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호

“조국 위해 두 번 死線 넘어…돌아온 건 이중간첩 굴레”

前 북파 민간공작원 김소웅 ‘침묵서약’ 50년 만에 입 열다

  • 최호열 기자 │honeypapa@donga.com

    입력2013-07-19 13: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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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대 1 점조직 훈련으로 ‘민수’ 육성
    • 40kg 메고 산비탈 10km 1시간 주파
    • 평생 먹고살 돈 준다더니…무임승차권 한 장
    • 김 씨 노린 북한군에게 하숙집 주인 살해돼
    • 국가 위해 목숨 건 게 오히려 생업 걸림돌
    “조국 위해 두 번 死線 넘어…돌아온 건 이중간첩 굴레”

    북파공작원 시절의 일을 처음으로 털어놓는 김소웅 씨.

    7월 27일은 6·25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꼭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3년 그날, 북한군과 중공군, 유엔군 대표가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한국군 대표도 배석했지만 협정서에 서명을 하진 않았다.

    정전협정이 완전한 종전(終戰)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남북한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특수공작원들을 상대 지역에 보내 국지전을 벌이거나 국가기밀 탈취, 요인 납치·암살 등 사실상의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남한은 적어도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전까지는 특수공작원을 북한에 잠입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북파공작원은 크게 둘로 나뉜다. 먼저, 영화 ‘실미도’에서처럼 단체로 군대식 무장침투 훈련을 받은 특수임무수행자들이다. 또 하나는 1대 1 점조직 훈련을 받고 실제로 북한에 침투해 기밀서류 탈취, 보안시설 촬영, 요인 납치 및 암살 작전을 벌인 민간공작원(민수요원)들이다.

    2001년 정보사령부는 북한에 침투한 민간공작원이 1만 명이며, 그중 2200여 명이 살아서 돌아왔고, 7700명 이상이 작전 중 사망 등으로 귀환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이듬해엔 1만4000여 명을 보냈다고 말을 바꿨다. 하지만 총 생환자 수에 대해선 함구했다.

    “평생 먹고살 돈 주겠다”



    북파공작원은 1999년에야 비로소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우리 사회는 2004년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고, 그에 따른 보상금 몇 푼을 쥐여주고는 이내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연기위원장인 원로 방송인 김소웅(70) 씨는 지금도 종종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는 꿈을 꾼다. 그는 1964년과 1965년 두 차례 북한에 침투한 민간공작원 출신이다. 하지만 그때 이야기를 꺼내는 데 한참을 주저했다.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50년 전에 강요된 계약이 아직도 그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는 “사회에 나가 북한에 갔다 온 사실을 자랑삼아 떠들다 죽은 경우를 여럿 봤다”고 했다. “사나이가 한번 한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고도 했다. “당신의 특별한 현대사 체험이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도록 기록을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설득에 긴 침묵을 깨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어. 그래서 건달 시절 내 별명이 묵호였지. 중학교 졸업하고 어영부영 지내다 해병대 97기로 자원입대했어. 묵호에 해병대사령부가 있었는데 멋있어 보였거든. 그런데 어느 날 독자(獨子)라는 이유로 귀가조치를 하더라고. 7개월 18일 근무하다 집으로 돌아왔지.”

    동네에서 주먹깨나 쓰다 1962년 상경해 용산시외버스터미널에 터를 잡았다. “세계 어느 역과 터미널이든 쓰리꾼(소매치기)이 있기 마련인데, 용산터미널은 우리 때문에 쓰리꾼이 발을 못 붙였다”고 한다.

    그 무렵 조직의 중간보스쯤 됐던 모양이다. 6명의 부하를 거느렸는데 ‘너희는 나처럼 무식하게 살지 말라’며 모두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켰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용산병원 시체안치실에서 ‘짤짤이’나 하며 시간을 죽이곤 했다. 가슴 한구석, 뭔가 인생의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1963년 여름, 용산역에서 놀던 이현방이란 친구가 찾아와 넌지시 “좋은 돈벌이가 있는데 안 갈래?”라고 제안했다. 귀가 솔깃했다.

    “총도 주고, 잘하면 평생 먹고살 돈을 준다는 거야. 현방이와 약속장소로 나가니 남자 둘이 있더라고. 한 명은 ‘선생’, 다른 사람은 ‘키퍼(keeper)’라 불렀는데, 나중에 보니까 훈련교관이었어. 고향, 가족관계 등 신변에 대해 묻더라고. 신원조회 때문이었겠지.”

