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호

지식재산포럼 김명신 회장

“21세기는 두뇌전쟁 시대, 지식재산법으로 국가경쟁력 키워야”

  • 정현상│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9-02-05 11: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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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미국을 ‘지식재산 강국’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아직 이에 대해 통합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민간이 주도한다. 지식재산 강국을 부르짖으며 기본법 법제화 등을 이끌고 있는 ‘열정 덩어리’ 김명신 회장을 만났다.
    지식재산포럼 김명신 회장

    사진 조영철 기자

    미국 오바마 정부가 1월20일 공식 출범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해 말 차기 국정과제의 요지를 담은 ‘오바마-바이든 플랜’을 발표했는데, 국내 언론들은 주로 오바마의 경제정책과 대외정책을 분석했다. 그러나 간과해선 안 될 또 하나의 핵심 내용이 있다. 수학 및 과학 교육 강화, 줄기세포 연구 지원 확대, 하이브리드차 100만대 보급 등 미국을 지식재산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지식재산이란 전통적인 발명, 디자인, 상표 및 저작권을 의미하는 협의의 개념에서 벗어나 생명공학상의 새로운 발견, 기술비결, 식물 신품종, 컴퓨터 프로그램, 예술, 인공지능 등 인간의 모든 정신적 창작물을 뜻하는 무체재산(無體財産)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미국은 사실 1980년대 초에 지식재산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임을 간파하고, 국가 차원에서 지식재산의 권리화, 자산화를 추진해왔다. 일본은 미국의 지식재산보호정책을 모델로 ‘지적재산입국(知的財産立國)’이라는 과제를 국가생존전략으로 수립했다. 또 총리가 직접 지적재산국가전략추진본부를 설치하고 2002년 지적재산기본법을 만드는 등 지식재산업무를 강력하게 추진한 결과 지적재산고등법원이라는 특수한 제도도 마련했다.

    그러나 한국은 아직 이에 대한 통합 대책을 세우지 못한 상태다. 다만 특허청 문화관광체육부 지식경제부 등 각 부처가 개별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다 보니 부처이기주의가 생기고, 정책추진도 비효율적이다. 이런 가운데 지식재산의 중요성을 파악한 일부 지식인이 민간 차원에서 관련 운동을 펴나가고 있어 관심을 끈다. 대한변리사회 회장을 지낸 김명신씨가 김재철 전 한국무역협회장, 이상희 전 과학기술처 장관과 함께 공동대표로 있는 사단법인 지식재산포럼이 바로 그런 단체다. 이 포럼을 발의하고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김명신(65) 회장을 1월7일 서울 마포 도화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 회장은 경북 포항 출신으로 고려대 법대를 나와 1969년 변리사가 된 이후 명신특허법률사무소 대표를 맡고 있다. 서울남산라이온스클럽회장, 국제라이온스협회 354복합지구 의장, 대한변리사회 장(1996~1998), 아시아변리사협회장(2000~2003) 등을 지냈다.



    일본 2002년 이미 법제화

    ▼ 언제부터 지식재산권의 중요성을 인식했습니까.

    “저는 산업정책에 관해 고민하는 학자도 아니고 또 대단한 법률가도 아닙니다. 다만 변리사 업무를 40년간 해오면서 지식재산권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습니다. 외국 대기업들이 한국에 와서 무슨 사업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는지를 항상 문의해옵니다. 또 국내 대기업들은 외국 나가서 무슨 사업을 하면 좋을지 상담을 원합니다. 우리 직원들이 만지는 서류가 이르면 10년 뒤, 멀게는 20년 뒤에 국내외 시장에 나올 상품들과 관련된 겁니다. 그래서 남보다 좀 더 많은 정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 2004년 일본에 갔을 때 그곳에 지적재산기본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2005년 봄에 한양대 법대 윤선희 교수와 다시 일본을 방문해서 그 내용과 배경을 파악하고 돌아왔습니다.”

    김 회장은 윤 교수와 함께 지적재산기본법에 따라 설치된 지적재산전략본부를 방문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 측이 순순히 받아주질 않았다고 한다. 결국 평소 안면이 있던 일본 법조계 원로인 도쿄대 나카야마 노부히로 교수의 도움을 받아서 갈 수 있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인구는 많고 자원이 부족한 나라입니다. 다만 교육열이 높아 두뇌 재산은 풍부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이런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반대로 일본은 재빨리 판단한 겁니다. 즉 현 상태 일본의 국력과 자산, 기술, 교육수준, 산업구조로는 앞으로 100년을 버틸 수 없다고 결론지은 거지요. 두뇌자원에 국운을 걸기로 한 겁니다. 이에 대해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합의를 봐서 지적재산기본법이 생겼습니다. 여기에는 행정부 전략만 있는 게 아닙니다. 입법, 사법, 행정, 심지어 외교, 학교, 기업까지 전부 포함된 전략이 있습니다. 2005년 제가 국제거래신용대상 개인상을 받고 시상식장에서 ‘사재를 털어서라도 지식재산권 운동을 벌였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게 직접적 계기가 돼 이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 지금 한국 정부는 어느 정도로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습니까.

