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호

다시 장인정신을 묻는다

“신은 디테일 안에 있고, 문화는 소비자가 만든다”

  • 입력2011-08-19 11: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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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년 4월까지 이어질 한국 대표 지성들의 릴레이 강연회 세 번째 강사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현 명지대 교수)이 나섰다.
    • 7월21일 서울 신문로2가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린 강연에서 유 교수는 장인정신과 작가정신의 차이,‘디테일’에 강한 장인의 경지, 황룡사와 청자 백자 사리함 등 한국 미술품의 힘과 아름다움, 금강송 등 재질의 중요성, 한국에서 배운 다도를 한층 발전시킨 일본의 문화적 힘 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특유의 달변과 비유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그는 장인이 탄생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 명품을 사주는 소비자의 의식 등 시스템이 중요함을 강조했다.<편집자>
    다시 장인정신을 묻는다


    반갑습니다. ‘신동아’에서 연속 기획강연으로‘한국 지성에게 미래를 묻다’라는 뜻 깊은 자리에 초청해주셨습니다. 제가 ‘한국 지성’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문화유산을 전공하는 전문가의 한 사람으로서 무엇을 얘기할까 고민하다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2년 전에 재단법인 아름지기에서 ‘우리시대 장인정신을 묻는다’라는 연속강좌를 열어 책으로 펴낸 바 있습니다. 건축, 사진, 음식, 복식 등 이 시대의 장인 여섯 분의 이야기인데 그 책 첫머리에 실린 저의 글을 나중에 읽어보니 아주 부실한 내용인지라 이걸 언제고 보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늘 개정판을 내겠다는 생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웃음) 우리 사회의 미래를 탐색하는 연속 강좌의 주제와도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장인정신을 이야기할 때 먼저 이와 연관되는 개념으로 작가정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했어요. 벌써 30년 넘은 일이네요. 그때는 우리 시대의 작가정신을 묻는 이야기는 많았어도 장인정신을 묻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당시에 필요한 것은 작가정신이었어요. 하나의 예술작품에서 작가정신이 결여되었다는 것은 치명상이었습니다. 이후 작가정신과 개성이 많이 구현되었고, 작가정신이 고갈되고 형식적인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 있던 국전 같은 공모전이 결국은 사라지게 됐습니다. 또 그만큼 우리 문화와 예술이 발전해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새로운 의문이 일어난 것입니다. 본래 작가정신에 대한 요구는 장인정신이 있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작가정신이 너무나 고양되고 상상력이 남발되는 상황에 이르자 그 뿌리를 이루고 있었던 장인정신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생겨난 거지요. 사실 작가정신이란 장인정신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근본이 흔들리고 있으니 다시 장인정신을 묻게 된 것입니다.

    명작은 디테일이 아름답다



    작가정신과 장인정신은 서로 보완적 관계입니다. 작가정신이 작가의 개성과 상상력과 창의력이 존중된 거라면 장인정신에서 존중되는 것을 무엇일까요. 남다른 기술과 재능을 갖고 있는 장인들이 자신의 작업에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건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습니다. 작가정신이나 창의력이라는 이름 아래선 대충 해놓고 끝내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장인정신이라는 이름 아래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장인정신이 외형적으로 나타난 결과를 말하라고 하면‘디테일(detail·세부양식)’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20세기 최고 건축가 가운데 한 사람인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s van der Rohe)는 “신은 디테일 안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라고 했어요. 건축이건 미술이건 음악이건 문학이건 명작은 디테일이 아름답다는 것이고 그것은 장인정신이 끝까지 구현돼 이뤄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나는 이렇게 작가정신, 장인정신을 나누어서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명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술과 기술이 분리되지 않던 시절에 있었던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천하의 명작으로 꼽히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瓷象嵌雲鶴文梅甁)을 볼까요. 이 운학문을 고려 사람들이 특히 좋아했어요. 창공에 나는 학과 새털구름. 박물관에 가보면 이런 운학문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한 마리, 어떤 것은 두 마리, 조금씩 달라요. 여러 마리를 그리자니 복잡하고, 적게 그리자니 서운한 거지요. 그런데 운학문매병을 그린 이는 완벽한 모형을 그렸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지요. 이분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단에 7개씩 42개의 원창을 만들면서 원창 안에 있는 학은 위로 올라가고 원창 밖에 있는 학 23마리는 아래쪽으로 내려가게 그렸어요. 그러니까 어느 면으로 돌려봐도 학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변화가 있어요. 질서를 갖고 있으면서 또 한편 질서에 얽매이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건 장인적인 기술만이 아니고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의 창의력이 들어간 거지요.

    백제금동대향로를 보면 용이 용틀임을 해서 연꽃 봉오리를 입으로 물고 있고 그 위로 봉황이 날아가는 형상입니다. 이것은 본래 중국에서 유행하던 박산향로 모양과 같은데, 수반(水盤) 위에 한 마리 오리가 도교에서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을 모시고 있는 형상입니다. 그런데 백제 사람들이 그 박산향로의 아이디어를 불교적 이미지와 합쳐서 용이 연꽃 봉오리를 물고 있고 그 위로 봉황이 날고 있는 환상적인 모습으로 탄생시켰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형태미만 알고 있고 그 디테일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향로 뚜껑의 네 겹 산봉우리와 향로 몸체인 네 겹 연잎의 잎사귀마다 조각이 들어가 있습니다. 산이 있고 그 뒤에 솔밭이 있고 냇물이 있고 바위가 있고 그리고 상상의 동물, 사자 등 현실의 동물들이 쭉 배치돼 있습니다. 기마인물상에서부터 5인의 악사까지 100가지 도상이 이 작은 공간에 들어가 있습니다.‘디테일’이 엄청나게 아름답습니다.

    장인을 잘 대접한 백제

    다시 장인정신을 묻는다

    학과 구름의 모양이 아름답게 새겨진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瓷象嵌雲鶴文梅甁).

