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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특별연재 -책으로 본 한국 현대인물사 2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파란의 근대사, 생생한 인간 벽화, 총체소설의 장관

  • 윤무한 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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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미망인의 처녀작 ‘계산’

광복되던 해 진주여고를 졸업한 박경리는 이듬해 결혼했으나 6·25전쟁 중 남편을 여의고 뒤이어 아들마저 잃었다. 어머니와 단 하나의 혈육인 딸을 부양해야 하는 작가의 삶은 가파르고 메말랐다. 전쟁은 분명 뒤틀린 현실을 낳았고, 그 시대를 산 모든 삶을 불구적으로 만들었다. 인간에 대한 존엄과 생명의 고귀함은 휴지처럼 구겨졌고, 삶은 몸서리쳐지는 고통과 불행의 늪이었다. 당시 전쟁미망인은 생존의 벌판에서, 또 사회적으로 따가운 눈총에서 아무런 바람막이가 없었던 ‘희생의 제물’ 같았다.

박경리는 원래 몽상가였다. 그러나 질곡의 현대사는 그를 긴장시키고 엎드리게 했고 균형을 잡도록 했다. 주어진 현실에서 소망을 무너뜨리지 않으려면 세속적 욕망은 버려야 할 그 무엇이었다. 그에겐 삶의 큰 울림을 주는 어떤 세계가 필요했다. 작가는 문학에 매달렸다. “넌더리가 날 정도로 집념에 가득 찬 도스토예프스키”의 고투에 작가는 감명을 받았고, 제임스 조이스에게선 예술가라기보다는 고도의 장인정신을 배웠다. 토머스 울프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는 토마스 만의 작품과 함께 박경리의 창작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의 문학은 세계문학의 태산준령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문학적 실험을 멈추지 않은 고골리의 작가정신에 공감했고, ‘고요한 돈 강’의 작가 솔로호프를 통해서 작가는 사실적 묘사와 도도한 서사시적 구성에로 시야를 넓혔다.

찬바람 몰아치는 신작로에 홀로 남은 듯한 소외감, 인간의 조건 속에서 튕겨져 나와 바닷가 모래알 하나가 된 듯한 절망감, 왜 사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을 반복하던 끝에 박경리는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계산’이 추천·발표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초기 소설에는 삶의 신산스러운 풍경이 자전적으로 용해되어 있다.

초기작 중에는 6·25전쟁 때 남편을 잃고 사는 전쟁미망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많다. 1957년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안겨준 ‘불신시대’에는 가난과 고독 속에서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몸부림이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고 세상에 대한 회의와 불신에 사로잡히다, 마침내 “그렇지, 내게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었지. 항거할 수 있는 생명이”라고 독백함으로써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생명력, 현실에 대한 각성과 세상의 부조리, 모순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하는 의식전환을 보여줬다. 장차 진화해나갈 박경리 문학의 밑그림이 펼쳐진 것이다.



1990년대 42쇄 찍은 ‘김약국의 딸들’

‘불신시대’를 통해 작가는 ‘소설 쓰는 일’과 ‘사람 사는 문제’를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생각하는 문학적 경향을 보였다. 작품이 일기나 수필처럼 전후의 현실에 대한 고발과 증언을 하고 있음에도 작가는 폐쇄된 주관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기구한 삶 속에 유폐된 것 같았다. 그러나 1959년에 발표된 ‘표류도’에서 박경리는 전쟁미망인의 고통에 찬 삶을 주제로 다루면서, 자폐적 고립성에서 벗어나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개방적 자세를 취하는 등 상당한 변모를 보인다. 세계와 타자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을 절대시했던 종전의 주인공과는 달리, “내 피부에, 내 심장에 불행한 인간들은 다정한 친구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이 됐다.

“나를 현실에 적응시켜야 한다. 내 생명이 있기 위하여 나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마지막 장면의 다짐은 외로운 ‘표류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제 박경리는 “억울하고 괴로운 심경을 표현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는 진술의 의미를 뒤집었다. 세상 사람들의 꿈과 슬픔을 이해하고 담아내기 위한 공적 담론으로써 작품을 대하는 소설가로 한 걸음 뛰어오른 것이다.

1962년 박경리는 전작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발표했다. 당시 장편소설은 문예지나 신문에 연재된 다음 독자의 반응이 좋으면 책으로 묶어내는 게 하나의 경향이었는데 ‘김약국의 딸들’은 이례적으로 바로 책으로 출판됐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곧바로 독자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박경리는 당시로선 드물게 전업 작가의 위치를 굳힐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1960년대의 작품이 1990년대에도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아 1993년에 1쇄를 발행한 ‘김약국의 딸들’은 1995년까지 2년 동안 무려 42쇄를 거듭했다.

대하소설 ‘토지’와  박경리

박경리로 하여금 전업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한 ‘김약국의 딸들’.

‘김약국의 딸들’을 읽으면 우선 어딘가 ‘낯익은 이야기’란 느낌을 받는다.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이야기 속의 어떤 불행한 집안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느낌, 아니면 내 고향 어느 대가(大家)의 몰락과정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작품은 2004년 마산 MBC가 특집 프로그램으로 마련한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와의 대담에서 박경리 자신이 “‘김약국의 딸들’은 솔직히 말해 통영의 떠도는 얘기를 모아서 재편집했다”고 말한 것처럼 설화적 요소가 짙다.

‘김약국의 딸들’ 전체를 지배하는 주술적 모티프는 “비상 묵은 자손은 지리지(번식하지) 않는다”이다. 김약국과 그의 딸들은 이 언어적 모티프처럼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 것으로 일관한다. 리얼리즘적 관점에서 보면 우연이 연속해서 중첩되는 현상은 비과학적일 뿐만 아니라 신비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개연성을 지탱한다. 역사적·사회적 배경이 아니라 운명적 배경과 그 원인을 밝혀내기 어려운 신비한 장치들이 작품의 곳곳에 포진해 있다. 언어의 주술성과 폐가를 중심으로 한 장치적 모티프, 그리고 곳곳에 나타나 작품의 주제를 암시하는 삽입 가요, 뚜렷한 설화적 구성원리 등이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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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무한 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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