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호

“폭탄 안고 사는 삶…무데뽀로 뛰어들지 마라”

경력 22년 무명 女가수 이영아 육성 고백

  • 김진수 기자 | jockey@donga.com

    입력2014-01-22 15: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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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들이 명멸하는 연예계에선 별별 일이 다 일어난다. 최근 드러난 억대 스포츠 도박을 비롯해 프로포폴 상습 투약, 연예병사 군기문란 사건 등도 그렇다. 마약 투약, 병역비리, 성범죄 등도 끊이지 않아 수위를 넘은 ‘연예인 일탈’ 소식도 이젠 그저 일상의 파편처럼 무감해질 정도다.

    그런데 ‘사회적 물의’ 또한 연예계 중심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들의 전유물 아닐까. 주변부만 맴도는 무명 연예인은 늘 대중의 관심 밖이다.

    그래서일까. 대중음악계 음지에 공고히 뿌리내린 먹이사슬에서 벌어지는 광포한 일화를 가감 없이 써내려간 근작 소설 한 편이 눈길을 잡아챈다. ‘나는 22년간 늑대의 젖을 먹고 살았다’(책과나무).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저자는 이영아(43) 씨. 공식 앨범을 낸 트로트 가수. 그럼에도 아는 이 적다. 이른바 ‘무명 가수’여서다.

    처녀작이자 자전적 작품인 이 소설엔 지방 출신에다 중앙 연예계와 하등 연고가 없는 이 씨가 ‘노래가 좋아’ 무작정 밤무대로 뛰어든 후 겪은 갖가지 체험이 적나라하게 녹아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자궁암으로 일찍 돌아가신 다정했던 어머니, ‘아가씨’ 둔 다방을 운영하면서도 딸이 가수가 되는 걸 한사코 말렸던 아버지, 어머니를 대신한 정신적 지주였던 작은언니의 간암 투병, 자신의 공황장애 발병, 그런 악조건에서도 결코 놓지 않았던 인기 가수를 향한 꿈, 밤무대와 지방 행사 공연 때마다 쏟아지던 성 상납 강요, 이벤트 업자의 빈번한 출연료 떼먹기, 밤업소 주변을 서성대는 조직폭력배….

    그는 왜 아픈 가족사를 비롯해 입 밖으로 끄집어내기 힘든 얘기들을 굳이 들춰냈을까.



    “폭탄 안고 사는 삶…무데뽀로 뛰어들지 마라”
    공고한 먹이사슬

    궁금증은 만남을 부르곤 한다. 인터넷에서 이 씨에 관한 정보를 검색했지만, 별다른 게 없었다. e메일로 받은 프로필 역시 간결했다. ‘경북 영주시 풍기읍 출생. 1971년생. 경북항공고등학교(풍기읍 소재) 졸업. 밤업소 활동을 오래하다 서른 넘어 첫 앨범 발매. 2005년 1집을 시작으로 총 3장의 앨범을 냄.’ 이러니 더 궁금하지 않은가. 그를 만나 “왜 책을 썼느냐”고 ‘돌직구’부터 날렸다.

    “내 속에서 뭔가 가득 치밀어 올라 ‘악악’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올 만큼 미칠 것 같았다. 누구라도 붙들고 내 얘기를 하소연하고 싶은데 그럴 데가 전혀 없었다. 그나마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해 결국 책 출간 방식을 택했다.”

    이 씨는 2005년 1집 ‘딱 한 번’, 2007년 2집 ‘흔들리지 마’, 2010년 3집 ‘잊혀지질 않아요’를 발매했다. 전통 트로트가 아닌 세미 트로트 곡. 7080세대 취향에 어울리는 노래들이다.