    ‘선생’은 어떤 일을 하는 건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잘만 하면 평생 먹고살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만 했다. 그는 막연히 밀수 같은 일이겠거니 했다.

    “나중에 들으니 용산 건달 중에서 6명이 나보다 먼저 지원해 갔더라고. 그중 1명만 다리가 절단된 채 살아남았고, 나머지 5명은 행방불명이었어. 죽었다고 봐야지.”

    “조국 배신 않겠다” 서약

    10월경 다시 한 번 면접을 본 후 11월경 ‘선생’으로부터 “준비하고 덕수궁 앞으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현방과 함께 약속장소로 나가자 번호판이 진흙으로 가려진 지프가 서 있었다. 차에 타자 안대로 눈을 가렸다. 오후 3시쯤 출발했는데 차가 멈춰 서 내려보니 날이 깜깜해져 있었다. 철조망이 쳐진 독립가옥. 나중에야 그곳이 경기도 파주시 광탄이라는 걸 알았다.

    “곧장 안 가고 빙빙 돌아간 것 같아. 아무튼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선생이 45구경 권총을 꺼내 실탄을 채우더니 탁자 위에 탁 내려놓는 거야. 그러곤 서약서를 쓰라더라고. ‘나는 어떤 경우에도 국가와 민족 앞에 추호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겠다. 만약 배신하면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그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사진 찍고, 열 손가락 지장 찍고 나서야 내가 하게 될 일이 뭔지 알려주더라고. 북한에 침투한다는 말에 머리가 쭈뼛했지만 이미 서약서까지 썼고, 실탄이 장전된 권총이 앞에 놓여 있는 마당에 ‘난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순 없었지.”

    전쟁 직후엔 주로 북한 지리를 잘 아는 북한 피난민을 민간공작원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빨갱이가 싫어서 내려왔는데 왜 다시 가겠느냐’며 통 지원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사형수나 무기수, 전쟁고아들을 활용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북한으로 넘어가자마자 자수하거나 내려오지 않았다. 그곳에서 새 삶을 선택한 것이다. 이들로 인해 북파공작 기밀이 유출되는 등 문제가 불거졌다. 1960년 1월 1일부터 정보부는 작전을 바꿨다. 물색조를 사회에 보내 일반인 중에서 포섭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 가장 먼저 타깃이 된 게 건달들이었다. 건달 중에서도 날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스무 살 안팎의 청년들에게 접근했다.

    극한의 생존훈련

    포섭하는 대로 데려가서 키퍼로 불리는 교관이 1대 1로 훈련을 시켰다. 따라서 군대처럼 집단훈련을 받는 특수임무수행자들과 달리 동기나 기수가 없다. 점조직으로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했기에 같은 훈련을 받고 있어도 서로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특수임무수행자들은 훈련 중에 찍은 단체사진이라도 있지만 민간공작원은 훈련받을 때 사진이 없다. 특수임무수행자가 무장공비처럼 적지에 침투해 파괴, 살상을 함으로써 혼란을 유도하는 게 주 임무라면 민간공작원은 정보수집, 요인 암살과 납치 같은 간첩 역할이 주 임무였다.

    “민간공작원은 원래 ‘도꼬다이(혼자)’로 생활하고 훈련하는데, 나와 이현방은 2인1조로 같이 했어. 그런데 처음엔 빨래랑 식사를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는 거야. ‘우린 그런 거 해본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다, 더구나 이런 추운 겨울에 어떻게 하느냐’며 못 하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알았다’며 광탄초등학교 근처에 하숙을 시켜줬어. 젊은 신혼부부가 사는 집이었지. 앞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혼자 지내니까 밥해먹기 귀찮아 미8군에서 나오는 식료품으로 끼니를 때우는 바람에 미제 물건 쓰레기가 많이 나온 거야. 젊은 놈이 만날 미제만 먹으니까 동네 주민이 이상하게 생각해서 112신고를 하는 등 보안 노출 문제가 생기니까 보급품을 차단하고 대신 하숙을 하게 한 거였어.”

    ▼ 훈련은 어땠나.

