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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위해 두 번 死線 넘어…돌아온 건 이중간첩 굴레”

前 북파 민간공작원 김소웅 ‘침묵서약’ 50년 만에 입 열다

  • 최호열 기자 │honeypapa@donga.com

“조국 위해 두 번 死線 넘어…돌아온 건 이중간첩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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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대 1 점조직 훈련으로 ‘민수’ 육성
  • ● 40kg 메고 산비탈 10km 1시간 주파
  • ● 평생 먹고살 돈 준다더니…무임승차권 한 장
  • ● 김 씨 노린 북한군에게 하숙집 주인 살해돼
  • ● 국가 위해 목숨 건 게 오히려 생업 걸림돌
“조국 위해 두 번 死線 넘어…돌아온 건 이중간첩 굴레”

북파공작원 시절의 일을 처음으로 털어놓는 김소웅 씨.

7월 27일은 6·25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꼭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3년 그날, 북한군과 중공군, 유엔군 대표가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한국군 대표도 배석했지만 협정서에 서명을 하진 않았다.

정전협정이 완전한 종전(終戰)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남북한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특수공작원들을 상대 지역에 보내 국지전을 벌이거나 국가기밀 탈취, 요인 납치·암살 등 사실상의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남한은 적어도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전까지는 특수공작원을 북한에 잠입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북파공작원은 크게 둘로 나뉜다. 먼저, 영화 ‘실미도’에서처럼 단체로 군대식 무장침투 훈련을 받은 특수임무수행자들이다. 또 하나는 1대 1 점조직 훈련을 받고 실제로 북한에 침투해 기밀서류 탈취, 보안시설 촬영, 요인 납치 및 암살 작전을 벌인 민간공작원(민수요원)들이다.

2001년 정보사령부는 북한에 침투한 민간공작원이 1만 명이며, 그중 2200여 명이 살아서 돌아왔고, 7700명 이상이 작전 중 사망 등으로 귀환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이듬해엔 1만4000여 명을 보냈다고 말을 바꿨다. 하지만 총 생환자 수에 대해선 함구했다.

“평생 먹고살 돈 주겠다”

북파공작원은 1999년에야 비로소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우리 사회는 2004년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고, 그에 따른 보상금 몇 푼을 쥐여주고는 이내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연기위원장인 원로 방송인 김소웅(70) 씨는 지금도 종종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는 꿈을 꾼다. 그는 1964년과 1965년 두 차례 북한에 침투한 민간공작원 출신이다. 하지만 그때 이야기를 꺼내는 데 한참을 주저했다.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50년 전에 강요된 계약이 아직도 그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는 “사회에 나가 북한에 갔다 온 사실을 자랑삼아 떠들다 죽은 경우를 여럿 봤다”고 했다. “사나이가 한번 한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고도 했다. “당신의 특별한 현대사 체험이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도록 기록을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설득에 긴 침묵을 깨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어. 그래서 건달 시절 내 별명이 묵호였지. 중학교 졸업하고 어영부영 지내다 해병대 97기로 자원입대했어. 묵호에 해병대사령부가 있었는데 멋있어 보였거든. 그런데 어느 날 독자(獨子)라는 이유로 귀가조치를 하더라고. 7개월 18일 근무하다 집으로 돌아왔지.”

동네에서 주먹깨나 쓰다 1962년 상경해 용산시외버스터미널에 터를 잡았다. “세계 어느 역과 터미널이든 쓰리꾼(소매치기)이 있기 마련인데, 용산터미널은 우리 때문에 쓰리꾼이 발을 못 붙였다”고 한다.

그 무렵 조직의 중간보스쯤 됐던 모양이다. 6명의 부하를 거느렸는데 ‘너희는 나처럼 무식하게 살지 말라’며 모두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켰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용산병원 시체안치실에서 ‘짤짤이’나 하며 시간을 죽이곤 했다. 가슴 한구석, 뭔가 인생의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1963년 여름, 용산역에서 놀던 이현방이란 친구가 찾아와 넌지시 “좋은 돈벌이가 있는데 안 갈래?”라고 제안했다. 귀가 솔깃했다.

“총도 주고, 잘하면 평생 먹고살 돈을 준다는 거야. 현방이와 약속장소로 나가니 남자 둘이 있더라고. 한 명은 ‘선생’, 다른 사람은 ‘키퍼(keeper)’라 불렀는데, 나중에 보니까 훈련교관이었어. 고향, 가족관계 등 신변에 대해 묻더라고. 신원조회 때문이었겠지.”

‘선생’은 어떤 일을 하는 건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잘만 하면 평생 먹고살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만 했다. 그는 막연히 밀수 같은 일이겠거니 했다.

“나중에 들으니 용산 건달 중에서 6명이 나보다 먼저 지원해 갔더라고. 그중 1명만 다리가 절단된 채 살아남았고, 나머지 5명은 행방불명이었어. 죽었다고 봐야지.”

“조국 배신 않겠다” 서약

10월경 다시 한 번 면접을 본 후 11월경 ‘선생’으로부터 “준비하고 덕수궁 앞으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현방과 함께 약속장소로 나가자 번호판이 진흙으로 가려진 지프가 서 있었다. 차에 타자 안대로 눈을 가렸다. 오후 3시쯤 출발했는데 차가 멈춰 서 내려보니 날이 깜깜해져 있었다. 철조망이 쳐진 독립가옥. 나중에야 그곳이 경기도 파주시 광탄이라는 걸 알았다.

“곧장 안 가고 빙빙 돌아간 것 같아. 아무튼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선생이 45구경 권총을 꺼내 실탄을 채우더니 탁자 위에 탁 내려놓는 거야. 그러곤 서약서를 쓰라더라고. ‘나는 어떤 경우에도 국가와 민족 앞에 추호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겠다. 만약 배신하면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그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사진 찍고, 열 손가락 지장 찍고 나서야 내가 하게 될 일이 뭔지 알려주더라고. 북한에 침투한다는 말에 머리가 쭈뼛했지만 이미 서약서까지 썼고, 실탄이 장전된 권총이 앞에 놓여 있는 마당에 ‘난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순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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