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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ership in Sports ⑦

주제프 과르디올라 FC 바르셀로나 감독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대성공을 거둔 ‘카탈루냐 최고의 축구 영웅’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주제프 과르디올라 FC 바르셀로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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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말 카스티야 지방의 이사벨라 여왕은 카탈루냐를 비롯한 나머지 지방의 왕국을 모두 흡수하며 스페인의 전국 통일을 이뤘다. 하지만 각 지역의 문화, 전통, 풍습 등이 워낙 달랐던 탓에 이후 500년이 훨씬 지났건만 아직도 완전한 통합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특히 스페인어와 완전히 다른 언어인 고유의 카탈루냐어를 쓰는 카탈루냐 사람들은 지금도 심심찮게 분리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카탈루냐어는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섞어놓은 듯한 언어로 프랑스어에 좀 더 가깝다.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카스티야와 카탈루냐 간 지역감정은 1920년부터 더욱 격해졌다. 당시 스페인의 독재자 미겔 프리모 데리베라 장군은 민족주의가 꽃을 피우던 카탈루냐를 억압하기 위해 FC 바르셀로나부터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페인 국가에 야유를 한 바르셀로나 관중의 행동을 빌미 삼아 FC 바르셀로나의 누캄프 경기장을 3개월 동안 폐쇄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뒤에는 그 수위가 더욱 높아졌다. FC 바르셀로나라는 클럽 이름과 문양도 강제로 바뀌는 수모를 겪었다. 심지어 바르셀로나의 수뇰 회장은 내전 중에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의 군대에 의해 살해됐다.

프랑코 총통의 유례없는 레알 마드리드 편애는 여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스페인 내전을 일으킨 후 국가원수에 오른 프랑코 총통은 레알 마드리드의 열렬한 팬이었다. 하지만 그의 레알 마드리드에 대한 사랑은 도가 지나쳤다. 이는 1950년대 최고의 축구 선수로 군림했던 아르헨티나 출신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영입을 둘러싼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영입 전쟁에서 프랑코 총통이 입김을 불어넣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1953년 디스테파노가 남미 리그를 평정하자,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동시에 그의 영입에 뛰어들었다. 먼저 움직인 쪽은 바르셀로나였고 디스테파노와 도 합의했다. 하지만 스페인 축구연맹은 디스테파노의 바르셀로나행(行)을 아무 이유 없이 허락해주지 않았다. 당연히 스페인 축구연맹의 결정 뒤에는 프랑코 총통의 입김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다. 결국 그를 영입한 팀은 레알 마드리드였다. FC 바르셀로나로서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셈이다.

디스테파노를 얻은 레알 마드리드는 이후 챔피언스리그 5회 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스페인 리그와 컵 대회를 합하면 레알 마드리드가 거둔 우승 경력은 무려 열다섯 번이다. 레알 마드리드가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20세기 최고의 팀’이라고 공인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억울하게 디스테파노를 뺏긴 FC 바르셀로나나 카탈루냐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사실상 도둑질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그렇지 않아도 라이벌 의식이 강했던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축구 경기는 일개 스포츠가 아니라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진 카스티야와 카탈루냐 사람들의 자존심 싸움으로 비화했다. 두 팀의 경기가 영어의 클래식(Classic)을 의미하는 ‘엘 클라시코(El Clasico) ’ 더비로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과르디올라는 누구인가

과르디올라가 왜 카탈루냐의 영웅이 됐을까. 쉽게 말해 그가 뼛속까지 FC 바르셀로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카탈루냐에서 태어났고, FC 바르셀로나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그의 스승인 요한 크루이프 또한 FC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의 영웅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셈이다.

과르디올라는 1971년 바르셀로나 근교의 시골 산트페드로에서 태어났다. 13세에 FC 바르셀로나의 청소년 팀에 몸담으며 축구와 인연을 맺은 그는 선수 시절의 대부분을 FC 바르셀로나에서 뛰었고, 은퇴하자마자 이 팀의 감독이 되어 바르샤(FC 바르셀로나의 애칭)와 카탈루냐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FC 바르셀로나 청소년 팀에 있을 때 과르디올라는 FC 바르셀로나의 홈 구장 누 캄프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와 같은 전설적 선수들의 볼보이를 했다.

19세 때인 1990년 과르디올라는 그보다 앞서 축구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전설적인 커리어를 쌓은 네덜란드 출신의 축구 스타 요한 크루이프 감독에게 발탁됐다. 선수 각자가 자기 포지션을 지키며 플레이하는 게 아니라, 공격과 수비 구분 없이 전원이 공격하고 전원이 수비하는 획기적 전술, 즉 ‘토털 사커’의 창시자이자 역시 FC 바르셀로나의 전설로 불리는 요한 크루이프 현 FC 바르셀로나 명예회장은 1973~74년 시즌 FC 바르셀로나에 선수로 입단했다.

크루이프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독재자 프랑코가 지원하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고 싶지 않기 때문에 FC 바르셀로나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이 한마디로 그는 네덜란드 출신의 이방인에서 순식간에 카탈루냐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실제로 카탈루냐를 사랑했던 크루이프는 아들의 이름에도 ‘요르디(Jordi)’라는 카탈루냐식 이름을 붙여 애정을 과시했다. 입단하자마자 바르셀로나를 우승으로 이끈 크루이프는 1988년 감독으로 팀에 돌아왔다. 그는 과르디올라를 비롯해 호마리우, 스토이치코프, 하지, 고이코에체아, 과르디올라 등이 크루이프의 지도 아래 새 역사를 썼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리그 연속 우승을 이룬 것을 포함해 크루이프는 총 11개의 우승컵을 바르셀로나 시민들에게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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