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권기범 호주 변호사

한인동포 첫 호주 시장 지내

  • 시드니 = 윤필립 시인, 호주전문 저널리스트

    입력2011-10-25 17:5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권기범 호주 변호사

    스트라스필드 시청사 앞에 선 권기범 변호사.

    ‘눈덮인 들판을 갈 때에도(踏雪野中去)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不須胡亂行) /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가(今日我行跡) /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遂作後人程)’

    백범 김구 선생이 자주 인용했다는 서산대사의 시다. 사람은 누구나 삶의 발자국을 남긴다. 더욱이 신세계로 진출한 이민자의 경우는 첫눈을 밟을 때처럼 그 자국이 선명해진다. 50년 역사의 호주 한인동포 사회에서 여러 분야에 큰 족적을 남긴 이들이 등장했지만 권기범(49) 스트라스필드 전(前) 시장 같은 이도 드물다. 변호사인 그는 2008년 이 고도(古都)에서 메이저 정당인 노동당의 공천을 받아서 시의원(직접선거)과 시장(간접선거)으로 선출된 최초의 한국인이다.

    태권도와 럭비, 축구 등으로 단련된 그를 만나면 아직도 청년의 분위기가 물씬 나지만 그를 자세하게 소개하자면 책 한 권이 부족할 정도다. 필자는 지난 20여 년 동안 권 변호사의 활동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그를 통해서 호주 동포사회 1.5세대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주 동포사회에서 1.5세대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이민 1세대는 열심히 일해서 가족의 터전을 마련하는 일과 자녀교육에 전념한다. 썩어 밑거름이 되는 밀알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1.5세대는 호주 주류사회로 진입해서 족적을 남겨야 한다. 그 언저리에 권기범 변호사가 있다. 그의 행보에서 서산대사의 시가 연상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대학교만 10년 다닌 사연



    1962년, 경기도 동두천에서 태어난 권기범은 서울에서 성장했다. 서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나이 열다섯에 부모를 따라서 호주로 이민했다. 그게 1977년이었으니 올해로 34년 전의 일이다. 한국에서의 삶 15년의 두 배 이상을 호주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금도 한국인의 정서가 더 짙게 묻어난다. 기층심리(基層心理) 형성기를 한국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권기범은 호주의 명문대학 NSW대학교에 입학한 1982년부터 1992년까지 계속 대학생이었다. 그는 10년 동안 토목공학, 역사학, 법학을 전공했다. 거기에 변호사가 되기 위한 연수원까지 다녔으니 10년이 부족할 정도로 다양하게 공부했다.

    NSW대 토목공학과에 입학한 권기범은 2년 동안 공부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같은 대학 문과(역사학)로 전과했다. 그는 역사공부에 푹 빠져들었다. 그래서 1년 더 연장해 우등(Honours)으로 졸업했다. 그렇다면 또다시 법대로 진학한 이유는 무얼까? 그 답은 그의 직장경력에서 찾아야 한다.

    그의 첫 직업은 식당 웨이터였다. 대학 2학년 때 꼬박 1년간 웨이터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바로 그해(대학 2년)에 택시면허증을 취득한 권기범은 변호사가 되기 1년 전까지 8년 동안 파트타임 택시운전사로 일했다. 그러다 1988년 이민부 정착담당 직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그의 법대 진학 수수께끼가 풀린다.

    신규 이민자의 정착을 돕다보니 법률상식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 때문에 법대에 진학한 것이다. NSW대의 경우 법대 진학 경쟁률이 몹시 높다. 그는 가끔 농담 삼아 말한다. “그놈의 열 받는 성질 때문에 법대에 갔다”고. 이민자들의 질문을 대충 얼버무려도 될 터였지만, 기왕 하는 것 제대로 하자고 다짐한 것이다.

    1992년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이후 그는 변호사와 정치인으로 정착한다. 그렇다면 권기범 변호사는 왜 어렵사리 이룩한 안정적인 법조인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정치계에 투신했을까? 역시 ‘그놈의 성질’ 때문에 소시민으로 사는 걸 스스로 거부했다고 한다.

    새 지평 열어준 두 개의 파문

    권기범 호주 변호사

    권기범 변호사가 시장 재직 시절 한 주민에게 시민권을 수여한 뒤 웃고있다.

