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호

무장투쟁 전개한 행동파 독립운동가 신채호, 민족개조론 편 친일 개화론자 이광수

신채호와 이광수

  •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kimhoki@yonsei.ac.kr

    입력2011-08-23 10: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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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신채호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무정부주의까지 수용했다. 근대적 민족주의를 체계화한 그는 문화운동을 거부하고 무장폭력투쟁을 민족해방의 주요 전략으로 제시했다.
    • 반면 일제강점기 언론인과 소설가로 문명(文名)을 떨친 이광수는 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문화운동으로 민중을 계몽하려 했다.
    • 하지만 그의 문화적 독립운동은 뒷날 친일행위로 변절된다.
    무장투쟁 전개한 행동파 독립운동가 신채호, 민족개조론 편 친일 개화론자 이광수
    이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이 내린다. /

    오동나무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오던

    한줌의 유골 같은 푸스스한 눈발이 / 동력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

    꽃메 마을 고령 신씨도 이제는 아니 오고 /

    금초하던 사당지기 귀래리 나무꾼 / 고무신 자국 한 줄 눈발에 지워진다.”



    시인 도종환의 작품 ‘고두미 마을에서’다. 부제는 ‘단재 신채호 선생 사당을 다녀오며’다. 고두미 마을은 충청북도 청원군에 있다. 도종환의 이 시가 부지불식간에 생각난 것은 지난해 8월 말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였다. 상하이를 찾아간 것은 한 잡지에 연재한 기획 기사 때문이었는데, 한일병합 100년을 맞이해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와 윤봉길 의거가 있던 훙커우 공원을 직접 찾아간 적이 있다.

    그동안 책에서만 봐오던 임시정부 청사를 직접 둘러보니 이곳을 무대로 활동한 여러 독립지사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이승만, 김구, 안창호, 김규식, 여운형 그리고 신채호가 떠올랐으며, 신채호를 생각하니 다시 도종환의 시 ‘고두미 마을에서’가 떠올랐다. 상하이의 뜨거운 여름 날씨에 멈출 줄 모르는 땀을 손으로 씻으며 푸스스한 3월의 눈발 속의 고두미 마을을 그린 이 시를 떠올리던 기억이 마음 한구석에 생생히 살아 있다.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내가 이 시를 처음 읽은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이 절정으로 가던 시대였다. 돌아보면 1980년대는 ‘열정의 시대’였다. 이 열정의 시대를 이끈 동력은 민족해방과 노동해방에 대한 열망이었다. 이념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였다. 어느 나라이건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변혁운동의 양대 이념적 지반을 이룬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른바 민족해방(NL), 민중민주주의(PD)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두 이념은 격렬하게 분출했다.

    이 기획에서 앞서 고려시대 김부식과 일연을 다룰 때 민족주의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민족주의는 모더니티의 한 요소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 역사적 기원은 전통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계 내에서는 민족주의의 기원에 대한 토론이 제법 활발히 진행되기도 했는데, 우리 민족이 근대 이전에 형성된 만큼 그 이념적 지반인 민족주의의 역사적 기원을 모더니티의 시간 안에 가두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사전적 의미에서 민족이란 한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언어·풍습·종교·정치·경제 등 다양한 사회 및 문화생활을 공유해온 공동체를 뜻한다. 민족주의란 바로 이 민족이 갖는 정치적·의식적 기획, 다시 말해 민족의 자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모색하고 추구하는 이념을 뜻한다.

    무장투쟁 전개한 행동파 독립운동가 신채호, 민족개조론 편 친일 개화론자 이광수

    충북 청원군에 있는 신채호 선생의 묘소.

    우리 역사와 사회에서 이러한 민족주의가 갖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민족주의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는 가치이자, 나이가 들어 보수와 진보로 나뉜다 해도 대다수 사람이 공유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은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이가 백범 김구인데, 김구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도 다름 아닌 민족주의다.

    이러한 우리 민족주의가 뜨겁게 분출하고 새롭게 재구성된 시기가 바로 식민지 시대다. 식민지 시대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민족의 주권이 상실된 시대다. 민족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에서 민족주의가 부상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번 호에서는 식민지 시대의 가장 강렬한 시대정신을 이룬 민족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자 한다.

