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호

군소 정당에서 전단지 돌렸던 앙겔라 메르켈

‘긍정의 힘’과 ‘단호한 원칙’으로 국민 마음 샀다

  • 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입력2008-10-06 1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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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소 정당에서 전단지 돌렸던 앙겔라 메르켈
    지난 8월27일 경제 격주간지 ‘포브스(Forbes)’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꼽았다. 3년 연속이다. 독일 경제를 침체에서 구해냈다는 게 선정 이유였다. 포브스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영향력, 언론의 주목 정도 등을 고려해 매년 유력 여성인사 100명의 순위를 발표해왔다.

    앙겔라 메르켈이 2005년 11월 총리에 취임할 때만 해도 ‘과연 얼마나 갈까’ 회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10년 중환자 독일 경제를 되살려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각종 경제지표가 그 증거다. 실업률은 취임 1년 전만 해도 12%에 달했지만 이듬해 10.8%로 낮아진 데 이어 지난해에는 9%대로 떨어졌다. 성장률이 1%만 넘어도 호황이라는 독일에서 2006년 성장률 2.7%를 기록했다. 세수(稅收)는 2005년 4521억유로에서 2007년 5141억유로로 늘었다.

    수출은 2006년 1조1123억달러로 미국(1조373억달러)을 제치고 2005년에 이어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인구수가 미국의 3분의 1도 안 되는 나라가 세계 최고의 수출대국이 된 것이다. 제조업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독일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메르켈을 처음에는 ‘동독 출신의 촌닭’이라며 우습게 여기던 독일 국민들이 지금은 단단한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국민을 잘살게 해주는 사람이 곧 좋은 지도자’란 만고불변의 진리가 이 나라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성공비법



    앙겔라 메르켈 성공비법은 다름아닌 시장친화 정책이다. 그 근간은 친기업 정책을 통한 일자리 만들기다. 메르켈은 진정한 사회보장은 세금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자리 확대’에 있다고 믿는다. 고용 없는 복지 확대는 오히려 더 심한 빈곤과 경기침체를 불러온다고 생각하고, 품질 좋은 ‘메이드 인 저머니(Made in Germany)’ 제품을 만들어 전세계 소비자에게 팔 때 독일 경제가 부활한다고 믿는다. 해법은 간단하다. 첨단제품, 첨단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각종 규제를 철폐해 기업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가 우선 노동분야 개혁에 손을 댔던 것도 그 때문이다. 독일 기업의 최대 단점은 노조가 강하다는 것이었다. 주식을 배분받은 노조는 안정성을 최고 가치로 여기며 기득권으로 ‘가늘고 길게 살기’를 원했다. 이들이 고용 창출의 걸림돌이 된 건 물론이다. 실업률은 당연히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메르켈은 노조의 경영 참여를 축소하고 신규 채용자를 해고할 수 있는 기간을 6개월에서 2년으로 늘리는 등 경직된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만드는 데 애썼다. 법인세율도 39%에서 29.8%로 낮췄다. 근본적인 해결은 아직 안 됐다는 지적이지만 어쨌든 철옹성 노조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메르켈을 영국의 ‘대처’에 빗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메르켈은 2000년 11월18일자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에 기고한 글에서 “독일의 노사관계는 세계화된 현재가 요구하는 모습으로 조정되어야 한다. 사회보장을 실시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불필요한 분야에 세금이 쓰이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교통 에너지 통신 분야의 과감한 민영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

    그는 철저한 친미(親美)주의자이기도 하다. 이라크전쟁에 반대하며 반미 정서를 독일 국민에게 확산시킨 슈뢰더 전 총리와는 딴판이다. 슈뢰더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거부한 유럽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다. 메르켈은 슈뢰더가 유럽이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막아 오히려 유럽의 대미 영향력을 떨어뜨렸다고 주장했다.