    집필을 결심한 건 자신이 음원(音源) 관련 사기 피해자란 사실을 알고부터. 3집 앨범 녹음 후 음원을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하라는 작곡가 말을 떠올리고 협회를 찾은 그는 크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걸 알았다. 특정 기획사 소속이 아니라 직접 자비 들여 만든 앨범인데 휴대전화 컬러링, 벨소리 다운로드 등을 통한 무선 음원 판매수입을 고작 6개월쯤 고용했던 전(前) 매니저가 가로채는 기막힌 현실을 접하게 된 것. 자신이 가족, 친구, 지인에게 보내주는 음원의 수입조차 제작자를 사칭한 그에게 고스란히 빼돌려지고 있었다.

    억울함은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게 했다. 처음엔 두 권 분량. 탈고를 거듭하니 출간까지 2년쯤 걸렸다. 직접 제목을 단 원고 완성본은 출판사로 보내졌다. 1쇄 500부는 다 팔렸다. 2쇄를 준비 중이다.

    미미한 판매량. 하지만 읽어보니 문체가 감각적이고 스피디하다. 원고 감수는 받지 않았다. 초·중·고교 시절 글쓰기 대회에서 거의 매번 상을 받았단다. “공부 좀 더 해서 국어국문학과로 진학하라”는 선생님의 잦은 조언에도 그 길을 가지 않았다. 노래에 미쳐 나대는 이 씨를 그 무엇도 제어할 수 없었다.

    제작자 사칭한 매니저

    ▼ 소설은 허구의 세계를 묘사한다. 자전적이라곤 해도 충분히 윤색 가능한 문학 장르다. 책 내용은 100% 실화인가.

    “그렇다. 근데 막상 써놓고 보니 실제보다 너무 톤다운(tone down)했다는 생각도 든다. 더 집어넣을 내용이 많았으니 허구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 어둠의 세계에서 고군분투한 과거를 드러내는 데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무척 망설였다. 밤무대 뒷얘기는 물론 사생활과 지긋지긋할 정도인 암 가족력까지…마치 생리혈 묻은 팬티를 까뒤집어 세상에 공개하는 거나 진배없다는 두려움이 컸다. 하지만 미쳐 돌아가는 나락에서 ‘너는 뜬다’는 거짓말에 매번 속으며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당하는 무명가수들을 위해 이영아로 대변되는 현실을 책을 통해서나마 들려주고 싶었다. 책 제목의 ‘늑대’는 ‘힘 있는 자들’을 상징한다.”

    ▼ 독자 반응은.

    “재밌다. 당신이 겪은 산전수전, 공중전에 마음이 아련하다. 그 바닥이 더러운 건 짐작했지만 정말 골 때린다. 이 세 가지 반응.”

    이 씨는 20세부터 가수의 길로 ‘올인’했다. 서울 대 지방, 남성 대 여성, 댄스 아닌 트로트. 가요계에서 상대적 약자일 수도 있는 조건을 두루 갖췄음에도.

    ▼ 가수를 꿈꾼 이유는.

    “어릴 때부터 남 앞에서 노래하는 게 좋았다. 계모에게 구박당하는 게 싫어 생업도 가져야 했다. 당시만 해도 시골에선 상업계 고교 나와 적당히 경리 일 하다 23~24세쯤이면 시집가던 시절이다. 그런 빤한 인생이 싫었다. 아버지 다방의 아가씨들 앞에서 우월해보이고도 싶었다. 가수는 멋있으니까. 1989년 고교를 졸업했는데, 야망과 욕심이 커서 본래 학업엔 뜻이 없었다. 대충 졸업하고 어서 노래 불러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 노래를 정식으로 공부한 적 있나.

    “없다. 앨범 녹음 때 발성 트레이닝을 조금 받은 게 다다.”

    ▼ 원래 꿈은 뭐였나.

    “간호사. 엄마가 아파 암암리에 링거주사 놔주는 아줌마들을 자주 대하면서 그런 꿈을 가졌더랬다. 그러다가도 가슴 밑바닥에서 노래 욕구가 솟구치곤 했다. 단단히 미쳤던 게지.”

    ▼ 고교 졸업 직후 풍기읍의 가요제에서 수상한 경험이 있던데.

