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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과 열정의 워커홀릭 그룹 세브코리아 팽경인 사장

“‘최초’라는 수식어보다 업무 성과로 평가받겠다”

  • 글·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사진·조영철 기자

진심과 열정의 워커홀릭 그룹 세브코리아 팽경인 사장

진심과 열정의 워커홀릭 그룹 세브코리아 팽경인  사장
‘테팔’ 브랜드로 유명한 프랑스계 가정용품 전문회사 ‘그룹 세브’가 한국 법인 ‘그룹 세브코리아’ 사장으로 한국인 여성을 임명했다. 9월 초 취임한 팽경인(46)씨가 그 주인공이다. 국내 법인 설립 후 한국인이 대표를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 팽 사장은 그룹 세브 내에서 비(非)프랑스권 출신으로는 처음 사장에 오른 여성이기도 하다. 10월 초 서울 종로구 서린동 그룹 세브코리아에서 만난 그는 “좋은 선례를 남겨야 한다는 책임감이 크다. 본국 출신 남성이 CEO를 맡았을 때와는 다른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며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팽 사장의 임명은 그룹 내에서도 화제를 모을 만큼 파격적이었다. 현지인에게 대표를 맡기면 재무 담당자는 본사에서 파견하는 것이 통례인데, 이번에는 본국인 스태프를 전원 철수시킨 것. 세브코리아와 팽 사장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의 표현이다. 팽 사장은 “한국 지사가 그동안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줄곧 좋은 성과를 낸 점을 높이 평가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세브코리아는 1997년 말, 설립된 지 한 달 만에 외환위기를 맞았다. 사업 철수를 고려할 만큼 상황이 나빴다.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흑자를 내기 시작했고, 이내 그룹 세브 계열사 가운데 최고의 실적 증가세를 보이는 우수 지사가 됐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성공이다.

진심과 열정의 워커홀릭 그룹 세브코리아 팽경인  사장
“그때 본사 차원에서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나 원인을 분석했다고 해요. 그러고는 내린 결론이‘우먼 파워’였지요. ‘회사가 위기에 처하면 남자들은 대부분 자기 밥그릇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하지만 여자들은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여성의 힘이 회사를 살렸다’고 본 거예요. 당시 세브코리아의 요직을 여성들이 주로 맡고 있었거든요. 그때부터 본사에서 한국인 직원, 특히 여성 직원들의 힘에 주목한 것 같아요.”

팽 사장은 당시 주방용품 담당 마케팅 매니저로 ‘세브코리아 성공 신화’의 선두에 서 있었다. 세 개에 9900원 하는 프라이팬이 주류이던 시절, 상대적으로 고가인 테팔 제품을 시장에 안착시킨 것. ‘눌어붙지 않고 오래가는 프라이팬’이라는 콘셉트가 주효했다. 국물 요리가 많은 한국에서 ‘테팔’이 성공하려면 바닥이 깊은 ‘한국형 제품’을 출시해야 한다고 본사를 설득한 것도 팽 사장이었다. 그는 프랑스 본사를 찾아가 현지 임원들 앞에서 직접 불고기를 만들어 보이며 신제품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이렇게 개발된 ‘한국형 불고기 그릴’은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고 전세계적으로도 판매되는 히트 상품이 됐다.

전기톱을 든 여인

“마케팅 담당자라면 이미 생산된 제품을 판매할 뿐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개발하도록 이끄는 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소비자의 일상생활 속에서 충족되지 않는 부분을 찾아낸 뒤, 우리 회사가 갖고 있는 글로벌 리빙 테크닉을 통해 실현시켜주면 자연히 비즈니스적인 성공도 따라올 거라고 믿었지요.”

팽 사장이 한때 사내에서 ‘전기톱을 든 여인’으로 통했던 것은 이런 사명감 때문이다. 그는 프라이팬이든 압력밥솥이든 전기그릴이든 신제품이 나오면 무조건 톱을 들었다. 산산조각 분해한 뒤 재조립하며 제품의 특징과 장·단점, 개선 사항 등을 꼼꼼히 점검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그가 마케팅 전문가로 성장한 비결이다.

