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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의 특별함 ②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

미노타우루스의 심장, 올빼미의 눈으로 신화가 된 남자

  • 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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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

모딜리아니(맨 왼쪽), 앙드레 살몽(맨 오른쪽)과 함께 한 피카소.

석유를 마시고 불을 뿜는 광대

답은 명백하다. 별빛을 가리는 태양처럼 피카소라는 인물 자체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의 압도적인 천재성은 그밖에 모든 것, 심지어 그의 작품까지 빛바래게 만드는 찬란한 태양이었다. 미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조차 피카소의 다부진 몸매와 동물적 감각으로 빛나는 눈동자, 캔버스 앞에서의 신들린 몸놀림 등을 보면 과연 천재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피카소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하나의 ‘현상’이었다.

일찍이 피카소는 자기 자신에 대해 “나는 아홉 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데생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닌 사실이다. 화가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화풍을 얻기 위한 고독한 수련기를 거치게 마련이다. 그러나 피카소에게는 이 같은 습작 시기가 없다. 그 자신의 말처럼 아홉 살에 이미 대가의 솜씨로 그림을 그렸다. 열네 살에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 입학할 때는 한 달 동안 그려야 하는 입학시험 과제물을 하루에 다 해치워버렸다.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에서도, 그리고 2년 후 입학한 마드리드 왕립 아카데미 미술학부에서도 피카소가 배울 것은 거의 없었다. 특히 그의 데생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미술교사이던 아버지 호세 피카소는 아들의 데생 솜씨를 보고 경악한 나머지 더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천재에게 “당신은 어떻게 천재가 되었나요?” 하고 묻는 것은 어리석다. 그것은 마치 미인에게 “당신은 어떻게 미인이 되었나요?”하고 묻는 것만큼이나 어이없는 일이다.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하는 법이 거의 없었지만, 어떻게 그처럼 많은 그림을 그렇게 빨리 그릴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나는 화폭에 무엇을 옮길지 사전에 모르고, 심지어 어떤 색을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작업하는 동안 내가 무엇을 그리는지 모른다. 그림을 시작할 때마다 나는 자신을 공중에 던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언제 땅에 내려설지도 전혀 모른다.”

그는 한 번에 서너 장의 그림을 펼쳐놓고 동시에 작업했다. 여러 캔버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밤 11시까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11시가 넘어서야 저녁을 먹기 위해서 붓을 놓는 그를 보고 ‘피카소의 여인’ 중 하나였던 프랑수아즈 질로가 피곤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피카소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 몸은 바깥에 가 있어.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신발을 밖에 벗어두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 피곤할 수가 없지”라고 대답했다. 스무 살의 피카소를 본 화가 브라크는 그가 마치 ‘불을 뿜기 위해 석유를 들이마시는 광대처럼’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는데, 이 정열적인 기질은 아흔 살이 넘도록 사그라지지 않았다.



피카소를 둘러싼 사람들

피카소가 태어난 곳은 스페인이지만, 화가로 일가를 이룬 곳은 프랑스다. 그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바르셀로나를 떠나 파리로 건너왔다. 파리의 예술가들은 오래지 않아 이 스페인 젊은이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다. 아폴리네르, 로랑생, 모딜리아니, 앙드레 살몽, 브라크 같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자석에 이끌리듯 몽마르트르에 모였고 이들은 ‘세탁선(Bateau-Lavoir)’이라 불린 피카소의 아틀리에에서 함께 지냈다. 이 아틀리에 2층에 있던 피카소의 방은 그림과 물감, 세간들이 엉망으로 쌓여 있어 더는 지저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청년 피카소의 ‘청색 시대’가 지나가고, ‘아비뇽의 여인들’(1907)이라는 대작과 함께 입체파 화가 피카소가 탄생한다. 살롱전은 물론 이 낯선 화가를 외면했지만, 1909년에 열린 화상(畵商) 볼라르의 전시회에서 피카소의 작품이 평론가들과 화랑의 주목을 받았다. 러시아, 미국, 독일의 화랑들이 앞 다투어 그의 그림을 사들였다.

몽마르트르 예술가 그룹에서 피카소처럼 쉽게 성공을 움켜쥔 이는 없었다. ‘세탁선’과 몽마르트르의 카페 ‘라팽 아질’에 모이던 치들 중 모딜리아니는 가난 속에서 요절했고, 아폴리네르는 스페인 독감으로 급사했으며, 로랑생은 독일 남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프랑스에서 추방당했고, 막스 자코브는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가 죽었다. 몽마르트르의 끔찍한 가난을 온몸으로 버텼던 이들 중 피카소만이 살아남았다.

피카소의 그림이 특별했던 것은 그가 형태나 대칭을 고의로 무시한, 즉 입체파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피카소의 그림에는 아프리카의 원시예술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에너지가 넘쳤다. 사조나 양식을 따지기 이전에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섹슈얼한 매력이 그림 속에 있었던 것이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새까만 눈, 딱 벌어진 어깨를 가진 스페인 남자의 모습도 대중의 열광을 얻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독창적이고 과감한 그림에 화가의 이국적인 이미지가 합쳐지자 파리 미술계는 온통 피카소에게 매혹되고 말았다. 스무 살에 무일푼으로 파리에 온 피카소는 서른이 되었을 때 파리 최고급 주택가에서 하녀와 요리사, 운전기사를 두고 생활했다.

그리고 이 천재 화가 옆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때로 그의 모델이자 연인이었고, 때로 그의 아이를 낳은 아내였다. 여자는 늘 바뀌었다. 피카소는 평생 일곱 명의 여자와 동거했고, 그중 두 명과 결혼했다. 물론 드러나지 않은 여자가 무수히 많았다. 피카소가 그린 수많은 그림을 보면 절대 다수가 여자 또는 화가와 모델을 그린 것이다. 노골적으로 에로틱한 그림, 춘화를 연상시키는 판화도 적지 않다. 여자, 황소, 미노타우루스, 모델, 화가, 투우, 새…. 피카소가 평생 그린 그림의 주제는 이런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여자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반면, 남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피카소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남자는 대부분 화가, 즉 피카소 자신이다.

아내와 여자?

몽마르트르의 세탁선 시절, 석유를 살 돈이 없어 등잔 대신 왼손에 촛불을 들고 오른손으로 밤새 그림을 그리던 때에 피카소는 한 여자를 만났다. 페르낭드 올리비에라는 이 아름다운 여성은 세탁선 건물로 비를 피해 뛰어들었다가 마침 복도에 서 있던 피카소, 검은 눈이 매혹적인 남자에게 이끌렸다. 페르낭드는 피카소의 첫인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작은 키에 가무잡잡했으며 몸집도 작았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의 눈은 깊고 어두웠으며 뭔가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듯한 눈이었다.” 두 사람은 1905년부터 1912년까지 동거했다. 쓰레기 더미 같은 화실에서 피카소는 미친 듯이 페르낭드를 사랑하다가, 페르낭드를 모델 삼아 그림을 그렸다. 화실에 누군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 페르낭드는 “잠깐만요, 옷을 입을 때까지 좀 기다려주세요!”하고 외치곤 했다. 이 기간에 피카소는 ‘아비뇽의 여인들’을 그리고 무명 화가에서 사교계의 총아로 발돋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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