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호

사면초가 삼성전자 키 잡은 이윤우 부회장

“뚱뚱한 고양이 안 되려면 ‘Work hard’ → ‘Think hard’로!”

  • 김용석 동아일보 산업부 기자 nex@donga.com

    입력2008-07-09 16: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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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면초가 삼성전자 키 잡은 이윤우 부회장
    지난 5월16일 삼성전자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이윤우(李潤雨·62) 부회장은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면서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25층 집무실의 6인용 소파부터 치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 10여 명이 모여 앉아 회의할 수 있는 탁자를 가져다놓았다.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생각에서였다. 부사장급만 참석하던 업무보고 등의 회의 자리에 이때부터 수하 임원들도 참석하기 시작했다. 해당 업무를 잘 파악하고 있는 임원들이 회의에 나와 실질적인 성과를 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예전 집무실이 펜타곤의 전략회의 분위기였다면 바뀐 집무실은 전장에 나선 사령관의 야전 텐트가 된 셈이다.

    이런 변화의 배경은 이 부회장의 CEO 선임이 평시의 차분한 바통 터치가 아니었다는 데 있다. 그의 CEO 선임은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CEO로 선임된 날 오후 사전에 예정된 미국 출장길에 오르는 바람에 태평양 상공에서 첫 경영구상을 가다듬을 정도였다.

    삼성특검 등으로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겪은 삼성그룹이 이건희 회장,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의 사퇴 및 그룹 전략기획실 해체라는 예상치 못한 격랑을 겪은 직후였다. 더구나 유가 상승,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 담보대출) 부실로 인한 경기침체, 반도체 가격 폭락 등 세계 경제 환경이 악화일로여서 한마디로 위기의 한복판에 뛰어든 셈이었다.

    삼성전자의 한 고위 관계자는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반도체 사업 진출 당시 이 부회장이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가져다놓고 결국 사업을 성공시킨 일화는 유명하다”며 “지금 이 부회장이 사무실에 테이블을 가져다놓으며 그때 심정을 다시 떠올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싸움에서 이기다



    지금의 이윤우 부회장을 키운 것은 ‘8할’이 반도체와의 싸움이었다. 삼성전자 ‘반도체 스타’로는 황창규 삼성전자 기술총괄 사장과 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 사장(전 삼성전자 사장)도 꼽히지만 이 부회장과는 상황이 달랐다.

    서울대 공대 후배들인 황 사장, 진 사장 두 사람이 삼성전자 반도체라는 ‘비행기’에 탑승한 뒤 고공 비행하며 스타 CEO가 됐다면, 이 부회장은 맨바닥에 앉아 철판과 나사를 모아서 비행기를 조립해낸 사람이랄 수 있다. 이 부회장은 두 사람과 달리 해외유학 한 번 다녀오지 않은 국내파다. 미국 인텔, IBM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소를 거친 두 사람과 달리 사회생활의 첫발을 삼성에서 내디뎠다. 강한 의지와 실행력으로 밑바닥부터 다지며 스타 CEO로 올라선 것이다.

    이 부회장과 반도체의 인연은 1975년에 시작됐다. 당시 입사 8년차로 삼성NEC(현 삼성SDI) 건설기획과, 진공관 제작과 등에 근무하던 이 부회장은 ‘반도체가 아니면 안 된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회사를 어렵게 설득해 집적회로(IC) 개발 계획을 마련했다. 당시 삼성NEC는 진공관 사업만 벌이고 있었다. 일본 반도체 선두주자였던 NEC로부터 기술을 이전받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수립했다.

    하지만 그를 필두로 한 50여 명의 반도체팀은 일본에서 첫 실패를 경험한다.

    “일본 NEC에 도착하니 직원들이 운동장에서 풀을 뽑거나 돌을 줍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1975년은 제2차 오일쇼크의 해로 NEC마저 일이 없어 공장을 놀리고 있었던 거죠. 연수가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습니다.”

    의기소침해 있던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병철 당시 삼성그룹 회장의 3남인 이건희 당시 동양방송 이사가 인수한 한국반도체가 한국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반도체 생산라인(FAB) 사업을 벌인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그는 회사 인사팀에 한국반도체로 전보해달라고 요청했다. 회사는 좀처럼 그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의 고집이 이겼다.

    “한동안 마음고생을 했죠. 하지만 결국 회사는 제 편을 들어줬습니다. 이왕 갈 거면 최고가 되라는 인사담당자의 협박(?)에 가까운 말을 들으며 1976년 10월31일 한국반도체로 전출됐지요.”

