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호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 문장식 대표 & 사형수 원언식

“사랑과 정성 앞에선 누구도 뉘우치고 용서받으려 하죠”

  • 권주리애 전기작가, 크리에이티브 이브 대표 evejurie@hanmail.net

    입력2007-03-09 16: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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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군가에겐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 사형수도 백발이 성성한 노(老) 목사에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죽음 앞에 겁먹은 어린 양이다. 노 목사의 조건 없는 헌신과 애정은 분노로 끓어오르던 사형수를 악몽에서 깨어나게 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세상을 보게 했다. 국내 사형수 중 최장기간 복역 중인 원언식씨와 사형폐지운동에 앞장서온 문장식 목사는 이렇듯 10년 넘게 남다른 인연을 이어왔다.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 문장식 대표 & 사형수 원언식

    사형폐지운동의 대부 문장식 목사. 옆 사진은 사형수 원언식씨가 저지른 방화사건을 보도한 신문 기사다.

    지난 1월 중순, 필자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발신처는 경기도 군포우체국 사서함 20-4070, 발신자는 ‘원언식’. 원언식(元彦植·50)씨는 우리나라 미집행 사형 확정자 중 가장 오랜 기간인 14년3개월 동안 복역 중인 사형수다. 편지의 내용인즉 지난해 필자가 한 남성잡지에 기고한 사형제 폐지에 관한 글을 읽었는데, 다른 책에 쓴 글도 읽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원씨는 일면식도 없는 필자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더불어 20년 넘게 자신과 같은 ‘최고수(교도소에서 사형수를 일컫는 말)’를 위해 애써온 노(老) 목사에 대해 썼다.

    불 질러 14명 죽게 한 죄인

    “2005년 9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의사가) 수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순간 제가 지은 죄는 생각지도 않고, 제 신분도 생각지 않고 ‘아!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생명은 여기까지구나’ 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13년이 넘도록 덤으로 생명을 연장 받았으니, 이 병도 감사히 받아들이자’고 생각하면서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곤 곧 죽게 되니까 제일 먼저 이 세상에서 감사드리고 싶은 분인 문장식 목사님께 편지를 올렸습니다.”

    원씨와 문장식(文仗植·70) 목사의 첫 만남은 1993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씨는 1993년 11월, 현주건물방화치사 혐의로 대법원에서 사형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로부터 1년 전인 1992년 10월4일, 그는 원주 ‘여호와의 증인’ 왕국회관에 불을 질러 14명(치료 중 수혈을 거부해 사망한 사람을 포함하면 총 15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뒤 자수했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1992년 10월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자.

    4일 오후 2시반경 강원도 원주시 우산동 74 상가건물 2층에 세든 왕국회관에 원언식(35·대한지적공사 원주출장소 직원)씨가 신도인 아내 신○○(33)씨를 찾으러 갔다가 만나지 못하게 되자, 미리 준비한 휘발유 10ℓ를 교회 출입문에 뿌리고 불을 질러 예배를 보고 있던 신도 90여 명 중 정○○ (58) 장로 등 14명이 유독가스에 질식되거나 불에 타 숨지고, 권○○ (22)씨 등 2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신도 한○○(67·여)씨에 따르면 이날 원씨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 “집사람을 내놓으라”며 2, 3차례 소리친 뒤 아내가 나오지 않자 휘발유를 출입문 바닥에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는 것.

    30평 크기의 왕국회관은 출입구가 하나밖에 없고 바닥에 15평짜리 카펫이 깔려 있으며 벽과 천장이 목재여서 삽시간에 불길이 번져 나갔다. 신도들은 하나밖에 없는 출입구로 한꺼번에 몰려들었으나, 문과 계단이 좁고 불길이 건물 전체로 번져 대피가 어려웠다. 신도들은 유리창을 깨고 밖으로 뛰어내리거나, 쪽문을 통해 슬레이트 지붕으로 올라갔으나, 슬레이트가 깨지는 바람에 바닥으로 다시 굴러떨어져 희생자가 늘어났다.

    단란한 가정에 찾아온 비극

    원씨는 1957년, 강원도 원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8대 독자로 태어나 가난했지만 열심히 살았다. 11세 때 교통사고로 부친을 잃은 그는 방송통신 과정으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1974년 대한지적공사 임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87년엔 대졸자들이 취득하는 지적기사 1급 자격증을 따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대한지적공사 최우수사원으로 뽑혀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91년엔 25평 아파트도 구입해 아내, 두 딸과 단란하게 살았다.

    그런데 그 이듬해 여름부터 술을 자주 마시고 친구들 앞에서 “병든 노모를 모시지 못하는 불효자식”이라고 자책했다. 아내가 왕국회관에 나가기 시작한 뒤로 자주 집을 비우고, 중풍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노모와도 사이가 나빠져 노모가 누이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이다.

