으로 해보자는 자조, 힘을 합하자는 협동 정신입니다. 초가지붕 개량과 소득증대 사업은 새마을운동의 결과이고 근본은 정신혁명이거든요. 가난을 숙명처럼 알고 살던 농촌에서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농촌 소득이 도시근로자 소득보다 올라갔어요. 그 후로 우루과이 라운드도 생기고 농가부채가 늘고 도농 격차가 다시 벌어졌지요.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정신은 어느 시대에나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농촌에서도 보람 있게 살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농촌에 농업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토지 규제를 풀어 농촌에 많은 사람이 가서 다양한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길을 터줘야 합니다. 저는 어떻게든지 농촌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농촌 정책을 다듬고 있습니다. 정리가 되면 발표할 것입니다.”

    전체 인구에서 농촌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정부 수립 다음해인 1949년 83%, 1960년 58.3%, 1980년 25.8%에서 2006년 7.3%로 급격히 감소했다.

    ‘수첩’ 대신 ‘비전’ 들고 나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필자, 신동아 최호열 기자와 식사하는 박근혜 전 대표.

    ▼ 2005년 말 기준으로 수도권 인구가 전체 인구의 48.1%가 됐어요. 아마 내년 말쯤에는 50%를 돌파하겠지요.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때부터 수도권 억제정책을 펴 공장총량제도 만들고 대학 정원을 억제했지만 결국 실패했다고 봐야지요. 정부는 경기도 이천의 하이닉스 공장을 청주에 지으라고 유도하고 있습니다. 청주에 공장을 짓게 되면 3년이 걸리고 건설비용이 5000억원 더 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대규모 투자가 신속하게 이뤄져야 하는 반도체산업에서 투자의 적기를 놓칠 수 있지요.

    “억제정책만 갖고는 절대 성공할 수 없지요. 수요가 있는데 그 수요에 대한 공급이 충분하지 않으면 시장은 왜곡되게 마련입니다. 기업들이 경제성과 입지 조건을 따져보고 좋아서 하려는데 그것을 막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할 필요가 없어요. 수도권에서 첨단산업을 막아 외국으로 가버리면 고용창출이 안 되죠. 첨단산업은 풀어줘야죠. 그리고 다른 지역에도 기업들이 정말 걱정 없이 투자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구축해야 합니다. 지방 중소기업에도 인력공급이 잘 되도록 산학연계를 잘해야 합니다. 지방에 공장을 지으면 인센티브를 줄 수도 있습니다. 지방도 매력 있는 입지가 되도록 투자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조건 막기만 할 일이 아닙니다.”

    “학생엔 학교선택권, 학교엔 학생선발권”

    ▼ 현 정부는 삼불(三不) 정책이라고 해서 대학입시에서 본고사를 못 보게 하고, 논술시험에서 영어 제시문은 내지 말라는 가이드라인까지 만들어 간섭합니다.

    “획일, 평등주의가 심해서 하향평준화로 가고 있어요. 관치(官治)도 심하고 정치 과잉입니다. 저는 경제에서처럼 교육에서도 자유와 자율의 확대를 중요하게 여기거든요. 학생들한테 학교선택권을, 학교에 학생선발권을 줘야 합니다. 내신이 판별력을 가질 수 있게 해야지요. 자립형 사립고, 자립형 공립고, 특목고를 다양하게 만들어 학생들이 선택하도록 하면 자연히 이런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학교도 교육정보를 공개해야 합니다. 어떤 학교인지 학부모들이 알아야 선택을 하지요. 잘나가는 학교가 정말 투명하게 운영하면 자율을 주고, 뒤처지는 학교에 대해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육성해서 올려줘야죠. 그러자면 정보가 공개돼야 하지 않겠어요?”

    ▼ 정부의 교육 코드가 대부분 전교조 이데올로기에서 나오는 듯합니다. 전교조는 교원평가에 반대합니다. 그리고 일부이기 하지만 어린 학생들한테 위험한 이데올로기를 가르쳐 학부모들의 걱정이 큽니다.

    “당 대표를 하면서 사학법 투쟁을 할 때 전교조와 크게 싸웠지요. 전교조가 저를 고발까지 했어요. 학생들한테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로 인정받은 것을 가르쳐야지, 왜곡된 역사관과 경제관, 국가관을 심어주면 앞날에 불행한 일이 생깁니다.”

    ▼ 국민연금 개혁에 대해서는 어떤 구상을 하고 있습니까. 최근 국민연금이 많이 내고 적게 받는 방향으로 개정돼 미래 세대의 부담을 줄였습니다. 그러나 공무원 교사 군인이 가입하는 특수직 연금은 엄청난 적자가 나도 예산으로 보전하고 있지요. 국민감정이 편치 않습니다. 그런데 선거를 치르자면 공무원 교사 군인 표를 의식해야 하니까 어려운 점이 있을 것 같아요.