    공예의 두 요소는 미(美)와 용(用)입니다. 향로의 최종 형태는 향을 피웠을 때 어떤 모습인지가 중요해요. 뚜껑을 열고 보면 그 안에 향을 피울 수 있는 종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뚜껑의 산봉우리 뒤에는 10개의 구멍이 숨어 있습니다. 앞에서 보면 안 보이지만 위에서 보면 그 구멍이 뚫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리고 봉황새의 가슴에도 두 개의 구멍이 있어서 모두 12개의 구멍에서 연기가 피어나오게 됩니다. 금동향로는 금속품이므로 직접 시험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청자향로는 도자기이기 때문에 실험해볼 수 있었습니다.

    청자향로 중에는 뚜껑이 사자나 기린, 오리 모양인 경우가 있는데 그 뚜껑의 짐승 몸통이 비어 있어서 그 동물 입으로 향의 연기가 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그대로 위로 올라가서 기린의 턱을 때리게 됩니다. 턱을 때린 연기는 그 반동으로 입 쪽으로 나가면서도 위로 뻗어가는 그 성질을 갖고 있어서 아주 환상적인 모양을 만들게 됩니다.

    백제에서 그렇게 멋있는 것을 만들 수 있었는데 왜 이 시대에는 저런 것이 없어졌는가. 백제시대에는 장인을 어마어마하게 대접했습니다. 무령왕릉 왕비의 팔뚝에서 나온 은팔찌를 볼까요. 용이 세 마리가 있는데 여기에는 대부인을 위해서 다리(多利)라고 하는 장인이 만들었다는 서명이 새겨져 있어요. 왕비의 팔찌에 자필 서명을 할 정도로 장인에 대해서 존경을 보냈던 것이지요. 백제는 장인을 대접해서 경학에 밝으면 경학박사라고 했듯이 기와를 잘 구워내면 와박사(瓦博士)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예가 발전했습니다.

    백제의 공예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려주는 사례가 여럿 있습니다. 일본 동대사 정창원에 있는 8세기 유물창고에는 의자왕이 일본 왕에게 보낸, 자단목으로 만든 나전바둑판하고 상아로 만든 바둑돌이 있습니다. 일본은 아직도 왕이 있기 때문에 이 헌납유물을 문화재로 다루지 않고 신성시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6년부터 해마다 10월이 되면 주로 국립나라박물관에서 몇 십 점씩 전시해오고 있어요. 그런데 2000년 전시에서 이 바둑판과 바둑돌을 백제 의자왕으로부터 받았다고 헌납보물대장에 나와 있었어요. 이게 어찌나 멋진지 몰라요. 한 5년 전에도 다시 전시된 적이 있는데 이때는 출처에 대한 설명이 도록에서 빠져 있었어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백제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낙화암, 의자왕, 삼천궁녀, 계백장군 등으로 멸망 시기와 관련돼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부여군수가 세계 역사도시 회의에 갔을 때 백제의 왕도(王都) 부여에서 왔다고 하자 “아, 그 멸망한 나라에서 왔어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더래요. 그래서 이분이 화가 나서 “멸망하지 않은 고대국가가 어딨습니까?”라고 말했답니다.(웃음) 그런데 왜 사람들이 백제에 대해서 그 문화가 아름답고 융성했을 때를 기억하려 하지 않고 망해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얘기를 기억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익산미륵사지석탑에서 나온 사리호를 보면 정말 아름답습니다. 높이 17㎝밖에 안 되는 굉장히 작은 건데 어디 한구석 허투루 만든 부분이 없습니다. 이 바닥에는 어자무늬라고 물고기알 문양이 빽빽하게 들어 있습니다. 명작의 경우 ‘디테일’이 아름다워서 중요한 특징은 확대하면 확대할수록 더 멋있습니다. 그래서 단원 김홍도나 겸재 정선의 그림은 작은 편화로 그린 것도 10배를 확대해 봐도 굉장히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이류 화가들이 그린 그림은 확대하면 데생이 정확하지 않아서 멀쩡하던 사람이 쓰러지는 것 같고 집이 막 기울어지는 것 같습니다.

    사리함이라고 하면 공예품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그 역사적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사리함은 당시 백제 사람들이 가진 최고의 기술과 최고의 공력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사리호나 사리함이 나오기 전에 당시 최고의 공예 기술이 발현된 것은 금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 500년 무렵이 되면 불교를 이데올로기로 하는 고대국가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거대한 고분을 만들어서 남에게 위세를 부릴 필요가 없어져버렸던 겁니다. 그래서 이때가 되면 왕을 위해 금관을 만들던 그 정성으로 지상의 사찰을 만들 때 절대자의 분신을 모시는 사리함을 만들었습니다. 공예로 보면 금관의 시대에서 사리함의 시대로 옮겨간 겁니다.

    2007년에는 백마강변 왕흥사에서 금은동 한 세트의 사리함이 나왔어요. 여기에는‘백제 창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서 사찰을 세우고 사리를 봉헌했다’고 쓰여 있어요. 뚜껑을 열면 순서대로 동 은 금으로 만들어진 함이 나옵니다. 통형, 항아리형, 구기자 같은 열매 모양을 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표현하면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을 것 같아서 저는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눌와) 책을 쓰면서 이것은 현대 고급 향수병처럼 생겼다고 했지요.(웃음) 이 세 가지 형태가 다 다르면서도 한 세트라는 느낌을 준 것은 뚜껑 꼭지의 디자인입니다. 이것도 각 함의 모양에 맞게 뚱뚱하고, 볼록하며, 삐죽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들이 세트라는 느낌을 갖는데 이는 바로 디자인의 힘입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백제본기 온조왕 15년조, BC 4년조에 ‘신작궁실’이라고 네 글자를 썼어요. 새로 궁궐을 지었다는 뜻이지요. 그렇게 표현해놓으면 사실 김부식은 역사의 사실을 기록하는 차원에서 제 할 일을 다한 겁니다. 그런데 그는 그 미감(美感)을 여덟 글자로 덧붙였어요. ‘검소하되 누추해 보이지 않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儉而不陋, 華而不侈)’. 이것이 한국인이 가질 수 있는 미감의 압권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 시대 장인들이 미적 목표로서 삼을 만한 그런 모토(motto)입니다. ‘모토’는 자기가 하는 행위에 대해 끝까지 검증케 하는 힘이 있지요.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통일신라시대 감은사탑에서 나온 사리함은 더 이상 화려할 수 없는 모양을 보여줍니다. 역시 디테일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상여와 가마 형태에다 사리를 장치하고 그것을 호위병들이 지키는 모양입니다.