    2003년 2월 메르켈은 미국을 방문하는데, 방미 며칠 전 미국 ‘워싱턴 포스트’에 ‘슈뢰더가 독일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그는 “슈뢰더 총리가 이라크 문제에 있어 독일의 이익만 내세워 우호적이던 독미(獨美) 관계를 해치는 유별난 길을 걷고 있다”며 대놓고 공격했다.

    해외 신문에 자국 정부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니 국내 정치인들과 여론은 메르켈이 독일의 위신을 깎아내렸다고 맹공격했다. 하지만 메르켈은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이런 단호함은 지난해 8월 탈레반에 인질로 잡힌 독일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났다. 인질을 살해하겠다는 탈레반의 최후통첩을 앞두고도 ‘철군 불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오히려 독일군 증파 의사를 밝혔다. 최후통첩 이틀 뒤 인질 1명이 살해당한 뒤에도 흔들림 없이 “독일군의 아프간 주둔은 매우 중요하고 논쟁의 여지가 없으며 장기간 계속될 것”이라고 못 박았다. 메르켈 총리의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신념이 드러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미국한테 잘 보여 반대급부나 얻어보자는 계산에서 나온 언행이 아니다. 그는 로마의 군사전략가인 베제티우스의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인 것이다.

    메르켈은 2003년 초 21세기 외교 및 안보 정책에 관한 글에서 독일 역사와 신유고 연방 코소보 자치주에서 벌어진 ‘코소보 사태’(유고연방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알바니아계 코소보 주민과 세르비아 정부군 사이에 벌어진 유혈 충돌사태)를 거론하면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했다.

    “우리는 평화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평화제일주의, 급진적 평화주의가 오히려 평화가 아닌 폭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더 큰 화(禍), 더 큰 폭력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은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인권과 안정에 대한 기준과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때로 군사적 개입은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메르켈의 이 말에는 우리 대북관계에서도 새겨야 할 대목이 많다. 우리는 지난 10여 년 동안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해 많은 돈을 쏟아 부었지만 북한은 우리의 선의(善意)를 핵무장으로 보답했다. 이런 북한의 행동에 대해 오히려 ‘핵무장을 이해한다’ 는 식으로 반응해온 게 지난 정권이었다. 로마사 전문가인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말처럼 “평화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동독에 가다

    메르켈의 친시장 정책과 친미 정책이 동독 체험에서 비롯됐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그녀는 유년기와 청소년기, 청년기를 합쳐 35년 세월을 사회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동독 출신자가 통일 독일에서 주류 서독인들을 제치고, 최연소 여성 장관을 거쳐 최초 여성 총리가 되었으니 그 자체로 드라마틱하다.
    군소 정당에서 전단지 돌렸던 앙겔라 메르켈

    메르켈의 남편인 요하힘 자우어 박사.

    그의 리더십을 연구한 독일 전기작가 하요 슈마허는 메르켈 평전에서 앙겔라 리더십의 본질을 ‘빈약의 미학’이라고 칭한다. 흔히 통상적인 성공가도에 필요한 충분조건을 갖추지 못했는데도 이를 이겨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적절한 비유란 걸 알 수 있다.
    군소 정당에서 전단지 돌렸던 앙겔라 메르켈

    사르코지 대통령과 함께 프랑스 상하원 표결을 지켜보고 있다.

    그는 1954년 7월17일생이다.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지만 생후 몇 주 만에 아기 바구니에 실려 부모와 함께 동독으로 간다. 당시 동독 사람들이 서독으로 가는 게 대세였는데 그의 부모는 역(逆)주행을 한 셈이다.

    메르켈이 태어나기 두 달 전인 1954년 5월 말까지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인은 18만명에 달했다.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던 1961년에는 그 수가 270만 이나 됐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부모가 동독행을 택했던 데는 사연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막 끝내고 결혼한 뒤 메르켈이 태어나자마자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들을 교화하라는 명령에 복종해 동독으로 향한다. 아버지는 신생 국가나 다름없는 동독이 정의로운 공동사회라는 초기 기독교 사상에 근접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희망과는 달리 사회주의 1당 독재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이 이끄는 동독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로 무장하여 부르주아 사상과 종교를 극복하는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야 한다고 부르짖는 상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냉전의 위협이 날로 거세지던 때이기도 했다. 동독의 행정구조와 법체계는 소련을 모범 삼아 정비됐고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농업의 집단화도 이뤄졌다.

