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호

‘승부사’ 최문순 강원지사

내 인생에 ‘다음’은 없다

  •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11-05-20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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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부사’ 최문순 강원지사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는 스산한 날씨였다. 강원도청 앞 사거리에 플래카드 두 개가 내걸려 있었다. 하나는 4월27일 치러진 도지사 선거 때 한나라당 후보로 나섰던 엄기영씨의 낙선인사였고, 다른 하나는 최문순 지사의 당선사례였다. 낙선인사 문구가 처연했다. ‘보내주신 사랑 감사드립니다.’

    강원도지사 공관은 도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아담한 단층 한옥이다. 우리가 먼저 도착해 기다렸다. 신임 도지사는 이곳에 거주하지 않고 춘천 시내 어머니 집에 있다고 했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먼 길 오셨습니다.”

    환한 표정의 최문순(55) 지사가 두 손으로 내 손을 꽉 잡고 흔들었다. 미안할 정도로 허리를 굽힌 채. 내가 기억하는 그는 사람을 만나면 늘 이렇게 ‘열정적으로’ 인사한다. 나는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인사했다. 진심이었다.

    그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그가 당선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4·27 재·보선 전날 공교롭게도 강릉에 출장 가 있었다. 그 지역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 했는데 그가 이길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성급하게 패인을 분석하기도 했다. 그가 지긴 졌다, 강릉에서는.



    최 지사는 양복에 줄무늬가 있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잘생겼다고 하기엔 부담스러운 ‘토속적’ 얼굴이다. 옆으로 길게 찢어진 새우눈은 웃을 때는 완전히 감겨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언뜻 그의 단점으로 생각되지만 이번 선거에서 드러났듯 실은 그의 경쟁력일지 모른다.

    “여길 개방하려는데 선거법 문제가 있어 쉽지 않다. 공관 개방이 일종의 기부행위가 되나보다. 유권해석을 구하고 있다.”

    최 지사는 당선 직후 관사를 일반에 개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는 걸 보니 말이 앞선 것 같다. 그는 아직도 지사 취임한 게 실감나지 않는다고 했다. 지사와 국회의원은 많이 다른 것 같다면서.

    “국회의원은 정치인이지만, 지사는 지역의 최고 어른으로 덜 정치적인 자리 같다. 전환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엄 선배와 아직 통화 못해”

    엄기영씨의 플래카드를 언급하며 통화했는지 물었다. 아직 안 했다고 한다.

    “타이밍을 보고 있다. 저분도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내가 전화를 하면 혹시 거부감이 있을까봐. 좀 안정을 찾으신 후에, 전화가 아니라 소주 한잔해야지.”

    두 사람은 춘천고 동문이자 MBC 선후배 사이다. 다섯 살 많은 엄씨가 고등학교로는 5년, MBC 입사로는 10년 선배다. 그런데 MBC 사장으로는 엄씨가 최씨의 후임자였으니 얄궂은 인연이다. 선거 때 두 사람은 ‘뜻밖에도’ 난타전을 벌였다. 이유야 어쨌든 아직 서로 통화도 안 한 걸 보면 감정이 꽤 상한 듯싶다.

    “선거로 접어드니까 내가 내가 아니더라. 선거대책본부에서 짠 전략대로 움직이니까 뜻밖에도 TV토론에서 상당히 강하게 부딪쳤다. 엄기영 선배가 성격이 강한 분이 아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굉장히 세게 나와 내가 당황했다. 나중에 나도 맞받아치게 돼 충돌이 커졌다.”

    두 사람의 TV토론은 17.5%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인기드라마 ‘짝패’를 눌렀다니 유권자들 사이에서 꽤 화제가 된 모양이다.

    최 지사 얘기를 들어보면 강원도의 정치 정서가 크게 변한 듯싶다. 전통적으로 보수성향이 강한 접경지역에서 야당이 승리한 것만 봐도 그렇다. 철원, 화천, 인제, 양구, 고성 5개 군 중에서 화천, 인제, 양구 세 군이 최 지사를 선택했다. 그는 이를 “평화의 메시지가 먹힌 것”이라고 해석했다.

    ▼ 엄기영씨가 자존심 때문에 축하전화도 못 하는 것 같다.

