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호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

“법과 문학과 인권은 하나… 비누향 같은 인권위 만들 터”

  •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입력2007-01-08 14: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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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2006년 11월25일로 출범 5주년을 맞았다. 그간 인권위는 각종 인권침해와 성별·종교·신체·나이·신분에 의한 차별에 대해 시정과 개선 권고안을 쏟아내며 국민의 인권 신장에 기여했다. 특히 구치소 내 여성 재소자 성추행사건, 정신병원 등 구금시설의 과도한 수용자 신체구금 등에 대한 문제 제기는 소외계층의 눈물을 닦아준 사례로 꼽힌다. ‘살색’이 평등권을 침해하는 용어라고 결정한 것도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

    반면 인권위가 일처리를 어설프게 하는 등 아직도 ‘시민운동’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인권 수호의 보루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 북한 인권에 대한 침묵, 한미 FTA 집회금지 철회 권고 등은 우리 사회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인권위에 대해 진보진영에서는 ‘소극적이다’, 보수진영에서는 ‘급진적이다’는 상반된 불만이 터져나오는가 하면 위원장이 갑자기 중도 사퇴하는 내홍을 겪기도 했다.

    2006년 10월30일 새 위원장으로 취임한 안경환(安京煥·59) 서울대 법대 교수는 대표적인 인권 전문가다. 참여연대에서 활동하는 등 진보적인 색채를 띠면서도 사안에 따라서는 진보진영을 질타하는 뚜렷한 소신의 소유자다. 취임하자마자 그동안 논란을 빚어온 북한 인권에 대한 인권위 공식 의견을 밝히겠다고 하는가 하면 과거 인권위 활동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아 눈길을 끌었다.

    ‘자유권’에 못 미친 ‘사회권’

    ▼ 인권위와는 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교수의 본분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여러 형태로 인권운동에 관여했습니다. 인권위에도 그동안 자문위원이나 조정위원으로 참여했고요. 아주 남이었다고는 할 수 없겠죠.”

    ▼ 취임하고 한 달이 지났는데, 밖에서 보던 것과 차이가 있던가요.

    “전임 위원장이 중도사임을 해서 내부갈등이 심한 줄 알고 걱정했는데, 조금 과장된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인권위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만큼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 전임 조영황 위원장이 내부 갈등 때문에 사퇴한 게 아닌가요?

    “제가 이야기할 부분은 아닌 것 같은데, 보고받기로는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하신 겁니다. 누가 봐도 힘든 자리이고, 자기가 싫으면 그만두는 것인데 어떻게 막겠습니까.”

    ▼ 인권위 위원은 여야의 추천으로 구성됩니다. 그 결과 이념체계가 다른 사람들로 조직이 구성되면 의견을 조정하기가 수월치 않을 텐데요.

    “여러 가지 의견이 제시되면 진지한 토론을 거쳐 하나로 모아지도록 해야죠. 합의를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의 노력을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다수결이라는 또 다른 민주적 절차를 거쳐야겠죠.”

    ▼ 취임 직후 과거 인권위 활동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나 표현에 소홀한 측면이 있었다” “인권 신장을 위해서 때때로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배양해야 한다”며 비판했는데요.

    “밖에서 볼 때는 그런 부분이 있지 않나 싶었는데, 그건 제가 인권위의 실상을 몰라서 했던 얘깁니다. 들어와서 보니 (인권위가) 생각 이상으로 많은 일을 했고, 열심히 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 오늘날 한국의 인권 수준은 어떻다고 봅니까.

    “우리의 인권이 크게 신장된 것은 사실입니다. 20년 전과 비교해봐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경제성장과 민주주의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정착한 경우입니다.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 중에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일궈낸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인 데 비해 인권지수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권을 자유권과 사회권으로 나눠 볼 때 자유권은 많이 신장됐지만, 사회권은 꽤 개선됐음에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국제사회에서도 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어요.”

    인용률 4%

    2001년 ‘국민의 기본 인권 보호를 규정한 인권위법’에 따라 출범한 국가인권위원회는 그동안 사회 곳곳에 잔존한 반인권적 제도와 관행에 제동을 걸면서 우리 사회 ‘인권 최후의 보루’ 노릇을 해왔다. 지난 5년 동안 인권위에 접수된 진정은 2만건이 넘는다. 하지만 제기된 진정 가운데 인권위가 권고, 고발, 수사의뢰, 법률구제 등을 통해 받아들인(인용) 경우는 4%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대부분 각하, 조사중지 처리됐다.