    동독에 아무 연고도 없던 메르켈 가족이 정착한 곳은 인구가 300여 명에 불과했던 브란덴부르크 주 ‘깡촌’ 크비트초프였다. 메르켈 가족은 궁핍한 생활을 신에 대한 경외로 생각하는 가장(家長) 덕분에(?) 가난하게 살았다. 3년이 지나 템플린이라는 작은 마을로 옮겨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애인 숙소와 성직자 평생교육원이 있는 그곳은 일반인이 살기에 적당한 곳은 아니지만, 어린 메르켈은 동물을 쫓아 뛰어다니고 식물을 관찰하고 초원을 쏘다녔다.

    게다가 교회라는 특수한 공간은 어릴 적부터 그에게 삶과 죽음, 궁핍과 정의, 의무와 동정심이라는 커다란 문제들과 대면하게 했다. 교회에 수용된 장애인들과 자연스레 어울리며 “정상적인 신체조건이 반드시 즐거움의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빈약한 환경이 오히려 그를 일찍 철들게 한 셈이다.

    부모는 자식을 엄하게 키웠다. 말을 듣지 않으면 체벌도 서슴지 않았고 용돈을 몰수했으며 외출금지령도 내렸다. 부족한 것은 많았지만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삶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정치 시스템의 억압과 감시는 ‘깡촌 교회’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전화를 할 때도 항상 슈타지(비밀경찰)가 도청하고 있음을 의식해야 했고, 중요한 대화는 숲에서 산책할 때까지 미루는 게 좋다는 생활의 지혜(?)를 누가 말하지 않아도 익히게 됐다.

    선교활동과 자선사업까지 제한받는 상황에서 메르켈 아버지의 처신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교회가 굳이 체제에 반대할 이유도 없고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를 형성해서도 안 된다고 믿었기에 정부와 별 마찰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우리에겐 숲과 호수가 있었다”

    1961년 8월13일 베를린 장벽이 세워질 당시 메르켈은 일곱 살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서독의 친가와 외가를 자주 가곤 했는데, 어머니와 함께 함부르크에 사는 외할머니 댁을 방문하고 돌아온 며칠 뒤 장벽이 세워졌다. TV뉴스를 듣던 어머니가 “이제는 더 이상 외갓집을 가지 못한다”고 울먹이던 모습이 어린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메르켈은 성인이 되어 “돌이켜 생각하면, 그날 이후 동독을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아예 없어지면서 동독이냐 서독이냐를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회고했다.

    장벽이 세워졌다고 교류가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소포 같은 우편물은 서로 보낼 수 있었다. 메르켈 식구들에게 온 것은 주로 인스턴트 수프, 비누, 청바지 등 자유시장경제의 산물들이었다. 이를 통해 서독 자본주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10대 시절 그의 우상은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였다.

    메르켈은 나중에 기자로부터 “서독에 태어났으면서도 동독에 살아야만 했던 것을 불평한 적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한다.

    “장벽이 세워지기 전 여름방학 때 서독에 사는 사촌들이 우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서독 애들이 동독 애들보다 더 행복한지 유심히 관찰했다. 그런데 사촌들도 그들의 부모한테 혼나는 것은 똑같았다.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나한테 없는 물건을 그들이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우리에겐 그 애들에게 없는 숲과 호수가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동독이라는 환경은 내가 잃은 게 뭔지 계속 고민하도록 도와준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난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주어진 상황에 기뻐하고 만족하는 성격을 갖게 됐다.”

    메르켈의 회고를 듣다 보면 낙천적인 성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는 누구나 꿈꾸는 성공의 비결인 ‘긍정의 힘’을 만들어내고 유지했다.

