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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이 사건’주치의 신의진

  • 글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사진 / 지호영 기자

‘나영이 사건’주치의 신의진

‘나영이 사건’주치의 신의진
“나영이 얘기를 하다보면 늘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어져요. 문제를 뻔히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무력한 어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습니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신의진(46) 박사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나영이’는 대한민국 모든 어른을 부끄럽게 하는 이름이다. 2008년 12월, 여덟 살 소녀는 큰길에서 불과 10여 m 떨어진 건물 화장실에 끌려들어가 참혹한 성폭행을 당했다. 사고 순간에도, 이후에도 나영이를 지켜주는 손길은 전혀 없었다. 재판 과정에서 5차례나 피해자 진술을 하며 끔찍한 상황을 거듭 떠올려야 했고, 가난한 환경 탓에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했다. 신 박사는 2009년 2월 나영이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병원 진료실에 들어오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제 몸의 반 크기는 될 법한 성인용 대변백을 옆구리에 차고, 겨울 외투로 어떻게든 그걸 가리려고 애쓰며 주춤주춤 다가오더군요. 가까이서 보니 뺨에는 범인에게 물어뜯긴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어요.”

마음에 생긴 생채기는 더 컸다. 말을 하지도, 밥을 먹지도 않으려 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세상을 외면하던 그 아이가 요새는 “선생님 같은 의사가 돼 마음 아픈 친구들을 돕고 싶다”고 말할 만큼 밝아졌다. 올 겨울방학에는 대변 주머니를 제거하는 수술도 받는다. 신 박사가 ‘나영이 사건 대책위원장’이라고 불릴 만큼 이 사건에 매달리며 동분서주한 덕분이다.

이런 변화를 가져온 것만으로도 그는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지 않았을까. 그러나 신 박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영이 개인의 상처는 조금 줄었을지 몰라도 제2, 제3의 나영이가 나타날지 모르는 환경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어린이 성폭력 대응 예산 도리어 줄어

“사건 초기의 격앙된 분위기가 가라앉고 나니 모든 게 예전과 같아졌어요. 심지어 여성부는 어린이 성폭력 피해자 지원 예산을 대폭 줄이기까지 했습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은 날은 마음이 아파서 잠이 안 왔어요.”

성폭력 피해 어린이와 부모에게 무료 상담, 법률·의료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해바라기아동센터 운영 예산 삭감에 대한 얘기였다. 2009년 68억2700만원이던 이 센터 관련 예산은 2010년 52억4500만원으로 16억원 가까이 줄었다. 신 박사는 나영이처럼 이 센터를 통해 자신을 찾아오던 아이들이 앞으로는 도움을 받기가 더 어려워지는 게 아닌지 걱정이라고 했다.

어린이 성폭력 피해자에게 같은 진술을 반복하게 만들어 2차 피해를 주는 수사 관행에도 변화가 없다. 신 박사에 따르면 나영이는 눈에 띄게 똑똑한 아이다. 사건 현장에서 기절했다가 깨어난 뒤 스스로 신고를 했고, 범인 얼굴도 정확히 지목했다. 그런데도 같은 얘기를 5번이나 되풀이하며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

“보통 아이들은 나영이와 전혀 다릅니다. 큰 충격을 받은 탓에 피해 당시 상황을 통째로 잊는 아이가 많고, 질문하는 사람의 태도나 주위 분위기에 따라 진술이 오락가락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것을 지적하고 추궁하면 아예 입을 닫아버리지요.”

그는 1998년 세브란스병원 부임 첫해에 만난 다섯 살배기 성폭력 피해자를 예로 들었다. 유치원 원장의 남편에게 피해를 당한 그 아이는 처음에 “아저씨가 내 손을 묶었다”고 진술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자신이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걸 강조하려는 마음에 사실과 다른 기억이 생긴 것이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손을 묶었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종종 봤어요. 자신의 기억에서는 그게 사실처럼 여겨지는 거지요. 그래서 어린이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을 받을 때는 아동심리를 잘 아는 전문가가 개입해야 합니다.”

신 박사가 요구하는 것은 경찰, 검사, 판사가 한자리에 모여 아동심리전문가의 입회 아래 진술을 받은 뒤 재판 증거로 사용하는 시스템을 만들라는 것.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당연하게 여겨지는 제도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 일에 매달리겠다고 했다.

“성폭력 피해 어린이들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스피치리스 그룹입니다. 누가 나서서 대신 소리 쳐주지 않으면 아프고 힘들어도 말을 못 해요. 나영이를 보면서 제가 그 아이들의 대변자가 돼야겠다고 결심했지요. 또 다른 나영이를 만들지 않기 위해, 어른으로서 꼭 해야 할 일을 해나갈 겁니다.”

신동아 2010년 1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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