    “내가 전화를 해야지.”

    ▼ 승자로서 통 큰 모습을 보여주지 그랬나.

    “나는 같이 일할 생각도 있다. 다만 저쪽도 조직이 있으니까. 엄기영 선배 개인이면 내가 바로 전화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개인이 아니라 팀이니까. 이쪽도 마찬가지고. 세력과 세력의 충돌이었으니까.”

    두 사람은 원래 친한 편이 아니었다. 최 지사는 “성향도 서로 달랐다”고 했다.

    “스타일도 다르다. 그분은 앵커를 오래 한 엘리트다. 같은 강원도 출신이지만 얼굴도 잘생기고.(웃음) 성품도 좋은 분이다. 파리특파원-정치부장-보도국장-보도본부장-부사장 등 차근차근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나는 거의 출입처를 갖지 못한 현장기자였다. ‘카메라 출동’‘2580’, 노동조합… 이런 길로만 걸어왔으니까.”

    “저쪽이 스스로 무너진 것”

    선거 막판 언론이 보도한 여론조사 결과로 봐선 최 지사가 이기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격차가 10% 이내로 나온 조사결과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도 마지막까지 이길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만 ‘반응이 좋다’는 느낌은 있었다고 한다. 그가 꼽은 승리 원인은 이렇다.

    “큰 틀에서 보면 첫째, 이명박 정부의 일방주의, 힘에 의한 정치에 대한 심판이다. 둘째는 경제정책 실패다. 어민이 많은 이 지역은 특히 서민경제 상황이 안 좋다. 경제규모에 비해 기름값이 미치는 영향이 큰 편이다. 어민들이 전부 기름을 쓰지 않는가. 작은 원인으로는 TV토론을 꼽을 수 있다. 도민들이 예전엔 일방적인 투표를 했는데 지금은 내 손으로 뽑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그래서 TV토론을 보고 선택한 분이 많은 것 같다. 그 다음에 이광재 동정론, 강릉펜션(콜센터) 사건이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잘했다기보다는 저쪽이 쫓기다 보니까 평정심을 잃고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현 정부의 경제실정(失政)에 따른 반사이익이 승리의 중요한 이유라면 이는 당선된 쪽에 부메랑이 될 수도 있을 게다. 이를 지적하자 그도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라고 동의했다. 우선 생각한 응급조치는 어민들에게 6개월간 기름값을 보조해주는 것이다.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당장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가 내건 공약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동해안 평화공단 설립이다. 강릉 옥계가 후보지다.

    “접경지역뿐 아니라 속초에서도 이겼다. 속초는 실향민이 많은 대표적인 보수지역이다. 남북관계가 나빠지면서 타격을 입은 곳이다. 금강산 관광이 잘될 때는 지역경제에 활기가 넘쳤다. 지금은 폐허가 됐다. 그래서 어느 지역보다도 남북관계가 개선되기를 강력히 희망하는 지역이 돼버렸다. 결국 살 수 있는 방법은 남북평화공단 설립이다. 북쪽 개성에 있는 공단은 정치적으로 불안하다. 남쪽에 지으면 정치적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 내가 처음 아이디어를 낸 것도 아니고 예전부터 있었던 얘기다.”

    말하자면 개성공단 같은 것을 남쪽에 하나 더 만들자는 구상이다.

    ▼ 정부와 협의했나.

    “그런 건 아니다. 앞으로 적극 건의할 것이다. 금강산관광 재개 문제부터.”

    ▼ 북한 태도와도 맞물려 있지 않나.

    “그렇다. 박왕자씨 사건에 대한 태도. 그것부터 풀어야겠지.”

    ▼ 북한도 풀려야겠지만 우리 정부도 풀려야 하지 않나.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고성 쪽은 폐허가 됐다. 이런저런 문제를 균형 있게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 됐다. 횟집은 물론 숙박업소, 건어물상, 기념품가게, DMZ박물관이 텅 비었다.”

    ▼ 평화공단을 설립하려면 남북관계를 복원할 돌파구가 필요할 듯싶다. 담판하러 북한에 갔다 올 생각은 없나.

