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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픽션에 놀아난 내가 안 미친 게 용하다”

‘저축은행 비리’ 무죄판결 이철규 前 경기경찰청장 6시간 격정토로

  •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검찰 픽션에 놀아난 내가 안 미친 게 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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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동천 배임 혐의는 사실상 아들 대신 형사책임 지는 것”
  • ● 유동천 구치소서 토로 “고향 후배에 누명 씌워 죽고 싶다”
  • ● “검찰의 기소독점 견제 위해 경찰 수사권 독립 절실”
  • ● “나는 아직 치안정감…내 발로 나가는 일은 없다”
“검찰 픽션에 놀아난 내가 안  미친 게 용하다”
11월 7일 저녁 약속 장소인 서울 강남의 작은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그는 푸석푸석한 빵을 뜯어 먹고 있었다. 아담한 체구에 평상복을 입은 이철규(56) 전 경기지방경찰청장(치안정감)의 첫인상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경찰 최고위급 간부보다 시골에서 막 올라온 농부에 가까웠다. 윤기 잃은 빵처럼 얼굴이 초췌했다.

테이블 한쪽에는 지난 20개월 동안 그를 괴롭힌 법정싸움의 흔적이 한 무더기의 서류 속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는 “며칠 전 내 얘기를 가지고 쓴 ‘동아일보’ 사설을 봤다.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며 “사설 제목처럼 누가 내 20개월을 보상해줄 건가”라고 반문했다.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 남자는 답을 찾았을까.

지난해 2월 29일, 유동천 제일저축은행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을 수사하던 대검찰청 산하 저축은행비리합동수사단은 그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했다. 영어(囹圄)의 몸이 된 그는 보름여 뒤 기소됐다. 공소사실은 ‘민원 해결이나 수사 무마를 대가로 강원 동해시 북평중·고등학교 선배인 유 회장에게서 네 차례에 걸쳐 모두 3000만 원, 박종기 전 태백시장과 박영헌 재경태백시민회장에게서 각각 1000만 원을 받았다’는 것. 이 전 청장은 이를 모두 완강히 부인하며 결백을 주장했지만 검찰은 그를 끝내 법정에 세웠다.

“증거 부족이 아니라 누명”

대법원까지 간 이 사건은 지난 10월 31일 1, 2심 판결대로 무죄로 종결됐다. 대법원은 이날 ‘검찰의 공소사실을 진실하다고 확신할 만한 정황증거나 물증이 없으므로 이 전 청장의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과 이를 그대로 유지한 항소심 판결은 법리상 정당하다’며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이 전 청장은 1, 2심 판결문을 내밀며 격한 감정을 쏟아냈다.

“검찰이 내게 좋은 감정이 아니란 건 진즉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날 옭아맬 줄은 몰랐다. 피의자의 허위진술과 검찰의 석연찮은 수사로 실체 없는 사건에 휘말려 내 직위는 해제됐고, 명예에 흠집이 났다. 5개월 동안 수감되기도 했다. 그간의 억울한 심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인데 아직도 날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돈은 받았는데 증거가 부족해서 무죄가 된 걸로 말이다. 단언컨대 난 있지도 않은 일로 누명을 썼다. 티끌만큼의 혐의점도 없어서 1 ,2, 3심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1, 2심 재판부는 유 회장이 돈을 언제 어디서 왜 줬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거나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꾼 점 등을 근거로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시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사건을 임의로 재구성해 피고인에게 돈을 준 것이 확실한 것처럼 객관적 증거에 꿰 맞춘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도 달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유 회장과 제일저축은행 전무로 비자금 관리를 담당한 장모 씨, 또 다른 전무 유모 씨, 행장 이모 씨 등 4명은 그 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을 당시 “대검찰청 대기실이나 빈 조사실에서 여러 차례 상의했다”고 진술했다.

이 전 청장은 “검찰이 입을 맞춰보라고 직접 대놓고 지시하진 않았겠지만, 피의자와 증인들이 공모할 수 있도록 조장하고 방조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또 “유 회장이 구치소에서 ‘고향 후배에게 주지도 않은 돈을 줬다고 진술해서 후배가 구속돼 죽고 싶다’고 했다는 말을 구치소 재소자에게서 직접 전해 들었다. 그가 허위진술을 한 것은 아들의 죄를 덮으려 했기 때문”이라며 검찰이 2012년 10월 법원에 제출한 사건 의견서를 내밀었다.

사건 의견서에는 ‘유동천은 1200억 원 상당의 배임, 300억 원 상당의 횡령 등으로 기소됐고 현재 징역 9년의 중형이 구형됐다. 유동천의 배임 혐의는 사실상 아들 대신 형사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 전 청장은 “형사책임에는 대위(代位) 책임이란 게 없다. 죄를 지은 사람이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런데 유 회장의 아들은 배임 혐의로 수사를 받거나 기소된 적이 없다. 유 회장은 다른 혐의로도 처벌을 받아야 하는 처지다. 결국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아들의 죄를 떠안고 검찰이 바라는 대로 진술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유동천과 제일저축은행 임원들은 은행 비자금을 조성해 횡령한 혐의로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라면서 ‘비자금 규모를 축소하거나 내역을 은폐하기 위해, 또는 수사상 편의를 제공받고자 허위로 진술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피의자 박영헌 씨도 같은 지적을 받았다. 재판부는 스스로 종전 진술을 임의 변경하는 박영헌의 태도로 볼 때, ‘자신의 진술에 따른 이해관계를 예측해 피고인에게 돈을 줬다는 사실 자체를 꾸며내 진술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도 내놨다. 이 전 청장이 박 전 시장에게서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에 대해서도 ‘피의자와 증인의 진술이 엇갈리거나 일관되지 않고 범행 장소와 일시 등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점, 진술내용이 객관적 상황에 맞지 않는 점 등을 볼 때 신빙성이 없다’고 무죄 판결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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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기자 │k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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