    “군민회관(당시는 영풍군)에서 매년 열리던 작은 가요제였다. 윤시내의 ‘열애’를 불러 1등 했다. 그때 느낌은 ‘아, 난 이 길로 가야 한다, 이렇게 화려하고, 나를 드러내 과시할 수 있고, 남이 우러러보는 무대가 내가 설 곳’이라 철없이 생각했다. 아버지의 외도와 폭력으로 가정적으로 불행했던 것도 그런 마음을 부추겼다. 엄마가 라디오를 끼고 살며 노래하는 걸 좋아해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내 성격이 예민한데, 노래 부를 때만큼은 상념을 잊을 수 있었다.”

    이 씨의 인생은 경주 나이트클럽→대구 백화점 직원→대구 보세 옷 매장 종업원→영주 밤무대 가수→태백 나이트클럽→구미 나이트클럽→안동 라이브 카페→앨범 취입→밤업소 일 중단→대구 나이트클럽→지방 행사 공연 등 다양한 궤적을 그렸다.

    앨범 내느라 3억 탕진

    현재 경북 안동시에 사는 그는 요즘은 지방 행사에만 간다. 무대에선 통상 본인 노래 한 곡과 기성 가수 노래 서너 곡을 부른다. 노래 연습은 이동 중 차 안에서 한다. 행사가 거의 없는 여름과 겨울엔 봄가을에 번 수입을 쪼개 산다. 한 달 평균 행사는 20회 가량. 출연료는 회당 30만~50만 원쯤. 좀 더 받는 이도 있지만, 대개 20만~30만 원 수준에서 움직인다고 한다.

    “심한 경우 밤엔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하며 행사엔 5만 원만 줘도 가는 이가 있다. 그러니 무명 가수 세계는 포화 상태다. 국내 무명 가수가 10만 명을 넘는다면 믿겠나. 입만 떨어지면 다 가수라고 한다. 그래서 더 생활이 힘들다. 집 없는 건 기본이고 월세 내기조차 빠듯하다. 미래도 없이 노래에만 기대어 사는 거다.”

    ▼ 돈은 좀 모았나.

    “한때 꽤. 하지만 앨범 내느라 몽땅 털어먹었다. 안 그랬다면 작은 액세서리 가게 운영하면서 내 몸 하나 먹고살 정도는 됐을 거다. 앨범 낸다고 서울까지 왔다 갔다 하며 길바닥에 깐 돈도 무시 못한다. 관계자들 만나 인사치레하고 밥 먹고 할 땐 그 기간만큼 일도 못했으니 풍비박산난 거다.”

    ▼ 앨범 제작에 얼마 들었나.

    “곡당 1000만 원. 3장 내는데 총 3억 원쯤 썼다.”

    이 씨는 2집 발매 후 정규 앨범 아닌 음반도 낸 적이 있다. ‘이화 카 드라이브’란 제목으로 기성 가수 노래를 30곡쯤 모아 불렀다. 고속도로휴게소 등지에서 팔렸다.

    “폭탄 안고 사는 삶…무데뽀로 뛰어들지 마라”

    ‘2012 대관령눈꽃축제’ 당시 공연 장면.

    ▼ 히트곡이 뭔가.

    “부끄럽게 왜 이러나? 없다.(웃음) 난생 첫 인터뷰인데, 우중충한 얘기만 하게 되네. 출세해서 이번 4집 앨범 콘셉트는 뭐예요, 이러길 꿈꿨는데….”

    ▼ 요즘은 음원 수입이 제대로 들어오나.

    “석 달에 1만~2만 원쯤?”

    ▼ 공중파나 케이블 방송에 출연한 적 있나.