    그때부터 그와 반도체의 끝없는 싸움이 이어졌다. 섬세한 반도체 생산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미세한 온도 차이 때문에 품질이 엉망이 되기도 했고, 심야에만 생산이 제대로 되고 낮에는 불량이 쏟아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속출했다. 이 부회장은 반도체가 그토록 애를 먹였지만 “규소판 위에 지도를 새기고, 그 위를 전자(電子)라는 놈들이 흘러 다니며 우리가 원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며 반도체와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1991년 세계 D램시장 정상 등극

    사면초가 삼성전자 키 잡은 이윤우 부회장

    2004년 6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아테네올림픽 성화봉송 행사에 참석한 이윤우 부회장.

    이 부회장이 반도체와 싸움을 벌이던 1982년 12월. 이병철 회장이 초고밀도 집적회로(VLSI) 사업을 본격 추진하면서 이 부회장은 이 사업 추진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3년 삼성이 공식적으로 반도체 사업 진입을 선언한 뒤로는 말 그대로 전쟁이 시작됐다. 첫 목표는 64K D램 반도체 개발이었다.

    “가까스로 집적회로(IC)를 생산하던 당시의 기술과 장비로는 어림도 없는 얘기였습니다. 마치 자전거를 만드는 철공소에서 초음속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달려드는 꼴이었죠. 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그 일에 덥석 뛰어들었습니다.”

    결국 삼성은 6개월 만에 개발에 성공했다. 미국 인텔이 1K D램을 처음 개발한 뒤 1978년 일본 후지쓰 등이 64K D램을 개발하기까지 8년이 걸린 것을 불과 6개월로 단축시킨 것이다.

    삼성은 1983년 9월부터 야산을 깎아 6개월 만에 경기도 기흥공장을 짓겠다는 또 하나의 ‘무모한 목표’를 세웠다. 선진기업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일반적인 반도체 공장 건설기간은 약 1년 반이었다. 반도체 설계를 포함하면 2~3년이 걸린다. 설계와 공사를 병행하며 기간을 3분의 1 가량으로 단축한 셈이다. 이 과정에서 한나절 만에 4km 길이의 포장도로를 만들어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기흥공장 건설은 근로자들이 아오지 탄광이라고 부를 정도로 힘든 공사였습니다. 야산을 불도저로 밀어 정지작업을 하고 그야말로 허허벌판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춘 것 없이 공사를 진행했죠. 창고를 사무실로 개조해 새벽까지 일하다 보면 2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기숙사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새우잠을 자기 일쑤였습니다. 연인원 24만명의 현장 동원 인력이 6개월 동안 단 하루도 공식 휴가를 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내놓은 64K D램은 1984년 반도체 시장 불경기가 오는 바람에 원가 이하에 팔아치우는 등 오히려 회사에 누적적자 1000억원에 이르는 큰 손해를 안겼다. 그러다 1985년 IBM 등 유수 기업으로부터 품질을 인정받고 미국 판매망을 갖추자 사업이 정상화했다.

    수요가 살아나 반도체 품귀현상까지 나타난 1987년에는 3억1500만달러, 이듬해에 8억580만달러의 흑자를 낼 정도로 대반전을 경험했다. 삼성은 이어 64메가 D램을 개발하고 1991년 세계 D램시장 정상에 오르는 등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삼성전자는 1992년 D램 부문, 1993년 메모리 반도체 부문의 세계 시장 1위를 차지한 뒤 지금껏 이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들은 이 같은 성공이 있기까지는 사업이 진퇴양난에 빠진 1987년 당시 기흥공장 공장장이던 이윤우 부회장의 추진력이 큰 힘이 됐다고 평가한다. 그는 회사가 망할 것이라는 대내외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감산(減産)에 나서지 않고 수억달러가 소요되는 신규 생산라인 공사에 착수해 신규 제품을 묵묵히 개발해내는 등 흔들리지 않는 추진력을 보여줬다.

    이 부회장은 1991년 반도체총괄 전무(및 기흥연구소장), 1992년 반도체총괄 대표이사 부사장, 1996년 반도체총괄 대표이사 사장을 맡으며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과 함께 성장했다.

    이 부회장은 “이 신화를 창조하기까지 많은 동료의 뼈를 깎는 고통과 노력이 있었다. 지난 일을 생각하면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잠시도 마음을 놓은 적이 없었다. 경쟁업체를 압도하는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는 일념과 대한민국의 희망이 돼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1분 1초를 아끼며 일했다”고 회상했다.