    “문제는 지금 과학기술 분야와 문화예술 정책이 따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의 부가가치를 제대로 올리려면 과학기술이나 문화예술 정책에서 긴밀하게 협력해야 합니다. 더 큰 문제는 눈에 안 보이는 인간의 두뇌자원도 큰 자산이라는 인식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예컨대 제가 대한변리사협회장을 맡고 있을 때 영국변리사협회와 자매결연을 했습니다. 당시 영국 측 회장에게서 들은 얘기인데요, 한국 국방부가 영국과 무기 기술도입계약을 맺었지만 실무 담당자들이 자꾸 바뀌면서 법률적 측면이나 국제관례 등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없는데 한국 정부에 그런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해요. 결국 업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니 예산낭비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정말 심각한 얘기 아닙니까.”

    과학기술과 예술의 만남 중요

    ▼ 과학기술과 예술의 만남이라면, 예컨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만화, 애니메이션, 컴퓨터프로그램, 캐릭터, 연극, 영화, 음악 등의 분야에 한국인이 빼어난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에 과학기술적 측면을 가미해 집중적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게임산업이 대표적이지요. 이를 위해 새로운 형태의 영재교육도 필요합니다. 일반적인 학업 성적은 떨어져도 컴퓨터를 잘하고 프로그래밍에 빼어난 학생이 있다면 그쪽으로 영재교육을 시키자는 겁니다. 형식에 얽매이면 창의력이 사라집니다. 제가 아는 어느 게임기 회사에서는 연구원들의 전성기 연령이 20~25세입니다. 그 시기를 지나면 퇴물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그 풍부한 창작성의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과학고니 자립형사립고니 하는 학교들과는 다른 형태, 즉 특수 분야에 소질 있는 아이들을 집중 교육시키자는 겁니다. 그들에게서 엄청난 부가가치가 나와요. 이건 한 개인의 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익을 위해서, 국가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필요한 일입니다.”

    김 회장은 국가적 전략 차원에서 지식재산기본법과 영재교육법 등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2008년 11월1일 정부의 한 고위 관료에게 지식재산기본법에 대해 브리핑을 한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 지식재산권에 관한 정책은 부처별로 나뉘어 있다. 예컨대 발명, 디자인 및 상표와 같은 산업재산권은 특허청, 컴퓨터프로그램과 저작권은 문화관광체육부, 반도체칩 등 산업 전반에 관한 진흥정책은 지식경제부, 식물품종은 농림수산식품부, 생명공학 분야는 보건복지가족부, 모조품 수출입 분야는 관세청 등이 관장한다. 따라서 집중적이고 계획적인 국가 전략을 수립하는 데는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있고, 정부 부처끼리 힘겨루기 하는 양상이 드러나기도 한다. 또 국민이나 기업 입장에선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가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대통령이 위원장을 맡는 위원회 같은 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입법 사법 행정 모두 힘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국무총리가 조율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콘셉트에 관해서 2006년에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특허청, 문화체육부, 교육부 등 관련된 부서와 심포지엄을 했는데 이 법안에 대해 위원장을 대통령으로 하자는 것 외에는 모두 찬성했습니다.”

    김 회장이 이끄는 지식재산포럼은 1800여 명의 회원을 둔 순수 민간단체다. 특정 종교나 정치집단에 가입하면 임원 자격이 박탈된다. 이 단체의 숙원사업이 바로 지식재산기본법의 입법이다. 김 회장은 18대 국회에서 누군가가 반드시 이 일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17대 국회에선 한나라당 이병석 의원이 의원입법을 추진했지만 성사되지 못하고 기본법안 초안만 마련된 상태다.

    “입법은 기왕 한다면 시간이 걸리고 비용이 좀 들더라도 제대로 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든든한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사안이 중요하긴 하지만 찬반 대립이 심한 것도 아니고, 관련 이벤트를 해서 일반인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참 힘듭니다. 그렇다고 여론이 비등할 때까지 기다린다면 다른 나라에 비해서 또 한참 뒤처지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독도 분쟁의 핵심은 기술 문제

    ▼ 일본에서도 처음엔 민간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나요.