    “2005년 8월 모 공중파 TV의 아침 다큐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내 1집 앨범 타이틀곡 제목처럼 ‘딱 한 번.’ 안동의 라이브 카페에서 활동하는 일상을 촬영했다. 물론 매니저가 ‘작업’한 결과다. ‘싱글벙글쇼’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엔 가끔 게스트로 출연했고, 내 노래가 방송을 탄 적도 꽤 된다. 한때 케이블 녹화엔 방송 시기조차 모른 채 악착같이 쫓아다녔다. 거기 가요프로그램에 출연하려면 회당 200만~300만 원 내야 한다. 며칠 전에도 무슨 협회장 전화를 받았는데, 케이블 녹화에 한번 내보내줄 테니 300만 원 달라더라. 그 프로그램 자막에 출연자들 이름이 나가는데, 2~3일에 한 번씩 싹 바뀐다. 돈 때문이지. 한마디로 ‘아주 비싼 노래방’ 아닌가. 백댄서도 1인당 10만 원씩 가수가 돈을 내지 않으면 안 붙여준다.”

    ▼ 매니저 비용은.

    “내가 지방에서 일하니 서울에서 움직일 매니저가 필요했다. 월 1000만 원쯤 줬다. MC 누구를 아는데 밥 한번 사줘야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가욋돈도 요구했다.”

    허울뿐인 가요제 입상

    “폭탄 안고 사는 삶…무데뽀로 뛰어들지 마라”

    3집 앨범 취입 때의 녹음실 연습 모습.

    ▼ 지방 행사 업자들의 횡포는 어느 정돈가.

    “한 이벤트 업자한테선 2년간 출연료를 한 푼도 못 받은 적이 있다. ‘줄게’ ‘줄게’ 하면서 차일피일 미룬다. 출연료 제때 달라면 그 세계에서 매장된다. ‘네가 감히 독촉해?’ 그런 식이다. 을(乙) 중 을이니 호소할 데도 없다. 가요제란 것도 몇몇 권위 있는 걸 빼면, 아무렇게나 명칭 갖다 붙이곤 죄다 가요제라고 떠든다. 그런 행사 본선엔 12~13명이 올라가는데 6~8명에게 상을 준다. 그러곤 ‘가수등록증’이란 걸 뿌린다. 그러니 한 해 전국 가요제에서 얼마나 많은 ‘가수’가 나오겠나. 수상자랍시고 초대 가수로 불려 다니면 헛바람 든다. 지방 행사나 케이블 방송 출연 기회는 한정적인데, 다들 ‘나도 가수다’ 그런다. 그만큼 무명 가수는 늘고 업자들 횡포는 심해진다. 귀해야 귀한 줄 아는데, 스스로 무덤 파는 꼴이다.”

    ▼ 공연이 끝나면?

    “뒤풀이 명목 술자리가 많다. 2012년 가을 대구 행사에 갔는데, 끝나고 막창집에까지 갔다. 난 업자들이 뭘 원하는지 아니 새벽까지 붙들려 있어봐야 좋을 게 없다 싶어 밤 12시까지만 있다 집에 돌아왔다. 초짜들은 여전히 업자 곁에 붙어 ‘고맙습니다’ 하고 있더라. 나중에 행사를 알선한 이에게 들으니 업자가 나더러 건방지다고 했다더라. 대체 내가 뭘 잘못했나.”

    ▼ 그들이 원하는 건?

    “몸이다. 한 지역 축제에서 공연하게 됐는데, 이벤트 업자가 느닷없이 전화해선 같이 출연할 가수 ○○○한테 공연 후 돌아갈 차가 없으니 이틀 전 차 몰고 나 먼저 오라고 했다. 단박에 거절했더니, 싸가지가 없다더라. 이름 알려진 ○○○한테 차가 없다? 이틀 전 오라는 건 더 말이 안 된다. 공연 전까지 자기랑 즐기자는 거지. 지방 공연 때 여가수와 행사 관계자가 차 안에서 관계를 갖는 것도 종종 목격했다. 그중엔 요즘 잘나가는 가수 △△△, □□□도 있다. 얼마나 더럽고 치사한가. 노래 부르고 돈 못 받고 몸까지 줘야 하고.”

    ▼ 성 상납 요구에도 시달렸나.

