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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발굴

다산학 정립, 사상의학 재건 ‘실천하는 선비’

전집 출간된 한국학 대가 이을호

  • 오종일 | 전주대 명예교수, 前 한국동양철학연구회장

다산학 정립, 사상의학 재건 ‘실천하는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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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학 정립, 사상의학 재건 ‘실천하는 선비’
1934년 선생은 영광에 체육활동 모임 갑술구락부를 만들었다. 체육활동을 명목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민족자강운동을 펴는 민족계몽운동 단체였다. 갑술구락부는 날로 번창해 마침내 체육단이 됐다. 체육단은 영광을 중심으로 고창 장성 정읍 등으로 옮겨가며 체육대회를 열고 운동경기를 벌이며 은연중에 ‘우리 힘으로 일제를 몰아내야 한다’ 는 의식을 심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이 마라톤 금메달을 땄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삭제 사건과 일제의 탄압이 뒤따랐다. 이에 많은 이가 울분을 터뜨렸고 ‘일본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의식이 싹텄다. 베를린 올림픽에선 남승룡도 동메달을 획득했는데, 선생은 순천 출신인 남승룡을 초청해 마라톤대회를 열 것을 구상했다. 주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는 자강운동이 될 것으로 본 것이다. 마침내 남승룡 초청 마라톤대회가 열리자 영광뿐 아니라 이웃 군민들까지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고 만세를 불렀다. 그 만세 소리가 실제로는 ‘조선독립만세’였으니 일경(日警)이 선생을 가만둘 리 없었다.

獄中에서 만난 ‘여유당전서’

선생은 1937년 9월 체포되어 7개월 동안 조사를 받았고, 목포형무소에 1년 6개월 동안 갇히는 몸이 됐다.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폭도사’엔 “전라남도 영광군 내 청년단체인 영광 갑술구락부 체육단 등에서는 표면적으로는 체육활동을 한다는 명목으로 날마다 배일운동과 민족운동을 일으켰기에 주모자 이을호 등 47명을 검거했다”고 기록돼 있다.

선생이 잡혀간 1937년 9월은 마침 김성진, 정인보, 안재홍 등이 간행한 ‘여유당전서’가 배본되던 시기였다. 이 책이 간행된 것은 ‘조선학(朝鮮學)’에 대한 재인식이 일어났기 때문인데, 그와 같은 각성이 이뤄지기까지는 당시 동아일보가 개최한 다산(茶山) 서세(逝世) 100주년 기념행사가 중요한 구실을 했다.



1935년은 일제가 조선을 점령한 지 25년이 된 해로, 백성들 또한 저들의 지배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한 무렵이다. 이때 동아일보에서는 1935년 7월 16일부터 다산 서세 100주년 행사를 열고, 다산 사상을 다방면으로 소개했다. 그 배경에는 민족정신을 소생시켜야 한다는 원대한 희망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경국제민(經國濟民) 의식을 크게 떨친 다산 정약용의 학문과 인격을 새롭게 인식시켜 일제 압박을 받고 있는 우리 국민의 민족적 긍지와 자존심을 회복시키자는 것이었다. 행사의 주역은 동아일보 김성수를 비롯해 정인보, 안재홍, 송진우, 한용운 등 종교계·교육계 인사 44인이었다.

동아일보의 그 같은 행사들이 계기가 돼 조선학에 대한 관심이 일었고 ‘국학’이라는 말이 쓰였다. 그리고 국학의 실체를 실학에서 찾고자 했으니, 다산 서세 100주년 행사는 ‘여유당전서’의 간행과 함께 민족의식을 깨우쳐준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선생은 목포형무소의 어두운 감옥에서 ‘여유당전서’와 마주했다. 선생의 관심은 오로지 우리의 사상과 지혜로써 어두운 시대를 극복할 지혜를 찾아야 한다는 데 있었다. 여기에서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의학이나 질병 치료로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선현의 지혜를 발굴해 그 가르침으로 앞길을 열어야 한다는 의식적 전환이 이뤄졌다.

선생은 어두운 감옥에서 형설(螢雪)로 불을 밝히고 다산 정약용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의 사상과 문화에 대한 자주성으로 새로운 경세(經世)정신이 확립될 때, 진정한 독립이 이뤄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광복과 교육입국의 이상

1939년 2월 옥고(獄苦)를 치르고 나온 선생은 1945년 광복 때까지 학문의 길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교유하던 지식인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왜경의 눈초리는 날로 날카로워졌기 때문이다. 이때 선생은 새로운 결심을 한다. 교육입국의 꿈이었다. 당신은 감시망 탓에 자유롭지 못하니 자손들을 가르치고 길러서 미래의 희망을 삼고자 한 것이다.

광복이 찾아오자 선생은 곧바로 정주연학회(靜州硏學會)를 발족했다. ‘정주’는 영광의 옛 이름이다. 광복을 맞은 지 2주 만에 단체가 결성되고, 3개월 만에 학교가 개교했으니 선생이 오래전부터 준비해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학교를 세우기 위한 부지로 논 9만여 평과 벼 1000석을 희사했다. 지금 그 가치와 규모를 쉽게 헤아리기 어려운 큰돈이다. 10월 5일 영광민립 남녀중학교가 개교했는데, 광복 후에 가장 빨리 문을 연 학교가 됐다. 선생은 교장에 취임하고, 학생들에게 ‘간양록’을 가르쳤다. 간양록은 영광 출신 강항(姜沆·1567~1618)이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서 저들을 가르치면서, 당시 일본의 실정을 낱낱이 적어 조정에 올린 상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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