    ▼ 인용률이 이처럼 낮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인권위에 들어온 진정 중에는 우리가 처리할 수 없는 것도 많고, 또한 중간에 문제가 해결되어 인용까지 가지 않고 없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희가 진정을 받아들여 해당기관에 문제 제기한 사안의 경우 해당기관에서 수용한 비율이 85%에 이릅니다. 따라서 인용률 4%라는 숫자만으로 낮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 특히 사법부에 의한 인권침해와 관련해서는 5년 동안 접수된 233건의 진정 중에서 인용된 것이 단 한 건뿐인데요.

    “스스로 사법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찾아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분명히 억울한 면은 있지만 현 제도에서는 구제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나라는 사법제도가 공정하다는 전제로 모든 것이 출발하기 때문에 이미 최종 판결이 내려진 경우나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사안을 우리가 조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건 우리뿐 아니라 어느 기관이나 마찬가지예요. 물론 그래도 우리는 그런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죠.”

    ▼ 인권위에서 다른 국가기관에 낸 권고안이 무시당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권고안이 내용 자체가 잘못되어서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주로 ‘시기상조여서 수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원칙은 맞는데 지금 바로 실행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는 거죠. 그래도 우리는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고 관련기관과 함께 문제를 푸는 쪽에 비중을 두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인권위의 권고안을 관련기관이 무시해도 아무 제재를 가할 수 없다면 권고안은 무용지물 아닌가요?

    “인권위에 강제권을 주느냐 여부는 국민과 국회가 선택하는 문제이지 우리가 제기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는 주어진 권한 안에서 성실하게 일하면 됩니다. 국민이 우리가 하는 일이 옳다고 느끼면 언젠가는 제도로도 반영되지 않겠습니까.”

    ‘샌드위치 신세’

    ▼ 최근 한미FTA, 비정규직법안 등과 관련해 불법집회와 폭력시위가 빈발하고 있습니다. 공권력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불법을 행한 사람들의 인권을 어디까지 보호해야 하는지 의문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그건 감정적으로 볼 문제가 아닙니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여러 자유 중에도 가장 본질적인 자유이고, 양보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핵심입니다. 시끄러우니까, 교통에 방해되니까 집회를 하지 말라는 건 말이 안 돼요. 사전집회금지는 언론을 사전검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부 참가자들의 과격한 폭력 때문에 시위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

    안경환 위원장(가운데)은 우리 인권 수준에 대해 “자유권은 많이 신장되었지만 사회권은 국제수준에 비해 아직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경찰은 시위를 진압할 때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방어적 진압이어야지 공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시위자뿐 아니라 경찰의 인권도 중요합니다. 그렇더라도 민주국가에서는 국가와 시민 간에 대립이 생길 때 국가의 공권력이 마지막까지 참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 국가보안법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권 인정,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 권고안 등 과거 인권위에서 내린 일부 결정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인권은 이념을 초월한 개념입니다. 보수와 진보, 좌와 우를 아우르는 보편적 국제 규범이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인권지수가 올라가려면 거기에 맞춰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은 과거에 남용된 사례가 너무 많아 국제사회에서 늘 폐지권고를 받았습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국가안보가 위협을 받는다고 오해하기 쉬운데 기존의 다른 법으로 충분히 보완할 수 있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부에서 ‘그렇다면 병역을 거부하지 않은 사람은 비양심적이라는 거냐’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그건 본질적인 부분이 아닙니다. 지금 세계적인 추세가 대체복무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제기했던 겁니다.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도 당장 그렇게 하자는 게 아니라 국제적 추세에 맞춰서 중장기적으로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권고한 것입니다.”

    ▼ 인권위 권고안에 대한 비판이 많은 것을 보면 인권위에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인데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어느 한쪽만 부각하려는 데서 빚어진 결과라고 봅니다. 인권위의 일은 이중적입니다. 우선 시민단체나 국민이 제기하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답을 줘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제기된 문제를 국가기관에 해결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시민단체나 국민으로선 우리가 미온적이라는 불만이 생길 수 있고, 국가기관에서는 우리가 급진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샌드위치처럼 중간에 끼인 셈이죠.”