    식민지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식민지 시대에 대해서는 학교 수업을 통해 배우기도 하지만, 필자 세대는 부모님으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내 경우 평생을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던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는 식민지 시대에 대한 인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 모더니티는 제도와 일상생활로 이뤄지는바,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당시 경성, 일본, 그리고 만주에 대한 이야기는 식민지 일상생활을 이해하는 데 나름대로 소중한 자료였다.

    그 가운데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식민지 시대 경성의 풍경이었다. 1930년대 후반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광복 직전 혜화동 주변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던 부모님의 경성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보다도 더 실감나는 것이었다. 전차, 다방, 축음기가 만들어낸 모더니티의 풍경에 대해 부모님이 느꼈던 놀라움과 두려움이라는 양가감정(兩價感情)은 모더니티를 바라보는 필자의 무의식에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 시대의 36년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다. 요즘 기준으로 평균수명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시간이다. 더욱이 다른 국가의 식민지 경험과 비교할 때 일본의 식민통치는 더없이 강압적이었다. 마치 영구적인 식민지의 건설을 목표로 한 듯 일제 식민국가는 우리 사회를 철저히 통치하고 억압했다. 그 핵심적 국가기구는 헌병을 기반으로 한 경찰제도였다. 1919년 3·1운동의 결과 문화정치가 표방됐지만, 경찰제도에 기반을 둔 탄압과 수탈은 오히려 강화됐고, 한민족 말살정책은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추진됐다.

    한 자료에 따르면, 경찰관서의 경우 1918년 751개소였지만 1920년에는 2716개소로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에 경찰 인원도 5400명에서 1만8400명으로, 경찰 비용도 800만원에서 2400만원으로 3배 정도 늘어났다. 억압적 국가기구에 기반을 둔 이러한 식민통치는 1930년대 들어와 일본의 대륙 침략전쟁에 따른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중앙집권화됐으며, 그 운용방식 또한 더욱 군사적 형태로 바뀌었다.

    이러한 일제의 강압적 식민 지배가 우리 모더니티의 형성에서 개인적, 집합적 주체의 정치·문화 경험과 제도화에 결코 작지 않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무엇보다 일제의 식민지 국가기구는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는 감시국가의 성격을 강화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자발적 조직화를 저지하는 동시에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포함한 민족해방운동을 극도로 탄압했다.

    이러한 식민주의의 맞은편에 놓인 것이 다름 아닌 민족주의다. 전통사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우리 민족주의는 식민지 시대를 경유하면서 근대적 이념으로 발전했다. 여기에는 역사학의 기여가 중요했는데, 박은식과 더불어 특히 신채호의 역할이 중요했다. “내가 살면 대적(大敵)이 죽고 / 대적(大敵)이 살면 내가 죽나니 / 그러기에 내 올 때에 칼 들고 왔다.” 신채호의 소설 ‘꿈하늘’에 나오는 이 구절은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신채호의 생애

    신채호는 1880년 충남 대덕군(현 대전시 대덕구)에서 태어났다. 널리 알려진 호는 단재(丹齋)다. 아버지는 신광식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 부인이다. 아버지가 죽자 신채호는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해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1898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905년 성균관박사가 된 다음 황성신문 등에 왕성하게 사설을 쓰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신채호의 삶은 오로지 독립운동에 맞춰졌다. 1906년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맡았고, 1907년 신민회에 가입했으며, 1910년에는 안창호·이갑 등과 톈진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1910년대에 그는 신한청년회를 결성하는 등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수시로 만주 지역을 답사하면서 우리 역사를 체계적으로 저술하는 일에 착수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해 의정원 전원위원회 의장으로 피임됐으며, 일체의 타협을 거부한 철저한 독립운동 노선을 걸었다.

    1920년대 신채호 독립운동의 주요 무대는 베이징이었다. 그는 민족주의 역사학을 확립한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등을 집필하는 동시에 의열단 선언문으로 알려진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했다. 이즈음에 신채호는 자신의 사상적 거처를 무정부주의로 옮겨갔다. 1928년 대만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사건과 연관돼 다롄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된 그는 10년 형을 언도받아 뤼순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6년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순국했다.