    82m 황룡사 이야기

    다시 장인정신을 묻는다

    경주 황룡사 복원 조감도.

    다음 황룡사터를 볼까요. 이 황룡사터에다 진흥왕은 궁궐을 지으려고 했는데 거기서 황룡이 나와서 절에다 기부해서 집을 짓게 됐습니다. 이 터의 기초를 만들고 회랑을 두르는 데까지 17년이 걸렸습니다. 진평왕이 여기다가 금당을 지어서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모시는 데 30여 년 걸렸어요. 그런데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중국에 유학하고서 고승이 돼서 돌아왔어요. 그때는 유학하면 보통 30년 만에 와요. 참 지겹게도 갔다 오지요. 자장율사는 35년 만에 왔어요. 혜초(慧超)는 오지도 못했지요.(웃음)

    그래서 선덕여왕을 만났는데 선덕여왕이 전쟁에 시달려서 아주 죽을 지경이었어요. 그때 자장율사가 황룡사에다가 거대한 9층 목탑을 세워서 여기에 1층부터 9층까지 신라에 무릎을 꿇어야 될 외적들을 상징해놓으면 그자들의 사신들이나 사람들이 황룡사탑을 보고는 감히 신라를 넘보지 못할 거라고 제의했습니다. 탑의 한 변이 27m이고, 상층부까지는 82m나 되는 크기입니다. 현대식 건물로 치면 25층짜리 건물보다 높아요. 선덕여왕이 ‘뜻은 좋은데 우리 실력으로 지을 수 있습니까’ 묻자 자장율사는 ‘백제에서 기술자 데려오면 됩니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라의 기술자들과 함께 이 탑을 완성했지요. 그 다음 탑에 외적들이 감히 신라를 넘보지 못하도록 한 층씩 상징을 세웁니다. 1층엔 무엇을 세웠을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일본.(웃음) 2층엔 중국, 중화라고 그랬어요. 3층은 오나라와 월나라. 4층은 탐라, 제주도. 탐라국이 백제에 조공을 해서 친선관계를 유지했지만 신라와는 자꾸 맞먹으려고 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5층은 예맥(濊貊), 6층은 말갈, 7층은 응유(鷹遊). 그러나 9층까지 가도록 거기에 고구려와 백제는 없습니다. 삼국전쟁이 갖는 의미 중에 민족적 동질성이 어디까지였는지를 생각할 때 선덕여왕 시절 신라가 정복할 아홉 나라 속에 두 나라가 없었다는 사실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중에는 예맥이 고구려고 응유가 백제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어요. 그런데 진짜 적이라고 생각했으면 고구려, 백제라고 쓰지 무엇 때문에 ‘스리 쿠션’을 쳐서 멀리 보냈다 와서 집어넣겠어요.(웃음)

    선덕여왕이 9층탑을 만들어놓았지만 13세기 대(對)몽항쟁기 때 이 탑이 불타고 맙니다. 그러고는 다시는 못 지었지요. 그런데 그전에도 이 집이 벼락을 6번 맞았어요. 삼국유사에 이 탑이 벼락을 맞은 날짜와 보수한 날짜가 나와요. 이 서라벌 허허벌판에 높이 82m짜리 건물이 피뢰침도 없이 서 있었으니 벼락이 거기 떨어지지 어디 가서 떨어지겠어요. 그래서 벼락을 살짝 맞았을 때는 1년 만에 보수했고, 세게 맞았을 때는 보수하는 데 10년 걸렸어요.

    황룡사 복원비용 3500억원

    사라진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것은 후손 된 자들의 임무입니다. 그런데 복원은 문화유산을 보수할 수 있는 경제력과 문화 능력이 있을 적에 가능한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못 합니다. 황룡사가 불탄 다음 고려는 이것을 세울 힘이 없었고, 조선은 폐불정책을 써서 있는 절도 없애는 판에 새 탑을 만들 리가 없었지요. 일제강점기를 지나 20세기 후반기까지 왔을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1970년대라고 해봐야 우리 국민소득이 1000달러가 안 됐을 때입니다.

    그런데 21세기가 되니까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나라 1년 국가예산이 300조원 가까이 돼요. 황룡사 복원하는 데 얼마 드는지 알아봤더니 3500억원 정도 드는 것 같아요. 7개년 계획을 세워 1년에 500억씩 넣으면 되니까 의지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조계종에서 경주시에 이것을 복원해달라고 했어요. 아니, 다른 때는 가만히 있다가 왜 내가 문화재청장을 하니까 그렇게 복원해 달라고 그랬는지, 참.(웃음) 어쨌든 저는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선덕여왕하고 똑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이것을 지을 실력이 있는가. 이 탑의 주춧돌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25층짜리 빌딩을 지으면서 지하실 파지 않고 세울 수 있습니까? 황룡사 탑에는 지하실이 없었어요. 또 그 높이의 탑을 나무로 세워야 돼요. 그 하중을 이길 수 있도록 토목공학적으로 그걸 증명해야 하거든요. 기술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도 그 다음에는 문화의 문제가 있습니다. 황룡사 탑을 지을 때 절대자의 분신을 모시고 그것을 제대로 지어서 외적들, 무릎 꿇을 외적들의 상징을 세워둔다는 호국불교의 정신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3500억원이나 되는 공사가 되면 조달청에서 턴키 시스템으로 입찰할 것이고, 그러면 재력이 되는 회사들이 코피 터지게 싸워서 낙찰을 받을 거예요.

