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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장 ⑨

헌 상 고쳐주며 나주반 원형 살려낸 소반장 김춘식

“목공예의 꽃은 바로 소반 사람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죠”

  •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헌 상 고쳐주며 나주반 원형 살려낸 소반장 김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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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주반도 다른 전통 공예품과 마찬가지로 한때 단절의 위험에 처했었다. 나주반 소반장 김춘식(金春植·75)은 본래 막상을 만드는 공방 주인이자 목물 상인이었다. 그랬던 그가 나주반의 전통을 살리는 데 뛰어든 것은, 어느 날 서울에서 온 손님의 주문이 계기가 되었다. 다리를 용 모양으로 장식한 제사상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에 이를 만들 장인을 수소문했지만 끝내 찾지 못한 김춘식은 스스로 나주반의 원형을 찾아나섰다. 수많은 헌 상을 고치면서 그는 옛 나주반의 구조와 제작법을 익혔고, 마침내 제대로 된 나주반을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헌 상 고쳐주며 나주반 원형 살려낸 소반장 김춘식

나주반 전수교육관 전시실에서 호족반 백골을 살펴보는 김춘식 장인.

알고 보면 가장 흔한 것이 가장 귀한 것일 때가 많다. 공기와 물이 그렇고, 물건 가운데서는 밥상과 밥그릇, 수저가 그렇다. 나무로 만든 소반(小盤)은 작은 목공품(小木) 중 가장 흔한 기물이다. 삼층장처럼 크지도 않고 자개함처럼 화려하지도 않은, 그저 수더분한 낯빛을 한 소반은 흔한 만큼 없으면 안 되는 소중한 존재였다. 집에 근사한 장롱이나 영롱한 자개함은 없을 수 있지만 밥상 없는 집은 없다.

“뭐니뭐니 해도 제일의 공예는 소반입니다. 왜냐고요? 소반이 기본이니까요. 임금님도 소반에 잡수시고, 서민도 이 소반에 먹었습니다. 거지가 밥 빌러 와도 멋진 개다리소반에 상을 차려주는 것이 우리네 인심이었어요. 옛 노래에 ‘개다리 목반에 닭다리 하나 얹어주라’는 대목도 있잖습니까.”

김춘식 장인은 소반이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소반에 담긴 문화가 더 소중하다고 강조한다. 사실 머슴이나 걸인에게도 상을 차려내는 것은 멋진 문화다. 더구나 그 상이 우아한 개다리소반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음식이라도 단아한 소반 위에 올라오면 초라해 보이지 않고, 소박하되 당당해 보인다. 그것은 아마 소반이 품고 있는 인간 중심 문화, 즉 ‘상을 받는 것은 한 사람으로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의미 때문일 것이다. 서양 식탁은 늘 그 자리에 있으니 음식을 먹으려면 사람이 식탁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 소반의 경우 앉아서 기다리면 음식이 사람에게 온다.

“다 같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 먹는 것도 좋지만, 끼니를 놓치고 늦게 들어온 가장이나 식구에게 밥상을 차려 방으로 들여보내보십시오. 3, 4인용 식탁에 혼자 앉아 먹는 것과 일인용 소반(單盤)에 담아 내온 음식을 먹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실감할 수 있을 겁니다.”

예닐곱 때 받는 독상, 인격체로 대접한다는 뜻

김춘식 장인의 말대로 우리 문화는 상과 관련이 깊다. 아이를 점지해달라고 비는 정화수 상이 있었고,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안전한 출산을 기원하는 삼신상을 차려 산모의 방을 꾸몄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삼신상을 올렸고, 백일에는 백일상, 돌에는 돌상을 차렸다. 특히 돌상은 아이가 그 상에서 무얼 집느냐에 따라 행운을 점쳐보기도 하는 중요한 상이다. 또 자라면서는 생일상, 어른이 되는 입문과정에서는 관례상을 받고, 혼례에서는 동뢰상(同牢床)을 사이에 두고 신랑신부가 절을 한다. 그뿐인가. 장 담글 때도, 먼 길 떠난 식구의 안위를 빌 때도 정화수 상을 장독대에 올렸고, 부부가 합방하는 날에는 낭만적인 둥근 일주반이 안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이 들어 환갑상을 거쳐 죽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제사상을 받는다.