    메르켈은 학창 시절 우등생이었고 당의 공식노선을 추종하는 교사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애쓴 신중하고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급우들과 반(反)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은 시(詩)를 낭송하다가 퇴학을 당할 뻔한 당돌한 학생이었다.

    청년기는 종교인의 딸에게 가해진 압력에 순응하며 ‘자기실현’이라는 과제를 충족시켜야 했던 모색의 시간이었다. “속마음을 말해도 좋을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그의 본능적 감각은 이런 독특한 체제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다.

    메르켈에게 ‘사회주의 체제’는 하나의 한계였지만, 그 한계 속에서 최대한의 결과물을 내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했다. 쉽게 저항하기보다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하려 한 것이다. 이런 성실함이 결국 그의 성취를 가능케 해준 동력이었다.

    “필요에 의한 결혼이었다”

    메르켈은 인문학이나 언어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대학에서는 물리학을 선택한다. 인문계열학과는 이데올로기에 더 묶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었다. 원자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가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물리학을 선택하면 정치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아 대학 추천서를 쉽게 받을 수 있었다.”

    그는 1973년 작센 주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한다. 대문호 괴테가 나온 곳이고 작곡가 슈만과 바그너 등이 공부한 명문대학이다. 동독에서 가장 큰 대학이기도 했다. 하지만 체제에 비협조적이어서 당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다.

    교수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는 전공 지식을 가르치는 것에 더 비중을 두어 학생들이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분위기이긴 했다. 하지만 정치상황이 거칠어지면서 심적 방황을 겪는 학생이 많았고 메르켈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 동독은 건국 25주년을 맞아 서독과의 연관성을 암시하는 모든 것을 폐지하는 내용으로 헌법을 개정하는 등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하나의 조국’이라는 가사가 포함된 국가를 가사 없이 악기로만 연주하라는 지시가 떨어질 정도였다. 저항 문인들이 추방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메르켈이 가장 좋아하던 작가 라이너 쿤체도 동독작가동맹에서 제명당하고 저항시인이자 가수인 볼프 비어만도 추방당했다. 그는 충격을 받긴 했지만 이것 때문에 반정부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메르켈은 졸업시험에서 최고점을 받았다. 학부 졸업논문이 미국 전문학회지에 공동명의로 게재될 정도였다.

    졸업하던 1977년에는 동급생인 울리히 메르켈과 결혼했다. 그의 첫 남편이다. 본래 이름이 앙겔라 카스너에서 앙겔라 메르켈이 된 것은 남편 성을 따랐기 때문이다(그는 나중에 이혼을 했는데도 첫 남편 성을 버리지 않고 있다).

    군소 정당에서 전단지 돌렸던 앙겔라 메르켈
    스물셋에 한 결혼이었지만 당시 동독 여성들이 워낙 결혼을 일찍 하는 풍조라 이른 것도 아니었다. 결혼을 하면 부부가 같은 지역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도 있고 주택도 배정받았기에 조혼이 많았다. 메르켈 부부 역시 화장실과 욕실을 세 가구와 공동으로 써야 하는 주택을 배정받긴 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일자리, 주택문제를 해결한다.

    결혼은 4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활동적인 메르켈과 달리 남편은 한적한 자신만의 생활을 즐기려 했다는 것이 주된 이유로 알려졌다. 한 인터뷰에서 메르켈은 “진정한 사랑에서 우러난 결혼이었다기보다 필요에 의한 결혼이었다. 남이 다하니까 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서독 체제가 분명히 옳다’

    대학을 마치고 잡은 첫 직장은 베를린 동독 학술아카데미 산하 물리화학연구소였다. 그전에 공대 조교가 되려고 면접을 보기도 했는데, 면접관은 메르켈이 서독의 라디오를 얼마나 자주 들었고 서독 청바지를 언제 입고 다녔는지 등 사적인 내용을 모조리 알고 있었다. 대학 당국이 친구들을 상대로 정보를 캐낸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매사 감시받는다는 것을 의식하고 살았지만 이렇게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인 줄은 그때 처음 느꼈다.