    “보내주기만 하면 갔다 올 생각이 있다. 그런데 지금 남북 간 접촉을 일절 허용하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고 있다. 금강산에 골프장 지어놓은 분도 있지 않은가. 대북투자도 많이 하고. 그런 분들이 자산이 동결돼 굉장히 힘들어한다.”

    손학규의 다급한 전화

    선거가 끝난 후 많이 나온 얘기 중 하나가 이광재 전 지사의 역할론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적절한 자리를 맡기는 걸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의례적인 말이 아닌지 궁금했다.

    “이광재 (전) 지사가 오랫동안 준비해서 아는 게 많다. 좋은 정책도 많고. 지금 추진하는 정책들도 다 이 지사가 만든 거다. 중국 투자와 기업 유치 등이 이 지사의 인맥으로 가능했다. 그런 사업들을 계속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본인도 좋다고 했다. 도에 여러 위원회가 있는데 그중 하나를 맡길 생각이다. 조례에 있는 합법적인 근거를 찾아서.”

    ‘승부사’ 최문순 강원지사

    최문순 지사는 유세기간에 투표를 독려하는 뜻에서 강원 인제군에서 번지점프를 했다.

    이광재씨와의 친분을 묻자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보다는 엄기영씨와 ‘훨씬 더’ 가깝다고 했다.

    “고향(평창)도 같고 지역구도 겹친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두 사람이 그동안 자주 만났다고 한다. 원래 (민주당에서) 엄기영씨를 영입하려 하지 않았나. 이광재가 도지사로 나오면 엄기영은 태백·영월·평창·정선 지역에서 국회의원 출마하는 걸로. 그런 얘기들이 계속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거기에 낄 이유가 없었지만.”

    더운지 그가 양복 윗도리를 벗었다. 소매를 걷어붙였다가 사진기자의 만류로 다시 내렸다. 그의 도지사 출마는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 원래 민주당에서 영입하려 했던 1순위 후보는 권오규 전 부총리였고 그 다음이 김대유 청와대 전 경제정책수석비서관이었다. 둘 다 노무현 정부 말기에 재직했다.

    “사실 나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에서는 엄기영 후보가 워낙 막강한데 영서 출신이니 영동 출신으로 맞대응해 지역주의로 가면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제외됐던 거다. 그런데 이 사람 저 사람 다 안 되니 (후보 등록 마감일) 하루 전에 손학규 대표가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아무리 떠밀렸다고 해도 전혀 생각이 없었다면 나섰을까.

    “초기에 언론이 재미 삼아 두 사람을 붙이는 여론조사 결과를 내놓았는데, 우리 당이 영동출신 후보를 찾는다고 하자 쑥 들어갔다. 그런데 마지막에 후보가 없는 상태가 됐다. 강원도에서 50년 만에 야당지사(이광재)가 나왔는데 이걸 그냥 넘겨줄 순 없는 것 아니냐. 마지막 날 토끼몰이를 당했다. 그래서 항복한 거다.”

    그의 승부사 기질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MBC 사장이 될 때였다. 부장이 곧바로 사장에 오른 건 언론계에서 ‘엽기적 사건’이었다. 엄기영씨와의 ‘악연’은 이때부터다.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자 김중배 사장이 임기가 남아 있는데도 사퇴했다. 새 정권이 출범했으니 새 사람을 뽑으라며. 사장 공모에 엄기영 선배(당시 앵커, 이사)가 지원해 이긍희 당시 대구MBC 사장과 경선했다. 다들 완승을 거둘 거라고 예상했는데 졌다. 2년 뒤 이 사장이 잔여 임기를 채운 뒤 다시 사장을 뽑게 됐다. 그때 또 엄 선배가 나왔다. 개혁진영에서는 엄 선배가 나설 경우 또 진다고 봤다. 노무현 정권 초기 MBC가 정부를 엄청 깠다.(웃음) 그래서 우리(개혁) 진영에서 불편했던 점도 작용했다. 사장으로서 독립성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내보내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래서 엄 선배 대신 내가 나가게 된 거다.”

    ▼ 뒤에서 조율한 게 아닌가.

    “노무현 대통령이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밑에도 그렇게 지시했다. 간섭을 했다면 처음에 엄 선배가 됐을 거다.”

    ▼ 정권 초기 말인가.