    “기성세대가 미래세대에 큰 부채를 물려줘서는 안 됩니다. 바로 내 아들 딸에게 닥칠 일이거든요. 특수직 연금도 이만큼 받을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들로선 정책이 갑자기 바뀌면 억울하죠. 정책이 일관성 없이 불안정해서는 안 되죠. 그러나 지금 공무원을 시작하는 쪽에는 국민연금처럼 적게 내고 많이 받는 구조를 개혁한다고 말해줘야 합니다. 빨리 시작해야죠. 후세에 과도한 부채를 넘기지 않는 방향으로 공감대를 형성해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국방 외교 교육 경제 복지 등 각 분야에 대해 공부한 흔적이 보였다. 필자는 박 전 대표 캠프에서 인터뷰에 앞서 예상 질문을 보내달라고 하기에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질문 20개가량을 보냈다. 그러나 실제 인터뷰에서는 80개가량의 질문을 했다. 문제를 미리 알려주고 치는 시험은 기억력 측정일 뿐 공부의 깊이를 잴 수 없다. 정책분야 질문에는 미리 보내준 것이 없다. 그런데도 보좌진이 써준 ‘말씀자료’ 없이 답변이 잘 나오는 편이었다.

    “성매매, 단속이 능사 아니다”

    ▼ 말하기도 조심스럽고 쓰기도 조심스러운 질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드러내놓고 얘기는 못하지만 심각한 부분이죠. ‘참여정부’에서 여성 3인방이 성매매금지법을 통과시켰죠. 지은희 전 여성부 장관,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열린우리당의 조배숙 의원이죠. 성매매 금지가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성인 남녀의 자유의사에 따른 노동계약’을 국가가 간섭해야 하느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명분과 취지는 좋은 법인데 복잡한 사회에서 과연 그 취지대로 법이 시행되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 문제거든요. 지하로 숨어들거나 풍선효과 같은 부작용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법이든지 부작용이 생기는 사회현상에 대해서는 퇴로를 열어줘야 한다고 봐요. 교육을 통해 살길을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 노력 없이 금지만 하면 과연 법 취지가 제대로 살겠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필자가 “모범답안이라 재미가 없다”고 말하자 박 전 대표는 웃고 넘어갔다.

    ▼ 자잘한 정책말고 대한민국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지에 대한 큰 그림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신동아 표지에 나올 헤드라인 거리로요.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드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경제 교육 부동산 분야에서 왜곡되고 비정상이 된 부분이 많죠. 그런 것들을 다 정상화해서 선진국으로 가자는 것이 저의 비전입니다. 선진국으로 가려면 지금처럼 국민의 마음이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는 불가능해요. 지역, 이념, 세대로 갈라져 있는데 어떻게 국가 에너지를 폭발시킬 수 있겠습니까. 신뢰와 화합의 리더십이 정말 중요합니다.

    국민의 신뢰를 얻으려면 지도자가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국민을 네편, 내편으로 가르는 리더십은 화합이 아니라 분열과 갈등의 진원지이지요. 정부가 부동산 대책, 교육 대책 내놓아도 하나 먹히지 않거든요,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죠. 신뢰의 리더십을 보여줄 때 국민도 화합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화합된 국민의 잠재력을 모아 국가발전에 쏟게 하는 것이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죠. 정치의 목적은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고 국민을 안전하고 편안하고 잘살게 하는 것이죠.”

    ▼ 지금껏 감명 깊게 읽었다거나 삶에 영향을 끼친 책이 있다면….

    “‘중국철학사상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중국철학이라기보다 우리 조상의 생각도 되거든요. 그 안에 청빈사상도 들어있습니다.”

    박 전 대표는 국회 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어서며 “인터뷰가 잘된 것 같습니까” 하고 물었다. 배석한 이정현 공보특보는 “6월 총재직에서 물러난 후 가장 긴 인터뷰”라고 말했다. 민감한 질문이 적지 않았는데도 인터뷰가 끝난 뒤 박 전 대표 캠프에서 이것저것 빼달라는 부탁이 없어 좋았다. 속기사 기록을 받아보니 ‘(웃음)’이라고 씌어 있는 곳이 많았다. 너무 헤픈 인터뷰라는 인상을 줄까봐 절반가량 지웠다.

    ‘수첩’ 대신 ‘비전’ 들고 나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2006년 11월27일 중국 방문 때 열차 페리에 오른 박근혜 전 대표.

    대운하 vs 열차 페리

    ▼ 열차 페리의 경제성이 있습니까. 평택에서 열차 페리로 옮기고 다시 중국에 내려 철로를 타는 게 일견 부산에서 로테르담으로 바로 가는 것보다 복잡하고 비용도 많이 들 것 같은데요.

    “부산에서 로테르담까지 해상 운송거리는 1만9800km입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하면 9400km가 단축됩니다. 컨테이너를 실은 열차가 인천이나 평택항에 도착하면 환적할 필요 없이 기차가 그대로 페리로 들어가요. 페리 안에 철로가 있거든요. 환적 시간이나 비용이 별도로 안 들어요. 서해안과 중국 사이 바다 위에 철로를 놓는 것과 똑같아요. 중국과의 거리는 500km 이내지요. 중국에 도착하면 옮겨 실을 필요 없이 중국 횡단철도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부산에서 한번 짐을 실으면 한번도 옮겨 싣지 않고 그대로 유럽까지 가는 거예요. 경쟁력이 높습니다.”

    열차 페리는 박 전 대표 진영이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대운하에 대응해 내놓은 정책 구상이다. 대운하가 지나갈 지역들은 벌써부터 기대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운하는 독일, 중국 같은 대륙국가에 필요하지, 이탈리아나 한국처럼 동서 횡단축이 짧고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국가에는 맞지 않다는 비판도 나온다.