    “보통 산에서 훈련했지. 5일 내리 산 속에서 생활한 적도 많아. 총알은 사고 날까봐 잘 안줬고, 주로 M1이나 카빈소총에 대검을 꽂은 게 전부였는데, 대검은 면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어. 주로 표창술을 배웠고, 목 꺾기 등 온몸을 활용해 상대를 제압하고 죽이는 기술을 배웠지. 비가 쏟아지면 밤에 공동묘지에서 담력훈련을 하고.”

    산악훈련은 주로 산길을 뛰어 시간 내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10kg짜리 모래주머니를 양발에 하나씩 차고, 20kg짜리 배낭을 짊어지고 뛰었다. 걷거나 뛸 때 소리가 나면 안 됐다. 그뿐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노출될 위험이 있는 산 정상이나 계곡은 안 되고 눈에 안 띄는 7, 8부 능선으로 다녀야 했다.

    “그렇게 비탈지고 험한 길만 골라서 1시간에 10km를 주파하라는 거야. 처음엔 절반도 못 갔지. 그러면 그 추운 겨울에 얼음을 깨고 물속에 들어가 5분 정도 있다 나오길 반복하는 기합을 받곤 했어. 죽을 고생이었지.”

    “여자 한번 붙여주곤 끝이야”

    “조국 위해 두 번 死線 넘어…돌아온 건 이중간첩 굴레”

    김 씨(왼쪽)는 북파공작원을 그만둔 후 강제징집되어 현역으로 입대했다.

    사람의 능력은 무한한 모양이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1시간 10km 주파가 가뿐해졌다. 그러자 곳곳에 지뢰와 모래장애물, 실(絲)장애물이 설치된 지형을 통과하는 훈련이 이어졌다.

    “실장애물은 스치기만 해도 실이 끊어져. 그런데 동물이 지나가면서 끊은 자국과 사람이 지나가며 끊은 자국이 달라. 모래장애물에 찍힌 자국도 동물 발자국과 사람 발자국이 다르고… 모래장애물을 지나갈 때는 나뭇가지로 발자국을 지워가며 이동해야 하는데, 나뭇가지도 가까운 데서 꺾으면 발각될 수 있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꺾어와 발자국을 지워야 해.”

    집에 있는 날에는 독도법(讀圖法)을 익히거나 유리창 파지법(소리 안 내고 유리를 깨는 것) 같은 것을 익혔다.

    “군사기밀지도인 1만5000분의 1로 축소된 항공사진 위에다 실체경을 올려놓고 보면 마치 현장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입체감이 생생해. 침투할 경로를 중심으로 매일 한 차례 이상 보면서 지형, 지물을 숙지하는 거야. 지뢰지대 등 장애물 위치도 하나하나 점검하고. 매일 보다보니까 나중엔 어디에 소나무가 있는지, 민가 화장실 위치까지 저절로 외워져. 그래서 실제 갔을 때는 처음 와본 곳이었지만 여러 번 온 것처럼 익숙하더라고.”

    ▼ 훈련 강도는 어느 정도였나.

    “해병대에서 받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됐지. 영화 ‘실미도’에 나오는 건 훈련도 아냐. 한겨울에 그냥 산에 풀어놓는 거야. 민가에 들어가서도 안 되고, 민간인에게 노출돼서도 안 돼. 그런 상태에서 산속에서 스스로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해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어. 그런데 그게 다 북한에 침투했다 살아서 돌아오는 데 꼭 필요한 훈련들이었지.”

    ▼ 힘들어서 도망갈 생각은 안 했나.

    “서약서를 썼는데, 그러면 죽지.”

    ▼ 북한 군부대 침투 훈련은 어떻게 했나.

    “당시 광탄에 미8군 노무단부대(KSC)가 있었는데, 거기에 침투해 서류를 절취하는 모의 침투훈련을 7차례 이상 시도해 모두 성공했지. 우리가 서류 절취에 성공하면 경계가 허술했다는 이유로 책임자가 문책을 받곤 했어. 경계가 한층 강화됐지만 또 거리낌 없이 침투해 서류를 탈취해 갖고 오곤 했지.”

    ▼ 외지에서 젊은 남자 둘이 들어와 살면서 흙 묻은 군복 입고 산에서 내려오면 마을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미8군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알고 있었어. 우리 일과도 훈련 나갔다 밤늦게 돌아와 주민과 마주칠 일이 거의 없고, 집에서 쉴 때는 집주인이 세탁해준 말끔한 평상복을 입고 있으니까, 별 의심은 안 했어.”

