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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산업 판도 바꾼 ‘SNS 황제’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주

  • 하정민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인터넷산업 판도 바꾼 ‘SNS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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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저커버그의 이름을 알게 된 사람이 하버드대 조정팀의 쌍둥이로 유명했던 캐머런과 타일러 윙클보스 형제. 이들은 인도계 하버드생 디비야 나렌드라와 함께 하버드대 교내 데이트 서비스인 ‘하버드 커넥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로그래머가 필요했던 윙클보스 형제는 자신의 사업 구상을 밝히고 저커버그에게 동참을 제안한다.

저커버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듯했으나 2004년 2월 갑자기 자신의 친구인 더스틴 모스코비츠, 크리스 휴즈, 앤드루 매컬럼, 에두아르도 새버린과 함께 하버드생들끼리 사생활을 공유하는 사이트 ‘더페이스북(thefacebook)’을 만든다. 오늘날 페이스북의 원형이다. 적록색맹인 저커버그가 비교적 구분하기 쉬운 색이 파란색이었기에 페이스북 바탕이 푸른색이 됐다는 것 또한 이제 고전에 속하는 일화다.

저커버그는 더페이스북 오픈 초기에 가입자를 하버드생으로 제한했다. 하지만 입소문이 나자 하버드가 있는 보스턴 거주자, 예일 컬럼비아 등 인근 동부 지역의 명문대 재학생으로 대상을 확대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창업 첫해인 2004년 이용자 수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

거듭된 소송

사업을 확장해야겠다고 결심한 저커버그는 2004년 6월 학교를 그만둔다. 그리고 창업 동지들과 함께 동부 보스턴을 떠나 서부 실리콘밸리의 팰러앨토로 회사를 옮긴다. 이때 더페이스북에 합류한 사람이 바로 음악 파일 공유 사이트 냅스터의 창업자이자 벤처 투자자로 유명한 션 패닝이다.



패닝은 저커버그에게 중요한 제안을 한다. 바로 ‘더페이스북(thefacebook)’에서 ‘더(the)’를 빼고 기업명을 단순화하라는 것. 저커버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패닝의 소개로 실리콘밸리 벤처 투자자와의 교류도 늘렸다. 회사는 쑥쑥 성장했다. 2005년 600만 명, 2007년 5700만 명까지 늘어난 가입자는 2008년 1억 명을 돌파했다.

이때부터 내분도 본격화했다. 페이스북 초기에는 프로그램 개발 및 서비스를 저커버그가 맡고 회사 운영 및 마케팅을 새버린이 담당했다. 하지만 회사가 커가면서 둘은 종종 성장 전략을 두고 충돌을 빚었다. 이 와중에 패닝이 저커버그에게 “새버린의 역할이 미미하다. 그를 몰아내라”고 종용하자 둘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잠시 망설이는 듯했던 저커버그는 결국 새버린과 결별했다. 분노한 새버린은 친구를 상대로 거액의 소송을 제기했다.

새버린 이전에 이미 윙클보스 형제와 나렌드라 또한 페이스북이 자신들의 사이트 하버드 커넥션을 모방했다며 저커버그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복잡다단한 소송에 지친 저커버그는 결국 이 모두에게 상당한 양의 주식을 주고 합의했다. 정확한 액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윙클보스 형제에게 준 페이스북 주식만 6500만 달러에 달한다. 현재 가치로는 최소 3억~4억 달러가 넘는 엄청난 규모다. 저커버그는 결국 패닝과도 이별했다.

진흙탕 소송전을 통해 저커버그가 얻은 점도 많다. 무엇보다 1인 지배체제를 굳건히 확립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회사를 키울 수 있었다. 페이스북과 마찬가지로 2004년 설립됐지만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의 뉴스코퍼레이션에 인수된 후 방향성을 잃어버린 경쟁 사이트 마이스페이스와의 결정적 차이점이다.

특히 저커버그는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의 유연함과 편의성을 잘 살리면서도 페이스북의 핵심 키워드인 ‘실명성’을 놓치지 않았다. 13세 이상인 사람은 누구나 가입할 수 있지만 출신학교, 거주지, 기혼 혹은 연애 여부 등 개개인의 상세 정보를 세세하게 기록하도록 만들었기 때문. 아무리 온라인상의 친구나 지인이라고 해도 허무맹랑한 가짜 프로필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번듯한 직업과 취향을 가지고 있어 오프라인에서도 해당 관계가 발전할 수 있다는 여지를 주는 데 주력했다는 의미다. 온라인 사이트지만 온라인 인맥을 오프라인 인맥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주기 위해서다.

샌드버그의 가세

1인 지배 체제를 확립한 저커버그에게 새로운 도약이 필요했다. 이때 천군만마와 같은 조력자가 나타났다. 바로 2008년 3월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COO)가 된 셰릴 샌드버그(45). 최근에는 여성의 사회참여를 독려한 베스트셀러 ‘린 인(Lean In)’의 저자로 더 유명한 샌드버그는 저커버그와 같은 유대계이자 하버드대 선배다.

1995년 하버드대 경영학석사(MBA)를 졸업한 그는 매킨지 컨설팅, 미국 재무부 등 거대 조직에서 일하며 승승장구했다. 특히 재무부 재직 시절 당시 재무 장관이던 로런스 서머스 전 하버드대 총장의 눈에 띄어 그의 특별 보좌관으로 활약했다. 이를 통해 샌드버그는 미국 사회를 주무르는 정재계 거물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2001년 당시 떠오르던 기업 구글에 입사한 샌드버그는 이곳에서도 출세 가도를 달렸다. 2004년 성공리에 기업공개(IPO)를 마치고 세계 최대 검색엔진이 된 구글은 애초에 페이스북을 인수합병(M·A)의 대상자로 봤다. 하지만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을 구글과 같은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야심을 품고 구글의 핵심 인재 샌드버그에게 접근했다. 2007년 12월 워싱턴의 한 파티에서 샌드버그를 만난 저커버그는 “당신을 위해 COO직을 만들겠다”며 집요하게 구애했다. 결국 샌드버그는 석 달 후 성공이 보장된 안락한 구글의 부사장 자리를 박차고 페이스북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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