    그는 특별한 비전 없이 연구소에 들어가 12년 동안 평범한 과학자로 지낸다. 월급은 1012마르크. 고급 구두 한 켤레가 32마르크니 결코 풍족한 생활은 아니었다.

    연구소라고 감시의 눈길이 덜한 것은 아니었지만 메르켈은 조금이라도 반체제 활동이라고 보일 만한 활동은 하지 않았다. 마음속은 아니더라도 겉으로는 최소한 정부에 어떻게 충성심을 보여야 하는 지 그 행동 양식을 어릴 때부터 익힌 결과라고나 할까.

    1980년대가 가까워지면서 동서독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럴수록 동독 젊은 세대의 동요도 심해져갔다. 마침 국제정세도 79년 나토 군비증강 결의, 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80년 폴란드 위기와 미국의 모스크바올림픽 보이콧 등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하고 있었다.

    억압이 심해질수록 자유에 대한 갈망은 커지는 법. 메르켈의 동료 연구원들은 기회만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동독을 떠나고 싶어했다. 마침 메르켈은 사촌의 결혼식으로 서독을 합법적으로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가족들이 모두 방문하고 싶어했지만 정부당국은 혹여 이들이 망명 신청이라도 할까봐 직업이 확실한 메르켈만 허락해줬다.

    당시 메르켈은 동독의 덜컹거리는 열차를 타다가 시설이 훌륭한 서독 열차를 탄 게 제일 감격스러웠다고 한다. 그리고 호텔에 묵으면서,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면서 ‘서독체제가 분명히 옳다’고 느꼈다고 한다.

    무거운 마음으로 동독으로 돌아와 좁고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연구실에 틀어박히는 외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그는 이곳에서 몇 년간 원자핵의 붕괴반응에 관한 논문을 준비해 1986년 1월 박사논문으로 제출한다. 논문을 감수한 요아힘 자우어 박사는 나중에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 된다. 두 사람은 1998년 12월 결혼하는데 자우어 역시 재혼이었다. 메르켈은 첫 결혼이나 두 번째 결혼에서 아이가 없는데 “정치에 투신했을 때가 서른다섯이었는데 이후 아이문제는 생각나지 않았다”고 한다.

    야당에서 전단지 돌리던 촌스런 아줌마

    평범한 연구자로 끝났을 수도 있었던 그의 삶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뒤 뒤바뀌었다. 장벽 근처에 살고 있던 그는 장벽이 붕괴되던 날 저녁,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사우나에 있었다. TV로 소식을 듣고 친구와 장벽으로 달려갔다. 당장 함부르크 이모에게 전화하고 싶었지만 공중전화도, 서독 동전도 없었다.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독인들은 정치적인 삶을 살았다. 정치가 변하면 곧 삶이 변화하니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다. 새로운 사회 건설에 참여하고 싶은 욕망도 솟았다. 메르켈이 어떻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전기 작가 하요 슈마허는 “메르켈은 동독에서의 삶을 통해 국가가 가지 말아야 할 길이 무엇인지 일찍부터 배웠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4일 뒤인 13일 메르켈은 폴란드로 출장을 갔는데 그곳 사람들에게서 “곧 독일이 통일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상황은 급속도로 진전됐다. 12월 중순 라이프치히 크리스마스 장터에서는 독일 통일을 위한 서명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가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다. 12월에 접어들면서 수만여 명에 달하는 동독 국민은 정부 위협에도 라이프치히와 베를린에서 ‘슈타지 물러가라’ ‘집단탈출을 막으려면 여행의 자유를 보장하라’며 평화시위를 벌였다. 시위대 숫자는 날이 갈수록 불어났다. 헝가리와 체코를 거쳐 서독으로 망명하는 사람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장벽 붕괴 후 약 6주가 지난 1989년 11월9일 메르켈은 새로 만들어진 야당 ‘민주변혁’의 문을 두드린다. 자신과 말이 통한다고 생각되는 지식인이 많이 참여하고 있었고 민주주의적 일처리 절차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는 이곳에서 전단지를 배포하는 허드렛일부터 시작한다. 수수하고 소녀다웠던 그는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솔선수범해 해결책을 제시, 삽시간에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하루빨리 통일이 되고 화폐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확신을 굳힌다.