    사건 당일. 전날 숙직을 한 그는 아내가 차려준 안주에 곁들여 소주 2병을 마셨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왕국회관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그럴 수 없다고 고집했고, 화가 난 그는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갔다. 그가 돌아왔을 때 아내는 집에 없었다. 왕국회관에 갔다는 딸의 말을 듣고 그는 플라스틱 통을 들고 나갔다. 일요일이라 문 닫은 주유소가 많아 세 군데나 들러 휘발유 10ℓ를 사고 슈퍼마켓에서 라이터도 샀다. 그리고 아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들어가 아내를 내놓으라며 소리쳤다. 신도들이 아내가 없다고 하자 이들이 아내를 숨겨놓았다고 생각하고는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러고는 경찰서로 가서 자수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소리치는 것을 듣고 뒷문으로 빠져나가 화를 면했다.

    1월26일 서울구치소에서 면회한 원씨는 당시 일에 대해 “나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쳐 죄송하다”며 “기사에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거듭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는 말을 꼭 써달라”고 당부했다.

    대부분의 사형수는 사형확정을 받으면 서울구치소로 이감된다. 구치소로 이감되면 교무과에서 종교인들과 자매결연을 주선해준다. 당시 서울구치소의 기독교 종교위원이 문장식 목사였다. 문 목사는 처음으로 원씨와 상담한 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원언식은 다른 사형수들이 그렇듯 처음에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가 유독 심했죠. 허공을 바라보며 허탈해했어요. 얼이 빠져 있더라고요. 자신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은 것에 커다란 죄책감을 갖고 있었어요. 화가 나서 싸울 때 간혹 ‘확 불 질러 다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도 그렇게 엄청난 결과를 전혀 예상 못하고 술김에, 홧김에 그런 일을 저질렀던 거죠.”

    문 목사 외에 자매결연한 두 명의 권사가 매주 화요일 그와 예배를 드리고 상담을 했다. 하지만 그는 쉽게 말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그 이듬해 인연을 맺은 김옥이 권사가 친어머니 같은 정성을 보이자 서서히 악몽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종교 때문에 가정이 깨지고 결국은 엄청난 죄까지 저질렀다는 생각에서인지 종교에 대해서는 쉬 마음을 열지 않았다. 문 목사의 얘기다.

    “처음엔 하느님의 ‘하’자만 들어도 몸서리를 쳤어요. 그러다가 자매결연한 권사님들과 대화하면서 서서히 마음이 녹더니, 기독교에 귀의하고 세례를 받았죠. 특히 김옥이 권사와의 인연은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어요.”

    흉악범의 최후

    그가 마음을 열고 안정을 찾자 문 목사는 그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문 목사는 1980년대부터 사형폐지운동에 앞장서왔다. 1983년 법무부가 종교위원제도를 시행하면서부터 서울구치소 종교위원으로 위촉받은 문 목사는 흉악범도 교화될 수 있음을 경험으로 확신했다. 더욱이 기독교 책임목사로 60여 차례 사형집행장에 입회했는데, 한때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지존파’조차 교화되어 최후에는 착한 모습으로 죽는 것을 목격하고는 사형제도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갖게 됐다. 문 목사는 그 같은 경험을 최근 책으로 펴냈다. 제목은 ‘아! 죽었구나 아! 살았구나.’ 문 목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형수는 피해자 가족에게 용서를 빌며 마지막으로 선을 베풀고 떠나고자 사후 자기 몸 전체를, 또는 안구와 장기를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긴다. 원언식씨도 사후 안구와 장기는 물론 사체도 연구용으로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하늘색 죄수복을 입고 가슴에 빨간 명찰을 단 사형수는 마주하는 것조차 두려울 것 같지만, 그들도 인간이기에 대화를 나누고 사귀면 친구같이, 자녀같이 다정해져요. 수년간의 교화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을 어느 날 기어코 끌어내 처형하는 광경을 곁에서 지켜본다고 생각해보세요. 너무도 비인도적이어서 교화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허탈감은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길이 없어요. 사형집행을 목격하고 나면 교화 의욕을 상실해 여러 날 동안 몸살을 앓고, 몇 달간은 충격 때문에 정신적 고통을 겪습니다.”