    ▼ 이명박 전 시장의 대운하 구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문제는 경제성이 있느냐, 국가 경쟁력에 도움이 되느냐, 친환경적이냐 하는 측면에서 전문가 사이에 찬반이 엇갈려요. 정치적으로 판단하기에 앞서 전문적으로 충분히 검토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직접적인 비판은 조심하는군요”라고 말하자 박 전 대표는 미소를 지었다.

    박 전 대표에게 2006년 5월 지방선거 유세 때 입은 상처를 보여달라고 하자 얼굴을 돌려 오른쪽 귀밑으로 길게 난 흉터를 보여주었다. 화장을 했는데도 상처 자국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상처가 생각보다 길군요. 끔찍한 사건이었어요. 성형수술을 받으면 흉터가 사라질 텐데….

    “5월20일에 사건이 났는데 병원에서 6개월 뒤에 보자고 하더군요. 성형수술은 아직 안 받았어요. 다행히 제 피부는 상처가 잘 낫는 편이래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박 전 대표는 5·31 지방선거 당시 한나라당 압승의 주역이었다. 그녀는 피습 당한 직후 “대전은요?”라는 한마디로 염홍철 대전시장을 낙마시켰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탄핵 바람 속에서 한나라당이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는 데도 박 전 대표의 공이 결정적이었다.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을 2년3개월 이끄는 동안 여당 대표는 8명이 바뀌고 당 지지율이 5%까지 떨어졌다. 그의 측근들은 “대선에서 두 번씩 패배해 지리멸렬한 한나라당에 변화를 불러오고 국민의 신뢰를 얻어 수권정당으로서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 한나라당을 위기에서 구했는데도 최근 여론 지지율 동향을 보면 억울하고 실망스럽다”고 말한다.

    “이회창 ‘강연정치’, 정계복귀 아니다”

    ▼ 북한 핵실험 이후 이명박 전 시장 지지율이 올라간 것은 여성의 위기관리 능력을 불안하게 여기는 국민의식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그런 면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에 아직…. 그런데 여성은 무조건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극복해야 할 편견이라고 봐요. 역사는 편견, 터부 같은 것을 극복하면서 발전했거든요. 남자니까, 여자니까 하는 편견이 아니라 과연 이 시대에 적합한 리더십인가, 역량은 어떤가, 이런 것들을 검증해 선택하면 한 단계 더 성숙하는 게 아닐까요.

    흔히 ‘모성의 리더십’이라는 말을 하는데 저는 그 말이 옳다고 봅니다. 약해 보이는데 의외로 강한 리더십이죠. 그게 바로 우리 어머니들이에요. 당신은 식은 밥 먹으면서 아이한테는 더운 밥 먹이죠. 가정이 흔들리고 어려울 때 가정을 지키는 데 누구보다 강인한 분들이 우리 어머니들이거든요. 세계적으로 여성 리더가 대통령이나 총리가 될 경우 부정부패가 확 줄어드는 것이 공인된 사실이에요. 국민이 화합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할 거고요. 공리(空理), 공론(空論)으로 세월을 보내는 게 아니라 국민을 더 잘살게 하는 실용정치, 생활정치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선거 때 여성 유권자가 여성 후보에게 표를 잘 주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는데요.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검증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글쎄…저는 선거를 치르면서 여성 유권자들이 열심히 도와준 덕을 봤어요. 지금은 그런 편견이 많이 극복된 시대라고 보는데요. 남성도 무조건 남성 찍는 건 아니잖아요.”

    필자가 따끈따끈한 대통령선거로 화제를 옮겨보자고 제의했다. 박 전 대표는 “내년은 정말 선거의 해가 되겠네요. 국가지도자가 누구냐, 또 어떤 정부냐에 따라서 국민 실생활이 큰 영향을 받으니까요”라고 했다.

    ▼ 한나라당 경선 방식은 어떤 게 좋습니까.

    “제가 당 대표로 있을 때 당헌 당규를 고쳐 혁신안을 만들었습니다. 9개월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50회가 넘는 토론회, 공청회를 통해 의견을 수렴했어요. 저는 사심을 갖고 정치한 적이 없습니다. 당원들의 의견이 모아져 경선방식이 결정됐을 때 주위에서 저한테 불리하니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원들이 합의한 것이니까 무조건 받아들였어요. 당원들이 만든 경선 규정을 한두 사람의 이불리(利不利)를 따져 고칠 수는 없습니다. 고치려면 다시 당원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합니다. 당원들이 뜻을 모아서 결정하면 저는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최근 ‘강연정치’에 나섰습니다. 제가 지난달에 신동아 인터뷰도 했고요. 이 전 총재는 “핵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구국활동에 나선 것인데 정치활동으로 본다면 어쩔 수 없다”고 하더군요. 동아일보 이동관 논설위원의 코멘트에 따르면 ‘야구장 관중석에 있다가 후보선수들이 몸을 푸는 불펜까지 내려왔다’고 하던데요(박 전 대표와 배석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분이 야당 총재도 오래 했고 두 번이나 대통령후보를 지냈기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혼란하고 어려우니 당연히 걱정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걱정하는 마음에서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 진심을 정계복귀라고 왜곡하는 것은 결례입니다. 우리 한나라당이 다음번에는 꼭 정권 재창출을 해야 하는 사명을 안고 있습니다. 그분은 큰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필자가 “킹메이커는 괜찮은데, 킹이 되겠다고 나서는 건 곤란하다는 말인가요”라고 묻자 박 전 대표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죠. 그분은 나라 걱정하는 마음으로…”라고 말했다. 이명박, 이회창씨에 대해서는 발언을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첩과 공주

    한때 일부 언론에서 박 전 대표를 ‘수첩공주’라고 불렀다. 열린우리당과 법안 교섭을 할 때 깨알같이 적어온 수첩을 보며 말한 데서 유래한 별명이다.