    신채호는 언론인이자 역사학자, 무엇보다 독립운동가였다. 언론인으로서의 신채호의 이름은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사설을 통해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역사학자로서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31년 6월부터 10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조선사’를 통해서였다. 곧이어 그는 조선일보에 다시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해 한국사 연구에 일대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광복이 된 후 1948년에 ‘조선사’는 이를 국내에 소개한 안재홍이 서문을 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로 간행됐다. ‘조선상고사’는 신채호의 대표적인 역사서다. 이 책의 첫 구절은 너무도 유명하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 민족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신채호에게 역사란 ‘아’인 조선 민족과 ‘비아’인 다른 민족 간 투쟁의 기록을 뜻한다. 이러한 역사관은, 사회학자 신용하가 지적하듯이‘민족적인 것’과 ‘비민족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사대적인 것’, ‘고유한 것’과 ‘외래적인 것’, ‘혁신적인 것’과 ‘보수적인 것’의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전형적인 민족주의 역사이론이라 할 수 있다. 신채호의 이러한 역사관은 경쟁을 강조하는 사회진화론과 변증법을 강조하는 헤겔의 역사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민족주의론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조선상고사’는 총론과 11편으로 이뤄져 있다. 구체적으로 1편 총론, 2편 수두시대, 3편 3조선 분립시대, 4편 열국쟁웅(列國爭雄)시대 대(對) 한족격전(韓族激戰)시대, 5편 (1) 고구려 전성시대, (2)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6편 고구려·백제 양국의 충돌, 7편 남방제국 대(對)고구려 공수(攻守)동맹, 8편 3국 혈전의 시(始), 9편 고구려 대수전역(對隋戰役), 10편 고구려 대당전역(對唐戰役),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이 그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무장투쟁 전개한 행동파 독립운동가 신채호, 민족개조론 편 친일 개화론자 이광수

    이광수의 친손녀인 이성희씨가 번역한 ‘무정’ 영문판.

    ‘조선상고사’가 갖는 의의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신채호는 역사를 모순관계의 상극투쟁을 통해 사회가 진보하는 과정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이러한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사료의 수집 선택과 그에 대한 비판이 수반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역사학자 이만열은 이를 실증주의 방법의 제시라고 보고, 신채호를 한국 근대 역사학의 확립자로 평가하고 있다.

    둘째, 이 책은 한국 고대사의 영역을 한반도에서 만주 지역으로 확장시킴으로써 고대사 인식체계의 일대 전환을 요구했다. 이만열이 지적하듯이, ‘조선상고사’는 우리 고대사를 신라 중심의 역사에서 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로 전환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신채호는 김부식의 역사인식을 일관되게 비판해왔다. 그 단적인 예가 고려 시대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 1000년 이래 가장 큰 사건’이라 한 것인데, 신채호는 이 사건을 사대파에 의한 북벌파의 좌절로 파악했다.

    현재적 관점에서 ‘조선상고사’에서 다뤄지는 내용은 그러나 적잖이 낯설다. 이른바 재야사학자들은 ‘조선상고사’의 견해를 크게 수용한 반면, 다수 아카데미 역사학자들은 ‘조선상고사’의 주장에 거리를 둬 왔다.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어느 해석이 더 타당하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아카데미의 관점에서는 민족주의에 대한 과도한 강조나 실증성의 결여가 신채호 역사 인식의 약점으로 제시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민족주의와 무정부주의

    신채호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먼 길을 갔던 지식인이다. 애국계몽운동에서 시작해 독립운동으로 나아갔으며, 다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무정부주의 운동까지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는 근대화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였으며, 또한 무정부주의자이기도 했다. 신채호라는 한 지식인의 사상적 편력을 통해 모더니티를 향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시대정신의 스펙트럼을 조망할 수 있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신채호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근대적 민족주의의 체계화다. 신용하는 신채호의 민족주의를 ‘시민적 민족주의’라 이름 붙이는데, 신채호는 국민의 생명·재산·권리를 보호하는 민족국가를 중시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완전독립과 절대독립을 쟁취해 자주부강한 입헌공화국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완전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신채호가 선택한 것은 무장투쟁이었다.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신채호의 민족주의론은 민족국가의 자율성과 입헌공화제를 특권화한다는 점에서 근대적 민족주의론이라 할 수 있다.

