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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괴짜들 ⑮

홍콩 영화 촬영지 순례자 주성철

“주윤발과 함께 하늘 보고, 유덕화와 같이 달리고, 장국영과 더불어 차 마시는 방법”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홍콩 영화 촬영지 순례자 주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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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소마’가 되고 싶던 어린 시절
  • ● 눈으로 손으로 발로 찾아낸 ‘그곳’
  • ● 길 위에 판타지가 있다
  • ● “바로 그 자리에 장국영이 앉곤 했지요”
  • ●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져도, 개같이 사느니 영웅처럼 죽겠다
홍콩 영화 촬영지 순례자 주성철
1987년, 소년은 열한 살이었다. 남자라면 모름지기 웃통 벗고 달려드는 이소룡이나 화려한 기예를 구사하는 성룡 같아야 하는 줄 알았다. 그때 그의 앞에 슈트를 입은 영웅이 나타났다. 지폐를 태워 담뱃불을 붙이고, 미소 머금은 입술로 성냥개비를 씹는 남자.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탄식하며 악당을 향해 쌍권총을 꺼내 드는 사나이. ‘영웅본색’의 ‘소마(주윤발)’였다. 긴 트렌치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거침없이 총알을 쏘아대는 그의 모습은 얼마나 근사했던가. “나는 신(神)이야.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신이니까”라고 말하던 그가 송자호(적룡)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 때는 얼마나 비통했던지. 동네 친구들과 지린내 풍기는 동시상영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날부터 소년은 더 이상 과거의 꼬마가 아니었다. “모든 것은 ‘영웅본색’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말하는 주성철(34)씨 얘기다.

“그 무렵 친구 일기장을 본 적이 있어요. ‘소마와 송자호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고 쓰여 있더군요. ‘멋지게 살고 싶다’는 얘기를 이보다 더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충격을 받았어요. ‘아, 이 말은 내가 먼저 했어야 했는데’ 선수를 빼앗긴 것 같아 분하기도 했죠.”

그 역시 미래를 생각할 때면 늘 소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영웅본색’ 이후 극장마다 내걸리기 시작한 홍콩 누아르(noir) 영화는 남자가 살아야 하는 삶의 모범 답안 같았다. 스토리 전체를 짓누르는 짙은 우울함과 죽음의 미학에 매혹됐다. 개봉 영화는 빠짐없이 보러 다니고, 영화잡지 ‘스크린’과 ‘로드쇼’도 사 모았다.

영화 순례자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홍콩 영화에 대한 그의 사랑은 여전하다. 한국에서 개봉하는 모든 홍콩 영화를 보는 그는 때로는 한국에 수입되지 않은 영화까지 챙겨 본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촬영지를 꼽아 시간 날 때마다 직접 찾아다닌다. 직장 생활 틈틈이 1박3일, 혹은 2박4일 일정으로 홍콩을 다녀온 게 이미 수십 번이다.

“정확히 몇 번인지는 모르겠어요. 시간과 돈이 될 때마다 훌쩍 다녀오는 거라 굳이 셀 생각을 안 했거든요.”

확실한 건 어딘가로 떠날 수 있을 때는 늘 홍콩을 찾았다는 점이다. 여행을 즐기지 않는 그는 지금껏 제주도에조차 간 적이 없다. 경주, 설악산도 수학여행으로 다녀온 게 전부다. 그의 촉수는 오직 홍콩, 그중에서도 자신이 본 영화 속 공간을 향해 뻗어 있다. 홍콩은 섬 전체가 거대한 영화 세트라는 말이 있을 만큼 영화 촬영지가 많은 곳. ‘화양연화’에 등장하는 골드핀치 레스토랑처럼 유명한 장소에는 늘 관광객이 붐빈다. 그 역시 그런 곳을 들르곤 한다. 하지만 더 좋아하는 건 아무도 모르는 영화 촬영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다.

‘도화선’에서 마지막 격투가 벌어진 그 폐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저렇게 독특한 자연경관이 정말 홍콩에 있단 말인가. 궁금증이 생기면 그는 일단 눈을 크게 뜬다. 영화를 돌려보며 도로 표지판이나 간판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적어놓는다. 영화가 끝난 뒤 올라가는 장소 협찬 목록도 빠짐없이 메모한다. 그 뒤 홍콩에서 구입해 온 정밀지도 색인과 대조해 주소와 간판이 일치하는 지점을 찾는다. 아무래도 안 보일 때는 무작정 홍콩으로 떠나 택시를 탄다. 영화 속 거리 이름을 한자로 적어 택시기사에게 내민 뒤 내리라는 곳에서 내리는 거다. 그때부터는 눈에 익은 장소가 나올 때까지 무작정 걷는다.

2000년 처음 홍콩 땅에 발을 들인 뒤부터 지난 10년간, 그는 대략 이렇게 홍콩 거리를 밟아왔다. ‘도화선’의 그 폐가를 찾아 인적 없는 습지를 헤매다가 늪에 빠져 ‘이대로 죽는구나’ 생각한 적이 있고, 째깍째깍 올라가는 택시미터기 소리에 숨이 막혀 ‘이제 그만둘까’ 고민한 적도 있다. 그래도 그를 계속 떠나게 하는 건 어렵사리 영화 속 공간을 발견했을 때 찾아오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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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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