    “그렇다. (엄 선배가) 자신의 역량만으로 충분히 이긴다고 보고 (청와대에서)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뭘 하려면 강하게 돌파해야 하는데 엄 선배가 그런 게 약하다.”

    ▼ 지난해 김우룡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인터뷰 파동도 있었지만, MBC 사장은 대체로 청와대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사전에 결정되지 않았나.

    “그런 적도 있었지만 노무현 대통령 때는 안 그랬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좀 그랬다. 박지원씨가….”

    그가 웃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 박지원씨는 그랬을 것 같다.

    “그랬다. 내가 언론노조위원장 할 때 나하고 많이 싸웠다. 노 대통령은 결벽증 비슷한 게 있어서 아예 손을 못 대게 했다.”

    ‘승부사’ 최문순 강원지사
    ▼ 청와대 지원을 전혀 안 받았나.

    “전혀 안 받았다.”

    ▼ 그러지 않고야 어떻게 부장이 사장이 될 수 있나.

    “당시 MBC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개혁진영에선 후보가 없었다. 내 위로는 거의 없으니 후보를 낼 수 없었던 거다. 엄기영 후보가 그나마 정치적 중립을 지킬 사람인데 질 것 같으니까. (개혁진영에서) 나한테 요구한 게 나가서 죽어달라는 거였다. 그래서 사표 내고 나갔던 거다. 그게 좀 점수를 땄다. TV토론 비슷한 것도 거쳤고.”

    “자기자랑 못해 참모들한테 깨졌다”

    그는 기자 시절 강성 노조위원장이었다. 파업을 주도하고 해직당했다. 복직된 지 1년 만인 1998년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을 맡았고 2000년엔 산별 언론노조를 설립해 초대 위원장을 지냈다.

    ▼ 노조위원장 출신이 사장이 될 줄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거다. 변신에 갈등이 없었나.

    “우리는 처음 겪은 일이지만 일본이나 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보편적인 일이다. 일본에 가서 많이 놀랐는데 노조위원장 출신 사장이 많았다. 매우 보수적인 언론사인 후지TV(후지산케이그룹) 회장도 노조위원장 출신이더라.”

    ▼ 더 놀라운 건 방송사 사장에서 곧바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는 점이다. MBC 내부에서도 비판이 거셌던 걸로 아는데….

    “비판 많이 받았다. 몇 차례나 사과했다.”

    ▼ 그건 또 어떻게 결정한 건가.

    “(2008년) 2월28일인가 사장 임기가 끝난 후 놀았다. 놀면서 남북경제교류협회라는 조그만 단체를 만들어 대북사업에 투자했다. 평양에 회사를 설립하려 했는데, 남북교류가 중단되는 바람에 건물이 지어지다 말았다. MBC 퇴직금 2억원을 투자하고 다른 사람들 돈도 모았다. 그런 상황에서 후배들 권유로 비례대표로 나가게 됐다.”

    ▼ 나가란다고 나가나.

    “당시 방송통신위원을 새로 임명했다. 우리 진영에서 보기엔 잘못된 인사였다. 누군가 나서서 지키고 싸울 사람이 필요했다. 내가 놀고 있으니 후배들이 찾아와 나가라고 했다. 후다닥 결정된 일이라 신청 마감시한을 두 시간 넘겨 서류를 제출했다. 박재승 공천심사위원장이 개혁적인 공천을 한다며 10번을 준 거다.”

    ▼ 당에서 요청한 건 아닌가.

    “아니다. 그때까지 손학규 대표와는 알지도 못했다. 그래서 내가 계보가 없는 정치인이다. 누가 봐준 사람이 없으니까.”

    ▼ 그전에 정치 꿈이 있었던 게 아닌가.

    “그전에는 정치를 생각해본 적도 없다. 정치부 기자를 한 것도 아니고. 정치권에 아는 사람도 없었다. 국회의원 하면서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 어떤 점이 안 맞나.

    “선거운동하면서 부대낀 게 자기자랑이었다. 그게 아주 죽겠더라. 참모들한테 엄청 깨졌다. 자랑 좀 많이 하라고. 그게 싫고 잘 안 되더라.”