    그는 인터뷰에서도 작은 수첩을 앞에 놓고 필자가 질문을 하면 받아 적은 뒤 답변을 했다. 수첩공주는 맞는데 수첩에 깨알같이 미리 적어온 것은 없었다.

    “아버지한테 메모하는 습관을 물려받았어요. 아버지께선 늘 메모 해놓았다가 확인했거든요. 제가 대표시절에 민생 현장을 다니면서 듣는 얘기들을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겠어요. 약속한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다 적어놨죠. 나중에 정책 담당자에게 확인해 예산이나 법안에 반영해야 할 것을 챙기죠. 제가 물어보고 확인하니까 ‘공포의 전화’라는 이름이 붙더군요(웃음).

    정부 여당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고 할 때 양당 대표와 원내대표가 만나 4자회담을 했거든요. 중요한 회담을 하는데 메모 한 장 없이 하는 게 더 이상하죠.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서는 당론이 있었습니다. 의원들의 의견을 메모한 것을 참고했지요. 그쪽에서 이적단체 규정을 없애자고 하는데 저는 ‘그것 없애면 국가보안법이 있으나마나’라며 양보를 안 하고 막판 싸움을 했어요. 우리가 결국 국가보안법 폐지를 막았거든요. 그때부터 수첩공주라고 비난하기 시작했어요.”

    ‘수첩’ 대신 ‘비전’ 들고 나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1978년 12월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투표를 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

    누구든 수첩을 꺼내들고 메모하면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수첩’ 뒤에 ‘공주’라는 말이 붙으면 묘한 조어가 돼버린다.

    필자가 “이명박 전 시장은 검사 출신 변호사를 캠프에 두고 네거티브에 전략에 대비한다던데요”라고 하자 박 전 대표는 “그렇답니까?” 하고 관심을 보였다.

    ▼ 이회창씨가 선거에 두 차례 패배한 것도 네거티브 전략이 먹혀들었기 때문인데요. 선거전이 본격화하면 어떤 부분에 공격이 집중될 것으로 봅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여성이 어떻고…그런 거 아니겠어요? 저는 2년3개월 동안 하도 네거티브를 많이 당해…. 하여튼 내내 그랬어요.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부터 시작해서….”

    ▼ 당내 경선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경선 승리를 확신하는 겁니까? 그래서 상대 후보가 이탈하지 못하도록 못을 막아놓자는 겁니까.

    “‘경선 결과에 승복할 것인가’라고 질문하기에 정정당당하게 경선을 치르고 결과에 승복해 정권 창출을 위해 같이 노력해야 한다고 대답했지요. 한나라당의 정권 재창출은 진짜 나라의 운명이 걸린 문제거든요. 우리가 분열하면 큰일납니다. 단순히 당 차원이 아니고 정말 국민의 눈물어린 염원이 달린 문제입니다.”

    ▼ 시중에는 대선을 둘러싼 온갖 공상소설이 돌아다니는데요. 엉뚱한 이야기 같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손잡을 것이라는 설도 있어요.

    “그분은 이미 은퇴하셨으니 그분과 손을 잡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지금 민주당하고 얘기겠지요. 민주당하고는 손잡을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보거든요. 정치철학과 노선이 맞아 힘을 합쳐 어려움을 극복하고 꼭 정권을 창출하자는 데 의기투합한다면 두 당의 연합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지요.”

    ▼ 박 전 대표를 폄훼하는 말 중에 ‘발광체(發光體)가 아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반사체(反射體)’라는 표현이 있어요. 정치적 수사로 볼 수도 있는데요. 하여튼 상대방이 이런 식으로 공격하면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부모님의 후광을 크게 입었죠. 아버지로부터 국가관 세계관 안보관을 배웠어요. 그때 얻은 교훈,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옆에서 관찰한 것이 지금 제가 정치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부모님이 훌륭하신데 제가 너무 못하면 ‘자식은 저 모양이냐’ 하고 욕을 배로 먹어요. 그래서 제가 더 잘해야죠.”

    “산업화 과정 피해자에게 죄송”

    ▼ 박 대통령은 광복 후의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분인데요. 경제적으로 보면 보릿고개를 해결했고 경제성장의 기반을 닦았죠. 그러나 박 대통령 시대에 박해당한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후퇴시켰고 독재를 했다고 비판합니다. 박 대통령의 치적과 과오를 하나씩 평가하신다면….