    신채호의 사상적 모험에서 특기할 것은 무정부주의다. 1910년대 후반부터 신채호는 크로포트킨 이론을 포함해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가졌으며, 1923년 의열단의 요청에 의해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에는 무정부주의자로서의 그의 사상이 표출됐다. ‘조선혁명선언’은 신채호의 후기 사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그는 외교론과 준비론을 주장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론을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운동론 등을 주장한 국내의 실력양성론 또한 거부하고, 테러에 기반을 둔 직접행동론을 민족해방의 주요 전략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신채호의 무정부주의는 그가 민족주의에서 민중주의로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일본 제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민중직접혁명을 통해 민중의 자유가 보장되고 민중이 주인인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게 그가 마지막에 도달한 결론이다.

    신채호의 무정부주의에 대해서는 그 평가가 엇갈린다. 신용하는 신채호의 무정부주의가 본질적으로 한국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주장된 혁명적 민족주의임을 강조한다면, 역사학자 이호룡은 신채호의 사상을 민족주의의 틀 내에서 가둘 게 아니라 무정부주의의 독립성을 주목해야 함을 강조한다. 어떻게 평가하든 무정부주의를 포함한 신채호의 독립사상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신채호와 이광수의 만남

    신채호는 당대 여러 지식인과 교유했다. 기록에 따르면 신채호의 성격은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 한반도를 떠나던 신채호는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 들른 적이 있다. 당시 오산학교에 재직하던 한 교사는 신채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단재는 세수할 때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빳빳이 든 채로 두 손으로 물을 찍어다가 바르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룻바닥과 자기 저고리 소매와 바짓가랑이를 온통 물투성이로 만들었다. …단재는 결코 뉘 말을 들어서 제 소신을 고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남의 사정(私情)을 보아서 남의 감정을 꺼려서 저하고 싶은 일을 아니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웃고 이야기를 할 때에는 퍽이나 다정스러웠다.”

    이 기록을 남긴 오산학교 교사는 다름 아닌 이광수였다. 신채호와 이광수의 만남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아래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이광수는 결국 친일의 길로 나아갔던 지식인이다. 한때 독립운동을 같이 했지만, 신채호가 일관된 비타협노선을 고수한 반면, 이광수는 타협노선을 선택했고 그 종착역은 안타깝게도 친일이었다. 여하튼 독립운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신채호의 짧지 않은 생애는 현재적 관점에서 볼 때 여전히 가슴 한 켠을 서늘하게 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신채호의 삶과 사상을 다룬 여러 글을 읽어봤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저작 중 하나가 신용하의 ‘증보 신채호의 사회사상 연구’다. 이 책에 따르면, 신채호는 평소 지인들에게 “생전에 광복을 못 볼진대 왜놈들의 발끝에 차이지 않게 유골을 화장해 바다에 띄워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신채호의 시신은 화장되어 유골로 국내에 들어와 고두미 마을에 토장됐다. 당시 한용운과 오세창이 비갈을 짓고 비석을 세웠으며, 1980년 그의 탄신 100주년을 맞아 무덤 앞에 영당을 지었다.

    이광수의 생애

    신채호가 오산학교에서 만났던 이광수 또한 20세기 전반 한국 사회에서 문제적 지식인이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이광수는 최초의 근대소설이라 할 수 있는 ‘무정’을 쓴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다. 둘째, 그는 실력양성론, 민족개조론 등의 온건한 독립운동 노선을 대표했다. 그의 이러한 노선은 근대 계몽주의를 널리 알린 나름대로의 기여가 있었음에도 결국 친일로 귀결됐으며, 이로 인해 광복 이후 상당한 고초를 겪었다.

    이광수는 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종원이며 어머니는 충주 김씨 부인이다. 필명을 여럿 사용했지만 대표적인 호는 춘원(春園)이다. 1902년 부모의 죽음으로 고아가 된 이광수는 동학에 입도했고, 1905년 일진회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됐다. 대성중학교와 메이지학원을 다녔으며, 1910년 메이지학원을 졸업해 정주 오산학교 교사가 됐다. 이후 중국 등을 유랑한 그는 1915년 다시 도일해 와세다대학 예과에 편입했다.