    ‘뚱뚱한 고양이論’

    이 부회장이 신임 CEO에 선임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많은 삼성전자 임직원의 머릿속에는 ‘뚱뚱한 고양이’ 그림 한 장이 떠올랐다. 이 고양이는 30여 년간 이 부회장이 보여준 강한 추진력을 대표하는 상징물 같은 존재다.

    1996년 이 부회장은 한 외국 협력기업과 회의를 하던 중 “삼성전자가 뚱뚱한 고양이(Fat Cat)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D램 1위를 구가하는 풍요로운 현실만 탐닉하다가 살이 찌는 바람에 민첩성이 떨어져 쥐를 잡을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상대방은 그렇게 심각한 생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아찔한 충격을 받았죠. 실제로 당시 삼성전자는 반도체 호황에 승승장구하며 조만간 일류기업이 될 것이라는 낙관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갑자기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사면초가 삼성전자 키 잡은 이윤우 부회장

    ‘이윤우號’는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2007년 신년하례식에서 이건희(가운데) 전 삼성회장과 함께 한 이윤우 부회장(맨 왼쪽).

    그는 대화 도중 머릿속에 떠오른 ‘뚱뚱한 고양이’의 이미지를 종이에 그렸다. 그리고 회사로 돌아와 이를 임원회의에 전달했다. “제품개발은 지연되고 고객대응은 느리며 생산 납기를 지키지 못한다면 이런 모습이 될 것”이라는 경고문이었다. 이 그림의 메시지는 강했다.

    이 부회장은 “임원들의 방에 내가 그린 고양이 그림이 하나씩 걸렸다. 많은 사람이 공감했다. 그리고 우리는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달콤한 휴식의 유혹을 벗어나기 위해 늘 새로운 시장을 찾아 도전하고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밤낮 없는 싸움의 길을 걸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아직도 가끔씩 해외지점 사무실에 걸려 있는 뚱뚱한 고양이 그림을 발견하고는 내 스스로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며 “이 그림은 나와 같이 일하지 않은 임원조차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뚱뚱한 고양이는 ‘간단한 것이 최선이다(Simple is best)’라는 이 부회장의 경영철학을 대표한다. 그는 “무엇이든 복잡할 필요가 없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물 또는 개념의 본질은 언제나 하나의 간결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것이 ‘핵심’이다”라며 “군더더기 없는, 그래서 과장되지도 축소되지도 않은 간결함 속에 핵심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역설한다. 뚱뚱한 고양이의 경고도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하지만 삼성전자 임직원들이 그 지혜를 되새기며 끊임없이 자신을 독려한 것이 결국 놀라운 성과를 끌어냈다는 설명이다. 이 부회장은 “단순한 진리에서 최고의 정수(精髓)를 이끌어내는 우리 임직원의 철저함과 완벽함이 놀랍고도 즐겁다”고 말한다.

    알렉산더의 지혜

    이 부회장은 ‘고르디우스의 매듭’ 일화도 자주 인용한다. 이 일화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고르디우스가 수레에 매듭을 맨 뒤 이를 풀고 수레를 끌어내리는 사람이 세계를 정복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아무도 복잡한 매듭을 풀지 못하고 있을 때 알렉산더가 단번에 칼로 매듭을 자른 뒤 수레를 끌어내렸다는 내용이다. 이 부회장은 “알렉산더는 문제의 핵심이 매듭이 아니라 수레를 끌어내리는 것임을 파악한 것”이라며 “본질을 파악하고 기본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경영철학은 그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이를 풀어내는 열쇠 노릇을 했다. 단칼에 매듭을 자르는 알렉산더 대왕의 결단력을 발휘하고자 노력해온 것이다. 그는 한 언론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수조원의 반도체 투자를 결정할 때 며칠동안 밤잠을 못 이루며 고민한다. 만약 투자에 실패하면 회사를 금세 위기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알렉산더 대왕의 결단, 즉 ‘간단한 것이 최고’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판단한다”고 토로했다.

    삼성그룹의 한 임원은 “이 부회장은 합리적이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지만 어려운 고비를 맞을 때마다 간결한 목표를 설정하고 강한 추진력을 보이는 힘을 갖고 있다”며 “이런 점에서 삼성전자의 위기를 극복할 적임자로 낙점된 것 같다”고 말했다.