    “그랬다. 지금은 내가 그런 늪에서 한쪽 발을 떼놨기에 가고 싶은 행사만 뛴다. 하지만 두 발 다 빠진 이에겐 그 늪이 곧 생계의 연결고리다. 예컨대, 경기지역 모 케이블방송의 한 PD한테 몸 줘서 방송 탄 애가 많다. 물론 1회성이다. 그 PD 아직도 그 짓 한다.”

    ▼ 스폰서 제의는.

    “10번 넘게 받았다. 응한 적은 없다. 대부분 동거를 원한다. 이름 대면 알 만한 유명 가수의 전 매니저를 서울 청담동 녹음실에서 만난 적 있는데, 그 후 안동까지 일 때문에 왔다기에 만났더니 대뜸 ‘거기 좀 만져도 되느냐’더라. 케이블 출연 다 책임지겠다면서. 스폰서 입김으로 MC 보는 여가수도 적잖다. 그래봐야 약발은 1년도 안 간다. 시쳇말로 개털 된다. 더 반반한 무명 가수들이 차고 넘치니까. 그 세계는 돈과 몸 없인 도무지 이뤄지는 게 없다. 거절하면 ‘네가 그리 잘났냐’ ‘요조숙녀냐’ 한다. 근데 나라고 이 나이 먹도록 남자를 모르겠나. 다만 난 몸과 출연 기회를 맞바꾸는 더러운 거래를 하는 게 싫다.”

    이 씨는 책에서 이런 행태를 ‘돈 먹고 몸 주기’라고 표현했다.

    ‘돈 먹고 몸 주기’

    ▼ 지방 행사에선 인기 가수와도 종종 마주치지 않나.

    “그 사람들, 속된 말로 밥맛이다. 인기가수건 그들 매니저건 무명 가수 순서에 끼어들기 예사다. 만만한 게 홍어 뭐라고, 다른 스케줄 더 있다며 ‘너희는 한 곡만 부르고 얼른 내려가라’고 한다. 절대 미안해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벤트 업자들은 그들에게 회당 800만~1000만 원씩 준다.”

    ▼ 밤업소엔 폭력배도 드나들 텐데.

    “태백에서 일할 때 조직폭력배들이 나이트클럽을 접수한 적 있다. 나와 다른 여가수 한 명의 속옷까지 벗겼다. 그다음은 상상에 맡기겠다. 다행히 마지막 위기는 용케 피했다. 그때 일을 차마 책엔 소상히 못 쓰겠더라. 일 마치고 귀가하려 해도 조폭들이 웨이터들 군기 잡는다며 마구 때리고 병도 깬다. 가수들은 무서워 벌벌 떨다 오줌까지 지리고. 조폭들은 지배인 보는 앞에서 스트립 걸을 성폭행하기도 했다. 대기실에서든, 화장실에서든. 응하지 않으면 밥벌이 못한다. 술집에 술 있는 것처럼 나이트클럽마다 조폭들이 박혀 있다.”

    ▼ 일부 손님의 행패도 심하지 않나.

    “슬픈 곡 부르면 우울하다고 난리고, 흥겨운 곡일 땐 분위기 더 띄우라며 안주고 병이고 던진다. 사장 친구라면서 테이블로 오라고도 한다. 가수 아니라 접대부다. 노래 불러야 해, 옆에 앉아 술 따라야 해, 마이 바빠~.”

    ▼ 이 땅에서 여가수로 산다는 걸 어떻게 생각하나.

    “폭탄을 안고 사는 삶이랄까. 감히 말하건대, 무명 여가수로 사는 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인기 가수 바쁘다며 업자가 공연 도중 MR(반주음악)을 끊어버리는 대상이 무명 가수다. 한창 ‘내 가슴을 뛰게 하지~’ 하며 노래에 열 올리는데도. 왜 언론은 이렇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사정사정하며 살아가는 우리 얘기는 다뤄주지 않나. 난 그게 참 이상하다.”

    ▼ 책에 한때 알고 지내던 동료 가수 종희(가명)가 등장하는데, 그는 자살 기도를 한 후 어떻게 됐나.

    “결국은 자살했다고 들었다. 제초제 마시고.”

