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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장 ④

파란만장 외길인생 걸어온 방짜 유기장 이봉주

“우리만의 뛰어난 합금기술, 반드시 지켜낼 겁니다”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파란만장 외길인생 걸어온 방짜 유기장 이봉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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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짜는 놋그릇을 주물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망치로 두드려 재질에 공기 틈새가 없도록 만들어내는 특별한 제작기법이다. 악기는 몰라도 방짜로 그릇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가진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전통 방짜 유기의 맥을 잇는 이봉주 대장(大匠)은 예부터 방짜 고을로 이름난 평안북도 납청 출신이다. 그러나 그가 방짜 기술을 배운 곳은 서울이다. 월남한 납청 출신 장인들의 공방에서 기술을 익혀 마침내 공방의 원대장이 된 그는 평생 놋그릇과 악기를 만들어왔다. 맨손으로 월남해 방짜 기술 하나로 크게 성공한 그는 우리 방짜 기술을 온전히 계승해낸 인간문화재이기도 하다.
파란만장 외길인생 걸어온 방짜 유기장 이봉주

물동이. 방짜 물동이를 쓰면 정수기가 따로 필요 없다.

이봉주(86) 옹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일본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1926년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난 그는 광복의 혼란기에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었고, 전쟁과 근대화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었다. 1948년 혈혈단신 서울에 도착한 스물두 살 청년 이봉주의 호주머니에는 겨우 고무신 한 켤레 살 돈밖에 없었는데, 지난해 그가 납부한 사업소득세는 1억8000만 원이다. 세월이 그만큼 흘렀고 세상도 변해 그의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로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삶은 달라진 게 없다. 오로지 방짜 유기와 함께하는 한길을 걸었고, 그 발길을 이끌어준 것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한때 사업이 망해 아내가 호떡장사도 했고, 피란 중에는 쌀장사 과자장사 뻥튀기 장사도 했지만 제 삶은 언제나 유기 공방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일이 술 마시고 노는 것보다 더 재미나고 유기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거든요.”

1983년 쇳농이 튀어 한쪽 눈을 잃었고, 2008년 담낭에 탈이 생겨 세 차례나 수술을 받아 몸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는 늘 자신은 행운아라고 말한다.

“수술 후유증으로 고생했지만 3년 전만 해도 산에 올라 다니고 50대인 아들보다 일을 더 잘했습니다. 유기 공방 일이란 게 작은 도가니를 들 정도로 힘도 세어야 하지만 능숙함이 무엇보다 중요하거든요.”

평생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빠져 살았고, 이제는 산세 빼어난 경북 문경의 약 4만 평 부지에 공방과 기숙사 등을 마련해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현역으로 일하며 인간문화재까지 되어 부와 명성을 거머쥔 인생이니, 누가 봐도 행운아가 분명하다.

“지금 제가 이룬 것은 제 능력이나 수단이 좋아서가 아니라 운이 좋아서였습니다.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분들은 그 운을 우연 또는 운명이라고 하겠지만,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였다고 확신합니다.”

납청 양대 고장에서 태어난 것이 첫 번째 행운

파란만장 외길인생 걸어온 방짜 유기장 이봉주

2003년 세운 문경 유기촌은 이봉주 옹의 마지막 보금자리다. 스승 탁창여 방주의 공적 비각 앞에서.

그가 태어난 곳은 평안북도 정주군 발산마을이다. 정주읍을 중심으로 발산마을은 5㎞, 유기로 유명한 납청은 10㎞ 떨어져 있다. 북한에서는 방짜를 ‘양대’라 한다. 납청은 양대의 대표고장으로 전국에서 방짜그릇을 그냥 ‘납청’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그의 출생부터가 방짜와 인연이 깊다. 그러나 정주에서 살던 때 납청 양대 기술을 배운 것은 아니다.

“그때는 모두 농사짓던 시절이었지요. 다른 일이라고 해봐야 정미소나 목공 일이었는데 대개 식구끼리 하는 가업 형태였습니다. 잘나가는 납청 공방에는 ‘빽’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어요. 돈 안 받고 그냥 기술 배우러 들어가려고 해도 안 받아주었습니다. 사실 양대 기술은 아무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지요.”

그가 처음 납청 양대를 접한 것은 어머니가 놋그릇 장사를 하기 시작하면서다. 광복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편이 어려워지자 어머니는 납청 양대를 떼어와 평안도 일대로 행상을 다녔고, 그때 이봉주도 놋그릇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고향에서 양대와 맺은 인연은 그뿐이었고, 어디까지나 농사가 본업이었다.

“일제 때는 다들 살기 어려웠지만 아버지는 간척지를 개간하거나 일본인이 좋아하는 토란을 경작했고 또 귀한 꿀벌을 치는 등 새로운 사업을 많이 시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실패한 적도 있지만 농사만 짓는 다른 집에 비해 그래도 9남매 대식구가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덕택이었지요.”

이봉주 역시 늘 새로운 기술에 도전하고 타고난 영리함과 정직함으로 사업을 잘 이끌어왔으니 친탁을 한 것 같다. 그는 소학교를 졸업한 뒤 집안 형편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농사를 짓다가 뒤늦게 부모의 권유로 만주 신경공업학교 입학시험을 쳤다. 그러나 과외까지 하면서 준비했건만 정작 시험 볼 때는 아는 문제에 엉뚱한 답을 쓰고 만다. 그것도 고쳐 써서 다 틀려버렸다.

“지금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합격했더라면 유기장 이봉주는 없었겠지요. 그러니 운명이었나 보다고 생각합니다.”

일제가 조선청년들을 전쟁터로 마구 내몰던 시절 그는 열일곱 살이었다. 군대에 끌려가기엔 어렸지만 취직하지 않으면 강제노역에 붙들려가므로 그는 아연광산에 취직해 직원숙소에 불 때는 일을 맡았다. 금속과 불, 이 두 가지도 그와 인연이 깊다. 이후 그는 불에 달군 금속을 두드리고 담금질하고 벼리면서 살게 되었으니, 어쩌면 인생은 이미 정해진 길을 걸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혼하러 고향에 돌아온 그는 다시 농사를 짓던 중에 광복을 맞았다. 잇단 흉년과 과도한 현물세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항의를 모의하다 북한 정권에 끌려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그는 첫 딸을 잃었다. 아버지를 도왔던 그 역시 잡혀가야 마땅한데 그의 본명 이봉빈을 이봉인으로 잘못 읽은 경찰은 대신 사촌형 이봉린을 잡아갔다. 과연 그는 행운의 사나이가 틀림없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의 삶은 팍팍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도 북한은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해도 늘 배 고프게 살아야 하는 농사는 가망 없다는 것을 저는 일찌감치 알았고, 더구나 언제 군인으로 끌려갈지 모르는 처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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