    그리고 이게 무너질까봐 무서우면 아마 철근으로 초석을 다져놓고 페인트칠해서 복원했다고 할 수도 있어요. 지금 저는 문화재청장이 아닌 자유인이 돼서 이렇게 자유롭게 얘기하고 있지만, 청장 시절에는 이 얘기를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할 수 없었어요. 제 솔직한 마음은 때가 되면 영민한 후배들이 20년, 50년 뒤에 제대로 지을 텐데 지금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정말 우리가 문화적 역량이 갖춰질 때 복원하면 되는 겁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문화재가 많이 불탔는데, 나고야성이나 오사카 사천왕사 등 다수를 시멘트로 복원했어요. 그래 놓고 지금 흉물이 돼도 부수지도 못하고 골머리를 앓고 있어요.

    금강송 보호 업무협약

    명품이라고 하는 것은 형태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그 재질 자체가 좋은 거거든요. ‘texture’ ‘matiere’ 이게 뛰어나야 멋있는 것이지 형태만 갖고 명품 디자인 되는 게 아니지요.(박수) 국립문화재연구소 측에 황룡사를 짓는 데 150~300년 된 금강송이 얼마큼 필요한지 계산해보라고 했더니 4t 트럭으로 2600대분이 필요하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이 소나무가 그 정도 규모로는 없어요. 광화문과 숭례문을 춘양목을 써서 복원하고 있는데 그 속에서도 들보, 대들보는 못 구해서 캐나다에서 사왔습니다. 아까 강의장에 오면서 차 안에서 라디오 뉴스 들으니까 거북선, 판옥선을 금강송으로 안 하고 캐나다산, 호주산을 썼다고 해서 당국에서 수사에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경북 울진군 소강리 통고산 휴양림에는 약 500만㎡(150만평)의 금강송 솔밭이 있습니다. 제가 문화재청장 할 때 산림청장이 조연환씨였어요. 얼마 전에 정년퇴임해서 ‘산이 거기 있었기에’라는 자서전을 내기도 했어요. 제가 그분과 아주 가깝게 지냈어요. 그분에게 가서 ‘우리 서로 잘 알고 있을 때에 산림청 통고산 휴양림을 문화재청으로 관리 이관시켜주시오’라고 했어요. 그러자 뭐에 쓰려고 그러냐고 하기에 ‘소나무 잘 키워서 문화재 복원하는 데 쓰려고 한다’고 했지요. ‘좋은 생각이지만 관리할 줄 아느냐’고 해요. 그래서 제가 작전을 바꿨지요.‘지금 말고 150년 후에 이 소나무들을 문화재청에서 쓴다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이것에 대해 국무총리를 증인으로 한 문서를 만들어 150년 뒤에 열 수 있는 타임캡슐에 묻자’고 제안했어요. 그래서 타임캡슐을 묻었어요.(웃음) 여는 날은 2155년 11월11일이지요. 제가 앞으로 145년만 더 살면 직접 그 뚜껑을 열고 싶은데….(웃음)

    그랬더니 산림청 사람들이 좀 억울했나 봐요. 그래서 금송비를 세워야겠다고 해요. 옛날에 솔밭에다가 금송비를 세워서‘여기 있는 소나무를 벤 자는 곤장 50대에 처함’ 같은 글귀를 적어놓곤 했는데요. 그 전통에 따라서 금강송보호비를 세우기로 했어요. 조그만 빗돌 하나 세우자고 했어요. 그리고 제가 딱 한 문장만 썼지요. ‘여기 금강송은 150년 후 우리 후손들이 문화재 복원을 위해서 기르고 있는 것으로 이후 150년간 어느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벨 수가 없다. 산림청장, 문화재청장.’ 그런 뒤 개막식에 오라고 해서 갔더니 엄청난 크기의 비석을 세워놓았어요.(웃음)

    다시 장인정신을 묻는다

    경북 울진군 금강송 숲길.

    서양의 길드 시스템

    이 금강송으로 마지막으로 지어본 것이 경복궁 건청궁입니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아버지, 시아버지 그늘을 벗어나서 편안하게 살려고 지은 집인데요.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을 파괴할 적에 제일 먼저 부순 집입니다. 자기네들 치욕이 연상되니까. 근데 그 집을 제가 문화재청장이 돼서 그만두기 전에 준공까지 했습니다. 지금도 경복궁에 가서 특별 관람을 신청하면 경회루 거쳐 거기까지 갑니다.

    한옥으로 집을 지으려면 평(3.3㎡)당 최소 800만원이 듭니다. 제대로 지으려면 최소한 평당 1200만원은 들어요. 문화재를 복원한다면 평당 1500만원까지 인정해주고 있어요. 그런데 건청궁을 전부 춘양목으로 하고 거기에 동원된 인부는 모두 인간문화재급 고급 인력을 쓰고 했더니 평당 2000만원이 들어갔어요. 직원들이‘이거 감사에 걸립니다’라고 했을 때 저는 이렇게 얘기했어요.‘감사에 걸리는 거는 돈 떼먹지 않았으니 행정능력 미숙이라고 경고 같은 조치를 받겠지. 그런데 이 집이 준공된 다음에 후손들이 왜 이 집을 이렇게 대충 복원해놓았느냐고 한다면 예산이 이것뿐이라서 대충했다고 대답할 거요? 돈이 얼마가 들어가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으로 복원하는 게 옳다.’그러자 담당 과장이 ‘청장님은 그만두면 교수로 복직하겠지만 우리는 앉아서 당해야 합니다’라고 해요.(웃음)