    “가장 잘하신 업적을 들자면 국민에게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어 국민의 힘이 하나 되게 해서 국가발전을 이뤘다는 것이죠. 그 반대 부분은 민주주의에서 미흡한 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산업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보신 분들에 대해서는 저도 참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박 대통령이 세 번까지만 연임하고 유신을 하지 않았더라면 10·26이라는 비극도 없었을 테고, 아마 세종로 사거리 이순신 장군 동상 옆에 나란히 동상이 세워졌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견해에 동의합니까.

    “아버지가 조국의 제단에 몸을 바쳤다는 말이 과장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지 가난의 한을 풀고 잘살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셨죠. 아버지는 빈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나라 뺏긴 설움을 겪으며 성장했지요. 국력이 약하니까 당하는 수모였습니다. 이런 것이 아주 겹겹이 아버지 마음을…. 나중에 아버지께서 군사적인 면에서…. 지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아버지의 일기에 생각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쨌든 아버지께서 평소에 가지셨던 꿈, 조국에 대한 꿈은 이루고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답변의 마지막 부분은 엉겨서 의미가 잘 통하지 않는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지금 다 말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박 전 대표의 어머니 육영수 여사는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북한이 보낸 암살범 문세광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떴다. 그날 박 전 대표의 심경을 헤아려보기 위해 1999년 출간한 ‘나의 어머니 육영수’라는 책에서 ‘1974년 8월15일의 기억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대목을 펼쳐보았으나 87, 88쪽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인터뷰 후에 발견해 낙장(落張)의 까닭을 물어보지는 못했다. 육 여사가 서거했을 때 박 전 대표는 파리 유학 중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1979년 10월까지 5년 동안 퍼스트레이디 대역을 했다.

    ▼ 퍼스트레이디 대역을 할 때 아버님은 어떤 가르침을 주셨습니까.

    “아버지는 국익에 관한 한 어떤 양보도 하지 않는 분이었고요. 지도자가 가는 길에서 세 가지가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국가지도자는 몸가짐을 바르게 가져야 한다. 자기가 바르지 않고는 나라를 이끌 수 없다고 하셨죠. 다음에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셋째, 어려운 국민을 챙기고 돌봐야 한다. 그 시대와 21세기의 경제 운용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규모도 엄청 달라졌으니까. 그러나 사심 없이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일이죠. 본받고 싶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박 전 대표가 화장을 안 하거나, 머리가 흐트러진 모습을 본 일이 없다고 말한다. 퍼스트레이디 대역 시절에 생긴 엄격한 자기관리 습관일 것이다.

    ‘수필가 박근혜’

    ▼ 외국어도 그 시절에 공부했습니까.

    “학생시절부터 했지요. 어머니가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시고 제가 그 역할을 대신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그때 우리나라를 찾는 국빈이 많았어요. 제가 어머니 대신 손님들을 맞았지요. 대사 부인들도 다 접견했고. 그때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를 아주 잘 써먹었지요. 정치하기 전에 중국어를 독학했는데 이번에 중국에서 유용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중국지도층 인사들과 아주 친밀해졌어요. 제가 중국말을 하면 그분들이 활짝 웃어요. 우리도 외국인이 한국말을 하면 반갑잖아요.”

    ▼ 10·26 이후 청와대를 떠나서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해 정치를 재개할 때까지 17년 동안은 주로 어떤 활동을 한 건가요.

    “수필 써서 문인협회 회원이 됐고,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를 운영했지요. 책을 읽고 여행도 다녔어요. 박 대통령 기념사업도 했고요.”

    이때 배석한 ‘신동아’ 최호열 기자가 “1997년 12월 한나라당에 입당하셨는데, 금융위기가 터지고 역사상 처음으로 집권여당이 정권을 야당에 내준 시기였죠”라고 말했다.

    “부모님이 청와대에서 공적인 생활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 저는 자유롭게 살고 싶었어요. 그렇게 늘 무거운 책임을 안고 사는 생활이 제게 매력적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차를 타고 가다가도 울컥하고 막 눈물이 났어요. 어떻게 만든 나라인데 이런 식으로 무너질 수 있는가.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 정치에 뛰어들어 다시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 데 일조하자고 정계에 들어왔지요.”

    최 기자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 그래서 킹 메이커가 되기보다 직접 대통령후보로 나서는 것인가요.

    “물론 국민이 선택해주느냐 안 해 주느냐에 달린 문제이죠. 나라가 비정상으로 가고 있는데 모든 분야를 강하게 만들고, 잘살고 또 문화적으로도 앞서는 선진국을 만들어보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은 정권 재창출을 안 하면 이루기가 불가능하거든요. 제가 야당대표로 대북관계, 경제, 교육에 관해 별 얘기를 아무리 많이 해도 소용이 없더라고요. 대통령과 여당이 안 들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당은 구했으니까 이제 나라를 구하려고 합니다.”

    박 전 대표의 키나 전체적인 얼굴 윤곽은 어머니를 닮았다. 눈과 코는 아버지를 닮았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강한 선을 어머니의 부드러운 이미지로 감싼 듯하다. 필자가 이 같은 인상기를 말하자 박 전 대표는 “그런 얘기를 많이 듣지요”라고 했다.

    “성격도 아버지 닮았고, 눈 같은 데는 특히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해요.”

    “나도 미치지 않은 게 기적”

    ▼ 박지만씨는 아버지 쪽을 더 닮은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래요.”