    특이한 사례다. 비례대표와 도지사 출마라는 중대한 선택을 떠밀려서, 그것도 두 번 다 쫓기듯 결정했다니. 어쨌든 그는 승부를 걸 때마다 이겼다. 그에게 얻는 교훈은 즉흥적으로 결정해도, 혹은 치밀한 계획 없이 살아도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건 새로운 유형의 교훈이다.

    “뭘 굳이 성취하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비울 때 딱딱 비우니까. 이번에도 이길 거라는 생각은 별로 안했다. 지더라도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 어느 자리든 오래 머물 생각이 없다.”

    ‘승부사’ 최문순 강원지사
    그는 취임 후 “연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치권과 관가의 비리는 대부분 자리 욕심에서 빚어진다. 그런 점에서 그의 발언은 일단 신선하다.

    “참모들에게 5분 이내로 떠날 준비를 하라고 말한다. 내가 관사에 안 들어오려는 것도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연임 안 한다고 이미 공표했다. 연임으로 도청 직원들을 압박하는 건 하급행정이다.”

    ▼ 3년간 너무 잘해서 도민들이 한 번 더 하길 원해도 안 할 건가.(웃음)

    “나는 이제까지 맡았던 모든 자리를 연임한 적이 없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도 임기 내에 모든 힘을 다하라, 연임 생각은 하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 팀은 그런 자세가 돼 있다. 내가 나서서 뭘 하는 것보다 직원들이 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게 중요하다.”

    그동안 가장 보람을 느낀 자리가 뭐냐고 묻자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국회의원과 노조위원장이 비슷하고 MBC 사장과 도지사가 비슷한 것 같다. 가장 보람을 느낀 건 MBC 사장 할 때였다. ‘주몽’이나 ‘무한도전’ 같은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청률이 높게 나오고 돈 많이 벌 때 보람을 느꼈다. 노조위원장이나 국회의원은 만날 싸움만 하고…(웃음). 그런데 스트레스는 사장과 도지사가 훨씬 크다.”

    ▼ 경영자라 그런가.

    “노조위원장과 국회의원은 무책임하다. 지르기만 하면 되니까.(웃음)”

    노조위원장 출신에 대한 선입관도 작용했겠지만 그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때 과격하다는 이미지를 풍겼다. 2009년 미디어법이 강행 처리되자 천정배 의원과 더불어 의원직 사퇴를 선언하고 한동안 활동을 중단했다. 지난해 천안함 사건 때는 진상조사단 발표내용에 강한 의혹을 제기하며 ‘음모론’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춘천에서 태어난 그는 춘천고와 강원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84년 서울대 대학원(영어영문학과)에서 석사를 취득하고 MBC에 입사했다. 대학 졸업한 지 6년 만이었다.

    ▼ 학생 때도 투쟁적이었나.

    “그때는 별로…. 학생운동을 하기는 했다. 태백문화촌이라는 지하운동이었다. 어쩌면 그때 남을 뒷바라지하는 훈련이 된 것 같다. 지하운동은 드러내선 안 된다. 386세대와 다른 점 중 하나가 그거다.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는 게 어색하고 잘 안 된다. 드러나지 않게 남을 뒷바라지하면서 조용히 조직을 키우는 훈련을 한 게 평생 가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화려하지 않다. 386세대의 운동은 굉장히 화려하고 많은 사람을 몰고 다닌다.”

    ▼ 지방대 출신으로서 학력 콤플렉스를 느낀 적은 없나.

    “당시 서울MBC 전체에서 강원대 출신은 나 혼자였을 거다. 그 후 또 입사자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사장 할 때 지방대 출신들이 서류심사에서 손해 보지 않도록 했다. 출신지나 학교를 가린 채 뽑게 했는데도 잘 못 들어오더라. 어쨌든 나는 그것 때문에 손해를 본 적은 없다.”

    ▼ 기자생활 할 때도?

    “본질에 집중하면 다른 게 별로 장애가 되지 않는다.”

    기자 시절 그는 한국방송대상 우수작품상과 보도기자상을 받았다. 특히 사회고발뉴스인 ‘카메라 출동’ 전문기자로 이름을 날렸다. 썩은 물이 고인 아파트 물탱크 실태를 고발해 물탱크 청소를 의무적으로 하게 만들었다. 그가 지하철 분당선 부실공사를 지적하자 당장 시공이 중단됐다. 고속전철 부실공사 고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 MBC에 들어가 노조활동을 열심히 한 건 정의감 때문인가.

