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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25분 만에 귀순해 10년 만에 박사모 쓰다

탈북 청년 주승현의 고군분투 서울살이

  • 글·주승현 | 북한이탈주민·통일학 박사 joosy3050@naver.com 정리·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25분 만에 귀순해 10년 만에 박사모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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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북한도 아닌 한국에서 난생 처음 굶어
  • ● ‘미친 등록금’ 마련하려 피 뽑을 생각도
  • ● 푸대접 낙담 않고 대기업 취업
  • ● 호락호락하지 않을 통일을 소망하며
● 주승현(33)은 스물두 살 때 휴전선을 넘어 귀순했다. 비무장지대(DMZ)에서 남측의 심리전을 제압하는 방송요원으로 군 생활을 했다. 북한이탈주민의 한국 입국이 본격화한 2000년 이후 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박사학위를 취득한 첫 사례이자 최연소 탈북자 박사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회와 동양·금호석유화학·롯데그룹에서 근무했다.

10년 전 어느 겨울 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휴전선 철조망에 부딪혀 웅~웅~ 울음을 토하던 그 밤에 비무장지대(DMZ) 내 북측 심리전 제압 방송국에서 근무하던 나는 목숨을 건 귀순 길에 들어섰다. 북한군 GP(Guard Post)초소에서 한국군 GP초소는 뛰어서 5분, 걸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그 길은 북한에서의 스무 해가 넘는 내 인생을 뒤로하고 내딛는 길이었고 내 손에 쥔 것이라고는 어제의 동료(추격조)로부터 나를 지키는 AK자동소총뿐이었다.

하나원에서부터 ‘왕따’

월남(越南)과 침투를 막으려고 DMZ에 설치한 1만 볼트의 고압 전기철조망과 지뢰를 비롯한 장애물, 촘촘한 매복호, 전방 탐지기기의 추적을 피해 마침내 MDL(Military Demarcation Line·군사분계선)을 넘었고 탈출 25분 만에 나는 한국 측 초소에 무사히 도착했다. 아마도 한국에 들어온 2만7000명의 탈북자 중 최단 시간 내에 북한에서 한국으로 온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귀순은 사실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환경이 좋은 곳에서의 복무를 마다하고 DMZ를 선택한 것은 어린 나이였는데도 무력으로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는 북한 당국의 논리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출신성분이 우수하고 계급적 각성이 높은 자만 뽑혀오는 DMZ에서도 나는 심리전 제압 방송요원이라는 중요한 보직에서 근무했고, 적과 아군이 대치한 전초선이자 대북방송과 대남방송의 대결장에서 남북의 분단 상황을 6년간 목도했다.

사선을 넘어 한국에 귀순한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귀순용사가 아닌 탈북자, 새터민, 북한이탈주민, 탈북이주민 등 수많은 용어가 난무하는 탈출 이방인 대열에 합류했다. 정체성의 혼란과 상대적 박탈감 탓에 심한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다른 탈북자처럼 경제적 어려움 탓에 탈북한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끝없는 후회와 절망이 찾아왔다.

탈북자 정착기관인 하나원에서부터 나는 이른바 ‘왕따’였다. 특히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고향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였다. 내가 DMZ에서 근무한 군인 출신이라는 사실이 소문나면서 탈북 과정에서 그들이 겪은 트라우마가 반사적 분노로 표출돼 나에게 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북한 주민의 탈북을 총으로 막는 국경 경비대원이 아니었는데도 북측의 DMZ를 지키던 군인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나를 공격하는 그들을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원에서 퇴소해 먼지 가득하고 허름한 서울의 한 임대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지하철 타는 법도, 은행에서 돈 찾는 법도 모르던 터라 나는 차라리 외계인에 가까웠다. 어찌할 줄을 몰라 나를 담당한 형사에게 전화해 이것저것 물어보자 “혼자서 새로 온 탈북자 40명을 담당하는데 그중 절반이 어르신이다. 젊은 너는 알아서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이후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홀로 살아가야 했다.

10년 만에 학·석·박사

나는 북한에서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다른 탈북자처럼 제3국에 체류하면서 시장경제를 터득한 것도 아니기에 한국 사회에 나온 지 두 달 만에 얼마 안 되는 정착금마저 사기를 당해 날렸다. 정착금을 빼앗아간 사람은 탈북자였고, 불량 휴대전화와 짝퉁 물건을 나에게 팔아 생계비를 빼앗은 이는 한국인이었다. 생활비라도 벌려고 주유소에 찾아가 면접을 봤지만 대학생과 휴학생 구직자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중국 동포보다 더 어리바리했던 나를 뽑아줄 리 만무했다.

목숨을 걸고 DMZ를 넘어왔지만 잉여인간으로 전락한 채 북한도 아닌 남한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굶어보았고 몸서리칠 만큼 힘든 상황을 하릴없이 받아들기에는 깊은 내상으로 인한 통증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에 대한 죄책감, 상대적 박탈감과 알 수 없는 분노로 하루하루 폐인이 돼갔으며 5개월 만에 체중이 10㎏이나 줄었다. 그즈음에 정신적 좌절이 행동으로 발현되면서 극단적 선택도 수차례 했지만 용케도 목숨이 붙어 있었다.

25분 만에 귀순해 10년 만에 박사모 쓰다

일러스트·김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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