    1917년 기념비적인 ‘무정’을 발표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19년에는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이후 상하이로 탈출한 그는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으로 일하다가 1921년 귀국했다. 1922년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해 논란을 일으켰으며, 1923년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이광수는 상하이 시절부터 안창호에게 큰 감화를 받았는데, 1926년 안창호의 영향 아래 흥사단의 국내 조직이라 할 수 있는 수양동우회를 결성했다.

    1930년대에 이광수의 삶은 매우 드라마틱했다. 1932년 대표작 중 하나인 ‘흙’을 발표했고,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이듬해 보석으로 풀려났다. 1938년 안창호가 죽자 큰 실의에 빠진 그는 1939년부터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가야마 마쓰로(香山光浪)로 창씨개명을 했으며, 친일 시·소설·논설을 발표하고 학병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8·15 광복 이후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구속되기도 했던 그는 1950년 6·25전쟁 당시 납북돼 그해 12월 평안북도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광수는 식민지 시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지식인 중 한 사람이다. 이 땅에서 교육을 받은 이라면 그가 쓴 근대소설의 효시인 ‘무정’과 농촌계몽운동을 다룬 ‘흙’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또한 그 과정에서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되며, 이에 대한 비판들도 접하게 된다. 광복 이후 이광수는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고 스스로를 변호했는데, 진정성이 결여된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많은 이를 격분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광수는 소설가였지만, 언론인과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1910년대부터 그는 많은 논설을 발표했으며, 안창호를 만난 이후에는 국내 흥사단 운동을 이끌었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이광수의 활동에서는 후자가 전자 못지않게 중요했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라는 기념비적 업적을 낸 국문학자 김윤식은 이광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다름 아닌 수양동우회 운동이었으며, 문학은 이광수 자신의 표현처럼 정작 여기(餘技)였다고 지적한다.

    ‘민족개조론’의 문제점

    아직 직업의 분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모더니티 초기에 어느 나라이건 지식인은 일종의 르네상스적 작업을 하게 된다. 신채호를 보더라도 ‘꿈하늘’‘용과 용의 대격전’ 등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광수도 마찬가지다. 그는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개조론’ ‘민족적 경륜’ 등 여러 논설을 발표했다. 발표 당시 큰 대중적 인기를 모은 소설 ‘흙’을 보더라도 이 작품은 당시 동아일보가 벌인 브나로드운동과 동우회운동에 밀접히 관련돼 있다.

    이광수의 작품 가운데 특히 1922년 ‘개벽’에 발표한 장문의 논설 ‘민족개조론’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민족개조론’은 독립운동 양대 노선을 이룬 준비론과 투쟁론, 실력양성론과 무장투쟁론에서 준비론, 실력양성론에 가까운 논리를 제시했다. 그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민족개조의 의미와 역사를 다루고, 중간 부분은 민족개조의 취지와 가능성을 검토하며, 마지막 부분은 민족개조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이광수는 논설의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민족개조가 있을 뿐이니 곧 본론에 주장한 바외다. 이것을 문화운동이라 하면 그 가장 철저한 자라 할 것이니 세계 각국에서 쓰는 문화운동의 방법에다가 조선의 사정에 응할 만큼 독특하고 근본적이요 조직적인 일 방법을 첨가한 것이니, 곧 개조동맹과 그 단체로서 하는 가장 조직적이요 영구적이요 포괄적인 문화운동이외다. 아아, 이야말로 조선민족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외다.”

    민족개조론은 문화운동을 통해 민족개조를 모색하려는 온건 민족주의 성향의 담론이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무엇보다 안창호의 사상으로부터 크게 영향받았다. 안창호의 독립사상은 독립운동전선을 정비해 결정적인 시기에 대비하자는 준비론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안창호의 준비론은 일제와 타협하는 소극적 노선이 아니라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독립전쟁을 준비하자는 적극적 노선이다. 실력 양성을 위해 그는 민족혁신을 주목하고, 이 민족혁신을 위한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자기개조 및 자아혁신을 강조했다.