    “내가 입사한 1984년은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다. 당시 MBC에 취직하면 배신자 소리를 들었다. 입사 전에 강원대에서 1년간 조교 노릇을 했다. 선생님이 꿈이었다. 그런데 교수 자리라는 게 위에 누가 하나 죽어야 생기지 않나.(웃음) 안 되겠더라. 그래서 학교 밖으로 나갔다. 군대 갔다 오고 대학원 마쳤으니 나이가 스물아홉이었다. 마땅히 취직할 데가 없었다. 그래서 시험 봐서 MBC에 취직했다. 중부경찰서를 출입할 때 권인숙양 성고문 사건을 가장 먼저 알았는데 위에서 막는 바람에 보도를 못했다. 나중에 동아일보가 짧게 보도하더라. 이런 압력에 맞서 제작거부를 몇 번 했다. 그 후 자연스럽게 노조운동을 하게 됐다.”

    1995년 노조위원장을 맡은 그는 이듬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강성구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파업을 주도했다. 결국 강 사장은 퇴진했지만 그도 해직당했다. 업무방해죄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내가 최문순이라는 존재를 처음 안 것도 그 무렵 MBC 파업현장을 취재하면서다. 당시 그는 투쟁의 화신처럼 비쳤다. 1년 뒤 그는 보도국 기동취재부 기자로 복직했다.

    ▼ 파업을 이끌면서 적성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나.

    “아휴, 안 맞지. 22일인가 파업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죽을 맛이었다.”

    ▼ 해직기간에 뭐 했나.

    “놀았다.(웃음)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아무런 짐도 없었고….”

    그의 촌스러운 웃음에서 싸움을 해본 자의 여유 같은 게 느껴진다. 싸움하기 전엔 두렵지만 막상 싸움에 들어가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턱없는 용기와 여유마저 생긴다.

    반유신파 선거운동원

    ▼ 노조가 예전 같지 않다. 시대변화에 맞춰 노조도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대기업 노조에 대한 비판이 많다.

    “노동조합이 망가진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이기적으로 변해서고, 둘째는 자기철학이 분명하지 않아서다. 이기적이라는 건 비정규직 문제 같은 걸 방치하는 걸 말한다. MBC 사장 할 때 비정규직을 많이 없앴다. 비정규직 없애는 건 회사에 전혀 부담이 안 된다. 중간에서 이권을 챙기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돈을 생각하면 비용은 똑같다. 낮은 임금을 주더라도 평생 고용을 보장하면 된다. 노동운동은 분배다. 내가 분배받았다면 남에게도 분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게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언론노조를 포함해 노조에 그런 철학이 없다.”

    답변할 때 그의 눈길은 줄곧 아래로 향했다. 속이야 어쨌든 겉으로는 자신을 낮추는 태도로 비친다. 그를 가까이서 접해본 사람들은 과격한 투사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은 소탈한 성격과 수줍은 웃음에 의아해한다. 이 의아함은 대체로 친근감으로 바뀐다.

    “어린 시절 수줍음을 너무 많이 탔다. 초등학교 때는 부분단장 한 게 최고였다.(웃음) 남 앞에 서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아직도 그런 게 남아 있지만. 조금 변한 게 고등학교 때였다. 2학년 때 10월유신 투표가 있었다. 당시 투표율이 90 몇 %였고 찬성률도 그 정도였다. 관에서 주민들을 엄청 쪼아댔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한테도 와서 협박에 가까운 말을 했다. 선생님까지 왔었으니까. 그런 걸 보면서 저항의식이 생겼던 것 같다. 그해 학생회장 선거가 있었는데 유신파와 반유신파로 갈라졌다. 나는 반유신파 선거운동원으로 활약했다. 그때 술도 배우고 이상하게 바뀌었다.(웃음)”

    그를 운동권으로 이끈 직접적인 계기는 고교 선배인 정재돈씨가 고문을 당한 일이었다. 정씨는 고3 때 정보기관에 끌려갔다가 온 후 한동안 누워서 생활했다. 장이 내려앉은 탓이었다.

