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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ership in Sports 18

김경문 NC다이노스 감독

베이징의 기적 일군 ‘화수분 야구’ 창시자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김경문 NC다이노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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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찾은 지도자의 길

결국 김 감독은 1990년 현금 2600만 원의 트레이드를 통해 당시 김성근 감독이 지휘하던 태평양돌핀스로 이적했다. 태평양 돌핀스에서는 한 시즌만 뛰었고 1990년 12월에 송재박 현 두산베어스 코치와의 트레이드로 다시 OB베어스 유니폼을 입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OB에 돌아온 지 1년 만인 1991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그의 프로 통산성적은 700경기 출장, 타율 0.200, 6홈런, 126타점이다.

김 감독은 은퇴 직후인 1992년부터 2년간 미국 프로야구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지금이야 야구단에서 은퇴한 선수들에게 해외 코치 연수를 보내주는 것이 일반화됐지만 20년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김 감독 역시 자비로 미국에 갔다.

세밀한 작전, 잦은 투수교체, 강공을 통한 대량득점보다는 번트 등을 통한 안정적 1점 확보를 중시하는 일본 야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당시 한국 야구 풍토와 달리 그는 선수 때부터 강공을 선호하는 메이저리그식 빅볼에 관심이 많았다.

김 감독은 애틀랜타에서 미국 야구에 더욱 매료됐다. 이때 그가 느낀 경험들은 김 감독이 훗날 한국식 빅볼 야구, 소위 된장 빅볼의 철학을 성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2009년 2월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미국 야구 지도자들이 잠재력 있는 선수를 알아보는 방식부터 한국과 완전히 달랐다는 점이 일종의 문화 충격이었다”고 털어놨다.



당시 애틀랜타의 한 인스트럭터가 그에게 ‘교육 리그에 있는 선수 중 누가 훗날 메이저리그에 갈 수 있는 선수가 되겠느냐’고 묻기에 그는 A라는 선수를 점찍었다. A선수의 타격 자세나 현재 실력이 가장 나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인스트럭터는 김 감독의 눈에 ‘뭐 저런 친구가 다 있나. 저게 야구 선수의 폼이란 말인가’ 싶은 B선수를 지명했다. 이에 김 감독은 코웃음 쳤다. 명색이 메이저리그 인스트럭터가 선수 보는 눈이 이것밖에 안 되나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중에는 김 감독이 찍은 A선수가 아니라 인스트럭터가 선호한 B선수가 결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일이 잦았다. 이유는 무엇일까. 김 감독은 “미국 야구 지도자들이 특정 자세나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고 선수 개개인이 지닌 장점을 최대한 끄집어내려고 애쓰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교과서적으로만 보면 B선수의 자세가 아주 엉성해 보이고 가망성도 없을 것 같지만 이 친구에게 어떤 부분만 추가하면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한국에서는 아직도 교과서적인 자세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한다. 물론 교과서적인 자세가 나쁘지는 않지만 모든 선수가 똑같은 자세로 운동할 수는 없다. 다른 자세로도 성공할 수 있다면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해줘야 합니다. 잠재력을 볼 줄 아는 지도자가 진짜 지도자”라고 말했다.

친정팀 사령탑으로 귀환

김경문 NC다이노스 감독
귀국한 김 감독은 1994년부터 3년간 삼성라이온스에서 코치로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1998년부터 친정팀 두산베어스에서 배터리 코치로 활동한 그는 2003년 10월 성적 부진 등으로 자진사퇴 의사를 밝힌 김인식 당시 감독의 후임자로 갑자기 뽑혔다. 선수로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그가 45세의 젊은 나이에 감독이 되자 야구계가 술렁였다.

여기에는 다소 복잡한 사정도 숨어 있었다. 당시 두산베어스 구단은 차기 감독으로 국보급 투수 출신인 선동열 당시 한국야구위원회(KBO) 홍보위원을 낙점했다. 문제는 계약 과정에서 선동열 홍보위원이 일부 계약조건에 난색을 표하면서 협상이 깨졌다는 것. 두산 구단이 선 위원에게 감독직을 제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인식 감독은 이미 사퇴해버렸고 선 위원은 감독을 맡지 않겠다고 밝혔다. 갑작스레 두산의 감독직이 무주공산이 된 셈.

당시 김경문 감독 또한 두산베어스에 큰 미련이 없었다. 1998년부터 6년간 같이 일했던 김인식 감독의 사퇴에 큰 충격을 받은 김 감독은 2004년 시즌부터 다른 구단에서 코치로 일하기로 마음먹고 이미 친정인 두산에 작별을 고한 상태였다. 다급해진 두산 구단이 김경문 코치를 붙잡고 호소하면서 결국 그는 지도자로 변신한 지 약 10년 만에 친정팀의 사령탑에 올랐다.

이런 불안한 배경 속에 출발한 데다, 당시 두산의 전력이나 팀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던 탓에 많은 야구인은 ‘김경문 호(號)’가 얼마나 갈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초보 감독 앞에 놓인 가장 큰 난제는 김인식 감독 시절 두산베어스의 전성기를 이끌던 한국 야구의 전설적인 클린업 ‘우동수 트리오’의 해체였다.

김동주를 제외하고 모두 타팀으로 이적해버리는 바람에 두산베어스의 장타력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우동수 트리오는 용병 타자 타이론 우즈, 김동주, 심정수라는 3번, 4번, 5번 타자의 모임을 일컫는 말로 세 선수는 2000년에는 무려 308타점을 합작했고, 2001년에도 가공할 파괴력을 선보이며 두산베어스의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두산은 정규시즌 3위로 페넌트레이스에 진출해 2위와 1위팀을 연달아 꺾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에서 정규시즌 하위팀이 상위팀을 꺾고 우승한 것은 두산베어스가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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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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