    ▼ 훈련 기간에 월급은 받았나.

    “먹여주고 재워주고 그뿐이었어. 월급도 따로 안 줬지. 가끔 문산 시내에 나가 술 사주고 여자 한번 붙여주곤 끝이야.”

    민간공작원은 주로 겨울에 북한에 침투한다. 날이 추우면 경계병들의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어 경계가 한층 허술해지기 때문. 한겨울에 혹독하게 훈련을 하는 이유다. 김 씨도 훈련 3개월 만인 1964년 2월경 북한에 침투할 계획이었다. DMZ(비무장지대)에 가서 10여 일을 대기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는지 철수명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 바람에 1년을 더 훈련하며 기다려야 했다.

    첫 번째 작전

    다시 겨울이 다가왔다. 11월 중순, 드디어 임무가 떨어졌다. DMZ 인근에서 대기하던 그는 8명의 민정경찰 에스코트를 받으며 군사분계선으로 이동했다.

    ▼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이런 경우 민정경찰들이 거수경례를 해주던데.

    “그런 게 어딨어. 함께 온 선생과 키퍼가 건투를 빈다며 어깨 두드려주고 한번 안아주고는 끝이지. 쇠고기 말린 육포와 찐 쌀 같은 일주일치 비상식량 건네주고, 언제 몇 시까지 어디로 복귀하라, 그때를 놓치면 각자 알아서 살아 돌아오라더라고. 잡히지 않고 제3국으로 탈출했을 때의 접선 방법도 다시 한 번 숙지시키고.”

    ▼ 기분이 어땠나.

    “솔직히 죽네 사네 하는 생각도 안 나. 그냥 뭘로 머리를 한방 맞은 것처럼 띵할 뿐이지. 드디어 침투하는구나 하는 생각뿐이야.”

    첫 임무는 황해도 개풍군 풍계리에 있는 남파간첩 침투 부대에 침입해 간첩 침투 루트가 적힌 서류나 사업지시서, 남파간첩 명단 같은 서류를 절취해 오는 것. 군부대 위치와 규모, 막사 구조 등은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숙지한 상태였다. 군사분계선에서 타깃인 군부대까지는 빨리 가면 하루거리였다. 그러나 낮에는 은폐장소에 숨어 있어야 했고, 밤에는 험한 산길로 이동해야 했기에 사흘이 걸렸다.

    “가는 길에 북한군과 딱 마주친 거야. 북한 통신병이 전선줄 설치작업을 하는데 우리가 엄폐해 있는 쪽으로 오더라고. 우린 인민군 장교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임기응변으로 넘겼어. 훈련 내용 중에 북한 사투리 교육도 있거든. 태연하게 ‘님자레 수고하오. 내레 안전부에서 나왔소’ 하고 인사를 건네며 지나갔어. 통신병도 아무 의심 없이 경례를 하고는 계속 자기 일을 하더라고. 그 정도로 어수룩하던 시절이었지.”

    “조국 위해 두 번 死線 넘어…돌아온 건 이중간첩 굴레”

    1 송해, 설운도 등 연예인들에게 고희연 축하를 받는 김소웅 씨(왼쪽 세 번째). 2 해상재난 환경구조단 민수 동지들과 함께(오른쪽 네 번째).



    군부대 인근에 도착한 두 사람은 하루 동안 동태를 살핀 후 그날 밤 철조망을 끊고 잠입했다. 미리 파악해둔 대로 사무실로 쓰이는 막사에 접근해 한 명은 망을 보고 다른 사람이 들어가 서류를 탈취했다.

    ▼ 기밀서류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나.

    “그걸 어떻게 일일이 확인해.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배낭에 쑤셔넣고 나오는 거지.”

    군부대를 빠져나와 북방한계선까지 오는 데는 하루밖에 안 걸렸다. 뛰고 또 뛰었다. 한겨울인데도 땀이 흥건하게 흘렀다.

    ▼ 탈취한 서류엔 어떤 내용들이 있었나.

    “배낭째 ‘선생’에게 넘겼어. 뭐였는지 얘길 안 해주더라고. ‘고생했다, 쉬어라’ 그걸로 끝이야. 보름인가 있다가 피로 풀러 가자며 문산 시내 한번 데리고 나가고.”

