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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취재

“한국 소녀들이 인도 민요 부르는데 내 두 조국이 합쳐지는 느낌이야”

중립국 택한 마지막 인민군 포로 현동화

  • 뉴델리=김유림 기자│rim@donga.com

“한국 소녀들이 인도 민요 부르는데 내 두 조국이 합쳐지는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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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녀들이 인도 민요 부르는데 내 두 조국이 합쳐지는 느낌이야”
“내나이 스무 살에 고국을 떠나왔지. 그땐 인도보다 우리나라가 훨씬 못살았는데…. 60년 지나서 이렇게 예쁜 손녀들이 와서 공연하고 고맙다고 하는데 얼마나 자랑스러워요. 그 감격은 말로 다 못하지.”

2011년 11월22일 오후 7시(현지시각) 인도 뉴델리 시리포트 공연장에서 열린 리틀엔젤스 예술단 공연을 보러 온 현동화(79)씨는 인도에 남은 마지막 반공포로다. 최인훈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처럼, 그는 6·25전쟁 이후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국을 선택했다. 고향을 떠난 지 60년이지만 여전히 진한 북한 말씨가 남아 있다.

현씨는 1932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1950년 사동군관학교를 졸업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인민군 중위로 참전했다 10월 포로로 잡혔다. 약 2년간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수감되면서 국군에 귀순했지만 그는 전쟁 이후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국을 택했다.

“살아선 못 돌아갈 거라는 비장함”

“인민군으로 참전할 때부터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컸어요. 당시 이북에서 머리가 좀 있는 사람은 모두 공산주의를 싫어했고 이남에서 똑똑한 사람들은 이북을 동경했지. 전쟁 이후 남한에 남느니 미국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는데 미국은 바로 갈 수가 없거든. 그래서 제3국 멕시코로 가겠다고 한 거죠. 밀입국을 해서라도 꼭 미국에 가고 싶었으니까.”

1954년 1월 중립국을 택한 인민군포로 76명과 중공군 포로 12명은 인도 군인들과 함께 인도로 가는 아스토리아호에 몸을 실었다.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비장한 생각에 빠져 있는데 선착장에서 반공 청년단 150명이 ‘한국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외쳤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그가 최인훈 소설 ‘광장’ 이야기를 꺼냈다.

“1960년대 남과 북의 현실과 이념, 고뇌에 대해 글을 썼다는 건 아주 놀라운 일이지만, 사실 그 사건을 겪은 사람으로서 최인훈씨 소설에는 오류가 많습니다.”

일단 소설 속 이명준은 남과 북에 대한 환멸 때문에 제3국을 택했지만, 포로 76명의 생각은 제각각이었다. 현씨는 “나처럼 유학하기 위해 가는 사람도 있었고 자유롭게 사업을 하고 싶어 제3국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며 “우리가 모두 이념적 선택을 한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 소녀들이 인도 민요 부르는데 내 두 조국이 합쳐지는 느낌이야”

11월 21일 리틀엔젤스 예술단이 인도 집권당 국민회의의 소냐 간디 당수 앞에서 공연을 선보였다.

현씨는 또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들이 배의 선장실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우정을 나누지만, 사실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당시 배에는 인도 군인 수백 명도 함께 타고 있었고, 포로들이 도망갈까 홍콩에 정박도 못할 정도로 규율이 엄격했다는 것. 그는 또 소설 속 타고르호는 3000t으로 묘사돼 있지만 실제 그들이 탄 아스토리아호는 2만4500t 선박이었다는 점, 소설에서는 배가 홍콩과 마카오를 거쳐 인도 캘커타로 갔지만, 실제로는 홍콩과 싱가포르를 통해 인도 남부의 첸나이에 정박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러한 ‘사소한 오류’ 말고도 현씨가 “광장은 100% 픽션”이라 주장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소설 속 이명준이 월북 후 노동신문사 편집국에 근무하는데, 북한 사정상 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

“이건 북한의 사고방식을 몰라서 하는 소리야. 이북은 아무리 아버지가 고관이라도 이남 출신이면 절대 큰일을 안 줘요. 남로당 박헌영을 숙청하는 게 북한이라고. 똑똑하거나 무조건 찬양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은 다 위험요인으로 보거든. 그런데 이남에서 온 대학생을 바로 노동신문 기자 시킨다? 말도 안 돼. 특히 당시 노동신문은 신민당 기관지랑 공산당 기관지가 통합한 신문이었기 때문에 북한의 정치권력 중심에 있었어요. 실제 권력은 장관보다 많았다고. 그리고 소설에는 북한의 억압적인 통치 실상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아 아쉬웠어요. 소설보다 몇 배는 더 처절하고 숨 막히는 일들을 내가 목격했는 걸. 소설 쓰기 전에 최 선생이 나랑 한 번 만났다면 훨씬 좋은 작품이 나왔을지도 모르지(웃음).”

월남 이명준이 노동신문 기자? 말도 안 된다!

1954년 인도에 온 인민군포로 76명은 2년간 뉴델리 야전병원에서 생활했다. 상당수 포로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로 떠났다. 현씨는 멕시코를 거쳐 미국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기다렸지만 멕시코는 끝내 포로를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포로 4명만 인도에 남았다.

당시 인도 정부는 네 사람의 자립을 위해 1만 루피 융자를 줬다. 공부를 포기한 그는 그때부터 사업에 매달렸다. 델리 인근에 큰 양계장을 차려 성공했다. 이후 인도 힌두교사원에서 머리카락을 사 한국 가발공장에 수출했다. 힌두교도는 소원을 빌 때 머리카락을 잘라 사원에 바치는데, 사원은 이 머리카락을 모아 경매에 붙인다. 1970년 현씨는 한국 기업을 도와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섬유공장을 세웠다. 이밖에도 무역회사, 여행사 사업 등을 성공시켰다. 그는 “대한민국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이를 악물고 사업했다”고 고백했다.

“사실 나는 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가장 힘들 때 나 혼자 잘되겠다는 생각으로 조국을 등지고 이곳에 왔잖아요. 거기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요. 그만큼 한국이 잘되게 백방으로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죠.”

그가 1989년 이후 20년 가까이 주(駐)인도 한인회장으로 활동하며 한국과 인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해온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은퇴 이후 그가 가장 마음을 쓰는 일은 인도 유피주 아요디아에 있는 허황옥 기념비 관리 사업이다. 인도와 한국에는 가야의 시조 김수로 왕의 부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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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델리=김유림 기자│r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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