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호

맨발, 맨주먹, 맨몸 ‘3M 목회’의 기적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

  • 배수강 기자 | bsk@donga.com

    입력2015-01-22 10: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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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골, 진골도 아닌 해골…주린 배로 설교 맹연습”
    • 喪家, 사우나 돌며 “나를 만나면 운명 바뀐다” 선교
    • 신도 4명 개척교회에서 3만5000명 대형 교회로
    • 인생 스토리 담은 책, 한국 목회자 최초 중국 출판
    맨발, 맨주먹, 맨몸 ‘3M 목회’의 기적
    그에겐 미안하지만, 교회가 아닌 체육관에서 봤다면 역도선수라고 생각했을 거 같다. 170cm가 채 안 돼 보이는 단구(短軀)에 다부진 상체도 그렇거니와 화법 역시 직설적이다. 뒤끝 흐리는 애매한 대답이 없다. 만약 그가 인사청문회 대상자였다면 예스(Yes), 노(No)가 분명한 단답형 답변에 청문위원들이 무척 반가워했으리라.

    1월 7일 오후 경기 용인시 죽전로에 있는 새에덴교회에서 만난 소강석(53) 목사는 “나는 해골이요…‘붉은 여왕의 효과’ 아시나”며 입을 뗐다. 보잘것없던 개척교회를 신도 수 3만5000명이 넘는 대형 교회로 키운 비결을 물을 때였다.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효과’처럼 저는 남보다 2, 3배 더 뛰지 않으면 앞서갈 수 없었어요. 저는 기독교계에서 보면 성골(聖骨), 진골(眞骨)도 아닌 해골(骸骨)이었습니다. 그런 해골이 성골, 진골 출신 목회자들보다 앞서가려니 부지런히 뛸 수밖에요. 저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 많은데 제가 그나마 여기까지 온 것은 피흘림, 노력과 열정, 헌신 때문일 겁니다. 간단해요.”

    ▼ 왜 자신을 해골로 칭하는 겁니까.

    “이른바 ‘빽’도 줄도 없었고, 교회 집안에서 난 것도 아니니까요. 스펙도 외모도 내세울 게 없었어요. 저는 전북 남원의 지리산 골짜기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산을 워낙 좋아해서, 지금도 산속에 살고 싶어요.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옴직한 여학생도 좋아해봤고, 싸움질도 해봤고…. 아버지께선 한학(漢學)을 하신 분이라 절대 교회는 다니지 말라며 ‘교회 다니면 쌍놈’이라고 하셨죠.”



    “부흥회가 붕어 잡는 걸로 알고…”

    ▼ 유교적 가풍이 강한 집안에서 목사가 나온 거네요.

    “초등학교 입학 전일 겁니다. 우리 동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기에 나는 ‘붕어 잡는다’는 줄 알고 ‘바케스’(양동이)들고 따라갔어요. 그런데 시골교회에는 붕어는커녕 사람들만 바글바글하고…. 어린 마음에 ‘교회는 못 믿을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후 남원에서 중학교 졸업하고 전북 군산으로 고교 유학을 갔습니다. 2학년 방학 때 한창 입시공부를 하고 있는데, 후배가 교회에 가자고 하더라고요.”

    ▼ 가풍과 ‘바케스’의 아픈 추억 때문에 거절했겠군요.

    “그럼요. 한 대 쥐어박았죠. 그런데 후배가 그러더군요. 교회에 가면 예쁜 여학생이 많은데, 여학생들이 우리 학교(군산제일고)를 우습게 본다고. 영화 ‘친구’에 나오는 장면처럼 다들 데리고 가봤어요. 아 그런데, 가서 보니 정말 예쁜 여학생이 제가 그날 처음 왔다고 ‘형제님’ 하면서 성경책도 가져다 주고 찬송가도 알려주더라고요. 요새 아이들 말마따나 ‘뿅’ 갔죠.”

    ▼ 여느 청소년의 교회 입문 과정과 비슷하군요.

    “유학 가서 외로울 때였으니까요. 여학생한테 잘 보이려고 성가대 활동도 하고 성경 공부도 참 열심히 다녔어요.”

    ▼ 혹시 그분이 지금 부인?

    “아뇨. 제가 신학교 간다니까 헤어지자고 하더라고요.”

    ▼ 왜요?

    “제가 일반 대학 진학해서 회사에 취직했다면 계속 교제했을 거예요. 목회의 길이 힘들잖아요.”

    ▼ 한학을 하신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을 텐데요.

    “면사무소 가서 직원들에게 ‘막내아들을 호적에서 파내라’고 호통쳤어요. 그런데 그게 되나요. 성경책 하나 달랑 들고 집을 나왔어요.”