    “난 가짜 가수”

    책엔 ‘진짜 가수’와 ‘가짜 가수’란 대목이 나온다.

    ▼ 스스로 어디에 속한다고 여기나.

    “가짜 가수. 왜냐? 일단 히트곡이 없다. 내 노래는 아는 사람도 적고, 노래방 선곡책에도 안 나온다. 노래방 가서 친구들이 ‘네 노랜 어딨냐’면 난 화장실에 가버린다. 명색이 가수라면 ‘12XX 눌러봐, 이제 내 노래 나오잖아’ 정도는 돼야 하지 않나. 노래방 기계에 노래 등록하려면 곡당 1000만~1500만 원 든다. 밴드 악사들이 갖고 다니는 엘프 기계에 올리는 값도 100만~200만 원이다. 반면 인기 가수 노래는 자동으로 등록된다. 그보다 좀 아래 급 가수도 그렇다.”

    이 씨의 휴대전화 컬러링은 자신의 노래 ‘잊혀지질 않아요’다.

    ▼ 밤무대 악사들의 실력은.

    “신의 손 경지랄까. 그런데 주변에 자살한 사람이 많다. 할 줄 아는 건 음악뿐인데 일자리는 없다. 술에 절어 살다 폐인 되고,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복수 차고. 그러다 목도 맨다. 그들 대부분이 여리다. 자기 컨트롤을 못하고 자괴감에 잘 빠진다. 차라리 깡패 유전자라도 갖고 태어났다면 남의 집 유리창이라도 깰 텐데.”

    ▼ 밤무대 여가수들도 경쟁하나.

    “말 마라. 같은 업소에서 일 못하게끔 교묘하게 쫓아내기도 한다. 거기선 앨범 낸 게 핸디캡이다. 그 자체로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다. 신랑이 팀 마스터인 여가수도 있는데, 그중 일부는 남편한테 ‘쟤 반주, 딱 한 곡만 넣어줘’ 그런다. 그러면 난 한 곡만 부르고 그가 몇 곡 마칠 때까지 바보처럼 몸 흔들고 있어야 한다. 아이러니한 건 지방 행사에서도 그렇다는 거다. 내 노래가 없을 땐 출연료를 받았는데, 앨범 내니 공연해도 돈을 안 준다. ‘우리가 네 노래 부를 무대를 내주지 않느냐’는 양아치 논리를 앞세웠다. 난 1억 원을 쓰든 2억 원을 쓰든 앨범만 내면 그만큼 레벨이 올라가 출연료도 늘어날 걸로 봤는데, 현실은 달랐다. 근데 자기 노래가 있으면 어딜 가도 그 노랜 불러야 하지 않나. 한동안 출연료 없이 행사를 돌아다닌 게 억울해 휴대전화에서 ‘돈 떼먹는 놈들’ 번호를 싹 지웠다.”

    ▼ 앨범 홍보가 잘 안 된 듯하다.

    “방송국, 이벤트 회사 등에 죄다 CD를 뿌려도 안 먹혔다. 노래를 들어보지도 않는다. 무명이니까. CD 케이스에 100만 원쯤 끼워 넣으면 한 번쯤 ‘콜’하겠지만. 네가 뭔데 맨입으로 해달라느냐, 그거지. 하루는 방송국 한구석에 버리려고 잔뜩 쌓아둔 CD 더미에서 내 앨범을 발견하곤 머릿속이 하얘졌다. 동전을 넣어야만 커피가 나오는 자판기 원리를 그때 새삼 깨달았다.”

    ▼ 그런데도 왜 앨범을 더 냈나.

    “그러니 환자지. 1집은 내가 좋아서 부르고 싶은 노래 위주로 꾸몄다. 그랬더니 따라 부르기 힘들단 평이 많았다. 귀가 얇아서 2집은 쉬운 노래로 갔다. 당시 마산의 한 이벤트 업자가 10년 전속계약을 하자고 했다. 말이 10년이지, 그건 노예계약이다. 거절했다. 난 난이도가 좀 있고 나만의 기교와 음색도 드러낼 수 있고 스토리가 느껴지는 노래가 좋다. 그래서 3집을 또 내가 좋아하는 노래로만 냈다. 한 곡도 못 떴다. 결국 망했다.”

