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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잇고 전통 넘는 장석·자물쇠 새 경지

두석장 박문열

  • 글·한경심 │한국문화평론가 사진·박해윤 기자

전통 잇고 전통 넘는 장석·자물쇠 새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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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보 없는 匠人’

그러다 공방이 홍은동으로 옮겨가고 그도 스승을 따라 7년여 숙식을 함께했다. 그 일이 힘들기만 하고 적성에 맞지 않았다면 그리 오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7년 세월 그는 스승에게 무엇을 배웠을까.

“배우기는 뭘…, 혼자 터득하는 거지. 다 알아서 만들어야 했지요.”

예전 공방이 그랬기도 하고 장인들이 본래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성향도 아니지만, 실제로 그는 ‘계보 없는’ 장인으로 불린다. 같은 중요무형문화재 두석장 김극천이 4대째 통영 장석의 전통을 오롯이 잇고 있는 데 반해 박문열은 평범한 공방에서 혼자 익힌 솜씨로 건축물의 철물부터 탑의 상륜부 제작과 자물쇠와 열쇠까지, 다루는 범위가 종횡무진이다. 어쩌면 그의 폭넓은 솜씨는 친절한 스승 없이 혼자 궁리하며 터득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친절한 가르침은 없었지만 솜씨 좋고 성실한 젊은이는 7년 동안 많은 것을 익혔다. 공구를 만들고 다루는 것부터 철을 깎고 정으로 문양을 새기고 음각과 투각, 조이질(쪼는 기법)과 상감(표면을 파고 다른 재질을 끼워 넣는 기법)까지 두루 익힌 그는 드디어 스승에게서 독립했다. 1970년대 중반,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였다. 그러나 실패.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스승 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3년을 더 보낸 뒤 한남동에 작은 공방을 차렸다.



“그때 우리 전통 가구는 주로 외국인들이 사갔습니다. 그러니 외국인이 몰려 사는 한남동이나 이태원 쪽에 공방을 내는 게 맞지요. 장석이 빠지거나 나무의 빛이 바랜 가구들을 수리해주고 다시 칠해주는 일을 했습니다. 옻칠이 아니라 고무나무에서 나온 재료를 알코올에 녹인 ‘세락’이라는 도료를 발라줬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전통 가구가 얼마 안 되는 것은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워낙 많이 팔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그때만 해도 우리 가구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우리가 모르던 때였으니까.

독립을 했다고 금방 돈이 잘 벌리는 것은 아니었다. 가구를 거래하는 상인이었다면 돈을 좀 만졌을지 모르지만 그는 상인들이나 가구를 사용하는 사람이 맡긴 가구를 수리했으니 큰돈을 벌기는 애초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나마 불이 나서 가게를 다 태워버리고 만다.

“가게에 있던 가구들이 다 남의 것이잖습니까. 남의 물건을 다 태워먹었으니 이만저만 낭패가 아니었지요. 용산경찰서에 끌려가서 조사까지 받았어요. 나라의 재산을 태워버린 죄를 지었다는 겁니다. 잠을 안 재우며 괴롭히는데, 무섭고 힘들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경찰이 정말 무섭던 시절이었지요. 결국 검찰 조사까지 받고 벌금을 물고 풀려나왔습니다.”

경찰과는 반대로, 그에게 가구를 맡긴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위로하며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런 이해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평소 그의 우직함과 정직함, 신용이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전통 잇고 전통 넘는 장석·자물쇠 새 경지

건물이나 가구에 다는 자물쇠도 두석장이 만든다. 박문열은 어릴 때부터 자물쇠 수리를 많이 해서 자물쇠 다루는 일에 아주 능숙하다. 여러 가지 모양의 자물쇠와 열쇠.

“내 인생이 시작됐다”

빈털터리가 된 박문열은 어쩔 수 없이 옛 스승의 공방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스승의 공방은 이제 제자와 아들, 사위가 운영하고 있었고 그는 월급쟁이로 얼마간 일했다. 아마 이때가 그에겐 심정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다 바로 위의 형이 군에서 제대하고 나와 같이 일해보자고 해서 이태원에 다시 공방을 냈다.

그런데 아무리 성실하게 일을 해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가구에 장석은 빠질 수 없는 품목이지만 가구처럼 덩치가 크지 않으니 외상을 하기 일쑤였다. 2년 좀 넘게 버티다가 사업을 접어야 했다. 이번에는 막내 매형이 운영하는 가구공장에 들어가 4년을 일했다. 그의 삶은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전통공예를 알아주지도 않는 때였으니까요. 1990년대 들어서 사람들이 전통 가구를 찾게 돼서야 저도 겨우 독립할 수 있게 됐습니다.”

고가구는 이미 품귀였으니 이제 현대 소목들이 전통 가구를 새로이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열렸다. 드디어 그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매형의 홍은동 공장 건물 옥상에 여덟 평짜리 가건물을 짓고 그는 새롭게 독립했다. 1990년대 초였다. 이때 비로소 “내 인생이 시작됐다”고 그는 말했다.

생계를 돕기 위해 아내가 아들을 업고 파출부 일을 하러 간 사이 그는 딸아이를 눕혀놓고 일하는 생활이었어도 박문열은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한 고집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공방에 오면 언제나 작품을 만들었고, 낮에는 주문 들어온 일을 했으며 그리고 다시 밤까지 작품에 몰두했다. 그렇게 정성 들여 만든 작품을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했다. 전통공예관 임영주 관장의 격려로 1987년부터 꾸준히 작품을 냈지만 뽑히기는 해도 큰 상을 받지는 못했다. 주변 사람들 말마따나 가구에 붙이는 장석으로는 큰 상을 받기 힘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통 잇고 전통 넘는 장석·자물쇠 새 경지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체육부장관상을 받은 숭숭이 장석을 단 반닫이. 투각으로 섬세하게 표현한 세련된 장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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