    소 목사에게 신학대 진학은 ‘광야에서의 방황’,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당장 마땅한 거처도 생활비도 없어 입학 전부터 노숙생활을 했다. 대학 다닐 때는 죽어라 공부해야 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교 다닐 형편이 못 됐기 때문이다.

    “하도 가난하니까 친구도 안 생기더라고요. 동기생 대부분이 목사나 장로 아들이라, 학비나 생활비 걱정하는 친구는 거의 없었어요. 성골, 진골 틈에 나만 해골이었으니 기가 죽을 수밖에요. 도서관과 예배실을 오가며 공부와 기도만 했어요. 빈 예배실에서 고장 난 마이크 들고 설교와 찬양 연습을 하고, 예배실을 닫는 주말에는 인근 무등산 기도원에 가서 나무막대기를 들고 설교 연습을 했습니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가 교인들이고, 막대기가 마이크였던 셈이죠. 성골, 진골들이 라면 먹고 탁구 칠 때, 허기진 배를 안고 미래의 꿈을 꾸면서 깊고 푸른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를 갈았습니다.”

    ▼ 성골, 진골들이 배고픈 해골 친구를 외면했나요.

    “아마도 ‘라면 내기’ 탁구를 했다면 라면은 나 혼자 다 먹었을 겁니다. 운동을 좋아하고 꽤 잘했어요. 그런데 내가 피했어요, 스스로.”

    가락동 스타일, 분당 스타일

    어렵게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암담하긴 마찬가지였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줄도 없고, 길들지 않은 광야의 야성미 소유자’에게 선뜻 부목사를 제의하거나 자리를 소개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소 목사의 ‘야성미’는 이후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 교회를 만든 비결이기도 하다. 그 얘기는 잠시 뒤에 다시 살펴보자.

    “결국 27세 때 상경했어요. 교회가 없고 물가도 싼 문정동 가락시장 인근에 정착했어요. 하나님 은혜가 있으면 반드시 전도할 수 있다, 반드시 부흥한다고 믿었어요. 그땐 미쳤습니다. 부동산, 미장원, 상가(喪家)를 돌며 사람들을 만났고, 동네 사우나에서도 생면부지의 홀딱 벗은 사람들과 손잡고 기도했습니다. 당시 가락시장 일대엔 가난한 인생 패배자가 많았는데, 그분들이 욕하는 소리가 이상하게도 정겨웠어요. 인간적이기도 했고. 나도 그들과 같은 비주류 인생을 살아왔잖아요. 그들에게 내 인생을 소개하며 ‘나를 만나면 당신의 운명이 바뀝니다’ 하면서 동반자로 살아가자고 했어요.”

    1988년 소 목사의 개척교회 첫 주일예배일, 보증금 800만 원에 월세 48만 원인 23평 지하 예배실에 5명이 모였다. 건물 주인, 교회 간판을 달아준 간판집 아저씨, 아기를 업고 나온 할머니, 그리고 소 목사였다.

    “열정에 사로잡혀 정직과 진정성을 바탕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도하니까 1년 만에 신도수가 100명이 넘었어요. 예배 참석자는 대부분 사회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었는데, 비주류로서 역경을 이겨낸 제 인생 스토리와 열정에 공감한 것 같아요.”

    그는 자신의 목회를 맨발, 맨주먹, 맨몸으로 일궈낸 ‘3M 목회’라고 표현했다. ‘3M 목회’는 지금 대지 2000평(6600㎡), 지하 3층, 지상 10층짜리 대형 교회가 됐고, 4명이던 신도는 3만5000명이 됐다.

    “신도가 늘어 교회를 새로 지으려고 가락동 인근 문정동, 장지동에 부지를 보러 다녔어요. 그런데 제법 괜찮은 부지는 대부분 그린벨트로 묶여 있고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고 있어서 1995년 경기도 성남의 분당신도시로 갔죠. 그러다 2005년 지금의 죽전으로 옮겼어요.”

    ▼ 가락동 스타일이 분당 스타일로 바뀌었겠네요.

    “고민도 많았어요. 가락동에 ‘본질파’ ‘야성파’ 신도가 많았다면 분당엔 ‘세련파’ 신도가 많죠. 양파 냄새 나고 거칠고 욕도 잘하는 ‘파괴된 사나이와 여인들’은 제 스타일대로 변화시켰는데 분당 스타일은 달랐어요. 가락동에서도 ‘설교가 거칠다, 사납다, 제트기 같다’고 비판하며 떠난 신도가 꽤 있었거든요.”

    ▼ 그래서요?

