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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 명사의 버킷 리스트

심영섭 영화평론가 · 대구사이버대 교수

딸아이와 빈둥거리기 · 아줌마 야구단 창단

심영섭 영화평론가 · 대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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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 영화평론가 · 대구사이버대 교수

심영섭
●1966년 서울 출생
●서강대 생명공학과 졸업, 고려대 심리학과 석·박사
●한국 영상응용연구소 소장

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몹시 바쁘게 살았다. 사람들은 내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을 건넨다. “선생님 요즘 바쁘시죠?” 물론. 수련받느라고 바빴고, 평론가로 바빴고, 박사 학위 논문 쓴다고 바빴고, 교수 노릇 하느라 바빴다. 집안 살림하느라 바빴고, 두 번의 결혼, 두 명의 아이, 두 개의 직업 때문에 바빴다.

그런데 사진치료학회 참석차 핀란드에 갔을 때, 네덜란드에서 온 심리치료사 로라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영!(외국 친구들은 섭 발음이 안 돼 나를 영이라고 부른다) 왜 눈이 오는데 눈 오는 장면을 찍고 있니? 눈이 오면 나가 노는 거야. 빨리 놀아. 아니 놀자.” 아. 그때 부르르 몸속의 세 치 끝 명치가 떨려 옴을 손이 먼저 느꼈다. 그래. 참. 눈이 오면 노는 거였어.

나의 버킷 리스트의 으뜸은 우리 늦둥이 딸과 한 달만 아무 일도 안하고 ‘그냥 노는’ 거다. 둘이 빨간 띠를 머리에 두르고, 신촌 오리지널 떡볶이도 먹고, 집에서 파전도 부쳐 먹고, 놀이공원 관람차도 타고, 예쁜 핀도 고르고…. 주말마다 찔끔찔끔 하는 이 ‘노는 일’을 본격적으로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빈둥빈둥’ ‘놀멘놀멘’ 하는 게 백미라 는 점이다. 집에서 빈둥거리며 오이마사지 팩을 얼굴에 서로 붙여주고, 딸이 좋아하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도 ‘할미꽃이 피었습니다’와 ‘치자꽃이 피었습니다’로 변주하면서 서로 다른 모션 스톱으로 딸을 놀래주는 거다. 정말 이 일은 그냥 공상만 해도 마음속에 쌍무지개가 뜨는 행복감을 선사한다. 서로만 있다면 지구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놀이, 빈둥거리기가 아닐까.

물론 이 버킷 리스트는 참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나도 시간을 내기 어렵지만, 요즘 초등학생들이 여간 바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달이라도 휴가를 내고 우리 둘이 놀겠다고 하면, 남편과 아들이라는 복병이 우리를 가만둘 리가 없다. 이들을 피하려면 아예 지리산 정도의 심산유곡으로 튀는 수밖에. 그러면 남편은 자기만 안 데려간다고 삐칠 것이다.

사실 난 지갑이 늘 얇다. 일도 많이 하는데 왜 지갑이 얇으냐. 이 땅의 국민이 그러하듯 번 돈을 다 집 사는 데 썼기 때문이다. 근 10년간 집값을 갚았다. 빈손으로 시작해 오롯한 집 한 채, 지구 위의 방 한 칸을 살 때까지 사실 사연도 많았다. 아무튼 지갑이 지금보다 더 비만을 앓는다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나만의 호사는 이과수 폭포 여행을 떠나는 거다. 물론 이 버킷 리스트는 순전히 원조 가위손, 홍콩의 감독 왕가위 혹은 왕자웨이의 영화 ‘해피 투게더’ 때문이다.

‘쿠쿠루쿠 팔로마’ 음악이 흐르면, 이과수의 거대한 황색 포말이 화면을 메운다. 영화 속의 이과수 폭포는 저인망으로 훑어가는 멈추지 않는 시간의 느린 유영을 닮았다. 진공의 풍경에 곧 기화되어버리는 드라이아이스처럼, 폭포는 하늘의 눈물로 쏟아 부어 흰 포말로 사라진다. 그곳 이과수에 가고 싶어한다, 양조위와 장국영은. 이과수는 둘에게 세상의 끝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슬픔을 버리려고 오는 지구상 모든 이의 성소다.

삶을 살다보면 오열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때 눈물은 도시의 하수구로 흘러들어갈 뿐이다. 그 거대한 폭포 앞에서 점처럼 작고 또 작아지는 나란 존재와 마주 대하고 많은 것을 내다버리고 싶다. 어쩌면 악마의 목구멍 앞에서 아예 생을 마감하며 물거품으로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인어 공주 판타지의 변형이 드라마에만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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