    “그 형이 여태 고문 후유증에 시달린다. 그런 걸 보면서 변화된 거다.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때 충격을 받았다. 이 지역에서 학생운동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때 변화됐다.”

    정씨는 현재 가톨릭농민회 회장이다.

    ▼ 평범하지 않은 인생역전을 몇 번이나 했다. 가족이 좋아하나.

    “엄청 싫어하지. 아내는 가늘고 길게 살기를 원한다. 58세 정년퇴직할 때까지.”

    ▼ 안정된 직장에서.

    “MBC에선 만 58세까지 갈 수 있다. 부장급 이상이면 억대 연봉이다.”

    ▼ 사장 됐을 때는 좋아했겠다?

    “별로 안 좋아하더라. 언론에 노출되는 걸 싫어하니까. 아내는 조용히 살기를 원한다.”

    ▼ 딸들은 어떤가.

    “딸들도 가족이 오붓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번에 혼났지. 다 선거운동에 투입됐으니..”

    그는 부인 이순우씨 사이에서 딸 둘을 뒀다. 큰딸 해린씨는 홍익대(조치원분교) 4학년이고 둘째딸 예린씨는 이화여대 1학년이다. 둘 다 전공이 미술이다.

    일산 집값 덕분에…

    그가 도지사 선거에 출마하며 신고한 재산은 14억4900만원이다. 2008년 국회의원이 됐을 때는 16억2700만원을 신고했다.

    ▼ 생각보다는 재산이 많다. 노조 하면서 언제 그렇게 돈을 모았나.

    “세 가지다. 우리 집과 어머니 집, 그리고 현금이다. 일산 킨텍스 앞에 있는 집값이 많이 오른 덕분이다. 다른 재산은 얼마 안 되고.”

    ▼ 언제 가장 큰 좌절감을 겪었나.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운명이나 팔자로 여겨진다. 내가 뭘 한다는 생각보다는 뭔가 맞닥뜨려지면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늘 승패가 걸려 있었지만, 뭐 질 때는 지는 것 아닌가. 해고됐을 때는 사실 다른 직장도 알아봤다. 편하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해고됐다 복직된 경우가 거의 없었으니까. 어쨌든 그때의 경험이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됐다.”

    ▼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뭔가.

    “인간의 존엄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 비록 나의 적이라도. 나를 호되게 비판하는 사람이라도. 그것이 곧 정치의 존재이유, 국가의 존립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정치구호가 아니라 현실생활에서 실천하려 노력한다. 매일 매순간. 쉽지는 않지만.”

    ▼ 같은 자리를 두 번 이상 안 앉는다는데 다음 목표는 뭔가. 장관?

    “(웃음) 그건 아니다. 지사 끝날 때면 나도 58세다.”

    ▼ 정무직이나 정치인은 정년이 없지 않은가.

    “이게 굉장히 힘든 일이다. 2월28일 출마선언 이후 토요일 일요일을 한 번도 못 쉬었다.”

    ▼ 석가탄신일에 인터뷰를 해서 미안하다.

    “아니다. 차라리 이런 시간이 편하다. 안 그러면 어디 돌아다녀야 한다.(웃음)”

    향후 인생계획에 대해 그는 “그때 가봐서”라고 답했다. 내가 그동안 인터뷰한 사회저명인사 중에 이런 식으로 자신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제시한 사람은 없었다. 기자 그만두고 뭘 할지 뚜렷한 계획이 안 서 있는 내게는 위로를 주는 얘기지만.

    ‘승부사’ 최문순 강원지사
    “다음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그러면 현재의 일을 제대로 못한다. 내가 국회의원 될 때 선배들이 말했다. 재선 생각 말라고. 그러면 잘할 수 있다고. 그런데 그걸 지키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내가 다음을 생각하는 정치인이었다면 언론법 문제를 두고 그렇게 싸울 수 없었을 거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다음을 준비한다고 해도 사실 뜻대로 되지도 않는다.(웃음)”

    그는 지독히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 운을 만든 것은, 내던져야 할 때 내던질 줄 아는 승부사 기질이었다. 이런 건 이데올로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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