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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의 특별함 ⑦

빌 클린턴

미국인들이 너무도 사랑하고, 또 미워했던 한 남자

  • 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빌 클린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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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지 않은 미국인이 섹스 스캔들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이 바람둥이 대통령에게 넌더리를 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클린턴이 바람둥이인 동시에 아주 유능한 대통령이자 매력적인 남자라는 것이었다. TV 토크쇼에 출연해 색소폰을 연주하고 로데오 경기에 즉흥적으로 뛰어드는 클린턴 특유의 친화력은 인생의 고비마다 그를 승리로 이끌었다.
빌 클린턴

빌 클린턴
● 1946년 8월19일 아칸소 주 호프에서 출생
● 1963년 소년단원 자격으로 존 F 케네디 대통령 만남
● 1964년 조지타운대 외교학부 입학
● 1968년 로즈 장학생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 철학·정치·경제 통합과정 전공
● 1971년 예일대 로스쿨 진학
● 1975년 힐러리 로댐과 결혼, 1978년까지 아칸소 로스쿨 교수로 재직
● 1978년 아칸소 주지사 당선
● 1980년 외동딸 첼시 출생. 아칸소 주지사 재선 실패
● 1982년 아칸소 주지사 재출마 당선. 이후 1992년까지 주지사로 재임
● 199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 제42대 미국 대통령 당선(지지율 43%)
● 1996년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재선(지지율 49%)
● 1998년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해 대통령 탄핵동의안이 하원 통과, 상원에서 부결됨
● 2000년 힐러리 클린턴 뉴욕주 상원의원에 출마, 당선
● 2001년 대통령 퇴임
● 2009년 전 미국 대통령으로는 두 번째로 방북, 김정일 면담

8월4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전격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해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클린턴은 회동 하루 뒤인 8월5일, 북한에 5개월째 억류되어 있던 커런트 TV의 두 여기자, 로라 링과 유나 리를 데리고 미국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CNN은 캘리포니아 버뱅크 공항에 도착한 두 여기자가 가족과 눈물 흘리며 포옹하는 감격적인 장면,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어 클린턴 전 대통령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장면을 생중계했다. 실로 번개같이 이루어진 ‘미국발 깜짝 쇼’였다.

그러나 세계를 감탄시킨 이 깜짝 쇼는 클린턴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의 방북은 9년 전부터 계획된 숙원사업이었다. 2000년 말, 두 번째 임기 막바지에 이른 클린턴은 미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우선순위에서 중동 평화협상에 밀려 실현되지 못했다. 북한을 방문하지 못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웠던 클린턴은 자신의 후임자인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선자에게 “지금 북한에 가면 북한과 미사일 개발 금지 협정을 맺을 수 있다”고 말했으나 부시 당선자는 대답을 피했다. 그리고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해빙 무드였던 북미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아무튼 모든 미국인에게 ‘너무도 특별한 한 남자’였던 빌 클린턴(Bill Clinton) 전 대통령은 이번의 ‘여기자 구출 작전’으로 다시 한 번 특별한 이미지로 전 미국인에게 각인되었다. 사실 클린턴은 1992년 대통령선거전 때부터 늘 특별한 남자였다. 미국 역사상 세 번째로 젊은 대통령(클린턴은 1992년 만 46세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1946년생으로 최초의 베이비붐 세대 대통령, 8년의 재임기간 중 미국 경제를 지속적 호황으로 끌어올린 대통령, 민주당 출신으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다음으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 등등.

1992년 미국 대선후보로 나설 당시 빌 클린턴은 완전한 무명인사였다. 그러나 12년에 걸친 아칸소 주지사 경력이 전부인 클린턴은 선거에서 당시 대통령이던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를 꺾는 대이변을 연출했다. 버스를 타고 미국 전역을 도는 신선한 방식의 선거유세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슬로건으로 미국인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은 점, 그리고 젊고 잘생겼으며 절로 마음을 쏠리게끔 하는 매력적인 연설솜씨 등이 승리의 원인이었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그의 행보는 대체로 순탄했다. 선거 공약대로 미국의 경제를 최대치의 호황으로 끌어올렸고 교육개혁에서도 적잖은 성과를 거두었다. 또 이스라엘과 중동 간 평화협상을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고 1998년 체결된 북아일랜드 평화협정(‘굿 프라이데이’ 협정)에 막후 해결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2000년 클린턴이 대통령직을 떠날 당시 미국의 재정 흑자 규모는 5590억달러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이러한 성과 때문에 미국인의 66%는 클린턴이 대통령직에서 퇴임하는 순간까지 그를 지지했다. 클린턴의 뒤를 이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8년의 임기를 아프간, 이라크 전쟁과 전세계로 퍼져나간 미국발 경제위기로 마감한 것과 비교하면 클린턴의 유능함은 더욱 두드러진다.

정책적으로 성공하고, 도덕적으로 실패한 대통령

빌 클린턴

8월4일,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한 클린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동하고 두 명의 여기자를 석방시키는 ‘깜짝 드라마’를 연출했다.

그럼에도 적잖은 수의 미국인은 그를 맹렬하게 ‘미워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미국인은 그를 정말로 싫어한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미워했다. 그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다. 클린턴은 임기 내내 섹스 스캔들을 끊임없이 일으켰다. 대통령선거 당시 불거졌던 제니퍼 플라워스와의 12년에 걸친 외도뿐만 아니라 폴라 존스와의 성희롱 소송, 결정적으로 집권 2기에 터진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 때문에 클린턴은 탄핵으로 대통령직을 상실할 위기에 몰렸다. 하원에서는 과반수 찬성으로 탄핵 동의안이 통과되었지만, 상원에서 부결됨으로써 그는 대통령직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직은 지켰다 해도 400쪽에 달하는 ‘지퍼게이트’ 보고서와 낱낱이 까발려진 사생활 등으로 그의 명예는 바닥으로 떨어진 후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탄핵 사태까지 간 이유가 그의 업무상 과실이나 실책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클린턴의 가장 개인적 문제, 즉 외도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표면적인 이유는 위증죄와 사법방해 혐의였지만). 미국인은 그를 뛰어난 대통령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몇 년째 폭로에 폭로가 거듭되고 도청, 성희롱, 심지어 그의 정액이 묻은 드레스까지 등장하는 상황에 넌더리를 냈다. 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앨 고어가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에게 패한 것은 고어 개인이나 민주당의 문제가 아니라 클린턴에 대한 유권자의 혐오감이 빚어낸 결과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

빌 클린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이 같은 스캔들을 앞에 두고 끊임없이 말 바꾸기와 거짓말을 시도한 클린턴의 유들유들한 태도였다. 예를 들면 TV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가 없었나?”라는 질문에 “르윈스키와 관계는 없다(There is no relationship with Rewinsky)”라고 현재형으로 대답하는 식이었다. 즉, ‘과거에는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지만 현재는 없다’는 의미의 대답이었고, 이런 방식으로 그는 위증죄를 교묘하게 피해갔다. 보수적 경향의 ‘워싱턴 포스트’는 클린턴을 가리켜 ‘태양 아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혹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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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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