    ▼ 아주 사사로운 질문인데요. 인터뷰라는 게 이런 것도 물어봐야 하니까…. 요즘 박지만씨가 결혼해 박 대통령의 대(代)를 이으며 잘살고 있지만 한때는 마약에 손대고 감호소를 드나들면서 방황했잖아요. 큰누나로서 안타까웠을 텐데요. 그때 동생을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했습니까.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두 분 다 총탄에 돌아가셨으니까, 그 쇼크라는 것이…. 사실 저도 미치지 않고 지금까지 산 게 기적이라고 생각할 정도예요. 그 충격과 고통은 정말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요. 지만이는 저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그렇게 됐으니까 안쓰럽지요. 이제 방황을 극복하고 어엿하게 가정을 꾸려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부모님께 감사드려요. 천상(天上)에서 이끌어주신 거죠. 동생이 결혼한다고 하니까 자기 일같이 기뻐하는 분이 많았어요. 방황할 때도 자기 아들처럼 걱정을 하고…. 그런 국민의 관심과 보살핌으로 오늘의 동생이 있는 거죠.”

    ▼ 박 대통령과 육 여사의 대를 잇게 돼 큰누나로서 무척 기쁘겠어요.

    “엄청 기뻐요. 조카가 너무 귀엽죠. 이름이 세현(世現)이에요. 세상에 나타났다는 뜻이죠. 놀리는 말로 ‘박 짠’이라고 해요. ‘짠하고 나타났다’…(웃음).”

    김종필 전 총리가 한나라당 의원들과 골프를 치거나 식사할 때면 으레 하는 이야기가 “근혜는 대통령이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 된다”는 말이라고 한다. 정치권에서 이미 소문이 날 만큼 났다. 필자가 “혹시 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박 전 대표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는 그런 말이 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제가 최근에도 찾아뵈었어요. 얘기도 많이 나누었죠. 함께 나라 걱정도 했습니다. 오히려 여러 가지로 격려하시던데…. 그 얘기가 어떻게 나오게 됐는지 잘 이해가 안 돼요.”

    생선초밥 도시락이 들어왔다. 박 전 대표가 “점심 드시면서 하시죠”라고 말했다.

    ▼ 헤어스타일이 어머니와 같죠.

    “달라요. 이게 안 변한 것 같아도 시대 흐름에 따라서 많이 변했습니다. 물론 뒤로 이렇게 묶으니까, 어머니도 뒤로 하셨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같은 것 같지만 약간 달라요.”

    필자는 여러 해 전 무주리조트에서 귀경하던 길에 충북 옥천의 육영수 여사 생가를 찾아본 적이 있다. 육 여사의 집안은 그녀가 대통령 부인이 되기 전부터 그 지방에서 알아주는 대가(大家)였다. 육 여사는 일제 강점기에 서울 배화여고에 다녔다. 그러곤 49세에 세상을 떴다. 지금 박 전 대표의 나이는 54세.

    박 전 대표를 가까이서 보니 흰머리가 약간 눈에 띄었다. 그도 “흰머리가 늘었어요”라고 했다. “염색을 하느냐”고 묻자 “안 한다”고 했다. 생선초밥 도시락을 먹으며 계속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 평소 음식은 뭘 좋아합니까.

    “아무 거나 잘 먹어요. 한식을 좋아하지만, 일본 가서는 일본 음식 잘 먹고, 중국 가면 중국 음식을 먹죠.”

    독일 통일의 교훈

    박 전 대표가 필자에게 “인터뷰하다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 깊은 얘기를 들었을 것 같군요”라고 역으로 질문했다.

    “이게 ‘신동아’에서 한 66번째 인터뷰입니다. 인터뷰 대상이 각계에서 톱에 있는 분들이죠. 저서, 논문, 기사 같은 관련 자료를 사전에 공부하고, 또 세 시간 동안 인터뷰라는 이름의 강의를 들으니까 제게도 큰 공부가 됩니다. 신동아에 게재된 뒤 10명씩 묶어서 책으로 내 이번에 ‘그들에게 길을 물으니’라는 제목으로 여섯 번째 책이 동아일보사에서 나왔습니다. 본업이 사설과 칼럼 쓰기이고 신동아 인터뷰는 하도급으로 하는 부업인데, 괜찮은 부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왕 장사를 시작한 김에 신동아 이야기도 꺼냈다. 신동아 발행부수가 약간 보태서 10만에 육박하며 중산층 이상, 지식층, 전문직 종사자가 주 독자이다, 박 전 대표 인터뷰가 대통령선거 해인 2007년 1월호에 실린다, 신문 인터뷰는 지면 제약 때문에 마구 자르지만 신동아 인터뷰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할 수 있다고 했다. 최 기자가 “신년호는 더 많이 팔린다”고 거들었다. 박 전 대표는 “그러면 이번 인터뷰는 아주 잘하는 거네요. 제가 잡지 판매에 기여했으면 좋겠는데…”라고 말해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최 기자가 질문을 이어갔다.

    ▼ 지난 9월 유럽 방문 때 EU,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도 방문하고 독일에도 갔는데요. 독일 통일 과정에서 우리가 벤치마킹할 게 무엇이라고 봅니까.

