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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괴짜들 16

크리스천 역술가 이철용 前 국회의원

“타고나는 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못 바꾸는 건 세상에 없다”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크리스천 역술가 이철용 前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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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직 국회의원이 역술원을 냈다. 게다가 이 사람, 저명한 장로이기도 하다.
  • 전직 국회의원에 교회 장로가 ‘점집’이라니!
  • “세상에 알려져도 괜찮으세요?” 조심스레 던진 질문에 껄껄 웃는다.
  • “문제될 게 뭐 있습니까. 동방박사도 별자리를 보고 예수 탄생을 알았는데요.”
크리스천 역술가 이철용 前 국회의원
1989년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살인마!”라고 외친 의원이 있다. 이철용이다. 1991년 낙동강 페놀 방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비커에 페놀을 붓고 환경처 장관에게 “당신이 먹어보라!”고 호통 친 의원이 있다. 역시 이철용이다.

13대 국회 시절 이철용(62)의 별명은 ‘소란꾼’이었다. 도무지 조용할 때가 없었다. 돌아보면 등원 첫날부터 ‘소란’을 떨었다. 휠체어를 타고 국회의사당 계단 앞에 나타나 ‘올라갈 수 없다’고 아우성쳤다. 경위들이 달려와 ‘모시겠다’는 걸 다 뿌리쳤다.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라.’ 이틀 만에 국회의원 130여 명이 서명했고, 의사당에 경사로가 생겼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제가 국회에 들어간 이유가 뭐겠어요. 보통사람이 하고 싶은 말 대신 해주라는 거잖아요. 왜 이렇게 튀냐, 가만히 좀 있어라 하는 얘기는 안 들었어요. 그러다가 찍혀서 다음부터 공천도 못 받았지만….”

‘의원 나리’일 때만 당당하게 산 건 아니다. 그전에도, 후에도 남 눈치 본 적이 없다. 눈치 보기 시작하면 주눅 들게 너무 많아서, 아예 멋대로 사는 법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폐병쟁이’였다. 그가 태어난 지 여섯 달 만에 세상을 떴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 남겨준 건 결핵균뿐이었다. 돌도 되기 전 앓은 결핵성 관절염으로 그는 평생 한 번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지체장애 3급 장애인 ‘절름발이’ 아들을 키우느라 ‘청상과부’ 어머니는 행상을 했다. 그 사이 아이는 거칠게 세상을 배웠다.

절름발이 인생

“우리 어릴 때는 장애인을 놀리는 일이 많았어요. 내가 지나가면 다들 ‘저기 절름발이 간다’ ‘찐따 간다’ 그랬지요. 한번은 종로에 있는 한의원집 아들이 내 뒤를 따라오면서 막 흉내를 내는 겁니다. 하도 서러워서 집에 들어가 엉엉 울었어요.”

어머니는 단숨에 길을 나섰다. 한의원집에 쫓아가 대문을 다 부숴버렸다. ‘이제부터 누가 너를 놀리면 이렇게 부숴버려라. 바보처럼 울지 말고.’ 이 얘기와 함께 그의 유년기는 끝이 났다. 작고 기울어진 몸으로 살아남으려면 남이 각목 들 때 칼을 들어야 한다는 걸 배워버린 것이다. 눈 부릅뜨고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사주에 관심 가진 것도 그 무렵부터였을 거예요.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나. 우리 어머니는 왜 서른 살에 과부가 됐을까. 그런 생각이 막연하게 들곤 했어요. 또 어머니가 과부니까 우리 집에 놀러오는 친구 중에 그런 분이 많았어요. 같이 계신 걸 보고 있으면 다들 뭔가 비슷했지요. 이 느낌이 뭘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

한번은 탄광촌 식당에 갔다가 어머니 친구들과 비슷한 분위기의 아주머니를 만났다. 무심코 ‘남편 몸조심 하셔야겠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6개월 전 갱도가 무너져 이미 세상을 뜬 상태였다. 그 기억은 오래갔다. 어쩌면 뒷골목 건달 생활을 하던 그가 빈민운동가 시절을 거쳐 국회의원의 삶을 누리다 역술인으로 자리 잡기까지, 멀리 돌아온 긴 세월의 첫머리에는 이날의 기억이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이 전 의원과 마주 앉은 곳은 서울 안국동에 있는 역술원 ‘통(通)’이었다. 이 공간을 만들기 전까지 그는 말 그대로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한국의 괴짜’로 소개하고 싶다”는 말에 그는 “앞날을 짐작할 수 없이 사는 게 괴짜라면 내가 바로 괴짜”라며 크게 웃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세상으로 나왔어요. 나만 잘살면 된다, 돈만 있으면 된다 생각했지요. 돈 벌기 위해 무슨 일이든 했습니다. 나만큼 악착같은 놈이 없으니 내가 가장 잘 벌었지요. 구두소(所)를 수십 개 갖게 되니 나를 따라다니는 애들이 많이 생기더군요. 얘들 공부라도 좀 시켜야겠다 싶어서 1972년에 조그맣게 야학을 만들었습니다.”

1974년 그 학교에 ‘은성학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좀 더 규모 있게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자연스레 새로운 삶에 발을 들이게 됐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 등 명문대 학생들이 선생으로 왔다. 빈민운동가 허병섭 목사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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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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