    문 목사는 심한 괴로움에 종교위원을 그만두려고 고민하던 차에 또 한 번 사형집행장에 입회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무죄를 주장하는 사형수를 보며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신 것은 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생명존귀운동을 하라는 뜻’이라고 확신했어요. 그래서 1988년 10월 서울구치소 불교 책임자이던 서성운 스님(삼천사), 천주교 책임자이던 추영호 신부(명동성당), 서울구치소 교화협의회장이던 이상혁 변호사를 만나 의논한 끝에 1989년 5월에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를 만들었습니다. 1990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도 사형폐지연구위원회를 조직해 다른 종교와 연대하고 있고요.”

    문 목사는 1994년 4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이하 예장) 사형제폐지위원장 이름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에 ‘원주 왕국회관 방화범 사형수 원언식의 감형 청원 협조요청’ 공문을 보냈다. 이후 KNCC와 예장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을 함께 해왔다. 예장과 KNCC 공동 명의로 1994년, 1999년, 2001년, 2003년, 2006년에 대통령 특사를 청원했다. 그리고 지난 1월에는 3·1절 모범사형수 특사청원을 했다.

    “형제들이 은전을 입었습니다”

    문 목사가 원씨 구명운동만 하는 건 아니다. 모든 사형수를 위해 감형(減刑)운동을 하고 있다. 문 목사에겐 다 ‘잃어버린 어린 양’들이다. 다만 문 목사가 원씨에 대해 남다른 부채감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원언식은 술을 마시고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어요. 세상에 어떤 가장이 단란한 가정을 꿈꾸지 않겠습니까. 종교 문제로 그의 가정이 파탄났기 때문에 종교인으로서 막중한 책임을 느낍니다. 또 원언식을 가까이해보면 사람이 참 착해요. 인상도 아주 선하죠. 그런데 구명운동을 할 때마다 원언식 이름을 맨 앞에 적어 놓아도 너무 많은 인명이 희생됐기 때문에 감형자 명단에서 매번 빠져요. 그러면 미안한 마음에 내가 죄를 지은 것 같아서, 구치소에 가더라도 한동안은 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문 목사의 그런 마음을 원씨가 모르지 않는다. 2003년 1월11일자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목사님의 수고 덕분에 이번에도 4명의 형제가 감형의 은전을 입었습니다. 5년 전에는 23명의 형제가 이세상을 떠났는데, 이번에는 감형의 은전을 입었으니 정말 그날은 복된 날이었습니다. 사실 모든 형제가 죽음을 초월하여 살고 있다고 하지만 왜 근심, 걱정이 없겠어요? 저희들은 감히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목사님의 수고가 아름답게 열매를 맺어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목사님의 수고와 사랑이 헛되지 않도록 언식이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무기로 감형된 사형수는 모두 42명. 감형은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집중돼 1998년에 2명, 1999년에 5명, 2000년에 2명, 2002년에 4명 등 모두 13명이 극형을 면했다.

    법무부에서는 2005년부터 1년 이상 수용된 사람에게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있다. 원씨는 2005년 9월 받은 건강검진에서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길어야 2∼3개월 더 살 수 있다”는 두 번째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

    “길어야 2∼3개월 산다”

    “목사님! 오늘은 언식이를 위해 기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생명을 또 한 번 살려주셔서 주님이 쓰고자 하는 곳에 쓰임 받을 수 있는 도구가 되고 싶습니다. 목사님! 꼭 기도해주십시오. 결코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겠습니다.”(2005년 9월26일 문 목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2005년 10월12일, 그는 간의 3분의 1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종양이 간의 맨 밑에 몰려 있었다. 문 목사는 그가 슬플 때나 아플 때, 부모 형제보다 더 가까이서 그를 위해 기도했다. 1년 반 전에 2∼3개월밖에 못 산다고 선고받은 원씨는 기적적으로 지금껏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지난 1월 CT(컴퓨터단층촬영) 결과에선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았고, 혈액 검사 결과도 정상으로 나왔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29일 23명에 대한 무더기 사형집행이 이뤄진 이래 지금껏 10년 가까이 사형집행이 없었다. 지난해 8월엔 사형을 확정받고 복역 중이던 장모씨가 폐암으로 숨졌다. 사형수가 사형 집행을 통하지 않고 자연사(병사 포함)한 첫 사례다. 그리고 올해 1월26일 사형수 김모씨가 급사했다. 미집행 사형수가 두 번째로 자연사한 것이다. 법무부는 아직 이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고 있다.

    2004년 유인태 의원(열린우리당)이 발의한 사형제폐지법률안은 현재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올 정기국회에서 법안으로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그와 상관없이 올해 말까지 사형이 집행되지 않으면 한국은 유엔이 인정하는 사실상의 사형제 폐지국(10년간 사형집행이 없는 국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63명의 사형수는 올해 하루하루를 살며 “아, 죽었구나!” “아, 살았구나!”를 반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도 머리가 허연 노 목사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위해 구치소로 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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