    장인의 문제로 가볼까요. 장인이 되기 위해선 독특한 수련과 연찬과정을 거쳐야 해요. 참을성 있게 끈질기게 배워서 완전히 몸에 익히는 과정이 없으면 안 되는데 그것을 시스템으로 정말로 잘했던 것은 유럽입니다. 유럽은 중세부터 장인 시스템을 엄격히 갖췄습니다. 조합이라고 하는 길드(guild) 시스템이지요. 길드를 유지하는 것은 워크숍(workshop) 또는 아틀리에(atelier)의 연합이었어요. 화가는 아틀리에이고 조각은 워크숍인데, 이 워크숍을 가지려면 마스터(master)가 돼야 해요. 마스터가 되려면 도제(apprentice), 직인(journeyman)을 거쳐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10년 동안 도제 수업을 받고 직인이 되면 밖에 나가서 활동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외주를 받아서 물건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림이든 조각이든 그릇이든 금속공예든 할 수 있지만 아틀리에는 못 가졌어요. 그래서 직인을 벗어나 자기도 마스터가 되려면 만든 제품을 길드에 내서 심사를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심사에서 떨어지면 영원히 마스터 자격을 못 받아요. 그리고 합격했을 때 길드에 냈던 그 작품을 명작(Masterpiece)이라고 했어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Masterpiece’는 명작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그 유래는 이와 같습니다.

    장인들의 종교 의식

    알브레히트 뒤러라고 하는 독일 르네상스의 화가가 남긴 4단계에 걸친 작품이 있어요. 도제 시절 드라이포인트로 그린 자화상, 그 뒤 22세 때 직인이 돼 남긴 자화상, 26세가 됐을 때 자기 자화상, 그리고 자기를 가르쳐준 미하엘 볼게무트(Michael Wohlgemuth) 선생을 그린 작품이 있어요. 그 과정을 누구든지 어떤 식으로든지 다 겪었던 겁니다. 그런 장인적 수련과정이 있고 그 다음에 기도하는 마음, 자기가 만드는 물건이 잘되도록 기도해야 될 것 아니겠어요.

    신에게 의지하고 싶을 때가 있지요. 신이여, 이번엔 이것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소서. 하우스북 마스터에 나오는 ‘머큐리(Mercury)’라는 그림을 보면 15세기 독일 마스터의 워크숍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어요. 하프시코드 악기 만드는 사람이 있고, 인체를 조각하는 사람, 대장장이, 말 안 들어서 볼기짝 두들겨 맞는 도제가 나옵니다.(웃음) 그리고 집단생활 하다 보니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마스터의 딸이 화가를 좋아해서 접근하는 장면이 있고, 마스터의 부인은 조각가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것 같고.(웃음) 그리고 워크숍에서 만드는 작품들이 잘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림의 윗부분 하늘에서 말을 탄 ‘머큐리’가 워크숍을 보호해 주고 있어요. 머큐리는 그리스말로 바꾸면 에르메스(Hermes)입니다. 명품 브랜드의 하나인 에르메스 마크를 보면 말 탄 사람이 가고 있잖아요. 그게 여기서 나온 겁니다.(웃음)

    로지에 반 데어 웨이든(Rogier van der Weyden)이 그린 ‘성모 마리아를 그리는 루크 성인’에서 알 수 있듯 기독교에서는 의술과 기술을 담당하는 ‘성인 누가(St. Luke)’가 장인들이 기대는 성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구한테 빌었을까요. 산신령님한테 빌든지 아니면 관세음보살. 해당사항 없는 거는 다 관세음보살이더라고요.(웃음)

    성덕대왕 신종 비천상 양옆에는 1037자의 명문이 있는데 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 8명의 이름과 관직을 쓰고 주종기술자 4명의 직책과 이름을 밝혀서 주종대박사(鑄鐘大博士) 나마(奈麻) 박종일(朴從鎰) 주종차박사(鑄鐘次博士) 나마(奈麻) 박빈나(朴賓奈) 등이 적혀 있어요. 그런 대접을 받은 거지요.

    성덕대왕 신종을 만든 그 정신을 봐요. 그 1000여 자의 글은 참 명문인데 이런 내용이 담겨 있어요. ‘무릇 심오한 진리는 가시적인 형상 이외의 것도 포함하나니…(부처님께서는) 때와 사람에 따라 적절히 비유하여 진리를 알게 하듯이 신종(神鐘)을 달아 진리의 원음(圓音)을 듣게 하셨다.’ 다시 얘기해서 부처님의 말씀을 적었으면 불경이 되고 부처님의 모습을 조각으로 빚으면 불상이 되고 부처님의 목소리를 만들면 종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을 만든 것이 진리의 원음, 절대자의 목소리, 거룩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입니다. 형태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종소리가 아름다워야 종이지요.

    에밀레종의 잔인한 전설이 나온 것은 그 소리 때문이에요. 맥놀이현상을 일으키는 그 여운을 어떻게 하면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아픔의 전설인 거거든요. 우리가 그런 존경하는 마음으로 무엇을 하면 안 될 것이 없지요. 그런데 현대인에게는 그런 것이 사라져버렸어요. 에밀레종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에 자세하게 써놨으니까 거기에서 보십시오.(웃음)

    수월관음도의 시스루 패션

    다시 장인정신을 묻는다

    장인정신이 잘 구현된 수월관음도.