    “북한 인권…복잡해요”

    북한 인권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세계 인권기구에서도 이 문제를 주요 의제로 다룬다. 그런데 국가인권위원회는 국내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수준으로 맞추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정작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해왔다. 이를 의식한 듯 안 위원장은 취임 직후부터 “북한 인권에 대한 인권위의 공식 의견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논의는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습니까.

    “11월27일 취임 후 첫 전원위원회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이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논의했습니다. 인권위는 몇 년 전부터 특별위원회를 두고 북한의 인권에 대해 연구해왔고, ‘북한 인권 법제 연구’와 ‘탈북자 증언을 통한 북한 인권 실태조사’라는 연구집도 발간한 바 있습니다.”

    ▼ 그동안 인권위가 이 문제에 대해 공식 의견 표명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은 왜입니까.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제가 올해(2006년) 안으로 발표하겠다고 약속했고, 무조건 해야 한다고 봅니다.”

    ▼ 의견 표명을 못한 데는 정치적 요인도 있었다고 봅니까.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위원들의 생각이 다 다르기 때문에 위원회의 공식 의견을 만들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가령 공식 의견에 어떤 이슈를 담을 것인가부터 저마다 생각이 달랐을 테니까요.”

    ▼ 앞으로도 적지 않은 진통을 겪겠군요.

    “지난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드러났듯이 북한에 대한 법적 시각부터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한쪽은 유엔에 가입한 독립된 주권국가로 보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대한민국 영토의 일부분으로 봅니다. 일반적인 국민의 시각은 그 중간 어디쯤이 아닐까 하는데, 이에 대해 합의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복잡한 사안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의 연구와 검토가 필요했던 겁니다.”

    ▼ 공식 의견 표명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갈 것으로 전망합니까.

    “지금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작정입니다. 그런데 현재 법상으로 우리가 표명할 수 있는 게 뭔지 분명치 않아요. 우리가 북한에 대해 뭘 요구할 권한이 없으니까요. 그래도 주어진 범위 내에서 그동안 연구한 것들을 발표할 겁니다.”

    1970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안경환 위원장은 1980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석사, 샌타클래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기도 한 그는 1987년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임용돼 귀국했다. 한국헌법학회장, 서울대 법대 학장을 역임했고, 박원순 변호사를 도와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머리는 하늘에, 두 발은 땅에

    ▼ 한국 변호사 자격은 없는데, 사법시험을 안 본 건가요, 떨어진 건가요.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어요. 전 당연히 될 줄 알았는데 말이죠(웃음). 그래서 바로 군대에 갔고, 그 후로는 시험 볼 생각을 안 했어요.

    저는 처음부터 법관이 되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법대에 들어간 것도 판사나 교수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밥 먹고 살기에 법대가 가장 적합한 것 같아서였어요. 건전한 지성을 가진 정의로운 인간이 되는 게 제 삶의 지표였는데, 우리 집안엔 인문학도가 많아서 격동의 시기에 절반이 죽었어요. 그래서 머리는 하늘에 두지만 두 발은 땅에 디딘다는 현실주의자의 삶을 선택한 거죠.”

    ▼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떠나기까지 10년의 공백이 있네요.

    “군대 다녀와서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국민의 저항권에 대한 논문을 썼어요. 그게 유신을 반대하는 것이 되어 곤욕을 치렀죠. 결국 대학원을 그만두게 됐고, 먹고살기 위해 기업에 취직했습니다. 제 세대만 해도 기업은 노동자를 착취하는 곳, 비인간적인 곳, 뭐 그런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대기업이 아닌 작은 기업에 취직했습니다. 성공하겠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성공하려면 부패구조에 어느 정도 몸을 담가야 하는데 제 성격과는 맞지 않았거든요. 그런 데 더 있으면 제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될 것 같았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도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부장 진급을 앞두고 퇴직, 유학길에 올랐죠.”

    ▼ 미국에선 어떤 공부를 했습니까.

    “대학 다닐 때는 법률공부가 재미가 없었는데 나이 들어서 다시 공부하니까 재미있더라고요. 내가 경험한 생활과 법률이 연결되기도 하고.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보면 파쇼적 성격이 드러나지만 자국 내에서는 사법정의가 살아 있는 곳이에요.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가지 요소가 공존할 수 있는 이유가 뭘까 연구했죠. 또한 가장 자본주의적인 사회인 미국이 경제적 약자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는지도 관심거리였어요. 미국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코드로 인권을 공부했는데, 그 인연으로 귀국 후 자연스럽게 인권운동에 몸담게 됐습니다.”