    이듬해 2월 민주변혁당이 선거준비를 하게 되자 연구소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에 돌입한다. 그러나 민주변혁당은 볼프강 슈누어 당수가 슈타지의 비공식 직원이었다는 게 알려지면서 1%도 안 되는 지지율로 참패했다.

    군소 정당에서 전단지 돌렸던 앙겔라 메르켈

    G8 정상들이 일본 홋카이도 도야코에 모여 지구온난화에 관한 선진국의 책임에 대해 논했다.

    다시 연구소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그에게 동독 정부 부대변인 자리에 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온다. 바야흐로 공식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항상 약속을 지키고 조용한 성격에 문제의 본질을 포착해내는 능력 덕분에 기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항상 검정치마와 검정 재킷, 굽이 편평하고 디자인이 단순한 신발을 신고 다녀 ‘제대로 좀 입고 다니라’는 지시를 받을 정도로 촌스러웠다. 재미있는 것은 메르켈은 이런 요구에 반항이라도 하듯 수년 동안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도 그 특유의 고집이 묻어난다.

    베를린협약을 이끈 환경부 장관

    메르켈은 무엇보다 자신이 ‘여성’ 정치인으로 인식되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스타일링’을 통한 성취나 남자들이 말하는 ‘여자로서의 무기’를 이용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남성지배적인 정치계에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메르켈은 후에 통독정치의 중앙으로 진입하며 ‘미디어 영향이 지대한 민주주의사회’에서 더 이상 촌스러움이 무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듯 옷차림에 신경을 쓰긴 했다.

    메르켈의 부대변인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맡은 지 5개월 뒤인 8월31일 새벽 동서독 양국이 45개의 조항과 1000여 쪽에 달하는 통일조약에 서명하면서 통일을 이뤄낸 것이다.

    통일 이후 그의 삶은 한마디로 승승장구였다. 연방언론정보기관 참사관을 거쳐 12월 총선에서 당선돼 국회의원이 됐고 한 달 만에 통일독일의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임명돼 세상을 놀라게 했으니 말이다. 더구나 남녀를 통틀어 독일 역사상 최연소(35세) 장관이었다.

    메르켈의 발탁에는 헬무트 콜 총리라는 배경이 있었다. 콜 총리는 동독 출신의 젊은 여성 정치인에게 비교적 ‘부드러운’ 정치적 현안을 다루는 부서를 맡김으로써 동서독을 아우르는 정치를 하고 싶어했다.

    이 때문에 메르켈은 ‘콜의 양녀’로 불리기도 했다. 하긴 그는 신용카드사용법부터 새로 배워야 했던 자본주의 사회의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빠르게 익혔다. 쉬지 않고 일만 해 직원들로부터는 ‘차갑고 정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정치적 기반이 없으면 소용없다는 것을 절감하자 1991년 민주변혁이 흡수 통합된 기독민주당 브란덴부르크 지구당위원장에 도전하는 과감함을 보인다. 서독 출신으로 친기업 성향을 띠었던 울프 핑크에게 참패하지만 주류 정치무대 진입을 위한 신고식으로는 제법 괜찮은 도전이었다.

    메르켈은 이듬해인 1992년 기민당 부당수 선거에 도전해 86%라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다. 그리고 2년 뒤인 1994년엔 콜 내각의 환경부 장관이 된다. 지금까지 부드러운 사안을 다루는 부서를 담당했던 것과는 달리 환경부는 정치적인 쟁점의 중심에 있는 사안들을 다루는 부서로 환경부가 내리는 결정은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가 물리학자였다는 배경을 생각하면 장관 자격은 충분했지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과연 일을 잘할지 의심의 눈초리에 시달렸고 환경보호단체들은 영향력 없는 사람을 앉혔다고 비난했다. 그녀는 이런 혹평을 1995년 베를린에서 열린 유엔기후정상회의에서 날려버린다. 당초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온실가스 배출량 축소를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베를린협약’을 2주간의 협상 끝에 채택해낸 것이다.