    우리 고려 불화 중에서 14세기의 명화들을 보면 이것도 존경하는 마음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보여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인데 이 수월관음이 보타락가(補陀洛迦)산에 앉아서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는데 흰 사라(紗羅)를 걸치고 있어요. 그런데 이 흰 사라를 어떻게 그렸나 볼까요. 피부가 드러나 있고 속옷이 있고 그 위에다가 흰 사라를 걸쳤는데 살도 나오고 속옷도 나오고 흰 사라도 표현 되어 있지요. 학생들 말로 하면 ‘시스루 패션’을 표현한 거예요.(웃음) 속살이 보이는 패션이잖아요. 이게 어떻게 가능했는가. 참 신묘한 기법이에요. 이것을 자세히 보면 얇은 선으로 수십만 번 ×자를 긋고 육각형의 무수히 많은 선을 그려놓으니까 멀리서 보면 그것이 흰 사라로 보였건 거예요. 그 붓질이 몇 십만 번인지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런 ‘영웅적인 참을성’을 갖지 않은 사람은 이 장인의 세계에 들어올 방법이 없는 거예요.(웃음)

    고려불화 가운데 법화경(法華經) 보탑도(寶塔圖)를 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받침대부터 금물로 7층 보탑도를 그렸는데, 사실은 그린 게 아니라 법화경 7권의 전 내용을 글로 쓴 거예요. 지붕골이나 풍경, 서까래 등이 다 글씨로 그림 효과를 낸 겁니다. 4.5m 높이의 보탑도가 그래서 나왔습니다. 믿음이 가게 하기 위해서 그런 거지요. 참 끔찍해 죽겠는데, 저것을 만들 때 한 글자 쓰고 세 번 절했대요, 나 참.(웃음)

    우리 미술에 대해서 가끔 ‘조선 사람은 뭐 끝마무리를 대충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보탑도를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전권을 쥐고 있으면 한국미술사를 배우지 않은 사람에겐 주민등록증을 발급하지 않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헛소리가 안 나오지.(웃음) 때로는 치밀한 것의 극한까지 가야 화려함의 극한적인 맛이 있고 스스럼없는 그런 맛을 구사할 수도 있는 거예요. 우리에게도 그런 장인적인 치밀함이 있었나라고 물어볼 때 우리는 대답할 말이 있는 겁니다.

    추사의 장인적 수련과 연찬

    추사는 대단히 개성적인 글씨를 썼습니다. 임창순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국립박물관에서 추사 탄신 200주년 기념 강연을 하면서도 언급했는데요. 추사체는 대체로 여러분이 쓰는 엉망진창의 글씨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다만 여러분과 추사가 다른 것은 그분은 이 자율적인 글씨를 들여오기 전에 칠십 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내고, 붓 1000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드는 수련을 했습니다. 추사체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이라고 했어요. 고전으로 들어가서 새것으로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 추사는 팔뚝에 역대의 명비문 309개를 간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법도를 지키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개성적인 글씨가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팔뚝 아래 309비는커녕 한 비도 없기 때문에 그 질서가 안 나왔다는 거지요. 바르셀로나 피카소 박물관에 가봐요. 피카소가 얼마나 사실적인 그림을 잘 그렸는지 알 수 있어요. 14세 때 그린 그림들을 봐도 찬탄이 절로 나옵니다. 그랬으니까 나중에 괴물 같은 여자들 그려도 다 멋있다고 하게 된 거지요. 장인적 수련과 연찬이 있은 다음에 개성을 추구한 것입니다.

    추사가 얼마나 엄격했나 좋은 예가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추사한테 와서 난초를 배웠어요. 그런데 추사가 북청으로 유배를 갔다가 1년 만에 돌아왔어요. 그러자 흥선대원군이 그동안 연습한 난초를 갖고 와서 평을 해달래요. 추사가 그랬어요.

    ‘대감의 난초 실력이 이렇게 늘었을 줄 몰랐습니다. 압록강이동(鴨綠江以東)에 대감이 그린 것 같은 난초는 없습니다.’ 요새는 한수이남 그러지만 그때는 압수이동이라고 했어요. 압록강이동이라 하면 우리나라 전체이지요. ‘나한테 난초를 구할 사람은 차라리 석파(石坡·흥선대원군 이하응)에게 구하는 게 낫겠습니다.’ 그런데 옛사람의 글은 처음에 칭찬이 나오면 나중에 뒤집는다는 뜻이에요.(웃음)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어요.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일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 이 마지막 일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어쩌라는 얘기입니까?(웃음) 더 열심히 하라는 얘기지요. 지금 우리가 2% 부족하다고 떠들고 있는데 여기는 0.01% 부족하다고 난리를 치는 거예요. 뭔가 이루어낸 사람들이 거저 이루어내지 않았다는 것도 추사의 이 말 속에서 알 수 있지요.

    다시 장인정신을 묻는다

    추사 김정희의 명필 ‘잔서완석루’.

    대교약졸의 무심한 경지

    불국사 석굴암은 신라의 전직 국무총리인 김대성이 25년간 만든 거 아닙니까. 그에게 전권과 모든 편의를 다 주고서 만들라고 하니까 그런 명작이 나온 것이지요. 돈이 얼마가 들어도 그 시대에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으로 하라고 할 때 장인정신이 나오는 겁니다. 기술자들에게 무조건 장인정신 가지라고 한다고 해서 갖춰지는 게 아니지요. 시스템이 장인정신을 받쳐주고 그 장인들에게 그와 같은 대접을 할 수 있을 적에 명작이 나오는 것이지요.