    “열정도 좋지만 제트기 같은 설교는 지양해야겠구나 생각했죠. 그래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링’ 식으로 바꿨어요. 성경 내용과 제 인생 얘기를 들려주며 감동을 주는 방식이죠. 최악의 스펙을 가진 요셉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명, 사랑과 용서, 그게 스토리죠. 역경을 극복한 저의 체험 스토리도 설교의 중요한 소재가 되고요.”

    맨발, 맨주먹, 맨몸 ‘3M 목회’의 기적

    2012년 6월 국립서울현충원 현충탑 참배 후 6·25 참전용사들과 행진하는 소강석 목사(오른쪽에서 세 번째).

    ‘사람을 섬기는 교회’

    소강석 목사의 인생 스토리는 지난해 10월 중국대륙에도 상륙했다. 저서 ‘스펙을 넘어 스토리를 만들라’가 ‘찬란한 경력을 초월하라(超越燦爛的經歷)’는 제목으로 중국에서 출판된 것. 한국 목회자의 책이 한국이나 홍콩·대만 등에서 중국어로 번역돼 출판된 적은 있어도 중국 출판사에 의해 현지에서 출판된 것은 처음이다. 책에는 고난 속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교회를 개척한 이야기를 비롯해 소 목사의 인생 역정과 더불어 성경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한편 공인자격(스펙)을 뛰어넘어 성공적인 인생을 가꾸는 방법이 담겼다.

    소 목사는 설교할 때면 ‘지역 주민과 함께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고 한다. 교회 표어도 ‘사람을 섬기는 교회’다. 번번이 논란이 되는 교회 사유화와 세습 문제에 대해서도 할 말은 했다.

    “대한민국이 압축 성장을 했지만 후유증도 큽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갑자기 성장하니, 갑자기 자본주의의 위력을 실감하니 내부 파워게임이 벌어지는 거죠. 교회는 기업체와 다를 바 없게 됐고, 교회의 거룩함은 땅에 떨어졌어요. 가끔 교회 내분, 교회 세습으로 싸우는 사건이 보도되면 일반인은 교회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갖게 되지요.”

    ▼ 자녀가 어떻게 됩니까.

    “아들 하나, 딸 하나입니다.”

    ▼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려고 하지 않나요?

    “(손사래를 치며) 아이고, 절대 안 한다고 해요. 아들은 공군 학사장교이고 딸은 대학생인데, 아버지가 고생하는 걸 보면서 자라서 그런지 절대 목회자의 길은 가지 않겠답니다.”

    ▼ 아버지가 어때서요?

    “아들이 그래요. ‘나는 한 여자(아내)를 불행하게 하지 않겠다’고요. 사실 저는 교회 부흥에만 매달렸지 집안일엔 신경도 못 썼어요. 교회에서 먹고 자고, 만날 책 쓴다고 교회에서 밤새는데 누가 좋아합니까. 결혼 초기 아내가 ‘이럴 거면 왜 결혼했느냐’고 따지기 일쑤였어요.”

    ▼ 목사로서는 성공적인데, 가장으로선….

    “하하. 결혼 초기에 아내에게 사정했죠. ‘가정을 희생하지 않으면 교회가 부흥할 수 없다. 우리가 조금 희생해야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고 영적으로 윤택하게 된다’고. 그러면서 교회든 가정이든 C학점은 받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대신 해외 선교여행 갈 때는 꼭 아내와 함께 가죠. 지금은 (아내가) 결혼 잘했다고 하죠(웃음). 목사 부인으로서 사회적 지위도 좀 있어 보이니까.”

    적대감, 하향평준화, 세습

    ▼ 지금으로선 교회 세습 문제에서 자유롭겠네요.

    “그렇죠. 우리 사회가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압축적으로 이뤄내다보니 덩치만 커졌지 정신연령은 아직 어린 것 같아요. 교회도 마찬가지죠. 덩치는 커졌지만 과도기, 조정기라고 봐요. 내가 피땀 흘려 세운 교회, 그것도 부와 영광을 상징하는 대형 교회 담임목사 자리를 남에게 줄 수 없다는 주장에는 물론 반대합니다.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주인은 하나님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기회를 줘야죠. 다만 교인 대부분이 ‘우리는 목사님 아들을 원한다’고 한다면 세습이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죠. 외국엔 세습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교회도 많아요. 기계적 평등을 앞세워 하향평준화를 강요하는 심리, 대기업에 대한 일종의 적대감, 이런 것들이 교회 세습 문제와 맞물리면서 반감이 커지는 것 같아요. 교회 이미지도 큰 타격을 입고요. 이제는 교회도 기업의 이미지 광고나 공익 광고처럼 자기 이미지를 끌어올리려고 노력해야 해요. 교회와 교회를 하나로 묶는 연합사업도 적극 벌여야 합니다.”