    그에 얽힌 극적인 스토리 두 가지를 소개한다. 하나는 한국 관련 파문이고, 또 하나는 호주 주류사회에서 일으킨 핵폭탄급 파문이었다. 청년 권기범과 변호사 권기범은 이 두 개의 산을 넘으면서 정체되었던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도서실과 변호사 사무실에서 광장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간 것.

    1987년 권기범은 한인동포 청년그룹이 개설한 ‘한민족자료실’ 대표간사를 맡았다. 그러던 중에 북한에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렸다. 그런데 ‘한민족자료실’ 소속 한인동포 청년들이 임수경양의 입북을 돕는 역할 일부를 맡았다. 그뿐만 아니라 권기범을 포함한 여러 명의 한인동포 1.5세대가 평양축전에 임수경과 함께 참가했다.

    한국과 호주 동포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다. 권기범은 “이역만리 떨어진 호주이지만, 내가 태어난 모국의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열망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부모님 세대와 1.5세대 대다수로부터 배척당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변호사로 착실하게 경력을 쌓아가던 그가 또다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1996년 연방총선에서 당선된 극우 인종차별주의자 폴린 핸슨 의원 때문이었다. 그가 의원 데뷔 연설을 통해서 “우리는 아시아인 늪에 빠질 위기를 접하고 있다(We are in danger of being swamped by Asians)”고 주장하면서 아시아계 이민을 줄이라고 압박한 것.

    핸슨 의원의 발언에 호주가 들썩거렸지만 존 하워드 당시 총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상당수 백인계 호주인이 마음속 깊이 감추었던 반(反)아시아 정서를 핸슨이 대변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대목에서 권 변호사의 분노가 폭발했다.

    1997년 어느 날, 시드니 타운홀 광장에 수천 명의 시위대가 운집했다. 필자도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연단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도 높은 내용과 조금은 선동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분노에 찬 연설이었다. 갑자기 광장의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권기범 변호사의 그날 연설은 호주 소수민족그룹과 노조 및 노동당 관계자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됐다. 몇 년이 지난 다음에 열린 전혀 다른 토픽의 시위가 맥 빠지게 이어지고 있을 때, 한 노조 간부가 필자에게 “그날의 사자후는 어디로 갔는가?”라고 물어올 정도였다.

    호주 주류사회에 도전

    권기범 변호사는 그날 이후 노동당으로부터 정계 입문을 권유받았다. 그는 1995년에 노동당에 가입한 상태였기 때문에 본인의 결심만 남은 상태였다. 그 대목에서 권 변호사는 또다시 한인동포 1.5세대를 떠올렸다. 동시에 아시아계 이민자들 스스로 주류사회가 잘못된 고정관념을 갖게 만든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며칠 밤 고민과 사색 끝에 이런 잘못된 고정관념과 인식을 깨기 위해서는 자기 혼자라도 호주 주류사회 활동에 참여해야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별다른 고민 없이 가입해 받은 호주노동당(ALP) 당원증을 꺼냈다. 그렇게 정치인 권기범으로 거듭났다.

    2003년 당시 이재경 한인회장(제마이홀딩스 창업자)과 성기주 상공인연합회 회장의 강력한 추천으로 한인 밀집지역인 스트라스필드 노동당 지구당 공천을 받았다. 이후 2004년 3월 치러진 선거에서 시의원이 됐다.

    2008년에는 노동당 후보 중 리더로 선거를 치렀다. 무난히 당선되었고 기대하지 않았던 행운까지 겹쳐서 간접선거로 뽑는 시장에 당선됐다. 한국인 최초로 호주에서 시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반대당의 집요한 반대공작에 시달리면서 최선을 다해 뛰었고 유권자에게 ‘불굴의 정치인’ 이미지를 강하게 심었다.

    시장 임기를 마친 권기범 변호사는 현재 스트라스필드 노동당 지구당 부위원장이면서 지자체 의원이다. 부인 박은덕 변호사와 함께 설립한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면서 다음 도약을 위한 숨고르기를 하는 중이다. 그가 어떤 분야에서 또 하나의 첫발자국을 남길지 궁금하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