    ▼ 박원순 변호사가 주도한 참여연대에서 집행위원장과 운영위원장을 했고, 아름다운재단 이사로도 활동했는데, 박 변호사와는 어떤 사이입니까.

    “고(故) 조영래 변호사가 저와 박 변호사를 맺어줬죠. 1990년 조 변호사가 작고하고 3개월쯤 지났을 때, 당시 저는 교환교수로 영국에 있었는데 박 변호사가 영국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전화를 했어요. 조 변호사의 유언 비슷한 거라고 하더군요. 그러다 나중에 함께 일하자고 해서 그렇게 됐습니다.”

    안 위원장은 서울대 법대 학장 시절 법대 사상 최초로 여성 교수를 임용하고 1급 시각장애인의 법대 입학을 결정했다. 이 일로 2004년 여성단체들이 주는 ‘여성권익 디딤돌 상’을 받았다. 그러나 진보진영의 과거사 청산 주장에 비판적인 시각을 내비치기도 했다.

    조영래를 보는 눈

    ▼ 보수와 진보를 오가는 중도 성향이라는 평이 있습니다.

    “과거의 제 판단이 잘못됐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똑같은데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 2005년, 고려대에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 명예 철학박사학위를 주는 것에 반대해 시위를 벌인 학생들을 징계한 적이 있습니다. 이에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에서 징계를 반대하는 성명을 내자 안 위원장께서 민교협과 학생들을 꾸짖는 신문 칼럼을 써 진보진영의 반발을 샀죠.

    “저도 민교협 회원이어서 성명서 초안을 받아 보았습니다. 저는 교수들이 학교의 잘못뿐 아니라 학생들의 폭력행위에 대해서도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어요. 스승으로서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수와 학생의 관계를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학점은 학생이 얼마나 수업을 열심히 듣고 공부를 했느냐로 평가해야 하는데 일부 교수들은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수업을 한 번도 안 들은 학생에게 좋은 학점을 줍니다. 이런 잘못된 관습에 대한 문제 제기를 고대 사건을 계기로 한 거죠.”

    ▼ 2006년 3월에 펴낸 ‘조영래평전’에 대해서도 진보진영에서는 말이 많았습니다.

    “조영래 변호사는 대학 1년 선배입니다. 이 책은 조 변호사의 전기가 아니라 인생의 선배가 과거를 돌아보며 젊은이들에게 주는 글입니다. 저는 한국사회가 이만큼 성장한 것은 산업화세력의 노력과 민주화세력의 노력이 합쳐져서 이룬 성과라고 봅니다. 조 변호사는 당시 산업화가 너무 앞서가면서 인간대접을 못 받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저는 그분 역시 두 세력의 공(功)을 다 인정했다고 봅니다. 저는 전태일도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근로기본법에 대해 이야기한 휴머니스트였다고 생각합니다.”

    박원순, 강금실, 정운찬

    ▼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서울시장에 출마할 때 지지선언을 했는데,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습니까.

    “그분이 법무장관에 취임하면서 도와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당시 저는 서울대 법대 학장이었는데, 도와주는 게 옳다고 생각해 법무부 정책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이후에도 일하는 모습이나 사람 됨됨이를 좋게 여겨 계속 돕고 싶었습니다.”

    ▼ 요즘도 자주 만납니까.

    “그분이 누구를 만나면 바로바로 신문에 이름이 나던데, 제 이름이 신문에 난 걸 본 적 있습니까(웃음)? 자주는 못 만나는데, 만나면 서로 예의 갖추고 지냅니다.”

    ▼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강 전 장관이 먼저 물망에 올랐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모르는 일입니다. 저보다 강 전 장관이 맡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과도 인연이 깊은 것으로 압니다.

    “정 총장과는 오래전부터 가깝게 지내는 사이입니다. 평교수 시절에는 둘이 방배동에서 맥주를 마시곤 했습니다.”

    ▼ 박원순, 강금실, 정운찬 세 사람 모두 범(汎)여권의 잠재적 대권후보입니다. 셋 다 경선에 나서면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겠군요.

    “수많은 사람과 온갖 인연으로 중첩되는 게 인생 아닙니까. 개인적 인연과 정치적 처지로 곤란해지는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이겠습니까. 더구나 인권위 위원장은 그런 걸 다 초월한 자리입니다. 임기를 마친 후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게 주위 분들과 한 약속이고, 저 스스로의 다짐입니다.”