    포로가 되다

    첫 침투작전에 성공한 지 한 달쯤 지났을까. 산악훈련을 하느라 며칠 하숙집을 비웠다가 돌아와보니 난리가 나 있었다. 그 사이에 집주인 남자(이름이 김영준이었고, 해군 출신이라고 했다)가 목이 잘린 채 살해된 것이다.

    “우리가 거기 산다는 걸 북한군이 알았던 거야. 주인집 남자를 우리로 알고 목을 따간 거지. 그 얼마 전에도 전방의 한 분대가 북한군에게 전멸당한 사건이 있었어.”

    2월경, 두 번째 작전 지시가 떨어졌다. 이번엔 요인 납치·암살이었다. 민족보위성(현재의 인민무력부) 소속의 상좌(대령)였는데, 그가 개성으로 시찰을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의 사진을 보여주며 얼굴을 익히게 하고는 며칠 몇 시경에 어디, 그다음엔 어디에 나타난다는 동선을 암기하게 했다.

    “실패하면 평양까지 가서라도 잡아오든지 죽이든지 하라고 하더군. 그런데 시도도 못하고 잡혔어.”

    아직도 작전 실패에 대한 부끄러움이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 임무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기를 꺼렸다.

    “1차 침투 때와 같은 루트로 북한에 침투했는데, 진눈깨비가 내리는 몹시 추운 날이었어. 갈대밭에 숨어 있는데 속옷까지 다 젖어 얼어 죽을 것 같더라고. 이현방이 ‘얼어 죽어도 죽고 잡혀 죽어도 죽으니까, 불이나 쬐고 죽자’고 하는 거야. 나도 너무 추워서 그러자고 했지. 고형연료로 갈대를 태우는데 눈에 젖었는데도 불길이 확 올라오더라고. 불 옆에서 이현방은 자고, 나는 보초를 섰지.”

    졸음이 몰려왔다. 꿈결에 갈대 스치는 소리가 났다. 바람에 스치는 소리와 동물이 지나가는 소리, 사람이 지나가는 소리는 다 다르다.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이내 갈대 스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촤악 하고 퍼졌다. 올 게 왔구나 싶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가만히 총을 들려는 순간, 뒤통수에서 ‘찰칵’ 노리쇠 장전 소리가 들렸다. “동무, 움직이지 말라요.”

    눈을 가린 채 끌려갔다. 돼지 울음소리가 나는 곳을 지나 진흙이 푹푹 빠지는 곳을 지나 끌려간 곳은 어느 창고. 이현방은 다른 곳에 감금됐다.

    “단발머리 여군이 심문을 하더군. ‘동무, 솔직하게 말하면 김일성대학도 보내줄 수 있고, 영웅칭호도 받을 수 있다’며 숨김없이 말하라고 회유하는 거야. 좋은 음식도 주고. 난 그냥 남조선이 싫어서 이곳에 온 거라고 버텼어. 이름을 쓰라고 하면 글씨를 몰라서 못 쓴다고 하고. 그런데 이틀인가 있다가 조사관이 내 앞에 지도를 펼쳐놓는데, 보니까 내가 태어난 동네야. ‘동무 이곳이 어딘지 잘 알지?’ 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내가 태어난 집이야. 깜짝 놀랐어. 다 알고 있으니까 숨김없이 말하라는 거지. 그래도 계속 오리발을 내밀었어.”

    계속 진술을 거부하자 고문이 시작됐다. 잠을 안 재우고, 구타가 이어졌다. 잠을 못 자는 게 맞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며칠 고문을 하더니 큰 부대로 이송을 하더라고. 그런데 우리 둘을 이송하는 데 3명밖에 안 따라오는 거야. 포승에 묶인 채 차를 타고 가다 꾀를 내 배탈이 나서 죽을 것 같다고 연기를 했지. 처음엔 그냥 바지에 싸라고 하다가 하도 급해 죽겠다고 난리를 피우니까 마지못해 차를 세워. 손으로 바지를 내릴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하니까 한 명이 포승을 느슨하게 해주려고 가까이 오더라고. 그때 이현방과 눈짓을 주고받고는 단숨에 목을 꺾어버리고, 나머지 둘을 한 명씩 맡아 공격했지. 걔들이 기절했는지 죽었는지도 몰라. 곧장 현방이와 서로 반대쪽으로 튀었으니까.”