이처럼 태어나기 전부터 죽은 뒤까지 갖가지 상을 받으니, 우리나라 사람에게 상은 삶의 여정이 담긴 상징적 물건이자 육체적 탄생 이전과 죽음 이후까지 삶을 연장하는 도구가 된다. 그러나 대다수가 아파트에서 사는 오늘날 그런 의미는 확실히 빛이 많이 바랬다. 김춘식 장인이 안타까워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옛사람들은 인간의 도리와 예절도 이 밥상에서 가르치고 배워왔어요. 할아버지와 겸상하면서 아이는 어른이 숟가락을 들고 놓을 때까지 기다리는 법을 배웁니다. 자기 마음대로 먹고 치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보조를 맞추고, 나아가 상대보다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익히게 되는 거지요. 또 어른은 아이에게 맛난 음식을 권해주는 자상함을 보임으로써 밥상을 중심으로 따뜻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고요.”

우리 예법으로는 부자(父子)는 겸상하지 않아도 조손(祖孫)은 겸상이 가능했으니 아이는 할아버지 상에서 숟가락질, 젓가락질을 익히고 밥 먹는 예절을 배운다. 자식은 가르치다 보면 역정이 나기 일쑤지만 손자는 실수도 너그럽게 넘기며 인자하게 가르칠 수 있다. ‘밥상머리’ 교육이 잔소리와 훈계가 아니라 할아버지와 귀여운 어린 손자가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고 밥을 먹을 때 자연스레 일어나는 마법이라는 것을 겸상 소반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예닐곱 살이 되면 독상을 받았어요. 그때 벌써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겸상할 때는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고, 독상을 받을 때는 독립적인 주체성을 인정받았으니, 얼마나 성숙하고 멋진 문화입니까.”

그의 소반 예찬은 끝없이 이어진다. 사실 일반 집기 가운데 소반처럼 정서가 깃들어 있는 물건은 드물다. 그래서인지 전통 목공품이 많이 사라진 오늘날에도 소반은 여전히 인기다. 독상을 받는 전통 덕분에 남아 있는 옛 소반도 그만큼 많고, 가격 역시 구입하기에 비교적 부담이 없는 것도 소반의 인기를 더해주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옛 소반이 모두 전통대로 제대로 만든 소반은 아니다. 광복 후부터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까지 마구 만들어낸 막상이 아주 많다. 그 역시 한때는 그런 상을 만들었다.

서울에서 온 손님이 내준 숙제

헌 상 고쳐주며 나주반 원형 살려낸 소반장 김춘식

운각과 다리. 운각은 모서리 부분에서 접힐 수 있도록 홈을 내준다.



그가 소반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0년대 초다. 그의 나이 20대 초반이었으니 일찍부터 인연을 맺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연배 장인들이 대개 10대 중반에 도제로서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과 비교하면 빠르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그는 ‘누구의 제자’로 수업을 받지도 않았다. 물론 여러 사람에게 기술을 배웠지만 그는 늘 ‘보스’였다. 상 만드는 기술을 소반 공장을 차린 다음 종업원인 장인들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상 공장을 차릴 생각을 한 것은 삼종형님의 권유 때문이었어요. 그 형님이 상을 만들다가 건축계로 나갔는데, 제게 상 만드는 연장을 주며 ‘상 만들면 먹고살 만하다’고 했거든요.”

군대를 제대한 후 그는 그 형님 말대로 상 만들 생각을 하고 떡하니 공방부터 차렸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누구 밑에 들어가 기술 먼저 배울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기술자를 데려다 부리면서 소반을 만들어 팔았다. 당시 나주반은 물론이고 다른 소반 기술자, 소목이든 대목이든 목수들은 대개 전국을 떠돌며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공방에 머물며 일하곤 했다. 그는 그런 기술자들을 채용해 상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만든 상을 그는 ‘장따래기 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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