    “지금 지적재산전략본부 사무국장이 전 특허청장 출신입니다. 이 사람이 자신의 퇴직금을 털어서 운동을 벌였고, 그러다 아내에게 이혼당할 뻔도 했답니다. 다행히 고이즈미 전 총리와 연결돼서 일을 성사시킬 수 있었지요.”

    지식재산포럼 김명신 회장

    김 회장은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직도 청년 같은 열정을 갖고 있다.

    그는 뜬금없이 독도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기자에게 대뜸 “독도 공시지가가 얼마인지 아느냐”라고 물었다.

    “독도 공시지가가 8억5000만원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토록 독도를 사수해야 합니까. 물론 원래 우리 땅이었다고 주장하고,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또 어족자원 때문에 소중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그 일대에 매장된 가스하이드레이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국민이 가스 대신 30년간 쓸 수 있는 가스하이드레이트가 그곳에 묻혀 있습니다. 그런데 가스하이드레이트에 관한 기술특허 가운데 65%를 일본이 갖고 있습니다. 한국은 2%도 안 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결국 기술이라는 겁니다. 두뇌전쟁 시대에 옛날 방식의 영토전쟁 개념으로 ‘독도는 우리 땅’을 외치는 캠페인은 좀 유치하지 않습니까.”

    김 회장은 일반 시민이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할 수 있는 국민제안운동도 벌이자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어느 조직에 속한 이가 사무실의 종이를 절약할 수 있는 획기적 아이디어를 제안했을 경우 그 절감효과의 10분의 1일을 종자돈으로 만들어 적정액을 매달 평생 지급하는 제도를 만들자는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에 대해 적정한 대가를 지급하면 국민의 아이디어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것.

    그는 강연회에 가면 청색발광다이오드(LED)를 개발한 나카무라 슈지 미국 샌타바버라대 교수 이야기를 가끔 거론한다. 슈지 교수는 1993년 니치아화학 재직 시절 세계 최초로 LED를 개발했다. 덕분에 소기업이었던 니치아화학은 연 10억달러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회사는 슈지 교수에게 과장으로 승진시켜주면서 겨우 2만엔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이후 슈지 교수는 샌타바버라대에서 스톡옵션과 연구자금을 제시하자 과감하게 회사를 떠나 학교로 옮겼다. 이후 정당한 보상을 받겠다며 소송을 제기해 항소심에서 회사 측으로부터 80여 억원을 받았다.

    “직무발명에 대해서는 정당한 보상을 해줘야 합니다. 슈지 같은 사람이 나오는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는 지식재산위원회가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로 중소기업 대책 문제를 들었다. 그동안 정부에서 중소기업, 벤처기업을 육성하겠다며 여러 가지 대책을 내놓았지만 가장 중요한 은행의 대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담보로 내세울 게 없는 중소기업은 아무리 돈이 급해도 은행 대출을 받는 게 쉽지 않았고, 정부의 대책도 ‘립서비스’에 그치고 말았다.

    “발상을 바꿔서 중소기업이 담보가 없어도 좋은 아이디어나 시나리오를 가졌을 경우 그 가치를 돈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구를 하나 만들자는 겁니다. 이 기구에서 아이디어를 1억원짜리로 평가했다면, 그 평가서를 담보로 은행대출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기업이 부도가 나면 은행이 30% 정도 책임을 집니다. 나머지는 은행이 지적재산에 관한 재보험공사 같은 데서 받아가는 형태가 좋습니다. 수출상품에 대한 재보험공사가 있듯이 지적재산 재보험공사를 만들어야겠지요. 이 공사는 다시 국제재보험을 듭니다. 이런 형태가 되지 않으면 중소기업이나 벤처 육성은 영원히 공염불이 될 겁니다.”

    ‘통통’ 튀는 열정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김 회장은 아직도 젊은이처럼 ‘통통’ 튄다. 그런 열정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김 회장은 음악에도 조예가 있다. 1997년 호주 시드니에서 아시아변리사회가 열렸을 때 뜻 맞는 회원들과 함께 APAA(Asi-an Patent Attorneys Association) 밴드를 설립했고, 이후 3년마다 치르는 정기총회에서 연주해왔다. 얼마 전에는 넥타이를 직접 디자인해서 귀한 손님이 오면 하나씩 선물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는 열정의 많은 부분을 사회봉사활동에 쓰고 있다.