    주목할 것은 민족개조론이 안창호의 사상으로부터 출발하기는 하지만, 안창호의 사상보다는 훨씬 더 온건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광수는 그동안 진행돼온 정치적 운동이 모두 일본을 적대시한 운동이며, 조선 내 허락되는 범위 안에서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기존 독립운동의 의의를 부정하는 이러한 논리는 발표 당시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더욱이 이 민족개조론은 김윤식이 지적하듯이 3·1운동 이후 막 등장하기 시작한 사회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총독부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이용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민족개조론으로 대표되는 이광수 논설에 담긴 그 어떤 정치적 무의식이다. 이광수에게 일본 식민주의는 일종의 애증병존의 대상이었다. 일본은 조선에 앞선 문명의 모델이기도 하고 식민적 억압의 주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애증병존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은 억압에 맞서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본적 문명화의 길을 따르는 민족개조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광수는 조선독립과 문명개화의 상반된 가치 사이의 균형을 갖고자 했다. 하지만 이 균형은 매우 위태로운 것이었으며, 그 균형이 문명개화의 열망 쪽으로 기울어졌을 때 그것은 다름 아닌 친일 활동으로 나타났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개인적 이익을 위해 친일을 선택했을 것이지만, 한 걸음 물러서 보면 일본에 대한 이광수의 애증병존의 태도에 친일로 향하는 길은 이미 예비돼 있던 것으로 보인다.

    민족주의의 현재와 미래

    신채호와 이광수의 사상을 돌아보면서 시대정신으로서의 우리 민족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사회학적으로 우리 민족주의에는 세 가지 점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첫째, 우리 민족주의는 서구 민족주의와 사뭇 다르다. 서구 민족주의가 근대에 의해 발명된, 인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말한 ‘상상적 공동체 의식’이라면, 우리 민족주의는 근대 이전의 역사적 전통과 ‘한민족’이란 에스니(ethnie)에 기반을 둔 문화적, 사회적 독자성을 갖는다.

    민족이란 말이 근대 이후에야 활발히 쓰였더라도, 근대 이전에 이미 전쟁을 통해 민족과 타자의 의식적·무의식적 구분이 이뤄졌으며, 이른바 ‘장기지속’으로서의 공통의 생활양식이 집단적으로 공유돼왔다. 요컨대 우리 민족주의 안에는 전통과 근대, 의식과 무의식이 공존하는바, 역사의 굴곡이 컸던 만큼이나 우리 내면 안에는 민족주의가 강인하게 살아 있다.

    둘째, 근대 이후 우리 민족주의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는 민족해방의 전통을 갖고 있었고, 광복 이후에는 그 연장선에서 세계체제에 대응하는 이념적 구심을 이뤄왔다. 우리 민족주의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일제 식민지 경험이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우리 사회에서는 민족해방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졌으며, 신간회에서 볼 수 있듯이 우파와 좌파가 함께 힘을 모으기도 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근대적 민족주의의 형성에 적지 않은 지식인이 기여해왔다는 점이다. 근대적 민족주의의 기원을 어디에 두든 그것은 특히 개항 이후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저항 속에서 형성됐으며,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 민주주의와 결합함으로써 시민적 민족주의의 의미를 갖게 됐다. 이 과정에서 신채호, 안창호 등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역할이 특히 두드러졌는데, 준비론이든 투쟁론이든 이들은 모두 민족주의를 공통의 시대정신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근대적 민족주의의 기획은 우파적 흐름과 좌파적 흐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우파적 흐름이 자유주의와 결합된다면, 좌파적 흐름은 급진주의와 결합된다. 식민지 시대라는 구조적 조건 아래 우파적 민족주의 기획이 문화운동을 중시하는 실력양성론으로 나타났다면, 좌파적 민족주의 기획은 무장투쟁을 중시하는 민중혁명론으로 나아갔다. 이 점에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매우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민족주의의 현재적 조건 또한 재고해봐야 한다. 최근 세계화 시대의 진전과 더불어 경제적 민족주의와 문화적 민족주의가 분화돼왔다. 이에 대해서는 지구적 차원에서 경제적 의존이 강화되면 될수록 문화적 자율에 대한 열망은 커질 수밖에 없다는 민족주의 이론가 파르타 채터지(Partha Chatterjee)의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외환위기 이후 세계화가 강제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지구적 차원에서 경제적 의존의 심화를 보여준다면, 일련의 사회·문화운동은 서구 중심의 세계화에 맞서는 이른바 ‘인정(認定)의 정치’를 상징한다.