    자판기 원리를 깨닫다

    ▼ 허스키 보이스다.

    “어릴 때 내 목소리가 싫어 이비인후과에 찾아갔는데, 의사가 그랬다. ‘다른 사람은 일부러 목소리를 허스키하게 만들려고 소리 꽥꽥 지르다 성대결절 생겨서 오는데, 넌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쌌냐?’”

    ▼ 한때 래퍼들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갖지 않았나.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이 ‘쇼킹’했다. 몇 년 동안 악사들과 넋두리하며 지냈다. 룰라, 잼 등이 나와 마구 인기가 치솟는데 난 아무짝에도 쓸모없구나, 생각했다. 밤무대에서조차 ‘구조조정’ 당할까 걱정할 정도였다. 당시 나미 등 쟁쟁한 기성 가수들도 사라지지 않았나.”

    ▼ 그러다 다시 복고풍 흐름을 탔는데.

    “장윤정의 등장이 전환점이었다. 깜찍 발랄하게 ‘어머나’ ‘어머나’ 하며 인기를 끄니 짝퉁 가수까지 생겼다. 또한 케이블이 활성화하면서 그동안 안 보이던 최백호가 나와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이은하가 ‘밤차’를 부르고 하니 힘이 났다.”

    ▼ 좋아하는 가수는.

    “혜은이, 이은하, 윤시내, 최백호. 예전이나 지금이나.”

    ▼ 장르는 다르지만, 아이돌 스타를 꿈꾸는 이가 아주 많다.

    “무명 가수 말이니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을 텐데…나처럼 절대 무데뽀로 뛰어들지 마라. 곁에서 ‘넌 아니야’라고 입바른 소리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부모든 누구든. 인기 가수가 되는 건 재능이 뛰어나도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만큼 힘든 일이다.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재삼 고민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어떻게든 앨범 내고 관계자에게 돈 쥐여줘 봐야 헛된 거다. 제발 꿈 깨라고, 다른 직업을 갖고 노래 부를 기회를 찾는 게 더 낫다고 말하련다.”

    ▼ 삶을 후회하나.

    “노래 택한 건 후회 안 한다. CD 몇 장 달랑 들고 무모하게 ‘메이저리그’행을 꿈꾼 건 후회한다. 앨범 낸 것 자체를 후회한다. 그걸 안 냈을 때도 난 가수였으니까.”

    “제발 꿈 깨라”

    ▼ 가수 활동은 접나.

    “한 명이든 열 명이든 내 노래를 들으려는 이가 있고 불러주는 무대가 있으면 가서 부른다. 스스로 무대를 찾아 나설 생각은 없다.”

    ▼ 앞으로의 계획은.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다. 글쓰기와 영화 감상이 취미라 나름 자신 있는데, 그 또한 벽이 높지 않겠나. 그래도 갈 데까지 가보려 한다. 소설 추천사를 써준 연기자 이정길 씨가 요즘 막장 드라마가 너무 많은데 꼭 좋은 작가가 되라고 조언했다. 첫 소설이 인생 2막을 위한 터닝 포인트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씨는 작곡가가 붙여준 ‘이화’에서 팬들이 붙인 ‘이자빈’으로 바뀌었던 예명 대신 이제 본명을 되찾았다.

    “요즘 무대에서 MC가 ‘이자빈’으로 소개하면 내가 나서서 정정한다. 다시 나, 이영아로 살아갈 거니까.”

    그의 1집에 실린 노래 ‘산다는 것은’의 가사는 어쩌면 굴곡진 그의 인생을 함축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디로 가야 하나 멀기만 한 세월/ 단 하루를 살아도 마음 편하고 싶어/ 그래도 난 분명하지 않은 갈 길에 몸을 기댔어~(중략)~산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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