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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⑧

터키 국부(國父)가 사랑한 ‘사자의 젖’ 라키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터키 국부(國父)가 사랑한 ‘사자의 젖’ 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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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투르크당’ 가담해 술탄 전제왕정에 반기

이후 아타튀르크는 몇 군데 근무지를 옮겨 다닌 뒤 1911년 지금의 리비아 벵가지 지역(최근 리비아 사태에서 반군의 거점 도시로도 유명해진 곳)에 배속돼 이탈리아-터키 전쟁(Italo-Turkish War·1911~1912)에 참전한다. 당시 이탈리아는 국내 통일을 이룬 힘을 바탕으로 해외 식민지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그때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리비아 공략에 나선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아타튀르크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활약을 보여 영관 장교로 진급한다. 그러나 터키 본토를 공격하겠다는 이탈리아의 위협과 함께 때마침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니그로 등 발칸 국가들이 동맹을 결성해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고 나서자 오스만 제국은 서둘러 이탈리아와 강화조약을 맺고 발칸반도 동맹국들과 대적하게 된다.

발칸전쟁(Balkan Wars·1912~1913)이 시작된 뒤 오스만 제국 군대는 주변 열강의 예상을 뒤엎고 계속 패전한다. 아타튀르크의 고향인 살로니카 역시 그리스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아타튀르크의 모든 가족은 이스탄불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불가리아군은 수도 이스탄불에서 100㎞ 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해 오스만 제국을 곤경에 몰아넣었으나, 때마침 유행한 전염병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패전의 위기를 겨우 넘겼다. 아타튀르크가 리비아를 떠나 터키로 되돌아온 것도 바로 이즈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까지 적군에 잃어버린 조국의 현실에 비통해하며 갈리폴리 반도 지역 방위 책임자로서 공훈을 세우기도 했으나, 전세(戰勢)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1913년 5월30일 양측 간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 주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영토를 발칸동맹 국가들에 양도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아타튀르크는 지금의 불가리아 소피아에 사무실을 둔 오스만 제국의 발칸 지역 대사관 무관으로 부임하게 된다.

1914년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한다. 이때 오스만 제국은 독일,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연합군과 맞선다. 아타튀르크는 대령 계급으로 갈리폴리 반도의 로도스토(지금의 테키르다) 지역에서 5군 예하 제19사단 지휘를 맡는다. 그리고 1915년 4월 유명한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 프랑스, 앤잭(ANZAC·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 등 연합군이 갈리폴리에 상륙하는 것을 격전 끝에 성공적으로 격퇴하는 전공을 세운다. 양측에서 무려 30만명 이상 사상자가 나온 이 전투는 오스만 제국이 참으로 오랜만에 거둔 값진 승리였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그는 훌륭한 군사지휘관으로서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된다. 이때 그가 얻은 칭호인 ‘파샤’(지휘자란 뜻)는 그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 이때부터 무스타파 케말이라는 이름보다는 케말 파샤로 불리게 된다. 갈리폴리 전투 지역은 지금도 터키의 주요 전적지로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연합군의 갈리폴리 상륙 저지… ‘국민 영웅’ 부상



터키 국부(國父)가 사랑한 ‘사자의 젖’ 라키

터키 현지인들은 멜론과 페타치즈, 견과류를 안주 삼아 ‘라키’를 즐겨 마신다.

1916년 아타튀르크는 이미 장군의 신분이 되어 제2군 예하 16군단 사령관으로서 코카서스 전선에서 남하하는 러시아 대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한다. 그리고 1917년 3월에는 전체 2군 사령관으로 승진하고 같은 해 7월에는 7군 사령관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그는 점점 전쟁에 임하는 술탄 정부의 무능함과 함께 독일군에 종속되어 있는 오스만 튀르크 군의 현실에 불만을 느끼기 시작한다. 마침내 그는 독일군의 지휘를 받는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면서 이에 대한 개선책에 관해 상부에 서한을 보냈으나 그의 의견은 묵살되고 만다. 그러자 아타튀르크는 7군 사령관 직을 사임하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아타튀르크는 술탄의 후계자인 황태자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을 방문할 때 동행해 보좌하는 임무를 맡는다. 독일에서 아타튀르크는 전황을 살핀 뒤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1859~1941) 앞에서 직설적으로 독일이 이번 전쟁에서 이기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1918년 7월 새로운 술탄이 된 메메드 6세는 불리한 전세를 돌리기 위해 아타튀르크를 다시 현역으로 복직시켜 팔레스타인 지역 방위를 담당하는 7군 사령관직을 맡게 했다. 그러나 이미 연합군에 급격히 기울어진 전세는 아타튀르크로서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군 측의 승리로 끝이 나자, 독일 측에서 싸웠던 오스만 제국은 비참한 결과를 맞는다. 먼저 수도 이스탄불에 연합군이 진주하고, 곧이어 1919년 5월에는 그리스군에 의해 당시 터키 제2의 도시인 이즈미르까지 점거되자, 터키 국민 사이에는 ‘터키라는 나라 자체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함께 민족주의 정신이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이런 바탕 속에 결국 아타튀르크의 주도 아래 1919년부터 터키 독립전쟁(Turkish War of Independence·1919~1922)이 벌어진다.

아타튀르크의 1차 목표는 연합군에 대항해 확실한 터키 민족 저항 세력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비록 제1차 세계대전 이전 터키의 국외 점령 영토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자국의 고유 영토만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겠다는 것이 그의 궁극적 목표였다. 터키 독립운동 과정에서 무능한 술탄 정부를 제치고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 아타튀르크는 현재의 터키 수도 앙카라에 근거를 두고 지지 세력을 모아나갔다.

1920년 아타튀르크는 앙카라를 기반으로 선거에 의해 새로운 터키 의회를 개설할 것을 주창하고, 이에 따라 그해 4월 ‘대국민회의(GNA·Grand National Assembly)’가 출범하게 된다. 대국민회의 회장으로 선출된 아타튀르크는 같은 해 8월 술탄 정부가 연합국으로부터 기존의 영토를 대폭 양도하는 ‘세브르 조약’을 강요당하자 곧 대국민회의 소속 군대를 결성한다. 대국민회의 군대는 이미 연합군의 꼭두각시가 된 구 술탄군대를 제치고 본격적인 터키 독립전쟁에 나서면서 서부 전선에서는 이즈미르로부터 진격해 오는 그리스군과, 동부 전선에서는 아르메니아군과 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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