    이중간첩 혐의

    쉬지 않고 남쪽으로 달렸다. 하늘이 도왔는지 그날따라 보름달이 환해 도망치기 쉬웠다. 북한쪽 비무장지대 철책선을 넘어 군사분계선을 향하다 산비탈에서 미끄러져 몇 십m를 구르는 바람에 머리가 깨지고 사금파리에 팔목이 크게 베었다. 나중에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그는 손가락 3개를 못 움직인다.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방한계선까지 온 것도 기적이었다. 당시는 군사분계선에서 인기척만 나면 암구호 없이 무조건 총을 쐈다. 그런데 마침 근무교대시간이어서 경계병이 없는 틈을 타고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지뢰를 안 밟은 것도 기적이었다.

    “여기선 이미 우리가 북한군에 붙잡힌 걸 알고 있었어. 그런데 살아서 돌아오니까 이중간첩으로 의심한 거지. 응급처지만 하고는 조사를 하더라고. 7박8일 동안 똥오줌 받아내면서 진술서를 쓰게 해. 토씨 하나 틀리면 왜 다르냐고 추궁하고…. 그런데 3일 뒤 이현방도 살아 돌아왔어. 그가 쓴 진술서와 내가 쓴 내용이 일치하니까 살았지, 아니었으면 이중간첩으로 몰려 죽었을 거야. 정보사에서는 내가 인민군 차를 타고 북한군 배웅까지 받으며 남쪽으로 내려왔다면서 간첩으로 몰았거든. 다 거짓말이지. 보상 안 주려고.”

    ▼ 결국 보상은 못 받았나.

    “국가가 사기를 친 거지. 평생 먹고살게 해주겠다고 하더니 한 푼도 안주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거야. 집에 가 있으면 연락하겠다면서 무임승차권 한 장 주더라고. 집에 돌아오니까 연락은 무슨, 오히려 2km 밖으로 외출할 때마다 파출소에 신고해야 한대. 말 안하고 나가면 바로 찾아와서 간첩과 접선한 것 아니냐며 조사하고.”

    이듬해엔 병역기피자라면서 징집영장까지 나와 군대에 끌려갔다. 억울했지만 그렇다고 ‘북한에 갔다온 나를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항변할 수도 없었다. 사회에 나가서 북파공작원 때 일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기 때문이다.

    정보사는 그가 이중간첩이라는 의심을 떨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매형이 통신병 출신이라 전기를 다룰 줄 알아 강원도 삼척에서 전파사를 차렸다. 그러자 그가 북한에서 받은 공작금으로 매형을 포섭해 전파사를 차리게 한 후 무선으로 북한에 국가기밀을 보낸다며 도청을 했다고 한다.

    “노골적으로 감시했어. 소문이 나서 손님이 다 끊어져 전파사가 망하게 됐지. 간첩으로 의심받는 가게에 누가 가겠어. 그 때문에 매형이랑 원수간이 됐어. 내가 이중간첩으로 의심되면 군사기밀이 가득한 군대를 보내지 말았어야지, 간첩을 군대 보내는 게 말이 되냐고.”

    온전한 명예회복 기대

    감시는 계속됐다. 제대 후 먹고살기 위해 전국을 떠돌며 장사를 할 때도, 지방 순회공연 쇼 사회를 볼 때도, 1974년 TBC 코미디언 공채에 합격해 방송활동을 할 때도 어느 곳에선가 감시하는 눈길이 느껴졌다. 2004년 북파공작원에게 위로보상금을 지급할 때도 정보사는 이중간첩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보상금 지급을 미뤘다. 거칠게 항의하자 마지못해 내주었다고 한다.

    “옛날에 나를 감시하다 걸리면 파출소를 부숴버렸어. 여러 번 그랬지. 웃기는 게, 그렇게 해도 몇 시간 잡혀 있으면 어디선가 전화가 와서 그냥 풀어주더라고(웃음).”

    해외에 나가거나 취직을 하려 해도 그가 북한에 갔다온 사실 때문에 신원조회에 걸려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웠다고 한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한 일이 오히려 먹고사는 데 걸림돌이 된 셈이다.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니까 아쉬움이 많지. 2004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훈장 하나 주지 않아. 대우도 형편없고. 아직 온전한 명예회복이 됐다고 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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