    “동독의 마지막 총리였던 로타 드 메지에르(66)씨를 만나 통일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물었더니 ‘첫째도 인포메이션, 둘째도 인포메이션, 셋째도 인포메이션’이라고 해요. 동독은 서독 TV를 보며 교류했잖아요. 그런데 통일해보니까 서로 너무 몰랐다는 거예요. 똑같이 못사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회주의라고 했어요. 못사는 사람을 잘살게 만들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는 더 뛸 수 있는 자유를 주고, 힘에 부치는 사람은 끌어올려줘야 하는데 똑같이 끌어내려서 똑같이 못살고 똑같이 공부 안 하는 것을 평등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요.

    독일은 통일의 세 가지 원칙을 분명히 지켰습니다. 첫째, 강력한 경제력입니다. 둘째, 튼튼한 안보가 있었기 때문에 국민이 교류를 용납했고 안심했습니다. 포용정책도 튼튼한 안보가 전제돼야 합니다. 지금 북한이 핵실험을 해 군사력이 완전한 비대칭이 되면서 포용정책의 전제조건이 깨져버린 거예요. 셋째, (독일은) 분단 고통을 완화하는 대가로 지원했습니다. 그냥 무원칙하게 주지 않았어요.

    저는 대북정책에 있어 한반도 평화와 남북공동 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대화와 교류를 통해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한 뒤 서로 자유롭게 남북을 왕래해야 합니다. 경제공동체 정도가 된다면 굳이 영토적 또는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않더라도 모두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고, 이것을 저는 통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사 중에 최 기자가 무거운 질문을 던져 박 전 대표가 답변하느라 초밥을 먹지 못했다. 필자가 다시 가벼운 대화로 물꼬를 돌려놓았다.

    매력 포인트 26.5

    ▼ 허리가 26인치라고 공개했더군요.

    “26 반.”

    ▼ 저는 33인치입니다. 배가 나와서요.

    “남자는 여자하고 달라요. 남자 33이면 봐줄 만해요.”

    ▼ 26.5를 유지하는 비결이 출산을 안 해서 그렇다고….

    “그렇게 말한 적은 없어요. 옛날에는 테니스를 쳤는데 지금은 시간이 없어 못하죠. 짬짬이 단전호흡을 해요. 그리고 규칙적인 생활을 해요. 먹고 일어나고 자는 시간을 지키려고 해요. 과식을 안 하고요. 생활습관이 건강유지에 중요해요. 평범한 것 같지만 진리입니다.”

    박 전 대표는 술을 안 마신다. 술자리에서 폭탄주 제조로 음주를 면제받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술은 칼로리가 많아 결정적으로 허리 사이즈를 늘린다.

    “체질도 있는 것 같아요. 부모님이 다 날씬하셨거든요. 젊은 여성들이 허리둘레를 줄이기 위해 애쓴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허리 줄이는 것보다는 건강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면 자연히 가는 허리가 따라오지요.”

    ▼ 혹시 좋은 남자가 나타나면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제가 분명히 결혼했겠죠.”

    ‘수첩’ 대신 ‘비전’ 들고 나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2006년 5월20일 서울시장 선거 유세장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습격당할 때의 모습.

    ▼ 어머니가 딸이 혼기를 넘기게 놓아두지 않았을 테니까요.

    “어머니가 혼처를 알아보시기도 하셨죠. 제가 대학 졸업할 때 그런 걱정을 하면서 알아도 보시고 그런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뒤 인생행로가 크게 바뀌었습니다. 결혼도 이젠 선택이 됐죠. 지금은 할 계획이 없습니다.”

    그는 “대학 다닐 때 연애해본 적 있느냐”는 질문에 “미팅도 한 적 없다”고 말했다. 특별히 믿는 종교는 없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불자였다.

    ▼ 최근 영화나 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습니까.

    “너무 시간에 쫓기고 지방에 자주 다니니까 여유 있게 볼 시간이 없습니다. 최근에 본 게 ‘왕의 남자’예요.”

    ▼ 이준기가 그렇게 예쁘던가요(최 기자).

    “예쁘지요(웃음).”

    ▼ 연예인은 누구를 좋아합니까.

    “배우 장동건씨를 좋아합니다.”

    터프하고 야성적인 배우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주위에 말끔한 정치인이나 서생 같은 남자가 많아서 그럴까.

    ▼ 화장하는 데 대개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30분 이내.”

    박 전 대표가 우리에게 “저것도 좀 드시지요” 하며 바구니에 담긴 튀김을 권했다. 박 전 대표는 초밥을 4개 남겼다. 그런데 초밥을 남기지 않고 다 먹은 우리한테는 자꾸 튀김을 더 먹으라고 권유했다. 중년 남자도 허리 사이즈를 걱정하는데…. 식사가 끝나 화제를 딱딱하고 무거운 정책으로 돌렸다.

    “전작권 합의, 분개할 일”

    ▼ 지난 10월 한·미 국방장관이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2009~12년 한국이 전시작전권을 단독 행사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정부는 자주(自主) 장사를 했지만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전시작전권을 가져오는 데 대해 국민은 불안해합니다.