    석굴암 불상을 둘러싼 벽을 보면 돌판들을 이어 붙여서 원으로 만들었어요. 남천우 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어요. 통일신라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구했든지 삼각함수의 사인(sin) 15。의 값을 우리보다 더 정확하게 구했다고요. 그것을 구할 줄 모르면 이것은 애당초 설계가 불가능한 거예요. 더욱이 1m를 쟀는데 1㎜의 오차가 없다는 것은 1000분의 1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건데 석굴암에선 10m를 쟀는데 1㎜의 오차가 없었어요. 명작이 탄생할 때 장인들이 갖고 있던 공력이 그런 것이었어요. 1000분의 1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았던 거예요. 석굴암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에 다 쓰여 있어요.(웃음)

    장인이 꼼꼼한 기교뿐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서 무심한 경지에 가는 것을 말하자면 철학이 들어가고 복잡해집니다. 노자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고 했어요. 큰 재주는 졸해 보인다고. 영어로 얘기하면 ‘Great mastership is like foolish.’대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이 말을 하면 그 참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저는 같은 뜻으로 ‘진짜 약은 놈은 약은 표도 안 낸다’라는 말이 있다고 해요.(웃음) 큰 재주는 재주가 드러나지 않는 거예요. 그냥 평범해 보이는데 그 속에 재주가 들어 있어요. 그래서 추사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이라고 했어요. 잘됐는지 못됐는지 계산이 안 되는 거예요. 잘되고 못되고를 염두에 두지 않는 거예요.

    그 무심한 경지. 추사의 글씨 세계가 그렇고 우리 백자 달항아리가 그렇고 일본인들이 미치게 좋아하는 고려 다완(茶碗·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사발)이 그 경지를 얘기해주고 있습니다. 추사가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다 떨어진 글씨에 완고한 돌멩이만 있는 집)라고 쓴 이 글씨를 보고 청명 임창순 선생은 ‘동양서예 2000년 역사에 윗줄은 맞추고 아래는 빨랫줄에 빨래 널어놓은 것처럼 이렇게 개성적으로 쓴 사람은 없다’고 했어요.(웃음)

    백자 얘기 가운데 책에 안 나오는 얘기를 하나 하지요. ‘이도’다완(井戶茶碗)의 전설을 어떻게 봐야 될 것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시대 때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이뤄놓은 것에 대해서는 존경의 마음이 조금도 없어서 다 우리가 옛날에 가르쳐준 거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웃음) 일본 사람들은 참 억울하지요. 그렇게 따지면 중국 사람은 우리보고 뭐라고 할 거예요. 문화란 그쪽으로부터 자극을 받아서 자기 것으로 만들면 그 나라 문화인 것인데 일본이 우리한테 배워서 일본화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인정을 잘 안하려 들어요.

    어수룩하지만 더 높은 차원

    일본의 다도(茶道)도 우리가 다 가르쳐줬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15세기부터 일어났던 일본의 다도문화는 대단했습니다. 센노리큐(千一休) 스님의 아들들이 안채 바깥채에서 전개해간 우라(うら)센카(千家), 오모테(おもて)센카(千家)는 우리가 가르쳐준 것을 넘어선 경지였어요. 일본 무로마치 시대는 조선시대하고 같은 시기인데 이때에 다도문화가 있었어요. 우리에게 선비문화가 있었다면 일본에선 사무라이 문화가 있었어요. 사무라이들은 공부보다는 차 마시고 선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책을 안 읽으니까.(웃음)

    무로마치 문화의 상징은 렌카(れんか), 가부키(かぶき), 차 마시기 이 세 가지입니다. 렌카는 누가 시를 한 수 지으면 그것에 운을 맞춰주는 것이고, 가부키는 전통연극, 차 문화는 잎차가 아니라 가루차였어요. 15세기가 되면 다이묘(大名)들이 다다미 60장 깔려 있는 30평짜리 방에서 조폭들 앉듯이 죽 늘어앉아 다회를 엽니다. 그래서 다두(茶頭) 되는 사람이 주도해서 차를 마시면 초대받은 사람들도 따라 마시고, 그 다음에 다완을 감상합니다. 그러면서 와비·사비(わび·さび, 侘寂·투박하고 조용한 상태) 어쩌구 하면서 정말 아름답다고 얘기합니다.

    15세기 때만 하더라도 다완은 아주 고급스럽고 값비싼 것, 그러니까 송나라 때 천목(天目)이라고 해서 환상적으로 어울리는 것, 또 고려청자의 비췻빛을 발하는 것, 깔끔한 것 그것이 다도인들이 선망하는 찻잔이었어요. 그러다가 그 호화의 극치로 간 것이 순금으로 만든 다실이었지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사카성 다실은 다다미 빼고 도배지 등 나머지는 다 금으로 발라버렸어요. 그리고 금잔으로 차를 마셨어요.

    그때 센노리큐라고 하는 스님이 등장해서 도요토미의 차 선생이 됩니다. 그는 진정한 차의 깊은 세계는 그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비와 와비의 미학이 있는 것이 진정한 것이다, 감추어진 것, 어수룩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높은 차원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거지요. 일본의 오카쿠라 텐신이라는 사람이 보스턴 미술관에서 100년 전에 이 얘기를 보스턴에 있는 귀부인들 앞에서 영어로 설명하면서 사비, 와비를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냥 와비의 미학이라고 해놓고 영어로 ‘incompletion for the completion’이라고 했어요. 완전성을 위한 더 높은 차원의 불완전성. 현재는 불완전하게 보이지만 사실 완전성보다도 더 높은 것이라는 얘기예요.(웃음).

    조선의 달항아리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은 완벽한 원이 아니고 일그러진 것 같지만 너그럽고 손맛이 있고 여백이 있고 우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대교약졸(大巧若拙)에 있지요. 이런 차원이 있는 것이 높다는 것을 리큐 스님이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반영한 것이 조선 막사발, 이 도공들이 잘 만들고 못 만들고의 개념 없이 그냥 만들어낸 이 막사발이 그야말로 금잔보다도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겁니다. 그때 조선에서 뛰어난 장사꾼이 나와서 저것을 비싸게 팔아먹었어야 되는데 그야말로 막사발 값으로 그냥 우리가 건네줘버렸지요.