    소 목사는 지난해 12월 27일 (사)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경기총·총회장 주남석 목사) 신임 대표회장으로 선출됐다. 경기총을 통해 교회 간 연합사업을 벌이겠다는 게 소 목사의 생각이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

    ▼ 교회 이미지 광고를 한다?

    “여러 방법이 있겠죠. 굳이 매체 광고를 하지 않더라도 사회적 책임을 갖고 할 수 있는 활동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실천하는 것도 교회의 책무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고요.”

    그래서일까. 새에덴교회는 지역주민에게 피트니스센터와 재즈댄스연습장 등 체육시설을 개방하고 각종 문화교실과 연극 공연, 오케스트라 연주회 등을 개최한다. 새에덴교회가 주민의 약속 장소, 휴식 장소로 활용되는 것도 이런 지역사회 활동의 일환이다.

    매년 6·25전쟁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여는 것도 눈길을 끈다. 2007년 참전용사 30명을 초청한 것이 출발점인데, 매년 참가자가 늘어 현재는 참전용사와 가족 200여 명을 초청한다. 2009년에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미 국방부 관계자를 비롯해 1000여 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열기도 했다.

    “종종 미국을 방문해요. LA에 갔더니 흑인 할아버지 한 분이 다리의 총상을 보여주며 6·25 참전용사라고 하더군요. 어떤 분은 ‘우리는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웠는데 한국인은 왜 성조기를 짓밟고 주한미군 훈련을 방해하느냐’고 따지더군요. 그래서 ‘한국인이 다 그런게 아니고 아주 일부가 그렇다’ ‘미국처럼 한국에도 표현의 자유가 있다’며 사과했어요. ‘나 같은 목사도 있으니 이해해달라’고 했는데, 그간 우리를 도운 참전용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데 인색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늦었지만 감사의 뜻을 전하는 행사를 열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새에덴교회의 6·25 참전용사 한국방문 행사는 참가자를 버스에 태워 6·25 전적지를 관람하는 그저 그런 행사가 아니다. 참전용사와 그 가족을 한 팀으로 해서 통역·인솔자 한두 명이 팀을 안내한다. 방문 기간 내내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힐링’이 목적이다.

    참전용사 ‘힐링 이벤트’

    소 목사 인터뷰에 배석한 이종민 목사(교무국장)는 “소 목사의 인적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해 주요 방문지마다 참전용사 일행을 ‘콘보이’(호송)하고 군악대가 연주한다”며 “참전용사 대부분은 큰 감동을 받고 6·25에 참전한 것을 새삼 자랑스러워한다”고 전했다.

    소 목사는 참전용사 초청행사와 한미 우호 증진 예배 등 지속적인 민간외교 활동으로 마틴루터킹 국제평화상, 미주한인재단이 주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상, LA 오렌지카운티 의회 특별공로상, 미국 해외참전용사협회 금훈장 등을 수상했다.

    2011년에는 한미관계 발전과 미주지역 동포 위상 강화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당시 김황식 국무총리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목회자는 대부분 문화체육관광부 추천으로 훈장을 받는데, 소 목사는 이례적으로 외교통상부 추천을 받았다. 민간외교 활동을 높이 평가받은 것.

    ▼ 참전용사들이 무척 고마워하겠네요.

    “그럼요. 우리도 참전용사들을 고마워해야 해요. 그들이 없었다면, 그래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없어졌다면 제가 목사를 할 수 있었겠어요? 대한민국 정체성을 부정하고 애국가를 부르지 않겠다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어요. 하지만 북한의 정치·군사 공세에는 맞대응하더라도 주민은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사랑해야죠. 저도 몇 차례 평양을 다녀왔어요.”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은 앨리스에게 “제자리에 있고 싶으면 죽어라 뛰어야 한다”고 말한다.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는 주변 세계도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열심히 뛰어도 좀처럼 몸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주변 상황이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어떤 대상이 진화하더라도 앞서가지 못하고 간신히 제자리를 유지하는 현상이다.

    미국 시카고대 진화학자 밴 베일른은 생태계의 쫓고 쫓기는 평형관계를 일러 생물학의 ‘붉은 여왕의 효과(Red Queen Effect)’라고 했다. 소 목사의 라이프스토리를 듣고 있노라면, 조만간 진화사회학적 관점에서 ‘소 목사 현상(Rev. So Effect)’이 명명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골’이라고 해도 좌절하지 않고 노력해 빠른 보폭으로 남보다 늘 일정 거리를 앞서가는 현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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