    ▼ 세 사람 중에서 대통령감으로 인정할 만한 분이 있습니까.

    “저는 그런 걸 말할 처지가 아니죠. 세 사람 모두이거나 다 아니거나, 그렇겠죠.”

    ▼ 현재 상황을 보면 내년 대선에서 여야가 바뀔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인권위 활동이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옵니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인권위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인권위 탄생 자체가 한국의 인권 신장에 큰 의미가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인권위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런 중요성을 여야 모든 정치인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임무라고 생각해요.”

    ▼ 몇 해 전 박원순 변호사가 쓴 글을 보니까 안 위원장의 아들이 네 살 때부터 초등학교에 들어간 당시까지도 돼지저금통이 다 차면 아름다운재단에 가져와 기부한다는 대목이 있더군요.

    “저도 어릴 때 그렇게 배웠습니다. 아버지가 교장선생님이셨는데 ‘재물과 사랑은 나누는 것’이라고 늘 강조하셨어요. 종종 부모들이 자녀에게 유행처럼 특정 분야의 교육을 시키는 것을 보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시대가 빠르게 바뀌는데 아이들이 컸을 때 필요한 지식이 뭘지 지금 어떻게 알고 가르칩니까. 어릴 땐 사랑, 그리고 재물을 나누는 마음을 심어주는 게 중요합니다. 나눔은 철이 없을 때부터 가르쳐야 해요. 나중에 스스로 생각하기에 싫어서 안 하면 그만인데, 처음부터 몰라서 안 한다면 부모 책임이죠.

    제 아이가 좀 자라더니 저금통에 있는 돈으로 먹고 싶은 걸 사 먹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 갈등하더군요. ‘추상적 공익’과 ‘구체적 사익’ 사이에 충돌이 생긴 건데, 그때 저금통을 2개 만들어서 공익과 사익의 조화를 꾀하게 했어요.”

    문학의 길 접은 까닭

    ▼ 취임사에서 오세영 시인의 시 ‘사랑의 묘약’을 인용해 “자신의 존재는 점점 작아져 냄새만 남는 비누처럼 겸손한 자세로 봉사하자” “인권위는 국민의 일상적 체취 속에 은은히 풍기는 비누냄새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문학청년이었던 모양입니다.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문학작품을 읽으면서부터일 겁니다. 문학이란 게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는 게 인권이니까요. 법 역시 소외된 사람들을 통해서 제기된 문제를 풀기 위한 사회적 규범을 만드는 것이니까 법과 인권과 문학은 연결될 수밖에 없어요.

    어릴 때 글을 써보겠다는 욕망이 있었고, 백일장에서 인정도 받았지만 문학의 길을 갈 엄두는 못 냈어요. 문학이란 게 학교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다양한 체험을 통하고 지식을 넓혀서 되는 것인데, 그 험한 길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어요. 우리 세대에서 깊은 내공을 가진 작가가 황석영과 이문열이라고 봐요. 내공이 깊다보니 문학의 길을 가면서 흔들리지 않았던 거죠. 저는 그럴 자신이 없었어요. 더구나 우리는 전쟁 이후 세대라 이병주씨 같은 전쟁 체험 세대에게 열등감이 있었어요. 전쟁 같은 커다란 체험을 못 해봤으니 간접체험을 한답시고 집을 나가보는 정도였죠.

    그런 문학적 체험과 열등감 때문에 월남전에 참전하려고 자원입대했어요. 결국 참전은 못 했지만. 그때 월남전에 뛰어들어 ‘머나먼 쏭바강’을 남긴 소설가 박영한이 제 친구예요.”

    안경환 위원장은 강한 의욕을 내비치며 업무를 시작했지만 ‘안경환호(號) 인권위’의 앞날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후 그의 공언대로 인권위는 북한 인권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 의견을 표명했다. ‘북한은 헌법상 우리 영토이지만 사실상 타국(他國)으로 인정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실효적 관할권을 행사하기 어려워 조사 대상에 포함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해 인권 상황 개선을 요구하기 어렵다’는 것.

    인권위의 소극적인 의견에 보수단체, 탈북자 관련단체 등은 강하게 반발했다. 안 위원장의 생각도 인권위 공식 의견과 같은지를 묻는 질문에 인권위측은 “인권위원회 전체 의견이 중요하고, 그게 인권위원장의 공식 의견”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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