    요즘 그는 서울남산라이온스클럽 회장으로 어려운 처지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무료 개안수술을 이끌고 있다. 이 클럽 회원수는 32명에 불과하지만, 대학병원 수준의 안과 수술 기자재를 갖추고 45년간 3만2756명의 환자를 진료했고, 3744명을 수술했다. 백내장 수술 뒤 인공수정체를 넣어주기 때문에 안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어려운 수술이다.

    “비용을 아끼려면 환자들을 서울로 불러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양쪽 눈이 다 보이지 않는 노인을 서울로 데리고 올 재간이 없습니다. 또 영양실조에 걸린 이들은 영양 보충이 수술보다 먼저 이뤄져야 합니다. 또 안과병원에서 자기들 손님 뺏어간다고 항의하기도 하고, 자기 동의 없이 수술했다고 항의하는 자식들도 있고….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명감이 없으면 하기가 어렵습니다.”

    김 회장은 또 국제라이온스협회 354복합지구 의장으로 있던 2000년 북한에 지하2층 지상 4층짜리 평양라이온스안과병원 설립 캠페인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 병원은 2002년 11월22일에 착공돼 2005년 6월 18일 완공됐다.

    “민간 차원에서 북한 돕기를 할 때 그곳 사람들의 가슴에 닿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안과병원 설립을 생각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울 때는 장기적으로 보면 음식보다는 정신적 양식이나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양식보다는 병원 건립으로 뜻을 모았습니다. 라이온스클럽 국제본부의 경영방침에 ‘시각장애인 없는 사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헬렌 켈러 여사가 살아 있을 당시 임원들을 설득한 뒤로 시각장애인 돕는 사업이 전통이 되었습니다.”

    ▼ 북한 돕기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처음에 480만달러 정도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650만달러가 소요됐습니다. 라이온스클럽 회원들이 낸 기부금을 바탕으로 하고, 국제본부와 일반회원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원래 공산주의는 로터리나 라이온스클럽 등 봉사정신과 잘 맞지 않습니다. 모두가 평등하므로 자기 임무만 완수하면 남을 돌아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의식의 차이가 어려움의 한 요인이었습니다. 또 북측이 병원 이름에서 라이온스 글자를 빼자고 해서 공사가 중단된 적도 있습니다. 사실 다 밝힐 수는 없지만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결과는 좋았고요.”

    특허법원 설립의 숨은 공로자

    ▼ 병원 설립에 관한 일이 밖으로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듯합니다.

    “남한에서 크게 알려지면 북측에선 그것을 오히려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당시 전국 회원이 6만명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들에게 설명하고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 사실 좀 어려웠습니다.”

    ▼ 남을 돕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 봉사활동에 몸담게 됐습니까.

    “제가 일곱 살 때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미국 케어원조재단이 보내준 밀가루를 먹고 자랐어요. 어른이 돼서 그 재단을 후원한 이들이 미국의 라이온스클럽 회원들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도 클럽 회원이 되어 제 수입의 일부를 기증해서 남을 돕는 일에 나서자고 생각했습니다.”

    ▼ 남을 돕는 일은 즐겁습니까?

    “즐겁다기보다 살아가면서 내 죄를 스스로 조금 덜어내는 기분이 듭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남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잖아요. 예컨대 조그만 돌멩이를 장난 삼아 풀숲으로 던졌는데, 마침 그곳에 있던 개구리가 맞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봉사는 상대적으로 자기보다 조금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입니다. 그래서 갑부가 몇백억원의 기부금을 내는 것보다 평범한 샐러리맨이 자기 월급 가운데 1000원씩이라도 남을 위해 내놓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김 회장은 긍정적인 사람이다. 자신의 이익으로 직접 돌아오는 것이 아닌 일들에 많은 시간과 돈을 쏟아 부었고,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들이 상당히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2008년 3월2일 개원한 특허법원 설립의 숨은 공로자다. 고등법원급인 이 법원을 설립하자는 캠페인을 6년간 이끌었다. 기술관계 재판을 하는데 기술을 잘 모르는 판사가 재판하는 모순을 막자는 취지였다. 반대가 많았지만 그는 뜻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그는 또 변리사들의 사법연수원 위탁교육을 성사시킨 이로도 변리사업계에선 잘 알려져 있다. 변리사 시험에 민사소송법을 필수과목으로 넣어 법률의 기초를 닦을 수 있도록 해 변리사의 경쟁력을 높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일을 벌여서 제가 개인적으로 얻은 게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손대는 것마다 뭐든 성공시킨다는 신뢰감을 남에게 줄 수 있었지요. 그게 가장 큰 소득입니다. 그래서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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