    “콜의 시대는 영원히 갔다”

    130개국에서 온 대표단 1000여 명의 상이한 이해관계를 국제회의에서 조정하고 마침내 모든 참가국이 수용할 만한 결과를 끌어내 짧은 시간 내에 복잡한 기후보호 분야의 전문지식을 습득하고 이해했음을 증명했다. 의심의 눈초리는 걷히고 직원들도 그를 신뢰하기 시작한다.

    1998년 독일 총선은 콜 시대의 종식을 가져왔고 메르켈의 8년 장관 생활도 끝났다. 그러나 메르켈은 집권당인 기독민주당(기민당) 새 당수 볼프강 쇼이블레가 그를 사무총장으로 낙점하면서 정치인생을 이어간다. 메르켈이 환경부 장관이던 시절 자문을 하며 맺어온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지만 메르켈의 일처리 능력에 대한 신뢰의 결과였다고 봐야 한다.

    하요 슈마허는 “남자들이 권력욕에 사로잡혀 실패할 때, 실패가 없던 메르켈이 서서히 중앙으로 진입한 것을 알 수 있다”며 “어떻게 성공할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냐가 그녀의 삶을 이끌었다”고 분석한다.

    ‘남자들의 실수’란 기민당과 콜을 뒤흔든 ‘불법자금 스캔들’을 말한다. 이 사건은 콜 정부에서 재정 담당위원을 지낸 사람이 구속되면서 정당 기부금 실태를 폭로함으로써 시작됐다.

    궁지에 몰린 콜은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수년간 기부금 운영과 관련해 ‘실수’를 저질렀다고 시인했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정당 기부금법을 거스르며 받은 액수가 ‘150만~200만마르크’라고 실토했지만 제공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이 스캔들은 기민당이 1년이나 여당 본연의 활동을 할 수 없도록 타격을 입혔다. 이 과정에서 메르켈은 빈틈없이 진상을 밝히겠다는 태도로 일관해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마이크 앞에 나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부금 수수 과정에 대한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했고 공격의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을 키워준 콜이었다.

    메르켈은 1999년 12월22일자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에 실명 기고라는 ‘폭탄’을 터뜨린다. “콜의 시대는 영원히 갔다. 당은 이제 (콜 없이도) 혼자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부금 제공자를 밝힐 수 없다’는 콜의 말은 신의를 법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합법적인 사안에서는 용인될 수 있지만 법에 위배되는 사건에서는 이해받을 수 없는 행동이다.”

    기민당은 발칵 뒤집혔다. 당수인 쇼이블레조차 신문을 통해 알고 펄쩍 뛰었다. 메르켈의 행동은 명백한 배신행위였다. 하지만 당시 콜뿐 아니라 쇼이블레조차 10만마르크 기부금을 불법적으로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라는 것이 후에 밝혀졌다. 쇼이블레는 1999년 12월 불법 비자금 사실이 불거져 나오자 부인하다 2000년 1월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시인하고야 만다. 기민당은 다시 표류했다.

    이 과정에서 메르켈은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덕분에 기민당을 재정비해 새 출발의 시동을 걸 유일한 사람으로 부각됐다. 마침내 2000년 2월 쇼이블레는 사임하고 두 달 뒤 열린 기민당 전당대회에서 메르켈은 935표 중 897표를 얻어 당수에 선출된다. 메르켈은 입당한 지 10년 만에 당내 최고 권력자가 됐다.

    마침내 메르켈은 2005년 11월 처음으로 독일 여성 총리에 올랐다. 기민당이 또 다른 우파정당인 기독사회당과 연합하고, 좌파인 사회민주당을 한데 묶어 대연정을 구축해 정권을 잡은 것이다.