진심과 열정의 워커홀릭 그룹 세브코리아 팽경인  사장

그룹 세브코리아 팽경인 사장은 신제품이 나오면 산산이 분해한 뒤 특징과 장·단점, 개선 사항 등을 꼼꼼히 점검한다.

팽 사장은 조사전문기관 AC닐슨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1989년‘코렐’ 등을 판매하는 미국계 주방용품 회사 코닝코리아로 이직해 처음 마케팅 업무를 맡았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소신은 이곳에서 싹텄다. 양식기 위주로 짜인 제품 구성이 한국 소비자에게 맞지 않는 것 같아 본사에 밥그릇·국그릇으로 쓸 수 있는 오목한 제품 개발을 요청했는데, 이러한 ‘한국형 식기’가 출시되자마자 시장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것. 코닝코리아의 매출은 10배 이상 늘었고, 세계 지사 중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돌아보면 그때가 제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회사에서 대리였던 제게 아시아 전체를 담당하는 마케팅 매니저 자리를 제안했거든요. 1년의 절반은 해외에서 지내야 하는 일이었지요.”

이미 결혼하고 아이도 있던 그가 망설이자 남편이 나섰다. ‘아내가 가족의 굴레 때문에 주저앉는 걸 원치 않는다’며 시집 어른들을 설득한 것. 이때부터 그는 마케팅 전문가로 본격적으로 성장했고, 자는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낄 만큼 치열하게 일했다. 동 틀 무렵 퇴근했다가 잠시 눈만 붙인 채 다시 출근한 날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아예 사무실에서 꼬박 밤을 새우기도 했다. 1997년 세브코리아에 창립 멤버로 합류한 뒤에도 이런 업무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다. 제품 개발, 홍보, 영업 등에까지 폭넓게 관여했다. 마케팅팀 차장으로 입사한 뒤 마케팅팀 상무, 영업팀 전무 등을 거쳐 마침내 대표가 될 때까지, 그는 그렇게 쉼 없이 달려왔다.

“사장이 된 뒤 직원들에게 요구 사항을 받았는데, 가장 많이 나온 얘기가 ‘야근을 줄여라, 화장실을 제때 가라’였어요. 지난 12년 동안 제가 일하는 모습을 본 후배들이 ‘사장이 돼서도 그러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나선 것이죠. 저도 사장이 지나치게 일하는 건 직원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조금씩이나마 생활 패턴을 고쳐가려고 적어도 일주일에 이틀, 수요일 금요일은 오후 8시 전에 회사에서 나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팽 사장은 “목표를 세우면 꼭 이루려고 노력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머지않아 ‘워커홀릭’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회사에서 일찍 나가는 날에는 가족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쓰려 한다. 지난 20여 년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삶을 살아온 그에게 가장 든든한 버팀목은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팽 사장의 책상 위에는 지난 어버이날 두 아이가 만들어준 종이 카네이션이 놓여 있었다. 고교 3학년생인 큰딸은 그가 사장에 취임했을 때 “그렇게 열심히 살더니 사장이 된 엄마가 자랑스럽다”는 편지를 보내 그를 감동시켰다고 한다.

“최초의 한국인 CEO, 최초의 여성 CEO라는 타이틀 때문에 저 개인에게 너무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쏠리는 것 같아요. 가끔은 모두 같이 차린 밥상을 저 혼자 먹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러워지지요. 제가 이 자리에 선 건 그룹 세브코리아 전 직원이 함께 이룬 성취입니다. 우리 가족의 이해와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고요. 앞으로 좋은 성과를 내도 이들 모두와 함께 한 것으로 평가받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최초’라는 타이틀을 넘어설 수 있는 좋은 ‘성과’를 내고 싶다고 한다. 그의 목표는 그동안 국내에 주방용품 회사로만 인식돼온 그룹 세브를 가전제품까지 망라하는 명실상부한 가정용품의 대명사로 키우는 것. 이를 위해 판매 품목을 다양화하고, 2년 전 출시한 헤어케어 브랜드 ‘로벤타’를 ‘테팔’ 못지않은 대표 브랜드로 육성할 계획이다. 새로운 일을 맡으면 늘 가슴이 뛴다는 그의 도전은 이제 다시 시작이다.

신동아 2009년 11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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