    그런데 어쩌다 센노리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한테 사형명령을 받습니다. 일본에서는 사형명령을 받으면 둘 중 하나입니다. 자기가 할복할 권한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 죽을래, 네가 죽을래’가 되는 겁니다. 리큐 스님은 자살을 택해요. 죽기 전에 스님은 마지막 다회를 엽니다. 센노리큐가 마지막 다회를 열어서 수의를 입고 저 이도다완으로 차를 마신 뒤 찻잔을 어루만지면서, 이것을 누구에게 물려줄 까 고민하지요. 지금 일본에서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다완과 같은 겁니다. 사실 물려주려면 제자한테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리큐 스님은 “비극적인 운명을 가진 자의 입술이 스쳐간 이 잔을 누구에게 넘겨줄 수 있겠느냐”며 찻잔을 깨고, 할복합니다. 그 센노리큐의 아들이 뒤를 이어간 것이 오늘날 일본 다도의 맥입니다.

    문화는 소비자가 만든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미적 척도로 계산이 안 되는 더 높은 차원의 이것은 일본 사람들이 추구했던 고려 다완의 미학입니다. 이런 다완은 장인들이 잘 만들겠다는 욕심조차 없을 적에만 가능한 겁니다. 억지로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은 표가 납니다. 이것은 장인정신을 뛰어넘는 한 차원 높은 미학인데 이런 미학이 서양에는 없습니다.

    불완전성. 그것이 불완전해서 불완전한 것이고 미숙해서 미숙한 것이 아니라는 것, 완벽한 것에는 오히려 우리가 감정이입할 수 있는 여백이 없는데 어딘가 관객도 같이 호흡할 수 있는 여백까지 주는 그 높은 차원의 미학이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장인에게 거기까지 요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결국 나중에는 국보가 되고 보물이 되고 우리 후손들에게서 상찬을 받게 되는 겁니다.

    결론으로 들어가서 장인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줘야 됩니다. 프랑스 와인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바로 이 품질인증제 덕입니다. 19세기부터 품질인증제를 해서 5만원짜리 와인은 분명히 5만원짜리라는 품질을 보증해준 거예요. 그러니까 100만원을 보내면 정확하게 100만원어치를 보내왔어요. 리모주(Limoges)에서 나온 에나멜 공예품이라든지 리옹의 장식미술품도 품질인증제로 장인정신이 검증되고 있어요. 장식학교, 장식 아틀리에, 장식 조합과 연계된 시스템을 지금도 그 전통 그대로 갖고 있거든요.

    일본 사람들한테도 배울 만한 것이 있습니다. 일본은 남보다 잘할 수 있는 것 하나가 있으면 그것으로 존경받아요. 일본의 성산인 히예산(枇杷山)에는 비석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조우일우 차즉국보(照于一隅 此則國寶)’. 오직 한 자리만 비추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우리는 나라의 보배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일본에선 지금도 도자기 도공은 14대, 15대까지 가고 있고 우산 잘 만드는 집도 몇 대를 내려가고, 단팥죽 잘 만드는 집도 4대째 내려오는 등 그런 사례를 많이 찾을 수 있어요.

    그런데 15대 내려가도록 계속 아들만 낳았다는 얘긴가요?(웃음) 일본에는 성을 바꾸는 데릴사위 제도가 있어서 사위의 성을 자기 성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딸만 낳아도 그 대를 이어갈 수 있었어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국내에서도 대를 이어가다가 딸만 낳을 경우 사위가 이어받아 다른 성씨로 대물림되는 사례가 있거든요. 사실 친손자나 외손자나 내 피가 들어간 것은 똑같습니다. 0.0001%도 다를 바가 없어요. 그래서 요즘 장인으로 내려오는 가문에서는 제발 딸 낳으라고 축수한대요. 왜냐하면 아들을 낳으면 강제로 시켜야 되고 딸 낳으면 잘하는 제자 붙잡아다가 성 바꾸면 되니까.(웃음)

    마지막으로 덴마크의 고급 도자기인 로열 코펜하겐(Royal Copenhagen)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몇 년 전 제가 문화재청장일 때 덴마크 여왕이 우리나라에 온 적이 있어요. 창덕궁을 보고 아주 환상적이라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때 하얏트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여왕 주재 만찬이 있었는데, 초대를 받아서 갔지요. 800명 정도가 참석했고, 10개 정도의 코스 요리가 나왔는데 마지막 커피잔까지 모두 로열 코펜하겐으로 나왔어요. 그래서 옆자리에 앉은 덴마크 대사 부인한테 물어봤어요. 이 그릇들을 다 어디에서 빌려왔냐고. 그러자 여왕이 올 때 모두 비행기에 싣고 왔대요. 한 나라의 왕가가 전통을 지키며 문화의 자존심 혹은 의전이 뭔지 보여준 사례가 아닐까 싶어요. 우리가 백자와 청자가 그렇게 뛰어나다고 하면서 그것에 대해서 그런 존중을 보인 일이 있나요? 기껏해야 경기도 광주에 무명 도공의 비(碑)라고 하는 것이나 세워놓고 있었지요.

    장인들보고 일 똑바로 하라고 하지 말고 소비자가 장인을 대접해서 장인정신이 들어간 비싼 것을 사줘야 합니다. 그래야 장인이 나옵니다. 정말로 잘 만든 것을 비싼 돈을 주고 사는 소비자가 있을 때 그 문화가 나옵니다. 문화는 공급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만듭니다.

    이 시대에 장인정신을 물을 때 장인을 꾸지람하려고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결론은 우리한테 있다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국가의 시스템도 최선을 다한 것이 보장받을 수 있는, 질(quality)을 따져야 합니다. 부정부패가 있나 돈을 떼어먹지 않았나 하는 데 잔신경 쓰는 것이 아니고 진짜 제대로 된 것을 했는지에 대해 더 비중을 두는 그런 문화풍토가 있을 때 우리 시대의 장인정신이 구현된다고 봅니다. 그것이 보장될 때 우리 문화 능력이 커지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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