    “이건 재협상해야 합니다. 유엔 안보리 결의라든가 6자회담 재개 같은 국가 운명이 달린 사안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따돌림당했어요. 그게 과연 자주냐 이거지요. 제가 NATO를 방문했을 때도 전시작전권에 관한 얘기를 많이 나눴는데, 그곳에선 전시작전권이 자주와 무관했어요. 선진국에선 어떻게 하면 국민한테 부담을 덜 주고 나라를 튼튼하게 지키는가가 최대 관심사였어요. 그리고 경제도 지역공동체로 가듯이, 안보도 지역 공동방위 개념이 강합니다. 독일, 영국 어떤 나라도 NATO 때문에 자주권이 훼손당했다고 하지 않거든요. 전시작전권을 가져오면 국방비가 크게 늘어나고 안보에 대한 확실성이 없어집니다. 한미연합사는 일본에서도 배우려고 할 만큼 효율적인 체제인데 이것을 스스로 허물어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어요. 참 분개할 일입니다.”

    ▼ 햇볕정책이 북한의 핵 개발로 한계에 부딪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북이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와 협력해 북한 핵을 폐기시켜야 하는 과제가 있는데요. 대북 스탠스에 관해 말씀해주시죠.

    “포용정책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대치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보다는 대화와 교류를 통해 평화적으로 풀어보자는 정책 자체야 좋은 것 아닙니까. 역대 정부가 했던 7·4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도 다 그런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무력으로 어떻게 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대화로 긴장을 완화하고 북한도 개방시켜 변화를 유도하자는 것이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북한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도록 개방과 개혁으로 유도하기 위해 포용정책을 시행해야 하는데, 지금은 핵 개발하고 미사일 쏴도 무조건 지원하고 금강산관광을 계속 보내는 것 아닙니까. 미국 신문이 남한 정부는 북한의 현금인출기라고 비아냥거렸지요. 양보만 하고 긴장은 더 고조됐습니다. 국군 포로 문제도 진전이 없습니다. 상호주의로 바꿔야 합니다. 북쪽이 정말 상응하는 노력을 할 때 인센티브를 주고, 한반도 정세를 악화하고 약속을 안 지키면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는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위원장과 만찬을 곁들여 3시간이나 대화를 나눴는데요. 이것과 관련해 대선 국면에서 여러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김대중 정부에서 김정일 위원장에게 500만달러를 제공해 박근혜 대표를 초청해달라고 했다는 루머가 퍼져 있거든요.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죠.”

    인터뷰하는 동안 박 전 대표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나온 대목이다.

    “정말 어떤 지원도 없이, 돈을 주지 않고 당당하게 북한을 다녀온 것은 아마 제가 거의 유일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 대북 특사 얘기가 나오다가 요즘 좀 주춤한 것 같더군요(최 기자).

    “제가 대북특사로 가겠다고 얘기한 적은 없고요. 북핵 실험 이후 제가 포럼 같은 데서 이것은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핵 문제를 해결하는 데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열심히 하겠다고 했지요. 저뿐 아니고 어떤 사람이든지 할 수 있는 말이죠.”

    “규제와 세금으론 집값 못 잡아”

    ▼ 만일 대북특사로 간다면 김 위원장을 설득할 복안이 있습니까(최 기자).

    “가게 될 경우, 핵을 갖고는 절대로 경제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고 김 위원장을 설득하겠습니다.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으로 나와서 국제사회의 일원이 돼야만 북한이 바라는 일을 모두 이룰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 이 정부가 집값을 너무 올려놓았지요.

    “세금과 규제 갖고는 절대로 부동산시장을 안정시킬 수 없습니다. 세금폭탄으로 집값 잡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집값이 폭등하고 서민의 내 집 마련 꿈은 멀어졌습니다. 부동산정책은 시장의 수요·공급 정책에 입각해서 펴야 합니다. 집이 있는 가구에는 적절한 세금을 부과하고, 무주택 가구엔 집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줘야 합니다. 서민주택종합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민이 살고 싶은 집을 많이 공급해야 합니다.

    뉴타운 개발을 확대하고, 용적률도 높이고 재개발·재건축 규제를 완화하고, 신도시 공급도 늘려야 합니다. 교육 문화 의료 복지 환경개선이 함께 따라가야 합니다. 특히 집값은 학교와 많이 관련돼 있습니다. 세금도 너무 갑자기 인상해 부동산시장이 마비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고 좀 조정을 해야 합니다.

    기업 규제가 너무 심하니까 투자가 안 이뤄지고 자금이 부동산으로 몰리잖아요. 경제정책이 잘못돼 부동산시장에 악영향이 미치는 것이죠. 시중에 부동자금이 500조원 이상이라고 하는데 생산적인 투자로 이어져야 합니다. 교육도 규제가 많다보니까 교육환경이 좋은 곳의 집값만 올리고 있죠. 저는 부동산시장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표현이 현란하지 않고 요점을 또박또박 말하는 스타일이다. 박 대통령 스타일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 한국의 대통령후보들은 매일처럼 이런 주관식 시험을 봐야 하니까 만물박사가 돼야 할 것 같아요. 사실 대통령이 되면 각 분야의 전문가를 잘 골라 쓰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만 알고 나머지를 모르면 균형감각을 잃을 수 있습니다. 국가관 역사관 경제관을 확실하게 갖고 ‘코드 인사’가 아니라, 사심 없는 마음으로 최고의 인재들을 모셔오면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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