    서글서글한 외모의 이 부회장은 호탕한 성격과 소탈한 취향을 가진 경영인으로 알려졌다. 업무처리에도 거침이 없다. 하지만 기본 원칙을 지키는 데는 철저한 면모를 보인다고 한다. 이 부회장을 잘 아는 한 중견 반도체 기업 사장은 “늘 소탈한 모습의 이 부회장이 삼성전자의 CEO를 맡았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두 이미지가 잘 연결되지 않았을 정도”라고 말했다.

    또 다른 지인은 “언젠가 이 부회장 앞에서 칭찬하는 말을 했더니 지나칠 정도로 정색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바람에 놀란 적이 있다”며 “대부분의 고위직들이 그런 경우 웃으며 그냥 넘기는 것과 달라 ‘이 사람 참 솔직하구나’ 생각했다”고 전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도 ‘서민의 음식’인 순두부찌개다. 이 부회장은 자신이 직접 적은 프로필에서 “나의 입맛은 아직 세계화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세계화가 무조건 지향해야 할 바는 아니지만 우리 음식이 좋다. 세계 어떠한 음식이 우리의 손맛만 하겠는가”라고 털어놓았다.

    따뜻하고 평범한 가장

    이런 면모는 사람을 끌어 모은다. 유원식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 사장은 2004년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이 부회장은 해외 유학도 다녀오지 않은 국내파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선마이크로시스템스와 델, IBM 등 대기업 CEO가 인정하는 훌륭한 인품의 경영자”라고 평가했다.

    그는 조직변동으로 회사를 떠나게 된 미국 선 본사의 아시아태평양 총괄책임자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부회장에게만은 꼭 얼굴을 마주 보고 작별인사를 하겠다”며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찾아온 일화를 소개했다. 유 사장은 이 글에서 “비즈니스로 만난 다른 나라 사람도 비행기를 타고 찾아오게 만들 만큼 따뜻한 인품을 지녔다는 점을 새삼 느꼈다”고 전했다.

    이 부회장은 인생에서 쉽게 경험하지 못할 아픔도 겪었다. 1995년 서울 서초구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 첫 부인과 사별(死別)한 것. 당시 이 부회장과 함께 일하던 임직원들은 이 부회장이 큰 아픔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추스르고 경영자로서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 주변을 감복시켰다고 전했다.

    이 부회장은 현재 최형인 한양대 연극영화과 교수, 2녀1남의 자녀들과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의 장인은 삼환그룹 창립자인 최종환 명예회장의 셋째형인 고(故) 최경환 경동산업 회장이다. 최용철 전 경동산업 부회장, 최용민 명지전문대 교수, 이윤 롤렉스코리아대표이사와 처남-동서 간이다.

    이 부회장은 자신의 프로필에서 가족들을 소개하며 “모든 이에게 묻고 싶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느냐고. 가족에게서 삶의 힘을 얻지 않는 사람이 있느냐고. 집에선 나 역시 평범한 가족의 아버지이며 남편이다. 특별하지도 못나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가장일 뿐이다.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함이 늘 아쉬운…”이라며 가족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드러냈다.

    가장 친한 지인들은 김태훈 전 동양제철화학 감사와 정해왕 전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소장, 곽혜근 HK한국광유 대표 등 경북고 동기들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을 포함해 ‘4인방’으로 불리는 이들은 주기적으로 골프를 치며 친교를 유지한다고 한다. 1980년대 초 시작한 골프가 이 부회장의 건강 비결이다. 국내 비뇨기과 분야의 1인자로 알려진 김세철 중앙대 의료원장과 이한구 전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 등과도 경북고 동기동창(46회)이다. 이 부회장은 또 부인이 연극영화과 교수여서 연극계 사람들과도 친교가 있다.

    이윤우 부회장이 국내 최대기업인 삼성전자의 키를 잡으면서 삼성전자가 어떤 방향으로 가느냐에 국내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전임자인 윤종용 상임고문보다 더 많은 짐을 짊어졌기 때문이다.

    ‘창조경영의 계승’

    삼성전자의 방향타 노릇을 해온 그룹 전략기획실이 없어지고 계열사별 경영체제가 불가피해진 것이 가장 큰 변화다. 전략기획실이 있을 때 윤 고문은 테크노 CEO로서 세계시장의 치열한 경쟁에 맞설 삼성전자의 미래 성장사업에만 집중하고, 기업을 둘러싼 외부환경(정치, 사회 등)의 이슈는 전략기획실이 나눠 맡는 일종의 분업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 그 기능을 해줄 전략기획실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 부회장이 챙겨야 할 과제는 사실상 전임자의 두 배가 됐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취임식을 치른 이 부회장의 일성(一聲)은 ‘창조경영의 계승’이다. 이 부회장은 5월20일 취임사에서 “스피드와 효율 중심의 경영혁신을 기본으로 하고, 창조경영으로 확대, 발전시켜 삼성전자를 21세기 진정한 초일류 기업으로 만들어나가자”고 당부했다.

