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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소설가

더 깊은 산중에 오두막 짓고 내 그림자 지우리

정찬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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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소설가

정찬주
●1953년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샘터사 편집부장, 행원문학상·동국문학상
●소설 ‘니르바나의 미소’ ‘소설 무소유’ ‘산은 산 물은 물’ 등

마당가 연못에 사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잦아들었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이 쌀쌀한 꽃샘추위에 놀란 모양이다. 이른 새벽 연못에 낀 살얼음을 보니 시절인연을 기다리는 개구리알들이 걱정스럽다. 그러나 한낮의 햇볕에 살얼음은 금세 녹아버릴 것이고, 바람 끝에서는 이미 봄의 손길이 느껴진다.

매화나무의 꽃눈들도 또록또록 부풀어 올라 있다. 마당가에 설연화(雪蓮花)로 불리는 복수초는 낮 동안 꽃잎을 피웠다가 밤이 되면 오므라든다. 복수초는 내 산방에서 영상 10℃가 되면 어김없이 피어나므로 봄을 알리는 나의 기상예보관이다. 사람이 입을 다물면 자연이 입을 연다는 말이 있듯, 산중에 10여 년 살다보니 자연과 가까워졌고 알게 모르게 날마다 마주치는 온갖 나무와 풀, 무당벌레 같은 미물들에게도 고마워하면서 살고 있다.

아직도 서울에서 살고 있다면 무는 낮에 몸무게를 불리고 배추는 밤에 잎사귀를 키운다는 그들만의 비밀을 어찌 알겠는가. 땅콩이 땅속에 있는 콩이라 해서 ‘땅콩’이라고 불리는지 어찌 깨달았겠는가. 산새들이 나무들의 열매를 먹고 그 씨를 배설해 푸른 숲이 사라지지 않게 한다는 사실을 어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겠는가.

어제도 안성에서 세 분의 손님이 왔다가 갔다. 오후 한나절 동안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손님들이 내게 하는 질문 내용은 대부분 엇비슷하다.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왜 남도 산중으로 내려와 살고 있습니까?’이다. 수십 년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외롭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산중으로 들어와 살고 있으니 나만의 속사정을 알고 싶어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나는 자칭 타칭 인도 마니아다. 십수 년 전부터 여건이 허락할 때마다 시간을 내어 여러 번 다녀왔다. 내년에도 설을 쇠고 아소카대왕 루트를 답사하고 올 계획이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나는 턱없이 가벼운 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곤 했다. 인도인들의 전통문화나 사고방식 중에는 정말 금쪽같은 것이 많다. 귀족 계급인 브라만의 인생 중에 생의 후반부는 모든 짐을 놓아버리고 자연에 귀의해 사는 이른바 임간기(林間期)라는 전통이 있는데, 그런 삶의 방식은 내 화두가 되었다.

생의 후반부이니 무책임한 일도 아니다. 가장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사회에 봉사할 것 다하고 남은 생을 자연에 귀의해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의 허락을 받은 뒤, 두 아이가 청소년기를 벗어나 나름대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때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결행했다. 친구들과 상의했지만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대부분 글을 쓰기 위해 산중으로 들어간다고 지레짐작하고는 서울에서 가까운 양평이나 남양주로 가기를 권했다. 그러나 나는 서울이 지척인 곳은 사이비 낙향이라는 생각이 들어 남도 산중으로 내려와 묵은 밭에 집을 짓고 이불재(耳佛齋)라는 당호를 걸었다.

죽는 것도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미리 자연으로 돌아가는 연습이라고나 할까. 산중에 들어와 살고 보니 인도 브라만의 임간기는 노자의 식영(息影)을 떠올리게 했다. 식영을 글자대로 직역하자면 ‘그림자가 쉰다’이겠으나 더 정확한 풀이는 ‘그림자가 사라진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자연 즉 숲으로 들어가면 사람의 그림자는 저절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노자의 식영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은유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무위자연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손을 놓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노자를 전혀 모르는 말이 된다. 무위란 사람의 때를 묻히지 않는 꽃 피고 물 흐르는 것과 같은 자연을 뜻하기에 그렇다. 불가(佛家)의 본래마음, 자성(自性), 도(道) 같은 말도 도가의 무위와 동의어로 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육조 혜능대사의 후예들이 무위법을 깨닫는 것을 최상의 경지라고 여겼던 역사적 사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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