    ‘로마인이야기’의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인간은 어차피 고생하며 사는 것, 기왕이면 즐겁게 고생하는 길을 제시하는 게 리더의 역할”이라며 “국민을 즐겁게 해주는 낙천적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최고”라고 했다. 낙천적 리더십이란 단순히 상황을 낙관적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중장기적인 안목과 역사의식,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최진 대통령리더십 연구소장에 따르면 “시대마다 원하는 리더십의 내용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면 메르켈은 “당대 독일인이 원하는 안정감 있고 낙천적인 성격과 비전을 갖고 있다”고 평할 수 있다.

    게르트 랑구트 독일 본대학 정치학 교수가 인터뷰(책 ‘앙겔라 메르켈’ 중)에서 인생관을 묻자, 메르켈은 이렇게 답한다.

    “저는 불평하기보다 해결책을 찾으려고 시도합니다. 저는 교육을 통해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가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변화해야 한다고 깊이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변화는 무섭거나 끔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혹은 우리 편이 어디에 있는지 보지 못하고 변화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 더없이 안타깝습니다. (중략) 저는 독일이 누구의 위에도 아래에도 있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딱 맞는 위치를 찾고 다른 나라들의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도록 제 힘을 보탤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메르켈의 리더십

    메르켈은 대중을 사로잡는 쇼맨십이나 수려한 용모와 말솜씨를 가지고 있지 않다. 메르켈이 산전수전 다 겪은 서독의 ‘정치 9단’들을 물리치고 총리에 오른 것에 대해 하요 슈마허는 “남을 믿지 않으며 자기 앞을 가로막는 정적(政敵)은 가차 없이 제거하며, 비판자들을 우군으로 만드는 권력의 십계명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우선은 올바른 비전을 바탕으로, 인연에 얽매이지 않는 단호함과 원칙을 지켜가려는 노력이 독일 국민의 마음을 샀다고 보는 게 옳다. 여기에 철저한 노력과 근면함, 과학자다운 치밀함, 적들이 적시에 나가떨어져주는(?) 운(運)도 따랐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무런 정치기반이 없는 동독의 여자 과학자가 총리까지 된 데에는 노력하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는 독일 문화에 그 비결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의 전기를 읽다 보면, 그가 조국에 대한 사랑과 문제해결을 무엇보다 우선시했기에 오늘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배경에는 합리적인 독일 정치문화가 있지만 말이다. 그는 권력 자체보다 ‘어떤 일을 해야 독일이 더 번영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앙겔라 메르켈의 삶을 보니 분단국가 국민으로서 부러움이 든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통일을 이룬 독일. 사회주의 국가 출신 정치인을 수장으로 자본주의의 꽃을 더 크게 피우는 독일. 독일과 우리는 인연이 많다. 독일은 현재 한국의 네 번째 교역국가로, 과거에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대한민국 발전의 종자돈을 벌었던 나라이고, 1964년 차관으로 우리나라 근대화를 도운 나라다. 박정희 대통령이 아우토반을 달린 후 한국에도 고속도로를 놓아야겠다고 해서 시작된 게 경부고속도로이지 않은가.

    두 나라 모두 전쟁의 폐허 위에서 동서와 남북으로 분단됐지만 공산화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며 ‘라인 강의 기적’과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한국도 독일처럼 자유민주주의로 통일될 날이 오기를 빌어본다.

    참고도서

    현재 국내에는 ‘앙겔라 메르켈’이라는 제목의 평전으로 니콜 슐라이(서경홍 옮김, 문학사상사), 레르트 랑구트(서유리 옮김, 이레)가 각각 쓴 책이 나와 있다. 두 권 모두 시간 순서대로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최근 나온 ‘독일을 바꾼 기다림의 리더십’(하요 슈마허 지음, 배인섭 옮김, 아롬미디어)은 메르켈 리더십의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았다. 먼저 평전을 읽고 난 뒤 이 책을 읽으면 정리가 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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