    그는 창조경영을 실천하기 위해 첫째 글로벌 인재 확보 및 조직문화 혁신, 둘째 신수종(新樹種) 사업 발굴을 위한 사업구조 고도화, 셋째 시장중시 경영을 통한 신성장 기회 확보, 넷째 정도경영 준법경영의 체계적 추진을 세부 과제로 제시했다.

    특히 솔루션 사업, 신(新) IT제품, 에너지·환경, 바이오·헬스 등의 신규 사업을 강조했다. 관심을 모은 신 IT 제품에 대해서는 휘는 디스플레이(Flexible Display), 입는 컴퓨터, 신 모바일 기기, 홈 엔터테인먼트 로봇, 차량용 반도체 등 구체적인 상품을 제시했다.

    관련 업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오래전부터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애정을 쏟아온 만큼 이 분야를 집중 육성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황창규 사장의 후임으로 비메모리 반도체 전문가인 권오현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을 선임한 것과 반도체 전문가인 황창규 사장과 임형규 사장을 각각 기술총괄 사장과 신사업팀장으로 포진시킨 것도 비메모리 사업 강화를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휴대전화, 디지털TV 등의 사업을 맡으며 마케팅에서 뛰어난 성과를 올려온 최지성 정보통신총괄 사장과 박종우 디지털미디어총괄 사장에게는 브랜드 가치를 올리고 신흥 시장을 확대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줬다.

    이 부회장은 이어 조직 추스리기에 나섰다. 올 6월 월례사에서 “최근 고유가, 고물가, 고환율의 3고현상과 저소비, 저성장, 저고용의 3저현상으로 어려움이 가속화하고 있다”며 긴장감과 위기의식을 불어넣었다.

    반면 과거 실수로 말미암은 임직원들의 모든 징계기록을 말소하는 ‘대사면’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은 “앞으로는 열심히 일하는(Work hard) 조직에서 깊이 생각하는(Think hard) 창조적 조직문화를 목표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또 “개방적이고 벽이 없는 조직,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신바람 나는 일터를 만들겠다”고도 했다.

    신뢰 회복이 과제

    이런 이 부회장의 리더십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보내지 않는 시각도 있다. 특검에 따른 쇄신책의 하나로 특별한 보직 없이 신흥시장 개척을 맡기로 한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돌아오기 전까지 삼성전자를 이끄는 것이 이 부회장의 역할일 것이라는 해석이다.

    따라서 이재용 전무의 후계 체제를 굳히기 전까지 차질 없는 경영권 승계 프로세스를 준비하는 정도가 이 부회장에게 맡겨진 미션이라는 시각이 없지 않다. 특히 특유의 카리스마를 가진 전임자 윤종용 상임고문과 달리 이윤우 부회장은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모난 데 없이 무난한 스타일이라는 점이 이 같은 분석에 힘을 싣고 있다.

    어쨌든 이 부회장이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를 잘 추스르고 정상궤도에 올려놓을지는 비단 삼성뿐 아니라 한국 경제 및 사회의 주요 관심사다. 이 부회장은 10년 전인 1998년 반도체총괄 사장 당시 이와 비슷한 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 IMF 구제금융 불황기를 겪는 가운데 조직 내부에서 대형 기술유출 사건이 터지면서 생겨난 위기국면이었다.

    당시 이 부회장은 ‘훌륭한 일터(Great Workplace) 운동’의 창시자인 로버트 레버링 박사를 초청해 조직진단을 맡겼다. 레버링 박사의 결론은 “삼성은 먼지처럼 메마른 조직이다. 전혀 즐겁지 않고 신뢰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 부회장은 이때부터 삼성전자 반도체를 훌륭한 일터로 만들기 위해 신뢰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사람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과 사람들 사이의 대화를 살려 안팎의 신뢰를 회복했다고 한다.

    이윤우 부회장이 지금 맡은 과제도 이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삼성그룹과 관련된 일련의 악재로 인해 삼성전자가 한국사회와 세계시장에서 잃은 신뢰를 어떻게 회복하느냐가 이 부회장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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