    다시 말해, 세계화 시대에 민족주의는 여전히 사회·문화적 저항의 이념적 거점을 이룬다. 지구문화가 강화돼가는 흐름 속에 ‘우리 것’에 대한 열망 또한 커지는 것은 그 증거다. 이러한 경향은 일상생활에서 정신문화까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며, 2002년 두 여중생의 억울한 죽음을 항의하고 평등한 한미관계를 요구한 촛불집회처럼 사회운동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내가 강조하려는 바는 시대정신으로서의 우리 민족주의가 새로운 전환의 지점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한편에선 20세기적 민족국가 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다른 한편에선 민족국가의 경계가 파열되는 21세기적 다문화사회가 도래하는 모순적 경향 속에서 민족주의를 새롭게 재구성하고 위치시켜야 할 과제를 우리 사회는 안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역사에서 비약은 없다는 점이다. 민족주의가 여전히 유효한 기획이라면, 그것의 재구성은 지난 20세기 전반의 근대적 민족주의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해야 하며, 이 점에서 신채호와 이광수의 사상은 여전히 중요한 함의를 안겨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하이에서 생각하는 민족주의

    이제 글을 마무리하면서 앞서 이야기한 상하이 여행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임시정부 청사를 찾은 다음 나는 윤봉길의 의거가 있던 훙커우 공원으로 향했다. 도심을 가로질러 훙커우 공원에 도착해 안내판에서 윤봉길을 기념하는 ‘매원(梅園)’을 찾았다. 흐르는 땀을 손으로 씻으며 20분 정도 걸어가니 매원이 있었다. 윤봉길이 거사한 장소라고 표시된 곳에 서니 몸은 무더웠지만 마음은 더없이 서늘했다.

    1932년 4월29일, 윤봉길은 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개와 자결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 1개를 감추고 식장에 입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이 폭발로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가 죽었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을 포함한 여러 요인이 중상을 입었다. 중국 장제스(蔣介石)가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말했을 정도로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의거 현장에서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윤봉길을 기리는 정자 ‘매헌(梅軒)’이 있었다. 원래의 이름은 ‘매정(梅亭)’이었으나 2009년 4월 우리 측의 요청으로 윤 의사의 호를 딴 ‘매헌’으로 바꾸고 현판을 교체했다고 한다. 1층과 2층으로 이뤄진 정자 안에는 윤 의사와 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내 시선을 특히 끈 것은 정자 2층 안에 목각으로 새겨진 윤 의사의 글이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 나의 우로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32년 12월19일 총살형을 받고 순국했다. 그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겨레의 광복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3년이 지나서야 이뤄졌다.

    무장투쟁 전개한 행동파 독립운동가 신채호, 민족개조론 편 친일 개화론자 이광수
    김호기

    1960년 경기도 양주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 박사

    미국 UCLA 사회학과 방문학자

    한국정치사회학회 부회장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 Korea Democracy Project 공동편집인

    저서: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 등 다수


    매헌을 둘러본 다음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훙커우 공원을 걸어 나왔다. 상하이의 무더운 날씨에 시민들은 공원 그늘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흐르는 땀을 주체하지 못하고 터벅터벅 걷는 길 위에서 나라란, 민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개의 폭탄을 숨긴 채 윤봉길이 그날 걸어갔던 길이 이 길이거나 이 주변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마음은 더없이 숙연해지고 처연해졌다.

    지금 이 글을 마무리하는 이 순간에 지난해 여름 상하이 여행을 떠올리면서 다시 한 번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겨레에 대한 강의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윤봉길과 신채호가 겨레에 바친 뜨거운 사랑을 나는, 그리고 우리는 21세기적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또 실천할 것인가. 아무래도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고두미 마을에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채호는 누구인가

    1880년 충청남도 대덕군에서 출생. 1936년 사망.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던 그는 민족주의 역사학을 체계화한 독립운동가라 할 수 있음. 절대독립을 강조한 그의 민족주의론은 광복 이후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쳐왔음. 주요 저술로는 ‘조선상고사’ ‘조선혁명선언’이 있음.

    이광수는 누구인가

    1880년 충청남도 대덕군에서 출생. 1936년 사망.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던 그는 민족주의 역사학을 체계화한 독립운동가라 할 수 있음. 절대독립을 강조한 그의 민족주의론은 광복 이후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쳐왔음. 주요 저술로는 ‘조선상고사’ ‘조선혁명선언’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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